깃털달린 뱀

13 인류 생존을 위한 피와 인류 종말의 날

  행콕 아저씨는 멕시코의 유카탄에 있는 치첸 이트사에서 쿠쿨칸의 신전을 찾는다. 30미터 높이의 이 지구라트는 전체계단 수가 365칸이다. 춘분과 추분에 시계처럼 정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삼각형의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서 북쪽 계단에서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스페인이 정복하기 전에 이 지방 일대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희생자를 돌 위에 눕히고 네 명이 팔과 다리를 벌리게 하고 위에서 누르면 손에 칼을 든 집행자가 나타나 뛰어난 기술로 젖꼭지 아래 늑골 사이로 칼을 집어넣는다. 그 자리에 손을 넣어 심장을 움켜쥐고 접시 위에 얹었다. 멕시코에서 번성한 위대한 토착문명 모두가 인간학살의 의식에 열렬했다.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올멕문명이 이미 정착시킨 이 학살극은 스페인 점령 당시의 아즈텍인들이 이어받아 광적으로 거행했다. 8대황제 아위소틀은 우이칠로포크틀리 신전을 세울 때 8만명의 죄수들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  아즈텍인들은 죽인 제물의 가죽을 벗겨 몸에 걸치기를 좋아했다. 피와 기름을 흘리면서 도시를 뛰어다니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신전에는 피가 흘러넘치고 계단아래까지 흘려내려 얼어붙었고 공포에 떨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16세기 초반에는 매년 25만명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랬을까? 그들은 제물을 바쳐 세계의 종말이 오는 것을 늦추려고 했다. 우주의 대 주기가 흘러 스페인 점령시에는 제 5태양의 시기였다고 한다. 4008년동안 계속된 제1태양시기에는 거인이 살았는데 물로 멸망당했다.

 제2태양시기는 4010년동안이었으며 바람의 뱀 때문에 멸망당했다. 제3태양은 4081년 동안이었는데 불로 멸망했다. 제4태양은 5026년동안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피와 불의 홍수 속에서 기아로 죽어갔다.

 여섯번째 황제 악사야카틀이 만든 태양의 돌은 무게가 24.5톤으로 동심원 모양을 연속적으로 조각했는데 네 개의 태양이 끝났음을 적어놓았다. 제5태양신의 혀는 입밖으로 나와있고 얼굴에는 주름이 많다. 혀를 내밀어 인간의 심장과 피에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다. 제5태양은 운동의 태양이며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제5태양이 마지막에 와있다고 믿었다. 종말의 시기를 계산하는 방법은 아즈텍시기에 잊혀졌고 이 필수적인 정보가 사라지고 나자 빈번하게 제물을 바쳐서 불가피한 파국을 늦추려고 했다. 신들이 선택한 아즈텍인들은 성스러운 사명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포로의 피를 토나티우 태양신에게 바쳐 종말을 연장해온 것이다. 올멕이나 아즈텍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위대한 문명인 마야문명이 남긴비문을 현재의 양력에 대입하면, 제5태양이 끝나는 날은 2012년 12월23일이다.

 

14 뱀의 사람들

   행콕아저씨는 안데스의 비라코차와 고대 멕시코의 주신 케찰코아틀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케찰코아틀은 피부가 희고 붉은 색이 감도는 얼굴이며 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백인이고 키가 크며 긴 속눈썹, 큰 눈, 긴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턱수염이라는 기록도 있다.

  과일과 꽃 이외의 제물을 비난했던 평화의 신이라는 전승도 있고, 노를 젓지 않아도 달리는 배를 타고 왔으며 사람들에게 불과 요리, 집과 일부일처제와 평화를 가르쳤다는 전승도 있다. 비라코차가 많은 이름으로 불리우듯 케찰코아틀도마찬가지였다. 구쿠마츠, 쿠쿨칸 등의 이름은 모두 깃털(날개)달린 뱀이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 마야의 신 보탄이나 이참나의 상징도 뱀이며 하얀피부와 턱수염과 긴 겉옷이 그 특징이다.

  모든 전설은 이 신인이 먼 동쪽바다에서 왔고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왔던 방향으로 다시 배를 타고 오겠다면서 떠났다. 멕시코에서는 바다 위를 걸어서가 아니라 뱀의 뗏목을 타고서다. 이 외국인들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었던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많은 전승 속에서 조수를 거느리고 있다. 이 뱀의 사람들의 손에 닿기만해도 병이 나았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었다고 전한다.

  문자를 전하고 역법을 개발하며 건축의 비술을 가르치고 지구를 계측하며 옥수수를 보급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예술을 향유한 이 케찰코아틀의 시대를 제물에 미쳤던 아즈텍인들조차 흠모했다고 한다. 케찰코아틀은 살아있는 것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며, 정 하려거든 새나 나비를 쓰라고 가르쳤단다. 이들은 무엇이 잘못되어 여기를 떠났을까?

 멕시코의 전설이다. 깃털 달린 뱀의 지배는 암흑의 신 테스카틸포, 즉 연기를 내뿜는 거울이 득세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싸움의 무대는 툴라라는 곳으로 천년역사보다 더 오래된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현재 발굴중인 툴라의 피라미드 오른쪽에 있는 긴 운동장에서는 고무공을 갖고 빼앗는 경기를 하다가 지면 목이 잘리는 공이었다. 뒤로 서있는 우상은 무언가 들고있는데 자세히 보면서 상상해보면 어떤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암흑과 탐욕과 사악을 대표하는 테스카틸포카는 케찰코아틀과 매우 오랜동안 전쟁을 계혹했다고 전설은 말한다. 때로는 이쪽이 때로는 저쪽이 우세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악이 선을 이겨 케찰코아틀은 도망한다. 꽃을 제물로 받는 시대의 막을 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15 멕시코의 바벨탑

   행콕아저씨는 인공산인 틀라치우알테페틀로 향한다. 케찰코아틀을 숭배하는 종파의 성지였던 여기에는 현재 카톨릭교회를 세워놓았다. 토대의 크기는 45헥타르며 높이는 64미터이다. 이집트 대 피라미드의 세 배나 되는 크기이며 토대의 한 변은 500미터고 허물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퇴보하고 있던 원주민을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인공산 위에있던 신전을 깨부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턱수염을 기르고 하얀 피부를 빛내는 이 사람들을, 원주민들은 상냥하게 신전으로 안내한다. 숭배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호화로운 음식을 내오고 춤과 노래로 그들을 대접하던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사람들이 선사한 것은 다름아닌 ‘학살’이었다. 문을 잠그고 보초를 세운 다음 죽인 원주민의 수는 6000명으로 아즌텍의 학살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페루와 멕시코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이 지니고 있던 전설 덕분에 칙사대접을 받으면서 마음대로 난장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림설명-케찰코아틀

  비라코차나 케찰코아틀과는 달리 안데스의 피사로와 중미의 코르테스는 이리처럼 날뛰며 땅과 사람과 문화를 먹어치웠고 대부분을 파괴했다. 그들은 무지와 편견과 탐욕으로 가득찬 더러운 손을 흔들어대며 인류의 귀중한 유산을 싹쓸이했다. 칼을든 군인과 성경을 든 신부들은 상징을 파괴하고 보석을 갈아버리고 세공품을 녹여버리고 그림과 글자가 들어있는 수만점의 사본과 사슴가죽을 태워버렸다. (이시점에서 초고대방 사람들은 잠시 눈물을 머금어야 마땅하다) 거대한 불기둥을 이루며 이 대륙의 역사기록이 연기로 날아갔다. 남은 것은 “스페인사람들 덕분에”아직까지 전해지는 20여개의 사본과 두루마리다.

 몇 명의 우리 초고방사람 같은 스페인사람들이 원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하고 수집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고 유적을 조사해 기록했다. 그 중 하나가 바벨탑의 전설을 전한다. 디에고 데 두란이라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는 1585년 촐롤라에서 100살이 넘은 노인에게 “암흑 가운데서 태양이 떠올라 햇살을 비추자 거인들이 나타나 땅을 지배했으며 이들은 태양의 빛과 아름다움에 빠져 하늘까지 이르는 높은 탑을 지어올렸는데, 천국의 신이 분노하여 하늘의 주민들을 내려보내 탑을 파괴하고 건축가들을 지구 구석구석으로 내쫓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출롤라의 피라미드는 많은 서로 다른 문화가 다른 시대에 공동의 노력을 들여 짓고 고치고 한 것이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피라미드 위에 피라미드를 얹고다시 올리고 한 식이다. 크기로만 본다면 지구 최대의 건축물이다. 누구를 위해 이거대한 신전을 지었는지, 스페인 야만인들 덕분에 거의 알 수 없지만, 태초에 나타난 거대한 남자들이라는 희미한 흔적은 남아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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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콘도르의 비상

행콕 아저씨는 세스나기를 타고 페루 남부에 있는 나스카를 날아간다. 고래, 원숭이, 벌새, 알카트라즈라는 왜가리, 물고기, 삼각형, 펠리컨, 콘도르. 반신반인의 비라코차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이 거대한 지상조형물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나스카고원의 320평방킬로미터 대지 위에 있다. 높이서 보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수도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400년전 에 그렸다는 것뿐이다. 나스카의 그림은 2단계에 걸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 먼저 만든 것이 더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이 간격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거미그림을 조사한 피틀루거 박사는 별자리와 비교해 조사한 결과 거대한 오리온자리를 지상에 그린 것이고, 그 그림에 연결된 화살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오리온 벨트의 별 세 개가 변천한 것을 그린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암호문자가 아닐까? 종이 위에 그렸대도 상당한 역작인 한 줄로 그린 원숭이의 길이는 122미터, 폭은 91미터이다.

 

5 과거로 인도하는 잉카

  공예품이나 기념비, 마을, 사원보다 종교적 전승이 훨씬 오래 남는 법이다. 전승은  변형되기는 해도 없애기가 가장 어려운 인류의 문화유산일 것이다. 스페인이 절멸시킨 잉카의 전승은 그나마 가녀린 흔적이 남아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창시자는 비라코차들이며 이 신비로운 존재들이 나스카의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태평양연안에서 안데스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던 잉카제국의광대한 도로망을 이용해 쉽사리 그들을 정복했다. 해안을 따라 3600킬로미터, 산맥을 따라 비슷한 길이로 난 도로는 많은 지선과 연결되어 스페인군대의 무자비한 진군을 도왔다.

  잉카족은 태양신 인티를 최고신으로 숭배했고 인티는 나스카에 있는 그림을 그린비라코차이며 이름의 뜻은 ‘바다의 거품’이라는 의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단단한 신전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그 위에 식민지풍의 사원을 지었다. 700장 이상의 순금이 덮였던 그곳을 스페인 사람들이 없애지 못한 것은 정교하게 짜맞추어놓은 돌블록 시스템 덕분이었다.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돌들이 기묘하게 맞추어진 도로와 구조물. 접합부로는 종이한장 들어가지 않는다.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 여기는 예수의 제자 바돌로메와 닮은 턱수염을 기른 백인의 신전이었다. 비라코차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고 스페인군대는 잉카군을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잉카인은 돌아온 비라코차를 보았던 것일까?

 

6 혼란의 시대에 나타난 남자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고대전설에는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피부색이 하얗고 외투를 입은 불가사의한 인물이 등장한다. 다른 장소에서 여러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동일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비라코차,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 사내는 과학과 마술에 능통하고 무서운 병기를 다루며 혼란의 시대에 나타나서 세계질서를 바로잡았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안데스 전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지구가 홍수로 물에 잠기고 태양이 사라져서 암흑으로 변한 무서운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위대한 힘을 가진 이 존재는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 기적을 베풀고 모든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 턱수염, 키 큰 하얀 남자. 하얀 외투에 허리띠의 이사람은 문명화라는 사명을 마친후 바다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름, 비라코차라고 부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사였다. 무질서한 사람들,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들, 식량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문명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의학, 야금학, 농업학,가축학, 문장학, 공학과 건축학의 세련된 원리와 기술을 전해주었다. 그가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도 있고, 비라코차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크샤우만으 고대성채는 돌들로 이루어져있고 돌 중 하나의 높이는 8.53미터, 무게는 361톤이다. 소형자동차 500대의 무게인 셈이다. 바퀴의 존재조차 알지못한 잉카에서 이런 건축물은 누가 만든 것일까? 전설에 따르면 이런 고대건축물은 턱수염을기른 하얀 이방인들, 빛나는 사람들인 비라코차가 건설했다고 전한다.

 

7 그렇다면 거인이 있었단 말인가

   행콕 아저씨는 쿠스코를 등지고 마추픽추라는 잉카의 도시로 가는 길에 인디오들의 전설을 되짚어본다. 대홍수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사하고 티티카카 호수에 한 명의 비라코차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과 달을 만들고 인류를 증식시킨다. 또다른 전승에는 최초에 창조의 신 비라코차가 거인들을 바위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인들이 태어난 것이다. 거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싸우고 일하기를 싫어했다. 창조신은 홍수로 그들을 멸망시켜버렸다. 마치 구약성경에 나타난 거인들의 이야기같다.

   비라코차는 그의 제자를 산과 들과 바다로 보내 사명을 수행한 다음 다시 합류한다.  그는 사람들을 남겨놓은채 제자들과 함께 물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도 위를 걸어 태평양 저쪽으로 사라졌다.    

   마추픽추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나머지 유럽 침략자들의 파괴를 면할 수 있었던 기이한 유적이다. 마추픽추의 유적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불멸의 조각이다. 산 정상에서 맞은 편 우아나 픽추를 마주보며 건설된 이 신성한 구조물은 다각형돌을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 쌓아올렸으며, 자연석도 군대군대 전체의 도안 속에 포함되어있다.

  포츠담대학의 천문학교수인 롤프물러는 마추픽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천체의 위치에 맞추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수천년의 별자리 위치를 계산한 결과 기원전 4천년에서 2천년 사이에 완성한 구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추픽추는 티티카카 호수에 남쪽으로 떨어진 볼리비아의 콜라오라지방에 있다.

 

8 세계의 지붕에 있는 호수

  볼리비아의 수도 라 파스는 거대한 분지에 있는 도시이며 해발 3킬로미터 높이에있다. 라 파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티티카카 호수가 있다.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810미터의 높이 있고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선이 여기를 지나간다. 길이는 222킬로미터, 폭은 112킬로미터다. 곳에 따라서는 깊이가 300미터인 곳도 있어 지질학상으로도 수수께끼인 호수다. 조개껍질 화석이나 살고있는 생물을 보면 여기는 예전에 바다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드는 생물 중에는 해마도 있고 주위에는 태고의 해안선 흔적이 남아있다.

   해안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티아우아나코에는 선착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티티카카 호수에 맞닿아 있었던 항구도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선착장은 지금의 수면에서 30미터나 높은 곳에 있다. 호수 수면이 급격이 낮아졌거나 이 선착장의 땅이 솟아오른 것이다. 티아우아나코라는 선착장을 건설하고 나서야 어떤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셈이다. 이 선착장을 건설한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 추정해보건데 기원전 1만5천년경이다. 갑작스러운 자연의 대변동은 기원전 1만1천년경에 닥쳐왔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9 과거 그리고 미래의 왕

  티티카카 호수 부근인 콜라오라 지역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난 전승이 전해온다. 문명을 전파한 투누파라는 영웅이 신처럼 숭배되었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백인으로 턱수염과 파란눈을 하고있었고 냉정하고 금욕적이며 술에 취하는 일과 일부다처제, 그리고 전쟁을 하지 말도록 설교했다. 그는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고 문명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를 질투하던 공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들은 투누파를 풀로 만든 배에 실어 호수로 띠워보냈다.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들은 놀랐다. 배는 강으로 흘러 해안선에 다다랐다.

   이 전승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전승과 거의 흡사하다. 오시리스는 플루타르크가 상세한 전승을 남긴 이집트의 문화영웅으로 그의 의형제인 세트의 음모로 연회에 초대된 후 나무상자에 갇혀 나일강에 버려졌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가 이 상자를 감추자 세트는 상자를 찾아내어 신성한 사체를 14등분으로 토막냈다. 이시스는 시체의 파편을 찾아 하나로 모아 복원시키고 별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저승의 왕이 되었다.

   문명전파자, 음모에 빠져 죽고, 배와 같은 것에 넣어 띄어보내고, 강을 표류하고 바다에 도착하는 이야기의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행콕 아저씨는 티티카카에 있는 수리키 섬으로 가서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배, 토토라라고 부르는 배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 배와 엄청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방법과 만든 모습이 똑같은 이 배를 보며 이집트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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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콘도르의 비상

행콕 아저씨는 세스나기를 타고 페루 남부에 있는 나스카를 날아간다. 고래, 원숭이, 벌새, 알카트라즈라는 왜가리, 물고기, 삼각형, 펠리컨, 콘도르. 반신반인의 비라코차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이 거대한 지상조형물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나스카고원의 320평방킬로미터 대지 위에 있다. 높이서 보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수도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400년전 에 그렸다는 것뿐이다. 나스카의 그림은 2단계에 걸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 먼저 만든 것이 더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이 간격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거미그림을 조사한 피틀루거 박사는 별자리와 비교해 조사한 결과 거대한 오리온자리를 지상에 그린 것이고, 그 그림에 연결된 화살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오리온 벨트의 별 세 개가 변천한 것을 그린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암호문자가 아닐까? 종이 위에 그렸대도 상당한 역작인 한 줄로 그린 원숭이의 길이는 122미터, 폭은 91미터이다.

 

5 과거로 인도하는 잉카

  공예품이나 기념비, 마을, 사원보다 종교적 전승이 훨씬 오래 남는 법이다. 전승은  변형되기는 해도 없애기가 가장 어려운 인류의 문화유산일 것이다. 스페인이 절멸시킨 잉카의 전승은 그나마 가녀린 흔적이 남아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창시자는 비라코차들이며 이 신비로운 존재들이 나스카의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태평양연안에서 안데스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던 잉카제국의광대한 도로망을 이용해 쉽사리 그들을 정복했다. 해안을 따라 3600킬로미터, 산맥을 따라 비슷한 길이로 난 도로는 많은 지선과 연결되어 스페인군대의 무자비한 진군을 도왔다.

  잉카족은 태양신 인티를 최고신으로 숭배했고 인티는 나스카에 있는 그림을 그린비라코차이며 이름의 뜻은 ‘바다의 거품’이라는 의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단단한 신전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그 위에 식민지풍의 사원을 지었다. 700장 이상의 순금이 덮였던 그곳을 스페인 사람들이 없애지 못한 것은 정교하게 짜맞추어놓은 돌블록 시스템 덕분이었다.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돌들이 기묘하게 맞추어진 도로와 구조물. 접합부로는 종이한장 들어가지 않는다.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 여기는 예수의 제자 바돌로메와 닮은 턱수염을 기른 백인의 신전이었다. 비라코차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고 스페인군대는 잉카군을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잉카인은 돌아온 비라코차를 보았던 것일까?

 

6 혼란의 시대에 나타난 남자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고대전설에는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피부색이 하얗고 외투를 입은 불가사의한 인물이 등장한다. 다른 장소에서 여러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동일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비라코차,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 사내는 과학과 마술에 능통하고 무서운 병기를 다루며 혼란의 시대에 나타나서 세계질서를 바로잡았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안데스 전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지구가 홍수로 물에 잠기고 태양이 사라져서 암흑으로 변한 무서운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위대한 힘을 가진 이 존재는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 기적을 베풀고 모든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 턱수염, 키 큰 하얀 남자. 하얀 외투에 허리띠의 이사람은 문명화라는 사명을 마친후 바다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름, 비라코차라고 부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사였다. 무질서한 사람들,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들, 식량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문명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의학, 야금학, 농업학,가축학, 문장학, 공학과 건축학의 세련된 원리와 기술을 전해주었다. 그가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도 있고, 비라코차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크샤우만으 고대성채는 돌들로 이루어져있고 돌 중 하나의 높이는 8.53미터, 무게는 361톤이다. 소형자동차 500대의 무게인 셈이다. 바퀴의 존재조차 알지못한 잉카에서 이런 건축물은 누가 만든 것일까? 전설에 따르면 이런 고대건축물은 턱수염을기른 하얀 이방인들, 빛나는 사람들인 비라코차가 건설했다고 전한다.

 

7 그렇다면 거인이 있었단 말인가

   행콕 아저씨는 쿠스코를 등지고 마추픽추라는 잉카의 도시로 가는 길에 인디오들의 전설을 되짚어본다. 대홍수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사하고 티티카카 호수에 한 명의 비라코차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과 달을 만들고 인류를 증식시킨다. 또다른 전승에는 최초에 창조의 신 비라코차가 거인들을 바위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인들이 태어난 것이다. 거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싸우고 일하기를 싫어했다. 창조신은 홍수로 그들을 멸망시켜버렸다. 마치 구약성경에 나타난 거인들의 이야기같다.

   비라코차는 그의 제자를 산과 들과 바다로 보내 사명을 수행한 다음 다시 합류한다.  그는 사람들을 남겨놓은채 제자들과 함께 물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도 위를 걸어 태평양 저쪽으로 사라졌다.    

   마추픽추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나머지 유럽 침략자들의 파괴를 면할 수 있었던 기이한 유적이다. 마추픽추의 유적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불멸의 조각이다. 산 정상에서 맞은 편 우아나 픽추를 마주보며 건설된 이 신성한 구조물은 다각형돌을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 쌓아올렸으며, 자연석도 군대군대 전체의 도안 속에 포함되어있다.

  포츠담대학의 천문학교수인 롤프물러는 마추픽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천체의 위치에 맞추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수천년의 별자리 위치를 계산한 결과 기원전 4천년에서 2천년 사이에 완성한 구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추픽추는 티티카카 호수에 남쪽으로 떨어진 볼리비아의 콜라오라지방에 있다.

 

8 세계의 지붕에 있는 호수

  볼리비아의 수도 라 파스는 거대한 분지에 있는 도시이며 해발 3킬로미터 높이에있다. 라 파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티티카카 호수가 있다.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810미터의 높이 있고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선이 여기를 지나간다. 길이는 222킬로미터, 폭은 112킬로미터다. 곳에 따라서는 깊이가 300미터인 곳도 있어 지질학상으로도 수수께끼인 호수다. 조개껍질 화석이나 살고있는 생물을 보면 여기는 예전에 바다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드는 생물 중에는 해마도 있고 주위에는 태고의 해안선 흔적이 남아있다.

   해안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티아우아나코에는 선착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티티카카 호수에 맞닿아 있었던 항구도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선착장은 지금의 수면에서 30미터나 높은 곳에 있다. 호수 수면이 급격이 낮아졌거나 이 선착장의 땅이 솟아오른 것이다. 티아우아나코라는 선착장을 건설하고 나서야 어떤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셈이다. 이 선착장을 건설한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 추정해보건데 기원전 1만5천년경이다. 갑작스러운 자연의 대변동은 기원전 1만1천년경에 닥쳐왔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9 과거 그리고 미래의 왕

  티티카카 호수 부근인 콜라오라 지역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난 전승이 전해온다. 문명을 전파한 투누파라는 영웅이 신처럼 숭배되었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백인으로 턱수염과 파란눈을 하고있었고 냉정하고 금욕적이며 술에 취하는 일과 일부다처제, 그리고 전쟁을 하지 말도록 설교했다. 그는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고 문명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를 질투하던 공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들은 투누파를 풀로 만든 배에 실어 호수로 띠워보냈다.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들은 놀랐다. 배는 강으로 흘러 해안선에 다다랐다.

   이 전승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전승과 거의 흡사하다. 오시리스는 플루타르크가 상세한 전승을 남긴 이집트의 문화영웅으로 그의 의형제인 세트의 음모로 연회에 초대된 후 나무상자에 갇혀 나일강에 버려졌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가 이 상자를 감추자 세트는 상자를 찾아내어 신성한 사체를 14등분으로 토막냈다. 이시스는 시체의 파편을 찾아 하나로 모아 복원시키고 별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저승의 왕이 되었다.

   문명전파자, 음모에 빠져 죽고, 배와 같은 것에 넣어 띄어보내고, 강을 표류하고 바다에 도착하는 이야기의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행콕 아저씨는 티티카카에 있는 수리키 섬으로 가서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배, 토토라라고 부르는 배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 배와 엄청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방법과 만든 모습이 똑같은 이 배를 보며 이집트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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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겨진 장소의 지도

   1960년 햅굿교수는 1513년에 피리레이스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제독이 그린 지도가  실제로 현재 남극대륙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는 미국 공군의 답신을 받는다. 지금 현재 1.6킬로미터 두께의 얼음으로 덮인 이 지역을 어떻게 16세기 사람이 정확히 그릴 수 있었을까? 행콕은 그 비밀을 찾아간다.

   이 지도는 알고보면 조작이나 창작과는 관계가 멀다. 아프리카 서해안, 남아프리카 동해안, 남극대륙의 북해안을 망라한 이 지도는 이미 있던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 아마도 남극대륙이 얼기 전인 기원전 1만3천년에서 기원전 4천년 사이에 남극 연안을 조사할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그린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이 지도를 본 햅굿은 그의 추리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① 남극대륙은 한때 얼음으로 덮여있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② 당시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것은 지금보다 3200킬로미터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③ 대륙이 이동한 것은 지각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각이동은 대륙이동과는 다른 것이며 오렌지 껍질과 알멩이가 따로 놀듯 내부의 부드러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표층부가 옮겨진 현상이다. 
④ 남극대륙이 이동하는 동안 얼음으로덮여 현재상태에 다다랐다

 

2 남쪽 대륙에 있는 강

 워싱턴 D.C.의 의회도서관에서 햅굿이 발견한 중세 지도와 해도는 다른 도법으로 그린 그 전의 지도를 모사한 것으로 남극대륙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 지형과 강은 지진파측정결과 나타난 얼음 아래의 대륙과 일치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지도가 하나 뿐이라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인 메르카토르의 지도, 18세기 프랑스 사람인 부아슈의 지도, 오스만투르크 하지 메이드의 지도역시 얼음 아래의 남극을 그려놓고 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적은 수백만년전이라고 말하지만 이 지도들은 햅굿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하다. 적어도 기원전 4천년전, 신석기인들이 이 지도를 그린 것일까? 이 지도들은 남아메리카의 상세한 지형과 양대륙을 연결한 베링해협의 땅을 그리고 있다. 1만년전 북구의 빙하가 녹아 해면이 높아지면서 사라진 베링해협의 육로가 여기에는 있는 셈이다.

 

3 사라진 과학의 지문

  1569년에 작성한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는 얼음이 없는 남극대륙의 지도를 상세히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해안의 정밀도는 오히려 떨어진다. 이 부분은 스페인 탐험가의 관찰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직 경도측정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경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남북의 위도는 태양과 별의 각도를 이용하면 간단히 잴 수 있지만 경도를 재는 것은 위치와 시간을 모두 측정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런데 이 고지도들은 정확한 경도를 나타내고 있다.

1339년의 둘체르트 포르톨라노라는 해도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그리고 있는데 흑해와 지중해의 경도가 0.5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런 결과를 미루어볼 때 이 지도들은 이미 사라진 고대의 정확한 지도를 모사한 것이다.

   특히 이 지도들은 현대에 와서나 사용한 고도의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 구형 삼각법, 평사도법 등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지도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유산을 인류가 계승했고 이용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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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지문" 서평 글쓴이 : 반효원

세기말적 현상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각 세기말에는 '종말론'에 관한 의견과 저서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유사 이래로 아직까지 그것은 항상 거짓이었다. 몇 년 후면 21세기를 맞을 현재의 시점에서, 과연 『신의 지문』이 주장하는 내용은 저 '세기말적 현상'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필자의 의견은 '『신의 지문』의 주장이 항상 거짓이었던 종말론의 일부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필자가 '『신의 지문』의 주장은 완전히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우선 필자의 지리학·지질학·역사학·문화인류학 등의 지식이 책의 저자보다 풍족하지 못하고,

따라서 필자는 저자가 책에서 자기의 주장을 밝히기 위해 제시한 예들의 합당성을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필자가 저자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Graham Hancock이 책에서 주장하는 이론의 핵심은 '지구는 기원전 지각이동설에 의해 지각의 극이 바뀌는 대 재난을 겪은 적이 있다. 이 때, 그때까지 이어져오던 남극의 어떤 찬란한 문명이 빙기의 변화에 의해 남극의 얼음 밑에 사장되었다.

 이 사라진 문명은, 당시로 보았을 때의 미래의 인류(즉 유사 이래의 인류)에게 그들의 문명을 조금이라도 알리기 위해 그 흔적을 지구의 곳곳에 남겨놓았고, 이 흔적이 바로 현재의 인류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세계 각지의 문화유산들이다. 과거의 대 재난 이후로 지구는 한 번 더 지각의 극이 바뀌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21세기 초엽에 일어날 것이다.

 지각의 극이 바뀌게 되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되며, 이 때 살아남는 인류는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유사 이래로 인류가 갈고 닦은 문명이 모조리 파괴될 것이어서, 미래의 대 재난 후에 인류가 또 다시 번성하게 된다면 그들은 <원시생활>에서부터 문명을 <재시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인류는 정말로 멀지 않은 시대에 일어날 지도 모르는 대 재난으로부터 문명을 지켜서, 다음 인류에게 전해줄 현명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다.

 따라서 이 학설은 유사 이래로 인류가 인정한 모든 '역사'를 부정하며, '유사'라는 용어 자체를 회의한다. 즉 우리가 '문명발상지'라고 부르는 몇몇 지역에서 일어난 문명은, 인류의 최초의 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사 이전'에도 인류의 역사는 있었으나, 그 시대의 역사서 등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유사' 이전 시대의 역사를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밖에 알지 못한다고 한다.

위에서 저자가 언급한 '지각이동설'과, '판구조론'이라고도 불리는 '대륙이동설'(plate-tectonics)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대륙이동설은 17세기부터 태동하였는데, 자연주의 철학자 Francis Bacon이 대서양 해안선이 병행함을 지적한 후로 여러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초 독일 기상학자 Alfred Wegener가 본격적으로 대륙표이의 증거를 제시하여 많은 연구가 있은 후에, 1960년대 말에는 대부분의 지구과학자들이 이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륙이동설은 그 대담한 직관이 확실한 증거보다 훨씬 먼저 나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후 서서히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질학원론 (1989), 원종관 외, 우성문화사, 서울.)

지각이동설은 1953년 미국 역사학자인 찰스 햅굿이 주창하여 아인슈타인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지질학 이론이다. 지각이동은 암권에 의해 지구의 표층 전체가 내부의 부드러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몇 번에 걸쳐 이동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렌지 껍질이 알맹이와 떨어져 헐거워지면 껍질 전체의 위치가 한 번에 바뀔 수 있는 것과 같다.

지각이동에 의해 남극대륙이 남쪽으로 이동해 가는 동안 대륙은 점점 식어, 수천 년간 만년설이 형성·확대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 이론은 남극대륙의 대부분이 기원전 4,000년까지 얼음으로 덮여있지 않았던 이유와 같은 지구과학의 변칙성에 대해 설명한다. 당시 남극대륙이 따뜻했던 이유는 현재보다 3,200㎞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남극대륙은 남극권의 밖에 있었고 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본문 p.21)

 

아인슈타인은 지각을 이동시키는 힘의 원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극지권에서는 얼음이 계속 퇴적하는데, 언제나 고르게 퇴적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불균등하게 퇴적된 얼음에 영향을 미치는 원심력이 발생하여 지구의 딱딱한 지각에 전달된다. 계속 증가하는 원심력은 어느 점에 도달하면 지구의 내부는 그대로 두고 지각만을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지구의 극지대는 적도 방향으로 이동한다. "( 본문 p.22, p.622)

햅굿에 의하면 대륙이동설과 지각이동설은 상반된 이론이 아니다. 두 이론은 서로 병행하며 일어날 수 있는데, 지각은 몇억 년에 걸쳐 서서히 이동하면서 급격한 이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각이 급격하게 이동할 때는 대륙간의 위치 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대륙 전체를 두 고정된 극지대 속으로 또는 바깥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이 이론에 대한 증거로 남극대륙에서 발견된 열대식물과 열대갑각류의 화석과, 고운 입자의 퇴적물, 뒤에 설명할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의 지도, 부아슈의 지도 등을 제시하고 있다.

19세기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균일설과 천재지변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나는 천재지변설과 균일설 사이에 사상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돌연한 변동은 일관된 움직임의 본질적인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를 비유로 설명하면 이렇다. 시계의 동작은 일관된 움직임의 모델이다. 시계가 정확하다는 것은 움직임이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계가 해머로 시간을 알리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돌연한 변동이다.

해머는 총신의 화약을 폭발시키는 장치일지도 모르고 다량의 물을 내뿜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세공을 하면 시계가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그때마다 다른 강도에 다른 횟수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릴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불규칙하게 보이는 이 변동은 완전히 일관된 움직임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계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학파가 생긴다면 두 가지 학파가 생길 수 있다. 하나는 해머를 연구하는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진자를 연구하는 학파이다. ") 본문 p.638

 저자가 위의 충격적인 이론에 대한 증거로 제시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6세기 중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피리 레이스'가 1513년 작성한 아프리카 서해안, 남아프리카 동해안, 남극대륙의 북해안을 그린 지도에는 얼음으로 뒤덮이지 않았던 기원전 13,000년부터 기원전 4,000년 사이의 남극대륙의 산맥과 강 등이 정확히 표시되어있다. 이 지도는 피리 레이스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먼저 만들어진 다른 여러 지도를 베껴 그린 것이라고 지도에 쓰여있다.

 그러나 남극이 인류에 의해 발견된 것은 1818년이고, 유사이후 과거에 만년설로 뒤덮이지 않은 남극을 그토록 자세히 그릴 수 있는 기술은 없었다. 그렇다면 피리 레이스가 모사한 지도는 빙기가 오기 전의 남극을 고도로 발달한 알려지지 않은 문명이 작성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얼음으로 덮이기 전의 남극을 모사한 사람은 피리 레이스 한 사람이 아니다.

도법으로 유명한 16세기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 메르카토르, 18세기 프랑스의 지리학자 필립 부아슈, 16세기의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이다. 특히 피나에우스가 모사한 지도에는 만년설이 대륙의 오지에서만 발견되므로, 원본 지도는 남극에 얼음이 없던 기원전 13,000년경에 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알 수 없는 문명이 그려놓은 지도는 남극지도 뿐이 아니다. 피리 레이스가 1513년에 모사한 남아메리카지도에는 1543년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마라조 섬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그 위치도 현재와 매우 다르다. 그리고 오리노코 강과 현재의 델타지대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원본 지도가 그려진 시대부터 퇴적하여 오늘날의 델타지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나타나있는 대서양의 거대한 섬은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위치가 중앙 대서양 해령의 위치와 일치하므로 당시 이 지역에 지도와 같은 섬이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

 2세기 로마의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고대의 원본 자료를 토대로 편집한 북해도에는, 스웨덴 남쪽까지 빙하로 뒤덮인 기원전 10,000년경의 북유럽이 매우 자세히 그려져 있다. 그리고 1770년대에 영국의 존 해리슨이 크로노미터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정확한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위의 사람들이 모사한 원본 지도들은 경도와 위도가 정확하다. 또한 이 원본 지도들은 구형의 지구 표면을 평면의 종이에 나타내는 투영도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지구가 구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과 이에 따르는 매우 복잡한 기술인 구형삼각법(球形三角法)이 쓰였을 것이다. 1137년에 베낀 중국의 돌기둥에 그려져 있던 지도 역시 경도의 정밀도가 뛰어나고, 바둑판 형태의 눈금 선이 있으며, 구형삼각법을 이용하여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 지도는 유럽과 중동의 지도와 차이가 없다.

 이로 보아 '전 세계에 걸쳐 사라진 문명의 유산이 계승되어왔다'는 새로운 추측을 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것들에는 이 외에도 '페루의 나스카 지상 그림', '잉카문명',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숫자',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별의 세차운동', '각 민족의 신화' 등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지각의 극이 바뀌면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마지막 자장의 반전이 있었던 기원전 11,000년에서 기원전 10,000년 사이에 대형 포유류가 멸종되고, 해면이 갑자기 상승하고, 허리케인 같은 폭풍이 치며, 뇌우와 화산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지상 위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2030년경에 다음 자장의 반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현재로부터 33년 후의 일이다. 만에 하나 예측이 들어맞는다면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철저한 파괴'를 피해 소수의 현 인류가 살아남을 것이며, 그 대다수는 원시생활로 역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소수 중에서 몇몇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대다수에게 지식을 전파하거나 문명의 흔적을 남겨, 후세 인류가 문명을 다시 일으킬 발판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세의 인류'는 현재의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문명을 발전시켜간다는 것이다.

 전혀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인가? 답은 '알 수 없다'이다. X-FILES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다가올 현실'이라면 극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인공위성 특수 촬영기법을 이용하여 남극대륙의 얼음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주장의 진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자의 주장이 일장춘몽이라고 믿고 싶지만, 저자가 제시한 수많은 예시들을 볼 때 지구상의 불가사의한 것은 정말로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과거 냉대 받았던 갈릴레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이나 대륙이동설 등은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였다.

혹시 지각이동설도 미래에 인정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명의 초기시대보다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현 인류의 문명이 남김없이 철저하게 파괴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허무하고 당혹스러운 혼란 상태에 빠지게 한다.

 계속 이야기한 것처럼 만약 '재난'이 일어난다면, 혹시 타임캡슐은 파괴로부터 문명을 지켜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과학지 『Newton』에서 읽은 바로는, 미국의 NASA에서 달에 인간이 생명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공 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안정적인 지각 깊은 부분에 역시 인간이 살 수 있는 '지하 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계획들이 문명을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도 33년 이내에 완성되어야 한다. 보다 현실적인 생각으로 지금 당장에라도 지구의 주변에 떠 있는 <인공위성>은 매우 안전한 도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공위성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정보'도 보관할 수 있다.

모든 인공위성에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후세에 전달할 수 있는 장치를 함께 보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타임캡슐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실현 가능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발전한 인류의 문명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는 이론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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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초고대문명은 존재했는가?

 남극 대륙이 얼음으로 뒤 덮이기 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에 작성된 남극 대륙 지도의 발견(남극 대륙이 지금의 인류에게 발견된 시기는 19세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페루 남부 나스카 고원에 있는 거대한 지상 그림과 잉카 문명, 그리고 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홍수 신화, 신화 속에 은폐되어 있는 세차 운동에 대한 암시, 지각 이동설 등……. 현대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그 실체를 밝히지 못하 고 있는 불가사의한 고대 문명의 흔적과 신화들은 지금도 신비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현대 과학보다 훨씬 앞선 그 문명은 도대체 누가 세운 것이며, 그 문명의 주인공들은 왜 한순간에 사라졌는가? 어디로 사라졌는 가? 또한 이러한 유적들이 현재의 지구와 인류에게 전해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이책 『신의 지문 Fimgerprimts of the Gods』의 저자인 그레이엄 핸콕은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지의 동아프리카 특파 원으로 활약했으며, 런던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의 기자였다. 성서에 나오는 “계약의 궤”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면면 을 기록해 놓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였던 『암호와 봉인 The Sign and the Seal』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매혹적인 사라진 초 고대 문명의 그림 조각을 맞추기 위해서 세계 곳곳을 탐사하고 있으며 고고천문학, 지질학, 고대 신화의 컴퓨터 분석 등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하여 태고 문명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핸콕은 그 문명의 진실을 밝혀내고 과거에 고대 인류가 멸망한 원인과 그들이 경고한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 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예언서는 아니다. 방대한 자료와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태고에 고도로 발달한 인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주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와 문명들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해 왔다. 지 구도 그 흐름속에서 많은 변화의 과정을 밟아왔다.아직 신비로 남아 있는 숱한 고대 문명의 흔적들은 오늘의 인류에게 우리 문명의 뿌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지은이 : 그레이엄 핸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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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다양한 과학적 방법으로 우주가 일정주기로 반복 순환한다는 것을 최근들어 알아내고 있답니다.

지나간 세월에 지구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연구한 과학자들이 밝혀낸 우주의 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거의 정확히 음양오행의 주기와 일치합니다.

 

 

  과학자들은 그지역의 땅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바위들이 널려 있는 모습을 보고 이것의 원인을 추적하게 됩니다.

 추적 결과 이것의 원인이 빙하기때 있던 얼음에 묻혔던 바위 들이 녹으면서 그지역까지 이동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밝혀낸 것이 "육지의 1/3이상이 지난100만년 동안 적어도 7회의 빙하기가 찾아왔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던 우주의 겨울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음양오행의 129,600년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죠?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원인을 밝혀본 과학자들은 다음의 두가지로 결론 지었답니다.

공전 궤도의 변화: 그런데 지구의 이상한 움직임 가운데 공전궤도가 달라진다.

지구의 공전궤도는 원칙적으로 원을 그리는 것인데,

타원을 그리다 다시 원상복귀하는 경우가 10만년을 주기 하여 한번씩 찾아온다.

 

지축변동: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구는 현재 23.4도 기울어져 있다.

그렇다면 왜 지축이 기울어졌을까?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한다. 기울기는 대략 4만년을 주기로 하여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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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생장염장의 큰주기인 129,600년을 과학자들이다양한 방법으로 밝혀낸 것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약간 씩의 연도 차이는 있지만, 이는 과학의 오차를 생각하면 거의 일치하는 것입니다.

 

얼음 기둥에 간직된 퇴적물

  남극 빙상에는 태양, 삼림, 사막, 화산 등을 기원으로 하는 다양한 물질이 운반되어 오랜 세월 동안 눈과 함께 퇴적되어 얼음이 되는데, 이 얼음 속의 여러 물질들을 분석하여 과거 수십만 년 동안의 지구 기후 변화를 복원해냅니다.

  1996년 과학자들은 이 빙상코어의 얼음속에 포함된 동위원소의 비율을 분석한 결과 "34만년 동안 빙하기 간빙기가 3번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헝가리에 있는 푸라(Pula) 분화구의 호수에서 해마다 얇은 판자모양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침전물들은 과거 300만년에서 260만년전의 32만년 동안의 지구기후 변화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기록의 스펙트럼 분석에 의하면 황도경사와 세차운동의 주기동안에 들어오는 태양 복사에 대한 지상의 반응을 알수 있지만, 가장 강력한 지상의 반응은 124,000년의 주기를 가지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Nature지 1999년 2월 25일자]

 

해저 퇴적물로 주기 확인

  해저 퇴적물에는 자성물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천천히 쌓이므로 이것을 분석하면 과거의 지구 자기장 변동을 알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는 해저에서 42m라는 길이에 이르는 해저 퇴적물을 캐내었는데, 이것은 거의 225만 년치에 상당하는 것이라 합니다.

  샘플을 분석한 결과 약10만 년 주기의 자기장 변동을 발견했으며, 이는 지구 궤도의 이심률 변화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답니다.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

 

 

 우와! 이미 과학에서도 똑같은 결과를 찾아냈다니. 정말 놀라워요. 그런데 지금은 우주일년 중에 언제에 속하는 거예요?

 이제야 생장염장이라는 자연의 변화원리가 몸으로 느껴지나보네요! 그러면 이제 지금이 주기의 어디에 해당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죠!!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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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빙기와 간빙기의 반복

밀란코비치가 1920년에 발표한 논문

몇 개인가의 지질학적 증거를 통해, 과거에 지구 전체가 한랭 기후가 되어 고위도나 산악 지대에 빙하가 넓게 분포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것은 '빙하시대'라 불리고 있다.

과거 약 65만 년 사이에 대하여 말하면 약 65 만 년 전 무렵의 권츠 빙기약 50만 년 전 무렵의 민델 빙기,약 40만 년 전에 시작되는 리스 빙기약 10만년 전에 시작되는 뷔름빙기의 4개의 빙기와 각각의 빙기 사이에 3개의 간빙기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뷔름빙기가 사라진 것은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이며, 가장 추웠던 것은 지금부터 약 1만 8000년 전이고, 그 무렵의 기온은 현재보다 5~10℃ 낮았다.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에 관심을 가진 밀란코비치

그것에 대하여 현재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이론을 제안한 사람은 수학자 밀란코비치(Milutin Milankovitch)이다. 밀란 코비치는 1875년에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의 빈 공과 대학에서 학위를 딴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베오그라드 대학의 응용 수학 교수가 되어 그 곳에서 이론 물리·역학·천문학을 가르쳤다.

1911년 무렵부터 그는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1914년에는 그 때까지의 결과를 정리하여 '빙하 시대에 관한 천문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수만년 동안에는 지구 궤도의 형태나 지축의 기울기가 변한다. 그것이 지구상에 입사하는 일사량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래서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가 일어난다는 것을 그는 이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논문을 발표한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후 오랜동안 이 논문은 과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채 있었다.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직후에 밀란코비치는 오스트리이·헝가리 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수용된 독방 안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계산을 계속하였다. 얼마 안 있어 해방되고, 대전 중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머물러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베오그라드로 와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1920년에 '태양 복사로 생기는 열 현상에 관한 수학 이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프랑스 어 논문을 파리에서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의 일사량을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 계산하여, 앞에서 말한 지구의 천문학적 변동이야 말로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관계하는 3요소의 주기적 변동

이것은 자전하면서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는 지구의 운동을 나타낸 그림이다. 지구의 공전 궤도면을 황도면이라고 한다. 잘 알고 있듯이 황도면과 지구의 적도면은 일치하지 않고 약 23.5˚의 각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지구의 중심을 통과하는 황도면의 수선(수직선)과 지구의 자전축 역시 23.5˚의 각도를 이루고있다. 이 각도를 궤도 경사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질 시대를 통해 이 경사각이 일정했던 것은 아니고, 21.5˚와 24.5˚ 사이를 변화하였다.

이러한 자전축의 변화의 주기는 약 4만년이다.

지구의 궤도는 타원형을 하고 있다. 그 타원 궤도의 편평률(이심률)은 일정하지 않고 지질시대를 통해 0과 어떤 최대치 사이를 변화한다. 편평률이 0이라면 궤도는 원이 되고, 편평률이 최대일 때는 궤도는 가장 짜부라진 타원이 된다.

이와 같은 공전의 변화의 주기는 약 10만년이다.

이처럼 궤도 경사각이나 편평률이 바뀌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라 목성과 그 밖의 행성, 달 등도 지구에 인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과 달이 지구 적도 부분의 부풀어오른 곳에 작용하는 인력에 의해 지구의 자전축은 항상 공간(친구)에 대하여 완만하게 그 방향을 바꾼다.

기울어져 돌고 있는 팽이의 축처럼 자진축은 어떤 원추면 위를 주기적으로 돈다. 이 변화는 세차라 불리며, 그 주기는 약 2만년이다. 세차의 모습이 그림 2에 나타나 있다. 그림의 황도축은 황도면에 대한 수선을 나타낸다. 지구의 자전축은 그 수선 둘레의 원추면상을 이동한다.

a를 현재의 자전축이라고 하면 지금부터 약 1만년 후의 좌전축은 b, 약 2만년 후의 자전축은 다시 a가 된다. 이 약 2만 년은 앞에서 언급한 세차 운동의 주기이다.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는 지구상 지점의 일사량 변화에 의한다.

여기서 설명한 지구 궤도의 경사각(주기 약 4만년)과 지구 궤도의 편평률(주기 약 10만면)의 변화와, 지구 자전축의 세차 운동(주기 약 2만년)은 모두 지구상 지점의 태양 일사량에 변화를 일으킨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에서도 추정할 수 있듯이 지구의 궤도 경사각이 커지면 커질수록 일사량의 계절 변하나 위도에 의한 변화가 커진다.

지구 궤도의 편평률이 커지면 커질수록 지구의 태양으로부터의 거리, 따라서 일사량의 계절 변화도 커진다. 이처럼 지구 궤도의 경사각 및 편평률의 변화와 세차 운동은 모두 지구상 지점의 일사량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 일사량 변화로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가 일어난다고 밀란코비치는 주장했던 것이다.

반복하여 서술한 지구의 공전 및 자전에 관계한 세 가지 요소의 시간적 변화와 그것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지구상 지점에서의 일사량의 변화는 엄밀한 천문학적 계산으로 더듬을 수 있다. 길고도 무료한 계산을 하여 밀란코비치가 얻은 결과가 그림 3으로 나타내져 있다. 이것은 북위 65°지점에서의 여름의 일사량이 시대와 함께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나타낸 그래프이다.

그림의 가로축은 연대로서 이를테면 20은 현재부터 20만년 전을 나타낸다. 세로축은 그 때의 북위 65°점에서의 일사량을 현재의 위도로 바꿔 나타낸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부터 23만 년 전의 북위 65°지점에서의 여름의 일사량은 현재의 북위 77.5°에 해당한 크기였다.

특히 그 무렵에는 북위 65°지점에서의 일사량이 현재보다 훨씬 작았다. 만일 그렇다면 그 무렵은 빙기였던 것은 아닐까라고 밀란코비치는 생각했다. 
 

  해저 퇴적물의 연구에서 밀란코비치 설이 재평가 되다.

밀란코비치는 지구의 세궤도 요소의 주기적 변동을 중합하여 태양으로부터의 일사량 변화를 계산하였다.

1976년에 밀란코비치의 생각을 논증하는 논문을 미국의 베이즈(1933~)등이 발표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데이터는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양의 수심 약 3000m에서 채취한 해저 퇴적물이었다. 퇴적물의 퇴적 속도는 1000년에 3cm를 넘어 매우 크다. 조사된 기간은 과거 약 45만년에 걸쳐 있었다.

그들은 해저 퇴적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유공충의 종류에 주목하였다. 해수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유공충은 바닷물의 온도가 약간 달라지는 것만으로 그 종류가 바뀐다. 바닷물의 온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저온에 적응한 유공충의 비율이 보다 커진다. 

보다 새로운 시대의 퇴적물일수록 보다 위에 퇴적되기 때문에 채취한 해저 퇴적물을 아래에서 위로 더듬으면 그것이 그대로 연대 순으로 되어있다. 이것과 각층마다의 저온에 적응한 유공충의 비율에서 우리는 과거의 바닷물 온도 변화를 더듬을 수 있다. 

이처럼 하여 얻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은 가로축에 연대, 세로축에 저온에 적응한 유공충의 비율을 취한 그래프를 그리고, 그 그래프의 '주기분석'을 하여 어떠한 주기의 변화가 두드러지는가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이 주기 약 2.3만년, 4.1만년 및 10만년의 변화였다.

이들은 각각 앞에서 서술한 자전축의 세차운동, 지구 궤도의 경사각 및 편평률의 변화에 대응한 주기이다. 이러한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결과는 빙기와 간빙기의 교대에 관한 밀란코비치가 주장한 이론이 옳음을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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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지1999년 2월 25일자)

우주일년 129600년에 대한 과학적 자료로서 Nature지(1999년 2월 25일자)에 실린 한 논문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논문의 요지는 헝가리에 있는 푸라(Pula) 분화구의 호수내의 화분(花粉) 침전물을 스펙트럼 분석을 해보았더니, 124,000년의 주기성을 가지고 지구가 변화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플라이어신(Pliocene; 300만년에서 260만년 전, 鮮新世) 시기는 지구의 기후 변화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간이다.

지구가 점진적으로 차가워지는 시기였으며 그 결과 지구상의 빙하가 증가하고 북반구의 활발한 빙결작용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플라이어신(Pliocene;∼3-2.6 million years ago, 鮮新世) 시기의 기후 변동, 좀더 자세히 말하면 극적이고 전체적인 환경변화를 나타내는 이 시기의 지구상 식물(초목)의 반응에 대한 고해상도의 대륙적인 기록을 보여주려고 한다.

  헝가리에 있는 푸라(Pula) 분화구의 호수에서 해마다 얇은 판자모양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침전물들은 과거 300만년에서 260만년전의 32만년 동안의 지구 기후변화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 기록의 스펙트럼 분석에 의하면 황도경사(obliquity)와 세차운동(precession)의 주기동안에 들어오는 태양 복사에 대한 지상의 반응을 알수 있지만, 가장 강력한 지상의 반응은 124,000년의 주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푸라 분화구의 기록은 124,000년의 주기를 가지는 온도 시스템의 내부적으로 유도된 비선형적인 반응들은 최소한 지난 플라이어신 기간동안에 일어난 큰 규모의 환경변화을 유도한 세차운동과 황도경사의 궤도 주파수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힘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푸라(Pula) 분화구로부터 얻어진 결과들은 세차운동과 황도경사의 궤도 주기와 더불어 내부적으로 일어난 124,000년의 주기성을 가지는 비선형적인 기후변화도 지상의 식물(초목)의 역학적인 변화를 유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광범위한 환경적인 변화와도 충분한 관계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 지상의 결과는 지구 기후 시스템에서의 위급한 시기동안에 식물(초목), 빙하의 양, 그리고 일조력 사이의 물리적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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