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수는 누누구인가?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보시면서 천하의 지령지기(至靈之氣)를 타고난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공사에 쓰셨습니다. 그 중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는 말씀의 주인공인 미수 허목(許穆)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그 많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중에 왜 하필이면 허목의 기운을 천지공사에 쓰셨을까요?
 
우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대립각으로 허미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상제님께서 허미수를 천지공사에 쓰신 깊은 이유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허미수의 진면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호는 미수(眉?), 이름은 목(1595∼1682: 선조 28년∼숙종 8년). 그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서인(西人)이던 우암 송시열과 벌어진 예론(禮論) 관련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는 동방 제1로 칭해집니다. 56세인 1650년(효종 1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660년 효종의 상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대비의 복제(服制)로 일어난 제1차 예송(禮訟)에서 송우암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에 반대하여 3년 상을 주장하다 서인의 반격으로 삼척부사로 좌천됩니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다시 조대비의 복제가 문제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에 반대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조참판, 우의정을 지냈고, 송우암 처벌에 강경론을 내세워, 온건론을 편 같은 남인인 허적(許積)과 반목하여 청남(淸南)의 영수가 됩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煥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삭탈관직을 당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미수기언(眉?記言)』,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합니다. 
 
 
집안의 화를 예지했던 허미수
흔히 허미수를 유학자로만 알고있는데 한편으로 그는 도력이 높은 이인(異人)으로도 전해집니다.
허적1) 의 탄생과 관련하여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1)허목과 허적은 같은 양천 허씨로 12촌지간이다.
 
허미수는 한집안 사람인 허적의 아버지와 한때 절에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스님이 한 명씩 없어졌습니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스님을 잡아먹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안 허적의 아버지가 이무기를 칼로 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고 들어갔습니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습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허적’이었는데, 허미수는 그 아이가 허씨 가문의 멸족을 초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친척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합니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훗날 결국 역적이 되어 허씨 가문에 화를 입히게 됩니다. 
 
 
허적은 허미수와 함께 후에 남인을 영도하여 서인인 송우암을 공격하였는데, 허미수는 강경한 입장을 띤 데 반해 허적은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여 둘의 사이가 벌어집니다. 
 
허적과 갈등을 겪은 허미수는 1678년(숙종 4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당시 우의정이던 허적과 그의 아들 허견(許堅)의 실정과 죄상을 논핵하다 왕의 노여움을 삽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허미수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를 볼 때, 허적에 대한 설화는 이무기를 죽이고 나서 그 척(隻)으로 허씨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예측한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줍니다.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그런데 허미수의 예지능력은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영험한 <척주동해비>를 통해서 최근에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당시 삼척은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서 고기잡이배가 다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파도 때문에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여 어민들이 굶어죽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해일이 몰려올 때는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 바닷가로부터 30리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동헌마루까지 바닷물이 밀려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허미수가 돌에다가 직접 글씨를 써서 바닷가에 비석을 세우자 신기하게도 그 이튿날부터 물이 평소의 3분의1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는 비석이 묻힌 주춧돌까지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바닷물의 침수피해를 입었던 곳까지도 백성들이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허미수가 삼척을 떠난 뒤 반대파인 노론계의 인물이 신임부사로 왔는데, 그는 그 비석의 내력을 듣고 허무맹랑하다고 여겨 비석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자 다시 풍랑과 해일이 몰려왔고, 당황한 신임부사는 다시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허미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또 하나의 비석을 만들어 두어서 그 비석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삼척 동해비’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허미수가 이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일컬어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한 글)’이라고도 하는데, 육경(六經)에 뿌리를 둔 것으로 도가(道家)적이며 주술적인 비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 허미수는 이 비석을 세우면서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지만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 때는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앞으로 불(火)로 난리가 난 후에 물(水)로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5년 전인 2000년 4월부터 강원도 고성, 강릉, 삼척 등 영동지방에 해마다 대형산불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쓰나미가 동해안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축이 서는 후천개벽이 일어나면 일본열도는 초대형 지진으로 태평양으로 대부분 가라앉게 되고 그 여파로 대형 쓰나미가 우리나라 동해안으로 몰려올 것은 자명합니다. 
 


 ▲ 척주동해비. 허미수가 삼척부사 재임시절 동해의 해일로 인한 바닷가 마을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1661년에 높이 170㎝, 너비 76㎝의 검은색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삼척 정라진(汀羅津) 앞 만리도(萬里島)에 세웠던 것인데, 그 후 비가 파손되어 현재의 정라동 육향산(六香山)에 다시 세워졌다.
 
 
허미수는 이미 그러한 일을 예견하면서 비석을 세웠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학자이자,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도가의 인물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기인으로서 그의 풍모를 보여줍니다. 
 
『도전』에서도 상제님께서 공사 중에 허미수가 강선루를 하루만에 지었음을 슬쩍 비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새 세상이 오면 서울이 바뀌게 되느니라. 
 큰 서울이 작은 서울이 되고, 작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되리니 서울은 서운해지느니라. 
 허미수는 하루만에 강선루를 지었다 하나 나는 하루만에 36만 간 옥경대를 짓느니라. 금강산 구룡폭포의 금이 서해바다에 와 
 묻혔나니 장차 36만 간 옥경대의 상량이 되리라.” 하시니라. 
(道典 5:136)

 
 
민족사학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허미수
무엇보다 『도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제님께서 송우암과 함께 허미수를 천지공사에 쓰시는 내용입니다.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사하고 간청하는 한 여인의 절박한 호소를 딱하게 여기시어 아이를 살려주시는 상제님. 그런데 그 공사과정에서 상제님께서는 느닷없이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 하고 허미수 신명에게 명을 내리십니다. 상제님께서 왜 하필이면 허미수를 시켜서 우암 송시열을 잡아오라 명하셨을까요?
 
구릿골에서 술장사하는 김사명의 아들 성옥이 어느 날 급증에 걸려서 나흘만에 죽거늘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백방으로 주선하여도 회생할 여망이 없는지라. (중략)
상제님께서 차마 보지 못하시고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혀 배를 만져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큰 소리로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하고 외치신 뒤에 모과를 씹어 그 즙과 함께 침을 흘려서 죽은 아이의 입에 넣으시니 아이가 문득 항문으로 추깃물을 쏟거늘, 상제님께서 “나가서 회초리 하나 끊어 오라.”하시어 회초리로 아이의 종아리를 탁탁 때리시매 죽었던 아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홀연히 살아나더라. 
(道典 4:124)

 
 
물론 김사명의 아들의 급증과 비슷한 병을 앓았던 송우암에게 독약을 줘서 낫게 했던 허미수. 그의 기운을 붙여서 죽은 아이를 살리신 상제님의 그 뜻을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뭔가 더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허미수의 역사의식을 알면 그 공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허미수가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이 권력을 잡은 유학자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유교 근본주의적인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그 중심에 놓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 의식이 있는 비주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합니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주로 남인과 북인계열의 학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했는데, 허미수 역시 1670년대에 『동사(東事)』2) 라는 역사서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칩니다. 허미수는 그가 당시 정권의 주요 실세였던 남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자학적 입장에서 우리민족을 중국과 구별하면서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단군문화 정통론’을 추구하였습니다.
2)동사는 단군세가 (부여열전, 숙신씨열전, 기자열전, 위만세가, 사군이부, 삼한열전), 신라세가 (가락열전, 대가야열전), 고구려세가, 백제세가 (예맥열전, 말갈열전, 모라열전), 흑치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서술한 『동사』는 기존의 중화사대주의적인 사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세 가지의 서술형태를 보여줍니다. 
 
첫째, 한국사의 첫머리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내세워 단군조선이 우리역사의 기원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을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즉 한민족문화의 **을 신시(神市)까지 소급시키면서 신시와 단군의 시대는 중국의 제곡, 당우시대와 자웅을 겨뤘다고 주장하면서 환인-신시-단군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계통을 확립합니다. 
 
둘째, 그는 숙신, 예맥, 말갈 등 백두산 북쪽의 족속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모두 함께 단군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후에 20세기 초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영향을 줍니다. 이같이 부여계 국가들을 단군의 후예로 보는 시각은 고려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조선 세조 때 권람의 『응제시주』에만 보이던 것인데, 허미수가 이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조 사서류에서 단군**의 역사인식을 낳은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셋째, 그는 당시 유가들이 신화적인 요소를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척한 것과는 달리 단군의 신이성(神異性)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단군의 순방한 정치가 1천 년간 지속되었다면서 이상정치의 연원을 요순이 아닌 단군 통치시대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허미수의 『동사』는 후에 민족주의 학자들의 역사관의 틀을 잡아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숙종 말년에 소론 학자 노촌 임상덕(1683∼1719)은 1710년대에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써서 고대 한민족의 강역(江域)과 단군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였고, 성호 이익(1681∼1763)은 ‘삼한정통론’을 지지하면서 정통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삼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에게 전수되어 기자 이전에 단군시대부터 이미 원형의 유교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허미수의 영향을 받은 담헌 홍대용(1731∼1783) 이후 북학사상가들은 ‘조선=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해갑니다. 이에 따라 화이론적인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부정되고 오히려 그동안 정통에서 제외되어 연구되지 않았던 발해왕조가 북학사상가들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옥유당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서는 우리나라 왕조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다시 근대 민족주의 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고 오늘날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시금석이 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사대주의에 매몰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주의에 빠졌지만 허미수의 『동사』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 고유의 정통성을 복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허미수 묘역 경기도 연천군 소재
 
 
 상제상제님께서 허미수를 부르신 이유
다시 상제님의 공사정신으로 돌아와서 허미수와 송우암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송우암은 상제님께서도 인정하실 정도로 지령지기(至靈之氣)를 타고난 기운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적인 중화사대의자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중국인처럼 옷을 입고 중국식으로 살아가는 등 원시반본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업보로 송우암의 자손들은 대대로 자손줄이 끊어져서 양자를 들인다고 합니다.3) 
3)송우암은 자신의 둘째 형님으로부터 대를 이을 양자를 들인 이후로 송우암의 집안은 직계자손의 줄이 끊어져서 7명(8대~13대)을 내리 양자로 들인다.
 
상제님께서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기운을 천지공사에 쓰셨습니다. 허미수는 비록 겉으로는 유학자였지만 한민족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허미수와 송우암은 당시 통상적인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대결은 올바른 한민족 역사의 원시반본을 추구하는 정신과 중국 중심의 존화사대주의 정신간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상제님께서 허미수를 시켜서 송우암을 잡아오라하심은 왜곡된 역사정신에 의해 타락한 조선민족을 허미수의 기운으로 올바른 원시반본의 역사정신으로 회복하게 하려는 상제님의 깊은 뜻이 숨어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참고문헌>
 조용헌 ‘척주동해비’ 조선일보 2005년 1월 5일
 한영우 『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1989
 허 목 『眉?記言』
 허 목 『東事』
 양천 허씨(陽川許氏) 족보 
 은진 송씨(恩津宋氏族譜) 족보
 인터넷 야후 백과사전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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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라 불리우는 위징과 당태종

난세에 등장한 불세출의 영웅, 위징
중국 역사에 나오는 강직한 신하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위징”이란 신하가 있었다. 그는 유능한 황제 당나라 태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위징(魏徵, 580∼643)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 학자로서 자는 현성(玄成),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그는 중국 산동성 곡성에서 출생하였다.
 



수(隋)나라 말 혼란기에 이밀(李密)의 군대에 참가하였으나 곧 당 고조(唐高祖)에게 귀순하여 고조(高祖)의 장자 이건성(李建成)의 유력한 측근이 되었다. 황태자 건성이 아우 세민(世民: 후의 太宗)과의 경쟁에서 패하였으나 위징의 인격에 끌린 태종(太宗)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한 후 재상(宰相)으로 중용되었다. 특히 굽힐 줄 모르는 직간(直諫)으로 황제를 보필한 위징은 주(周), 수, 오대(五代) 등의 정사편찬(正史編纂) 사업과 『유례(類禮』, 『군서치요(群書治要)』등의 편찬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관중, 제갈공명의 맥을 이어 중국사에서 명재상의 전통을 계승한 특출한 인물의 하나가 ‘위징’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징은 당(唐)의 창업에 일등공신인 이세민(李世民)이 황제가 된 후 제국을 경영[守成]하는데도 성공하도록 힘쓴 명재상이다.
 
수(隋: 581∼619)나라 말의 혼란기에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인 이연(李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양제(煬帝)가 암살되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공제(恭帝)를 폐하고 당(唐: 618∼907)나라를 창업한다. 626년 고조(高祖)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태종(太宗)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외정(外征)을 통해 국토를 넓히는 한편, 제도적으로 민생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학문·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치세(治世)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盛世)를 이룩했다. 
 
당태종의 시대(서기 627∼649)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하여 중국사에서 길이 추앙되는 황금시대를 맞이하는데 위징은 그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정관의 치’라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좌복야(左僕射) 두여회(杜如晦), 기획력이 빼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 강직한 대부(大夫) 위징(魏徵) 등과 같은 많은 현신(賢臣)들이 선정(善政)에 힘쓰는 태종(太宗)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창업과 수성 중에 어느 쪽이 더 어렵냐”고 질문을 했다.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옵니다”고 한다. 그러나 위징은 대답이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 만큼 수성(守成)이 어렵습니다”라고 아뢴다.
 
그러자 태종이 말을 했다. “방공(房公)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驕奢: 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禍亂)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守成)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守成)에 힘쓸까 하오”라고 말한다. 
 
이처럼 명민한 군주 밑에 위징과 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었기에 당태종의 치적은 중국사에서 『논어』, 『맹자』, 『춘추좌전』, 『서경』, 『자치통감』과 더불어 제왕학(宰王學)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통해 치세의 법방을 후대에 전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정관정요』는 바로 당태종과 위징의 치국문답(治國問答)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원정에 패배한 당태종이 위징이 살았다면 원정을 말렸을 것이라며 그의 무덤을 돌보고 유족을 후대한 것만 보아도 위징의 진면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태종 시대에는 무엇보다 과거제도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전통 명문과 한미한 집안(寒門), 그리고 서족(庶族)까지 포함하여 신구(新舊) 세력의 조화 속에 능력 위주의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위징은 원래 태종과 왕권을 다툰 태종의 형 이건성(李建成)의 전략가로서 태종을 죽여야 한다던 인물이 었으나 추후 태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태종의 시대에는 중앙관제, 토지제도, 세금제도, 병제 등이 637년 율령격식(律令格式)으로 정비되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되었고 그 중심에 위징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시된 것은 강력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완성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을 천하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토대는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문화·군사력에 기초한다. 그것은 기원전 2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말까지 2천년의 역사를 갖지만 그 토대는 한무제(漢武帝) 시대에 다져지고 당태종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위징은 중화체제라는 동아시아의 중국패권체제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역량있는 건설자였고, 유장한 중국사에서 명재상으로서 태평성대의 전통을 이은 걸출한 영웅이었다.
 
 
강직한 위징 그리고 지혜로운 황후가 성군聖君을 만들다
하루는 황제가 조회(朝會)를 마치고 들어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황후에게 말하기를 “그 촌놈을 죽여버려야지…” 하면서 단칼로 목을 칠 것 같은 위세를 보이기에, “왜 그러십니까?” 하고 황후가 물었다. 그러자 당태종은 “위징이란 놈이 조회 때마다 나를 욕보인단 말이요.”라고 말한다.
 
황후가 듣고 물러갔다가 조복을 갈아입고 황실에 들어와 황제께 넙죽 절을 한다. 황제가 의아해서 물으니 황후의 말이 이러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君明臣直]하였습니다. 이제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이 드러나는지라 경하 올리옵니다.” 황제가 황후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화를 풀고 기뻐하며 직언하는 위징의 모습을 되새겼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참으로 많다. 먼저 위징이란 신하의 사람 됨됨이이다.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임금에게 ‘죽이면 죽으리다.’라는 심정으로 국정의 흐름을 바르게 직언한 위징의 정직함을 눈여겨 볼 수 있다. 
 
비록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될지라도 정사에 옳은 길이라고 판단이 설 때 옳고 그름을 제시할 줄 아는 충신을 둔 임금은 복 있는 사람일 것이다. 또한 자신의 남편이자 황제인 당태종을 지혜롭게 내조한 황후의 덕성을 유념해서 살펴보면, 황후의 지혜가 국정을 바로하고 성군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 황제 태종이 훌륭한 황후를 가진 것이 두 번째의 복인 것이다. 
 
통치자의 첫 번째 자질은 사람과 사물을 바로 보는 바른 판단력이다. 혀끝을 달게 하는 사탕발림하는 신하는 충신으로 끌어안고 병이 치료되는 쓴 약을 올리는 신하에게는 목을 쳐 내버리는 현대판 황제들이 지금도 이 땅에 얼마나 즐비한가! 비단 국가의 통치자에게만 적용된 말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 회사, 공장, 군대, 학계, 나아가서는 종교계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 그래서 수레가 잘 굴러가지 않는 것이다. 직언 하는 충언(忠言)을 누르기 위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은 세상물정도 알고 나름대로 충직한 사람이라 말하며, 정작 실상을 정확히 지적하여 보고하는 부하간부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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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공을 지낸 왕량 장군


윤창렬

 
 
왕량 장군은 A.D. 60년 28수에 맞추어 28장군의 초상을 배치할 때 4번째에 위치한 장군이다. 28수는 천구의 적도 둘레에 있는 밝은 별을 스물 여덟 별자리로 만들어 놓고 별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이 28수(宿)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사를 보신 내용이 있다.
 
하루는 유찬명(柳贊明)으로 하여금 두루마리에 ‘28수(宿)’자를 왼쪽으로부터 가로로 쓰게 하신 후에 끊어서 자로 재니 한 자가 되거늘 이에 불사르시니라. (道典 5:201:7∼8)
 


28수는 동서남북에 각각 7수씩 모두 합하여 28수가 되는데 이를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8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은허에서 나온 갑골복사(甲骨卜辭)와 상대(商代)의 금문(金文)에 이미 각(角), 방(房), 항(亢), 심(心), 정(井), 류(柳), 진(軫), 규(奎), 위(胃), 묘(昴), 자(?), 여(女), 허(虛) 등 28수 중에서 13수의 명칭이 나타나는데 추측헌데 당시에 28수가 다 전해내려 오고 있었지만, 단지 복사(卜辭)속에서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보다 앞서 서경의 요전(堯典)에 성조(星鳥), 성화(星火), 성허(星虛), 성묘(星昴) 등의 명칭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번 호의 주제인 왕량장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광무제를 도와 하북을 평정하고 야왕령이 되다
왕량(王梁)의 자(字)는 군엄(君嚴)이고 어양군(漁陽郡, 지금의 북경시 동쪽) 요양(要陽) 사람이다. 군(郡)의 관리로 있었는데 태수 팽총(彭寵)이 왕량으로 호노령(狐奴令, 호노는 지금 북경시의 순의현과 밀운현 사이에 있었다)을 삼았다. 그는 갑연(蓋延), 오한(吳漢)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광무제를 광아(廣阿, 하북성 隆堯縣 동쪽)에서 만나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받았다. 한단(邯鄲)을 함락하고 나서는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종군하여 하북(河北) 지방을 평정하여 야왕령(野王令, 야왕은 하남성 沁陽縣 지역)이 되었고, 하내군(河內郡) 태수 구순(寇恂)과 함께 남쪽으로는 낙양(洛陽)을 방비하고 북쪽으로는 천정관(天井關, 산서성 晋城市 남쪽 태항산 정상에 있다. 관의 남쪽에 天井泉 세 곳이 있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을 수비하니 주유 등이 감히 군사를 내지 못하거늘 세조(世祖, 광무제)는 이를 왕량의 공이라고 인정하였다.
 
광무제가 등극 후 대사공의 벼슬을 받다
세조 광무제가 등극한 뒤에는 의논을 거쳐 대사공(大司空)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적복부(赤伏符)에 “왕량주위작현무王梁主衛作玄武”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무제는 야왕(野王)은 위(衛)나라가 옮겨간 곳이고(衛元君 때  陽으로부터 野王으로 옮겨갔다) 현무(玄武)는 수신(水神)의 이름이고 사공(司空)은 수토(水土)를 관장하는 벼슬이라고 생각하여 왕량을 발탁하여 대사공(大司空)의 벼슬을 내리고 무강후(武强侯)를 봉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당시에 유행하던 비결서인 적복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적복부(赤伏符)의 예언에 따라 광무제, 천자에 등극하다
광무제가 하북지방을 거의 평정하자 모든 장수들이 천자에 등극하기를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유수는 그때마다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마침 유수와 동문수학했던 유생(儒生) 강화(彊華)라는 사람이 관중(關中)으로부터 적복부(赤伏符)라는 비결서를 가지고 유수를 만나 보았다. 원래 부(符)라는 말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여 기록한 미래기(未來記)이고 적복(赤伏)이 이 미래기의 이름이다. 한나라는 불(火)을 숭상했고 적색(赤色)은 불의 색깔이며 복(伏)이라는 말은 감추고 있다는 뜻이므로, 적복부는 화덕(火德)으로 일어난 유씨(劉氏)의 한나라가 다시 부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유수발병포부도(劉秀發兵捕不道)하니 사이운집용투야(四夷雲集龍鬪野)로다 사칠지제화위주(四七之際火爲主)라’고 하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유수가 군사를 내어서 무도한 사람을 잡으니 뭇 영웅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판에서 싸움을 하도다. 사칠의 때에 화덕(火德)을 가진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라는 뜻이다. 사칠은 곱하면 28이 되는데 이는 세 가지의 경우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한 고조 유방이 나라를 건국한 B.C. 206년부터 광무제 유수가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 A.D. 22년까지가 도합 228년이 되어 사칠지제(四七之際)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광무제가 28세 때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사칠지제가 된다는 것이며, 셋째는 28명의 장수가 또한 사칠지수(四七之數)에 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도 있고, 여러 신하들이 거듭 천자에 등극하기를 요청하자 유수는 A.D. 25년 6월에 호남(?南)의 천추정(千秋亭)에서 단을 쌓고 천자에 등극하였다.
 
황제의 명을 어겨 죽음에 직면했다 사면을 받다
건무(建武) 2년(A.D. 26)에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 등과 함께 단향적(檀鄕賊)을 칠 때 황제가 명을 내려 군사를 대사마에게 배속시켰다. 이때 왕량은 별도로 야왕의 군사를 징발하자 황제는 조칙을 받들지 않았다고 하여 그로 하여금 현(縣)에 머무르고 진군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량은 다시 자기 편리한 데로 진군을 하였다. 황제는 왕량이 거듭 명령을 어기자 대노(大怒)하여 상서(尙書) 종광(宗廣)을 파견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군중(軍中)에 가서 왕량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러나 중광이 차마 목을 베지 못하고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당시의 서울은 낙양이었다)로 압송하였는데 서울에 도착하자 황제는 그를 사면하였다.
 
적미와 오교적을 깨트리고 전장군에 임명되다
한 달쯤 지나서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집금오(執金吾)의 일을 행하였다. 북쪽으로는 기관(箕關, 하남성 濟源縣 王屋山 남쪽)을 수비하면서 적미(赤眉)의 군사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3년(A.D. 27년) 봄에 오교적(五校賊)을 공격하여 신도(信都, 治所는 지금의 하북성 冀縣), 조국(趙國, 治所는 지금의 한단시)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모든 근거지를 다 평정하였다. 황제는 겨울에 사자(使者)에게 칙령을 내려 왕량을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하였다.
 
 
전쟁할 때마다 더욱 공을 세워 산양태수가 되다
4년(A.D. 28년) 봄에 비성(肥城, 지금의 산동성 肥城縣) 문양(文陽)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더 진군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와 함께 교강적(퍏彊賊), 소무적(蘇茂賊)을 초(楚), 패(沛)의 사이에서 공격하여 대량(大梁, 지금의 하남 開封市 西北), 설상(齧桑)을 함락하고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 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와 함께 또한 길을 나누어 함께 진군하여 1년여만에 다 평정하였다. 5년(A.D. 29년)에 도성(桃城)을 구원하였고 방맹(龐萌) 등을 격파할 때 왕량은 전쟁에 더욱 힘을 기울여 산양(山陽, 지금의 하남성 焦作市 동쪽) 태수에 임명되어 새로 거느린 사람들을 진무(鎭撫)하였고, 군사를 거느리기는 이전과 같이 하였다.
 
 
수로를 뚫었으나 실패하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다
  

  
수개월만에 불려 들어가 구양흡(歐陽?)을 대신하여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왕량은 물길을 뚫어 곡수(穀水)를 이끌어 낙양성 아래로 흘려보내 동쪽으로 공천(鞏川)으로 흐르게 했으나 물길이 완성되었어도 물이 흐르지 않았다.
 
7년(A.D 31년)에 관리가 탄핵하는 글을 황제에게 상주하자 왕량은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왕량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征伐)에 종사하여 뭇 사람들이 훌륭함을 칭찬하였기 때문에 발탁하여 경사(京師)를 다스리게 하였다. 수로(水路)를 개통하기를 건의한 것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나 뭇 사람들의 힘을 들였지만 공을 이루지 못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이를 시끄럽게 말하는 자가 많도다. 비록 너그럽게 용서함을 받았으나 오히려 겸손하게 물러나기를 고집하는 도다. 『논어』에 이르기를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준다(君子成人之美)고 하였으니 왕량으로 제남태수(濟南太守)로 삼노라”고 하였다. 13년(A.D. 37년)에 읍(邑)을 더해주고 부성후(阜成侯)에 봉하였다. 14년(A.D. 38년)에 관직에 있으면서 졸(卒)하였다.
 
왕량이 주관하는 별은 동방의 창룡칠수 중에서 네 번째 별인 방수(房宿)에 해당한다. 방수는 창룡의 배에 해당하며 네 개의 주홍색 별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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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의 첫 자리를 차지하여 중국사람의 인종씨를 추리는 등우(鄧禹) 대장군


윤창렬


* 무신년 여름에 경석의 집 서쪽 벽에 `24장(將)과 `28장(將)을 써 붙이시고, 공우의 왼팔을 잡으시며 소리를 높여 만국대장(萬國大將) 박공우라고 부르시니라. 이후로 공우가 어디에 심부름을 가든지 문밖에 나서면 어디선가 방포성(放砲聲)이 나더라. (道典 4:82:1~3)


증산 상제님께서는 무신년(1908) 여름에 경석의 집 서쪽 벽에 24장과 28장을 써 붙이시고 박공우 성도를 만국대장에 임명하는 공사를 보셨다. 24장이란 정관 17년(643년) 당태종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문명을 열었던 24명 공신의 초상을 24절기에 응해 능연각(凌煙閣)에 그려놓게 한데서 연유하며, 28장이란 영평 3년(60년) 광무제의 한나라 중흥의 대업을 보좌한 28장군의 초상을 28수에 응하여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걸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상제님께서 24장과 28장을 써 놓으시고 박공우 성도를 만국대장(萬國大將)에 임명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국대장이란 모든 나라의 대장이란 뜻이다. 이 말씀을 통해 대개벽기에 24장과 28장을 세계 각 나라에 배치해서 인종씨를 추리는 대명을 맡기시고, 이들의 총사령관으로 박공우 성도를 임명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음의 공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성도 세 사람으로 하여금 종이를 지화(紙貨)와 같이 끊어서 벼룻집 속에 채워 넣게 하시고 한 사람이 한 조각을 집어내어 등우(鄧禹)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하며 그 종이 조각을 받은 사람도 또 등우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하며,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받은 뒤에 청국지면(淸國知面)이라 읽고…. (道典 6:77:4~6)


위의 공사는 숙구지 대공사 뒤에 이어지는 공사이다. 숙구지 공사는 대두목의 출세공사로 태을주의 화권으로 대두목이 도운의 대세를 회복하고 일꾼들의 꿈과 소망이 실현되는 대공사이다. 이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은 병겁과 의통성업 집행공사이다. 이 때 천상에서도 각 나라마다 장군들이 한 명씩 임명되어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역사하여, 지상의 일꾼들과 천상의 신장들이 신인합발(神人合發)하여 세계 각국에 나가 인종씨를 추리는 인류구원의 대역사를 펼치게 된다. 

등우란 신장은 바로 이때 중국의 인종씨를 추리는 책임자가 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등우를 부르고 청국지면(淸國知面)이라 읽게 했는데 지(知)는 여기서 알지 자로 해석하면 중국사람이 몇 명이 구원받을 것인 줄을 알게 된다는 뜻이고 맡을지, 주장할 지(乾知大始, 道知事등의 말에 쓰인 知가 이에 해당한다)로 해석하면 청국, 즉 중국의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을 주관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등우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28장의 첫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13억 중국민족의 인종씨를 추리는 대임을 맞게 되었는가? 

그에 관한 전기는 범엽이 쓴 『후한서』 권 16, 「등구열전(鄧寇列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세를 보고 광무제를 따르다

등우(鄧禹)의 자는 중화(仲華)이고 남양(하남성 南陽) 신야(新野)사람이다. 13살에 시경을 다 외웠고, 당시의 서울인 장안(지금의 서안)에 가서 공부할 때 당시에 광무제도 장안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등우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광무제를 보고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는 그와 친하게 교류를 하였으며 몇 년 뒤 고향으로 돌아 왔다. 

한(漢)의 부흥병이 일어나 갱시제(更始帝)를 옹립하고 많은 호걸들이 등우를 천거했지만 등우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대세를 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그 뒤 광무제가 하북 지방을 평정하고 있을 때 등우는 말채찍을 지팡이 삼아 북으로 달려가서 업(鄴) 땅에서 유수(劉秀, 뒤의 광무제)를 만났다. 유수가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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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 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윤창렬尹 暢 烈  대전대 한의학과 교수


왜 우리 역사를 알아야 되는가

1. 역사는 자아인식을 목적으로 한다

*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니라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자와 환골(換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道典 2:41:1-2)

영국의 외교관이며 정치학역사학 교수였던 E. H. (18921982)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곧 역사라 하여역사는 과거의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아 생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따라서 민족과 국가의 발전은 올바른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시대의 문명을 진단하는 역사가들은 지금을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위기라는 말은 인류가 위험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더 나은 시대로 도약하느냐아니면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전락하느냐 하는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a turning point for better or worse in an illness)

이러한 위기를 야기한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발전에 따른 자연 파괴와 공해윤리와 도덕의 타락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끊이지 않는 전쟁의 발발 등을 들 수 있지만이에 못지않게 가장 중요시되는 위기는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내 민족의 역사는 어떠한가우리 민족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보다는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하루살이의 인생을 살아가는방향성을 잃어버린가치관을 망각해 버린 인간 정신사의 타락이 가장 큰 위기라고 진단해 볼 수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 시대를 인류의 모든 문명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원시반본하는 때라고 말씀해 주셨다아울러 이 위기의 시대에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망각하거나 역사의 참된 뿌리를 부정할 때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해 주셨다.

만해 한용운도  '조선독립의 서'에서 월조(越鳥)는 남지(南枝)를 생각하고 호마(胡馬)는 북풍(北風)을 그리워 우나니 이는 다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다. 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굴을 향하고 죽는다고 하니 근본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미물이나 동물에게도 나타나는 진리라고 하겠다.


한민족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공부하고 체득하는 것은 인류의 새 시대, 21세기를 한민족이 열어 나가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행촌 이암선생은 '단군세기 서'에서 정유기(政猶器)하고 인유도(人猶道)하니 기가리도이존호(器可離道而存乎)며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 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 병수도기자아야(竝修道器者我也)며 구연형혼자역아야(俱衍形魂者亦我也). ()로 천하만사(天下萬事)가 선재지아야(先在知我也).”라고 하셨다.

2. 지금 우리 민족은 몸은 국산이지만 정신은 외제이다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니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리라. : 만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시작함이 있으니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을 가릴줄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 (道典 8:12:1-2)

지금 우리 나라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 빠져 있다.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각자 자기의 목소리만을 높일 뿐 남의 사상이나 생각은 전혀 수용을 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국론분열의 난맥상이 판치고 있는 시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민족의 통일과 미래를 걱정한다는 미명아래 공산주의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무법천지를 열고 있는 대학생들의 데모 시위이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의 각 개인은 사상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것을 공부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선후의 순서는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이란 19세기 후반 서구의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근세의 이론이다. 이것을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북통일을 원하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대한의 젊은이라면 우리의 9,000년 역사와 정신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운동을 전개하라는 것이다. 민족운동, 민족통일운동은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철학도,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인 것이지만 민족의 혈통만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은 민족단합의 근원이며, 민족자존의 원동력이며 민족발전의 추진력이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만을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이 배여 있는 고유한 종교와 사상이 없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민족은 있으되 역사는 없고, 아니 역사는 있으되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 역사는 어렴풋이 알되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국론이 분열되고 대학생들이 좌경 이론에 빠지고, 한국이 종교백화점화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 정신을 배우지 못해서 주체성을 상실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 :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릴 줄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道典 8:12:1)는 상제님의 말씀은 지금의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할 것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친구에게서 유학 당시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파티를 열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나라의 고유한 춤을 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만 고고와 디스코를 추어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연 당신은 몸도 국산이고 정신 세계도 국산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정신세계의 무국적(無國的) 현상을 타파하는 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지만, 우리 민족의 상황에 비추어 너의 민족을 알라.”로 고쳐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3 애국심은 역사의 올바른 인식으로부터

198911,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는 환희와 충격의 대 드라마를 목격하였다. 몇십 년이 지나도 요지부동할 것처럼 보였던 동서독의 냉전이 같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소련에서도 발트해 3국을 비롯해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등의 공화국이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마침내 독립을 성취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민족이란 무엇이기에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첫째, 민족이란 언어, 문자, 풍속, 관습, 생활, 사상, 그 밖의 문물일체를 공동 소유하고 있는 짙은 혈연의 사회적 집단으로 운명공동체, 역사공동체, 문화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명예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세계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9,000년 동안 국통의 단절됨이 없이 단일민족으로서 지속되어 온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부흥은 애국심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애국심의 고양은 역사의 올바르고 자랑스런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도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라는 글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눈에 국()이란 글자가 배회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손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봉사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발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뛰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목구멍이 항상 나라를 찬양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뇌가 항상 나라만을 생각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머리털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혈혈누누(血血淚淚)가 나라를 위하여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대저 역사가 무엇이기에 그 공효의 신성함이 이와 같은가. 역사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변천소장한 실적(實蹟)이니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가 반드시 흥기하니라.

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단군세기 서'에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이라는 말이 있다.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몸뚱아리와 같고, 역사는 우리 몸속에 있는 혼과 같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나 국가는 혼빠지고 얼빠진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비록 있더라도 후세들의 기를 펴주고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는 역사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역사없는 민족과 진배없다. 엄하게 기르되 기()는 죽이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만, 지금의 역사 교육은 학생들과 우리 민족의 기()를 살리기보다 죽이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끝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이기백 저, '한국사 신론' 서문)

(2) 우리 겨레가 처음 어디서 살았는지 분명치 않으나 단군신화가 말하는 고조선이 대동강 평양 근처에 세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국정교과서의 한 대목)

(3) 대동강변에 설치된 한사군은 원시적 국가 형태로 볼 것이나 민족은 나라의 식민지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는 변칙적인 과정을 밟았다. (김철준한우근 저, '한국사 개론')

(4) 한국사는 반도의 태반을 한족(漢族)에게 빼앗김으로써 상고(上古)에 있어서 외래족에게 굴복하는 선례를 남겼다. (이병도 저, '한국사 대관')

석주 이상룡 선생은 노예역사의 교육은 노예국민을 만든다.” 라고 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정신의 역사는 무정신의 민족을 낳고, 무정신의 민족은 무정신의 국가를 만든다.” 라고 하였다.

역사의 실례를 들어 보더라도 민족의 역사와 주체성이 확립되었던 고구려, 백제, 대진국 등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민족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었지만, 외래 종교인 불교에 빠지고 사대주의에 물들었던 신라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영토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은 '단군세기 서'에 있는 다음의 내용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위국지도(爲國之道)가 막선어사기(莫先於士氣)하고 막급어사학(莫急於史學)은 하야(何也). 사학(史學)이 불명즉사기(不明則士氣)가 불진(不振)하고 사기(士氣)가 불진즉국본(不振則國本)이 요의(搖矣)요 정법(正法)이 기의(岐矣)니라. :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그 민족의 엘리트이면서 지도자인 선비들의 기상보다 더 먼저할 것이 없고 역사 공부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 것은 왜 그러한가? 역사가 밝지 아니하면 민족 엘리트들의 기백이 떨쳐지지 못하고, 엘리트들의 기백이 살아나오지 못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치의 법도가 분열되느니라.

4. 지난 역사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원리에 의해

후천문화 건설의 모델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특히 중요시 되는 이유는 우리의 시원사가 인류 역사의 시원사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으며, 환국배달단군조선 시대의 신교의 사상과 철학과 문화는 원시반본의 정신에 의해 후천 문화를 건설하는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신교(神敎)의 제천의식과 음악, 미술, 무용 등의 삼성조시대의 문화와 철학의 원형 발굴은 후천 문화를 재정립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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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 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윤창렬尹 暢 烈  대전대 한의학과 교수

. 역사란 무엇인가

*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생기(有天下之生氣)하고,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사기(有天下之死氣)니라. : 천하의 대세를 알고 있는 자는 살 기운이 붙어있고 천하의 대세에 눈 못뜨는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밖에는 없느니라. (道典 5:259)

1. 역사는 진리의 종합적인 모습이다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 생활해 온 총체적인 모습으로 진리의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이다. 역사를 버리고서 인간은 진리의 진면목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며 역사를 떠나 천지의 대세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을사년에 부안 사람 신원일이 모시기를 원하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명()이 있으므로 신도(神道)에서 신명이 먼저 짓나니 그 기운을 받아 사람이 비로소 행하게 되느니라. (道典 4:41:5-6)

인간이 역사를 실현시키는 주인공이지만 여기에는 4차원의 신()이 들어서 함께 역사하고 신()은 천리(天理)의 운행원리에 따라 작용(作用)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운행원리()에 따라 그 기운을 주재하는 신()이 들어서 지상의 인간을 통해 사건()으로 전개된 총체적인 모습이 역사이므로 역사는 진리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우주의 운행원리에 시각을 맞추면 운도사관(運度史觀)이 나오고 신도의 법도에 촛점을 맞추면 신도사관(神道史觀)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선천의 역사가 끝나가면서 상제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여야 할 시운이 도래함() 선천의 말기가 되면서 인간의 죄악이 난무하고 천지가 혼란하므로 맛테오릿치 신부를 위시한 신성과 불타와 보살들이 상제님의 강림을 탄원함() 상제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시어 천지공사를 신명과 더불어 집행하심()

상제님의 강림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2. 단재 신채호의 역사 정의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類社會)의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니(신채호 저, 이만열 주석,   조선상고사 상 27쪽)

이는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와 비아(非我)를 주체적(主體的)으로 인식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개별성으로서의 존재파악이요 공동체적으로는 민족의 주체성 파악이다. 나라와 겨레의 역사는 한 집안의 족보와 같은 것이다. 내 집은 작은 집이고 나라는 큰 집이다. 나는 작은 나이고 겨레는 큰 나이니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일이 곧 대인이 되는 것이다. 작은 나는 죽어도 큰 나는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단재는 민족사관의 이론적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사대주의 사관을 깨뜨리어 단군조선(檀君朝鮮) - 북부여(北夫餘) - 고구려(高句麗)의 법통을 세웠으며 지리적으로 압록강, 두만강의 퇴폐한 정신적 국경을 떨쳐내어 민족구강(民族舊疆)의 복원(復元)을 제창하였고 철학적으로 주자학의 추방과 함께 삼신상제(三神上帝)와 신교(神敎)의 광명사상을 정립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둘째, 역사의 투쟁적 성격을 간파하였다.

선천은 상극의 운()이라” (道典 2:12:4)

셋째, 정신적 활동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역사의 삼대원소(三大元素)인 시()()()의 역사성 인식을 통한 실증적 방법론을 도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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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생추살 1회 그래픽 영상 추천>

◈춘생추살 책 소개(1:44) http://goo.gl/FyD2GR
◈생장염장(8:30) http://youtu.be/tKPoE92ZEWE?list=UUuVqEvJ0OCKinqw1e9rCVew
◈선천 후천(1:13) http://youtu.be/cRe_39iHPZs
◈우주일년은 129600년 (1:45) http://youtu.be/K32YZGkPXNc
◈ 목화토금수(2:13) http://youtu.be/35WvbPeSwqI
◈우주일년 우리는 지금 어느 때에 (5:17) http://youtu.be/RdPbYAdqTU8
◈오행으로 본 상제님 오시는 때(5:49) http://youtu.be/UQdWzLFfyag
◈지금은 우주 가을로 들어가는 길목 (49초) http://youtu.be/-xOz339L3sg
◈십미토로 오신 상제님 (1:20) http://youtu.be/991DRreZ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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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순이다
  • 학봉께서 이곳저곳으로 두루 다니시며 친히 세상을 배우실 때
  • 그 신이하고 혜명하심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가시는 곳마다 경애를 받으시되 시험코자 하는 사람도 많더라.
  • 한번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흥덕 부안면(興德 富安面) 하오산(下鰲山) 앞의 알미장(卵山場)에 이르시니 어떤 사람이 지필묵을 내어 놓고 글을 청하거늘
  • 어린 학봉께서 조그만 손으로 붓을 꽉 잡고 먹을 듬뿍 묻히신 뒤
  • 종이 위에 굵게 ‘한 일(一)’ 자 한 획을 힘껏 그으시며 큰 소리로 “나는 순이다!” 하고 외치시니 순간 한 일 자가 마치 누에처럼 꿈틀꿈틀 기어가거늘
  • 구경하던 장터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더 자세히 보려고 서로 몸을 밀치고 당기고 하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니라.
  • 이 때 학봉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 땅은 한 일 자 누에와 같다.” 하시니라.

  • (증산도 道典 1:22)


나루토라는 만화에 이를 표한것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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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도사님 말씀]

잃어버린 동방 한민족의 시원역사와 원형문화를 찾아서

道紀 144년 9월 20일(일), 『환단고기』 북콘서트, 독일 베를린

[말씀요약] 오늘 말씀의 근본 주제는 역사전쟁, 역사 대전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유교, 가독교 등 동서양의 문명권 이전에 7천년 동방의 시원역사 문화가 있었지만 동방 문화의 주인공이던 한국인은 물론, 서양 사람들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동방 시원역사와 영성문화의 원형을 되찾는 문제의 핵심은 동방의 시원역사와 문화가 왜곡되고 동시에 19세기 후반, 동방 근대사의 실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동학의 주제가 왜곡됨으로써, 인류가 고대사와 근대사를 일체의 관계에서 보고 현대문명 위기의 본질을 심도 있게 총체적, 근원적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큰 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동북아 삼국의 역사 성립 주장을 보면, 일본은 국가 성립사 1,300년을 두 배로 잡아 늘려서 2,600년이라고 하고, 중국은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통해 황제헌원과 염제신농씨는 물론 5500년 전 한민족의 조상 태호복희씨까지 중국의 조상으로 다 가져갔고, 한족 문화권과는 색깔이 다른 5천년 전에서 9천년 전에 이르는 동북아의 시원문명 홍산문화까지도 중화문명권에 포함시켜 본래 이 문명의 주인인 고구려, 발해, 그 이전의 단군조선 역사까지 중국사로 흡수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에 의한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임나일본부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사서인 『삼국유사』<고조선기>에는 우리 한민족의 유래와 첫 나라를 중국 문서를 인용해서 ‘4,300년 전 조선’이라고 밝혔고, 우리의 『고기古記』를 인용해서는 “석유환국昔有桓国, 예전에 환국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석유환국昔有桓国’ 부분을 일제 통치하에서 이마니시 류가 ‘석유환인昔有桓因,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고 조작하여 환인을 계승한 환웅과 단군까지 국가 성립사가 아닌 신화의 인물사, 3대 가족사로 만들었습니다. 또 ‘일웅일호’라는 기록은 환족을 찾아 온 부족들이 토템으로 삼은 것인데, 이를 한 마리 곰과 호랑이로 해석을 하여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역사 교과서에 싣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환국과 배달, 조선, 이 삼성조 역사를 부정하기 시작했고,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이 ‘한국은 한나라의 반 식민지, 또는 원나라의 완전한 식민지로 살았다.’는 100% 거짓말 역사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첫째, 『환단고기』는 서양문명의 근원과 동북아 한·중·일을 건국한 시조를 밝혀 줍니다. 뿐만 아니라 수학, 천문학, 과학, 철학, 종교, 언어, 인류 생활문화의 원형의 실상을 보여 주고 있어요. 한마디로 『환단고기』는 우주사상의 원전이며 지구촌에 있는 모든 역사, 종교, 문화 원전 가운데 유일한 인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의 원전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인간 마음의 구성원리, 인간이란 무엇이냐?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에 대한 답을 풀어 줍니다. 이를 인류 원형문화 언어로 삼일심법三一心法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인류 원형문화 시대인 환국과 배달 조선, 7천 년 역사 문화 정신에 눈 뜰 때 인간 마음의 원형, 인간의 진정한 본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그 역사 문화의 정신을 되찾을 때 우리는 본래의 참마음, 원 마인드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2부에서 계속)


-제1부-


왜 동방의 시원역사와 문화를 회복해야 하는가

결론은 역사전쟁입니다. 오늘 말씀의 근본 주제는 역사전쟁, 역사 대전쟁입니다. 

동서 강대국의 정치, 경제, 문화, 이념의 갈등이 집중되어 있는 유일한 분단국가, 동북아의 한반도는 19세기 후반부터 지구촌 역사전쟁의 중심지로 자리매김을 해 왔습니다. 이 한반도 분단 역사의 배경에는 근대사 이후에 지속되어 온 동서 강대국 갈등의 몇 가지 주요 과제가 변혁의 실제 손길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뜻 깊은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신, 지난 60년대 초 조국 한국이 가난에 허덕이던 그때 지구촌 반대편 이 머나먼 독일에 광부로, 또는 간호사로 오셔서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의 번영을 위해 한 생애를 바치신 분들에게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며 살아오신 삶이 어느덧 저물어가는 인생 황혼녘에 이르렀습니다. 

이 자리에는 또 여러 나라에서 오신 형제자매가 계십니다. 멀리 미국에서 ‘내가 이 『환단고기』 콘서트는 꼭 한번 직접 참여해야겠다.’고 해서 오신, 여성 만화가 분을 이틀 전에 만났는데요. 한국에서도 자녀를 데리고 ‘내 아들 딸들 역사 교육을 위해 아무리 멀어도 독일을 가 봐야겠다.’고 해서 오셨습니다. 지난번 엘에이에서도 어떤 여사장님이 아들 둘과 함께 참여하신 적이 있었어요. 오늘 그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콘서트는 지난번 국내외에서 전개했던 것보다 좀 더 실제적인 문제, ‘왜 우리가 잊혀지고 왜곡되고 부정되고 있는 동방 시원문화와 역사를 되찾아야 하는가? 이것이 왜 오늘의 우리 삶에 그토록 소중한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양의 문명은 불교문명, 유교문명, 도교문명, 이곳 서양문명의 근원인 기독교문명, 중동의 이슬람문명, 또 인도의 힌두교문명 등이 있습니다. 인도에 가 보면 10억 이상이 정말로 우리가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이 신에 대한 숭고한 의식을 갖고서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권 이전에 7천년 동방의 시원역사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동방 문화의 주인공이던 한국인은 물론, 서양 사람들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동방 시원역사와 영성문화의 원형을 되찾는 데에는 어떤 과제가 숨어 있는가? 그 핵심은 동방의 시원역사와 문화가 왜곡되면서 동시에 19세기 후반, 동방 근대사의 실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동학의 주제가 왜곡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동방의 고대 원형문화와 그것이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 근대 동방문화의 주요 선언, 즉 동학의 근대사 선언 내용이 동시에 왜곡됨으로써, 인류가 고대사와 근대사를 일체의 관계에서 보고 ‘오늘의 인류가 맞고 있는 현대문명의 위기의 본질이 뭐냐?’ 이것을 심도 있게, 총체적으로, 근원적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큰 눈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동방의 시원문화, 그걸 학술용어로 원형문화라고 그러는데요, 인류 7천년 원형문화와 동시에 왜곡된 동방 근대사의 선언 소식을 함께 바로잡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인류 문화 의식을 회복하고 앞으로 문명의 새 역사를 여는 데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의 70억 인류가 모두 한 형제가 되어 위대한 새 역사와 문명의 비전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갖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제가 강조하려는 한 가지 중대한 주제를 서두에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오늘 콘서트의 세 가지 주제

역사란 무엇이냐? ‘역사는 인간이 대자연에 적응하면서 문화를 창조하는 끊임없는 연출 과정이다. 역사는 현재사이며 동시에 미래사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사의 가장 큰 변혁은 사실 전염병의 문제였습니다. 전염병이 인류 역사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며칠 전 세계보건기구에서 “인류는 에볼라와의 전쟁에서 패했다.”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쟁을 선포하면서 미군 3천 명을 그곳에 급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근대사의 출발점에서 선언된, 앞으로 지구촌 현대문명의 가장 놀라운 전환의 과제는 무엇이냐? 지금의 에볼라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인류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중대한 문명 전환의 과제는 시두時痘, 천연두라는 것입니다. ‘시두가 다시 지구촌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현대문명의 중대한 생사 문제가 앞으로 일어나는 시두의 대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구촌 형제자매가 9천년 동서 인류 창세문화의 지혜의 눈을 떠서 시두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동방 영성문화의 진리 열매의 한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 『환단고기』 콘서트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잡아 봤는데요, 첫째는 성찰省察의 시간으로, 역사 왜곡과 그 깊은 상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각성覺醒의 시간으로, 동방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의 숭고하고 거대한 지혜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고대사와 근대사를 균형된 시각에서 보고, 오늘의 인류 위기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서 우리 모두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 진정한 생명의 한 소식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즉 {{동방의 문화역사의 주인공이던 한민족의 시원역사와 한국인 본래의 종교, 한국인이 9천년 동안 그 누구도 하루도 빠짐없이 생활해 온 영성문화의 실체를 밝히고 철저히 왜곡된 근대사의 출발점인 동학과 참동학 문제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3부 결론에서는 치유治癒의 시간, 그리고 새로운 비전의 시간으로 말씀을 마무리 짓기로 하겠습니다. 

동방의 잃어버린 역사 문화를 찾는 상징 언어, 웅상

1부 성찰의 시간에는 ‘동방의 시원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왜곡이 됐느냐? 그 진실은 뭐냐? 그리고 그 역사 왜곡의 깊은 상처가 지금 우리의 가슴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이른 새벽에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천지에 기도하고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하늘에서 밝은 기운이 열리면서 ‘그것은 두 글자다! 동방의 잃어버린 역사 문화를 찾는 상징적인 언어! 그것은 동방 역사와 문화의 실제 창조자를 부르는 두 글자다!’ 하는 기운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그 상징 언어가 중국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저 숙신肅愼의 나라에 백민, 백의민족이 살고 있는데, 큰 나무를 모시고 있어 웅상雄常이라 한다.”

‘숙신은 동북방에 거주하는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중국은 동방 한국의 옛 이름인 배달, 조선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역사서를 보면 한민족 나라 이름을 폄하하여 청구靑丘(푸른 언덕), 동이東夷(동방 오랑캐), 숙신肅愼(동북방 오랑캐), 또는 구이九夷(아홉 오랑캐)라고 했어요.

웅상! 이 속에 동방의 역사 문화를 찾는 비밀이 다 들어 있습니다. 웅상이란 뭐냐? 얼핏 보면 영웅 웅 자, 항상 상 자. 영웅은 살아 있다, 영웅은 영원하다는 뜻인 것 같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배달’을 건국하신 환웅천황을 모시는 나무입니다. 지금 4, 50대 이후 사람들은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다. 동방의 첫 나라는 배달이다.’ 하는 걸 알고 있어요.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 우리 민족의 나라 이름이 배달입니다. 그래서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라는 거예요. 바로 6천년 전에 배달국을 건국하신 분, 오늘의 한국을 세우신 최초의 건국자가 환웅입니다. 이 환웅천황의 웅 자와 항상 상 자를 써서 웅상이라 합니다. 

한민족은 거대한 공정심公正心을 유발하는 거룩한 성산聖山이 있으면 그것을 산상山像, 환웅님이 임재하시는 산이라 하였고, 거대한 나무가 있으면 신단수神檀樹로 삼아 웅상으로 모셨습니다.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수천년 전부터 산상과 웅상의 풍속이 전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어요.

웅상은 ‘환웅천황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명언입니다.

환웅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일본에 가 보면 실제 환웅천황을 모시는 신사가 있어요. 저 구주九州 히꼬산(日子山, 지금의 영언산英彦山) 단군굴에 환웅상이 있어요. 

동방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불상처럼 옛 어른을 모시는 문화가 있었어요. 몽골이나 시베리아에 전역에서도 산을 넘을 때 우리 한국의 서낭당처럼 돌을 쌓아놓고 세 바퀴를 돌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지금 신을 잃어버렸나? 나는 신과 지금 한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각성하면서 그 고개를 넘어간 겁니다. 

인류 창세 역사 문화의 성지라 하는 바이칼 호, 바로 그 위에 샤먼 바위가 있는데, 거기 보면 세르게이라고 열세 개의 큰 기둥을 세워 놓았습니다. 신단수의 변형인데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거기에도 오벨리스크라고 해서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놓았어요. 이것도 신단수의 변형이라고 서양 학자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모든 신사가 거대한 숲속의 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세워져 있어요. 모든 종교에는 그것이 부처님이 됐든, 마리아가 됐든, 성상을 모시는 문화가 있습니다. 몽골의 오워라든지, 세르게이라든지, 이런 솟대문화와 성상 문화의 근원이 바로 웅상입니다. 

제가 페르가문 박물관에 갔을 때 현장에서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들어가서 보면 이시타르 문이 있는데, 유명한 독일의 학자가 바빌론 천상의 정원, 하늘정원을 뜯어온 거예요. 그 솜씨가 참 대단하고 놀랍습니다. 거기 1층을 딱 들어서면 동방 원형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조각이 너무도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을 올라가 제단 있는 곳을 보니 그 위에 태양 같은 둥근 원이 있고 바로 아래에 직사각형이 있고 그 아래에 할아버지가 계신 거예요. 거기를 한번 꼭 가 보세요. 

더 놀라운 것은 그 상像이 옆에 똑같은 한 면이 있고 반대편에 한 면이 있어요. 3수로 돼 있는 겁니다. 신전에 있는 흰 수염을 한 노인이 누구인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문화의 원형은 6천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권에서 동방으로 오신 환웅입니다. 

웅상! 우리는 언제나 환웅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웅상! 이게 중국 사람의 기록에 나옵니다. 

일본과 중국의 조작된 국가 성립사

그러면 동북아 삼국, 한자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일본의 역사 성립이 언제부터였느냐? 정말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 이웃 일본은 ‘기원紀元은 2,600년이다. 기겡와 니센록뺘꾸넨이다.’라고 제가 어릴 때 집에서도 들은 얘기입니다. 물론 고대로부터 보면 2,600년이라는 시간대가 맞지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성립된 것은 친정집 백제가 망하고 난 10년 뒤, 670년이에요. 국가 성립사 1,300년을 두 배로 잡아 늘려서 2,600년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그러면 중국은 몇 년일까요? 중국사를 들어가 보면 전통적으로 신화, 전설, 왕조시대, 이렇게 셋으로 나눠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화, 전설은 삼황오제시대입니다. 문제는 삼황시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중국 역사의 근원은 삼황이다. 그래서 이 황과 제를 따서 중국사 최초로 황제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약 2,200년 전 진시황입니다. 진나라 시황제가 처음 황제의 자리에 앉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역사를 기록할 때 앞에 있는 삼황삼제는 쓸 수가 없어요. 왜? 그것은 동방의 역사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서오경에 나오는 유가의 역사관을 보면, 항상 ‘요순우탕문무주공’입니다. 요임금의 당나라, 그다음에 순임금의 우나라, 그리고 하상주夏商周, 하나라 우임금, 상나라 탕임금, 그리고 주나라를 연 문왕과 무왕. 

그러던 중국이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야, 우리의 역사, 국가 성립사는 어디부터냐?’ 하는 걸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했어요.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등의 연구 방법을 종합하여 서기전 841년 이전의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年表를 확정하고, 그동안 전설로 여겨 온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역사를 실제 중국 고대 왕조사로 만든 겁니다. 요순을 물고 들어가 ‘이것이 실제 중국의 고대 왕조국가 시대다.’라고 했는데, 역사 개혁을 하면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사마천 『사기』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4,700년 전의 황제헌원이 우리 한족의 시조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보다 500년 이전 동방 배달국의 성인인 ‘동양 의학의 아버지, 농경의 아버지, 시장문화의 아버지인 염제신농씨도 한족의 조상이다.’ 또 여기서 더 비약을 해서 5,500년 전, 동방 문화의 원 주인공이던 한민족의 조상 태호복희씨. 지금 우리나라 태극기의 괘, ‘팔괘를 처음 그린 태호복희씨도 중국의 조상이다.’라고 했어요. 우리 조상을 다 가져간 겁니다. 

하남성 정주시에서는 ‘10억 이상 되는 중국 인민의 역사의식을 개벽해야 한다! 우리는 지구촌 문명의 중심이다! 중화문명!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이 우리의 조상이다!’라고, 문화혁명 이후 이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에, 중국 문명사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83년도에 만리장성 밖 동북쪽 우하량에서 길이가 150미터 되는 동북아 최초의 피라미드, 소위 우하량의 총塚·묘廟·단壇, 거대한 무덤과 제단과 여신의 사원이 발굴됐어요. 그때 중국과 한국에서 대대적인 신문 보도가 있었는데 ‘신화, 전설인 삼황오제시대의 문화유적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만주지역까지 발굴해 보니 소위 홍산문화에서 동북아의 신석기 또는 옥문화가 7천년을 넘어 8천년, 9천년 전 것이 나온 겁니다. 중국의 황하문명에서는 신석기 유물이 한 8천년 전 것까지 나오는데, 그보다 천년이 앞선 것입니다. 그래 중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이 너무도 큰 충격을 받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고민을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만리장성 이남의 한족 문화와는 색깔이 다른 거예요. 미국의 고고학자 넬슨 교수는 ‘동북아 중국의 홍산문화, 소위 우하량을 중심으로 해서 5천년 전에서 9천년 전에 이르는 동북아의 시원문명 역사의 현장이 드러났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족 문화권과는 다르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의 젊은 소장학자들도 ‘중국 문화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해서 남방문화와 북방문화, 이런 전혀 다른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이 모든 문화는 우리 중화문명권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고서 본래 이 문명의 주인인 조선의 문명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구려, 발해, 그 이전의 단군조선 역사까지 중국사로 흡수하고 있어요. 최근 학회에서 ‘중국의 문헌이나 학술서적에서 일체 조선이라는 말을 없애자! 그걸 조선국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라고 일개 지방 이름으로 격하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학계의 정보가 그 문화의 주인공인 대한민국 국민에게 전혀 전달되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은 그들이 말한 신화, 전설 시대의 역사 유적이 원형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우리가 세계 4대 문명의 원 뿌리, 근원되는 이 문명의 주인공이다. 이제 우리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인류 문화와 역사의 본래 창조자로서 진정한 세계 일등 지도자, 문화민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뭐 박수라도 쳐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게 아닙니다! 

넬슨 교수가 중국 곽대순 같은 학자들이 쓴 논문을 영어로 번역을 했는데 거기에 주를 붙였어요. 홍산문화는 한반도, 대한의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이 그것을 저 동아시아 또는 북아시아에서 온 거라고 에둘러 말함으로써, 그 역사의 주인공인 한국의 존재를 폄하하는, 정직하지 못한 역사 해석을 하는 데 대해 훈수를 두는 문장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곡된 한민족의 국가 성립사

자, 그러면 우리 한국은 실제 역사의 성립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민족 최초의 국가는 무엇인가?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한반도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의 교과서 내용입니다.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틀을 전혀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지 통치본부를 세워놓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 가야, 백제를 다스렸다.’고 조작했습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극복되었지만, 일본 교과서에서는 이것을 역사의 진실로 가르치고 있어요. 대만에서도 그렇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의 딱지가 아직 안 떨어졌어요.

『환단고기』에 의하면 ‘본래 일본의 구주라는 땅은 저 북쪽에 있는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와서 문화를 가르쳐 주고 개척한 곳이다. 구주는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본비왜인세거지本非倭人世居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이름이 본래 임나任那다. 그것을 삼가라三加羅로 나눠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치했다.”고 했어요. 지금 이것을 얘기하면 한일간에 대전쟁이 벌어지겠지만 그러나 『환단고기』에 실린 역사의 진실은 그렇습니다! 

또 그들은 ‘2,100년 전에 북방의 유목민 흉노족(훈족)을 굴복시킨,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왕의 한 사람인 한 무제가 쳐들어와서 평양 주변과 그 북쪽에 네 개의 식민지 군(한사군)을 건설했다.’고 조작했습니다. 그래서 2~30대로부터 60대 되는 한국인들은 ‘한반도 북부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네 개의 식민지 군이 있었다.’고 외우고 다녔어요. 

그러나 한 무제가 실제 한반도까지 들어와서 평양 대동강 주변에 낙랑군을 세운 사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 조작이면서 완전한 사건 조작입니다. 다만 그 위쪽 요서지역에 일시적으로 군을 건설했다고 하는 기록과 유물이 일부 나오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 같은 분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은 있어요. 

『환단고기』를 보면, 당시 한 무제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한사군을 세워 진정한 동아시아의 진명천자, 통일제왕이 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옛 조선(북부여)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완전히 좌절됐습니다. 그때 북부여의 숨은 영웅이 나타나 한 무제를 격퇴했는데 그가 바로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입니다. 훗날 그분의 딸 파소가 경주에 내려와서 박혁거세를 낳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경주에 가 보면 역사 해설가들이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중국에서 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선도산에 모신 성모가 중국 여자입니까? 지금 대한민국 박씨들은 반 중국인이에요? 아직도 이런 역사 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식민문화 유산

다시 한 번 각성을 해서 우리 한민족 역사의 출발점을 돌아보면, ‘서력전 2333년에 단군이 아사달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해방 후 한민족 사학자들이 50년 이상 투쟁을 하고, 또 지금 내몽골에 있는 하가점 유적지에서 단군조선 시대 유물이 나오니까 부정할 수 없어서 역사 교과서에 단 한 줄을 넣어준 겁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웠다고 한다.’고 기술한 교과서가 있어요. 

얼마 전 수원에서 중고교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조그만 역사 학습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고조선의 문화는 사실이고 이러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쳤다.’고 썼습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를 대변하는 동북아재단 학자들이 교육부에 압력을 넣어서 ‘단군의 조선은 신화다! 당장 그것을 지워라!’라고 한 겁니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 관변사학자, 아카데미 사학자들의 공식 입장입니다. 고조선은 신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껏해야 한 2,200년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배경을 보면,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야, 너희 조선의 역사는 중국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을 보면 기록이 있잖으냐. 저 백제가 있던 마한 땅에는 조그만 동네국가가 쉰 네 개 있었고, 가야 땅에는 열두 개, 또 신라 진한 땅에 열두 개, 그렇게 해서 약 80개의 작은 국가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서 살았다. 그러니까 서기 4세기 후반까지 너희들은 나라가 없었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가 건설의 출발점은 1,600년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일본 역사는 2,600년으로 잡아 늘였는데 그들에게 역사 문화를 전수해 준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2,000년도 안 됩니까!

지금은 일부 극복이 되어 있지만 식민문화 유산이 아직 우리 한민족의 가슴 속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 있어요!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기록된 한국 역사와 문화의 출발점

그렇다면 우리 조국,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어디서부터인가? 

단군은 신화이고 실제 역사는 3천년 이상을 넘을 수 없다! 이것은 고고학적 입장입니다. 근대 과학주의 역사학의 고향이 바로 이 독일입니다. 이 실증사학, 고고학은 진실로 위대한 면이 있지만 인류 정신사의 뿌리를 다 말살해 버렸습니다.

자, 이제 우리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서를 통해 ‘동방문화의 본래의 주인공, 우리 한국의 창세 역사와 시원 문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냐?’ 이것을 살펴보겠어요. 

강화도 불평등조약 이후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민족 800만 명을 학살하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담긴 20만 권의 책을 남산에서 불 지르면서 이 책을 남겨 놓았습니다. 『삼국사기』와 짝이 되는 『삼국유사』입니다. 강단사학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서의 하나예요. 

『삼국유사』 <고조선기>는 인류의 창세 역사와 한민족의 시원 문화와 역사를 기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로 인해 인류의 첫 국가, 한민족의 시원역사 시대가 왜곡되고 부정되고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한민족은 물론 인류 창세 역사 문화의 고향도 이 <고조선기>이고 그 역사가 완전히 뿌리 뽑힌 것도 바로 여기예요. 그 때문에 『삼국유사』 <고조선기>는 한민족을 포함한 70억 인류에게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러면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실린, 지구촌에 탄생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나라, 바로 너와 나, 동양과 서양, 지구촌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역사의 고향에 대한 기록으로 잠시 들어가 보겠어요. 여기서 동방에 오신 ‘항상 함께하시는 환웅천황’의 건국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고, 완전한 신화 이야기로 부정되고 뿌리가 제거되었는지, 잠시 그 원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魏書云(위서운).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내왕이천재유단군왕검). 立都阿斯達(입도아사달).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개국호조선). 與高同時(여고동시). 
古記云(고기운). 昔有桓國(석유환국)[謂帝釋也]庶子桓雄(서자환웅). 
數意天下(삭의천하). 貪求人世(탐구인세). 父知子意(부지자의).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하시삼위태백가이홍익인간). 乃授天符印三箇(내수천부인삼개). 遣往理之(견왕리지). 雄率徒三千(웅솔도삼천), 降於太伯山頂(강어태백산정)[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신단수하). 謂之神市(위지신시). 
是謂桓雄天王也(시위환웅천왕야).…
時有一熊一虎(시유일웅일호), 同穴而居(동혈이거). 常祈于神雄(상기우신웅). 
願化爲人(원화위인). 時神遺靈艾一炷(시신유령애일주), 蒜二十枚曰(산이십매왈). 
爾輩食之(이배식지). 不見日光百日(불견일광백일) 便得人形(변득인형).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웅호득이식지기삼칠일). 熊得女身(웅득녀신). …

이 기록을 보면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에 왕침王忱이라는 사람이 『위서魏書』에서 말한 ‘내왕이천재 유단군왕검 입도아사달 개국호조선 여고동시’ 즉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란 분이 계셨다.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 중국 요임금과 같은 때다.’라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멕시코를 가 보면, 예전 수도가 거대한 분지인데 거기에 놀라운 피라미드가 있어요. 원주민들이 거기에 궁전을 지어놓고 살고 있을 때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어와서 그걸 보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거예요. 어떻게 이런 곳에 대문명이 있냐? 그래서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어디서 왔는가?” 이에 원주민 마야문명 사람들이 “우리는 저 동방 아스단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대답했답니다. 그 아스단이 아사달이에요.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우리 한민족은 어디서 왔느냐? 우리의 첫 나라는 뭐냐?” 이에 대해 일연 스님이 중국 문서를 인용해서 ‘4,300년 전 조선이다.’라고 밝힌 겁니다. 

그럼 우리 문서에는 어떻게 나올까요? 우리 한국인이 쓴 문서를 『고기古記』라 했는데요. 『고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 예전에 환국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환은 밝을 환 자거든요. 광명 문화를 연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류 문화사 최초의 나라가 환국이고, 아버지로부터 종통을 계승한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동방 땅으로 와서 신시에 도읍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을 내려서 “조선을 지배하려면 한민족 문화 역사의 뿌리를 제거해라.” 했습니다. 이후 일본 왕의 특명으로 승격된 조선사편수회 실무진 3인방 가운데 막내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어떻게 하면 조선 역사의 뿌리를 다 말살할 수 있는가?’ 그 근거를 바로 여기서 찾은 거예요. 석유환국! 

동경대학에 있는 초기 판본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나라 국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마니시 류가 ‘국國 자’의 가운데를 쪼아서 ‘인因 자’로 변조한 거예요. 석유환인,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고! 그러고서‘환인을 계승한 환웅, 또 환웅이 낳은 단군, 이것은 국가 성립사가 아니고 신화의 인물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 3대 가족사다. 이건 나라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책에서 ‘환국과 신시와 조선의 역사를 실제 역사로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나름대로 평을 하고 있습니다.

‘일웅일호’의 잘못된 해석

일연 스님은 몽골의 칭기즈칸이 원나라 대제국을 열고 우리나라가 생사존망의 위기에서 허덕일 때 자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고조선 역사를 기록했어요. 그런데 이분은 『환단고기』 「삼성기」 같은 옛 문서들을 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 보면 환웅천황이 3천 무리를 데리고 왔는데, 일가 다섯 명씩만 해도 실제 숫자는 한 2만 명 군단이 온 거예요. 

‘강어태백산정 신단수하. 위지신시. 시위환웅천왕야’, 백두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와서 신시라는 도읍 국가를 세웠는데, 이분이 환웅천왕이다.’ 

그러고서 ‘시유일웅일호 상기우신웅, 원화위인’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나라를 세울 때 ‘웅족과 호족이 와서 환국의 우주 광명 문화, 생활문화를 전수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내용인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한 마리 곰과 한 마리 호랑이가 찾아와서 짐승의 탈을 벗고 사람이 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거예요. 이런 무지한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마 지구촌에서 대한민국 국민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이곳 베를린이라는 이름은 데어베르 Der bär, 곰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베를린 시민들이 곰입니까? 그 조상이 곰이에요? 그게 아니라 이것은 토템입니다. 

저 시베리아 동방에서 온 북방 유목민 가운데 대표적인 돌궐족, 투르크족이 있어요. 지금의 터어키 조상들이 오스만제국 시대 때 서양을 침략해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그 조상들이 머리에 늑대 탈을 쓰고 다녔어요. 그게 토템입니다. 돌궐족이 늑대가 아니고, 월남에 간 맹호부대가 호랑이가 가서 싸운 게 아닙니다. 

부족들이 하늘에서 영을 받아, 자기들을 돌보아 주고 더불어 사는 보호신적 존재로 동물을 토템으로 삼은 것인데, 한 마리 곰과 호랑이가 와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했다?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역사 교과서가 『삼국유사』 원본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쑥과 마늘도 원래 한방에서 몸을 덥히고 냉을 다스리는 약으로 쓰고, 마를 물리치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먹었던 거예요. 그래 쑥과 마늘을 주며 ‘굴속에 가서 이것을 먹으며 천지에 제를 올리고 백일 동안 집중수행을 해라. 그러면 마침내 인간의 참모습을 회복하게 된다’고 수행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인류 창세의 첫 나라, 환국에는 아버지 문화가 있었습니다.

‘서자환웅. 삭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가이홍익인간.’, 환웅은 환국, 우주 광명 문화의 정신, 그런 심법을 계승한 장자로서 동방으로 온 거예요. 『환단고기』에서도 알타이 산(금악산)과 중국에 있는 삼위산과 동방의 태백산(백두산) 가운데 태백산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하는 데 가장 적지適地다 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홍익인간, 개천절 10월 3일, 이걸 전부 잘못 알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을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또 배달의 건국일인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을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날로, 양력 10월 3일로 알고 있어요. 특히나 대한민국은 최근 들어 국가 지도자들이 건국일 경축 행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도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지구촌의 한국 역사 교과서 왜곡

『삼국유사』 <고조선기>는 이렇게 인류 역사의 고향, 환국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지만 동시에 이 책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환국과 배달, 조선, 이 삼성조 역사는 믿을 수 있는 국가 성립사가 아니라고,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부정하기 시작했어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식민사학자인 이병도 박사 이후 2세대 3세대 식민사학자들이 그런 역사관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치고, 그 어린이가 대학에 가서 역사학자가 되고, 이런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지구촌에 있는 모든 역사 교과서가 왜곡되었습니다. 어떻게 돼 있느냐?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이 ‘한국은 한나라의 반 식민지, 또는 원나라의 완전한 식민지로 살았다.’고 기록돼 있어요. 100% 거짓말 역사입니다. 또 진나라 때는 우리 조선이 한반도 땅의 절반을 중국에게 내줬다! 이런 것을 근거로 남북이 통일되면 한강 이북은 중국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대만, 일본, 중국은 물론 미주, 불란서, 독일 등 모든 지구촌 역사 교과서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부정하고 왜곡시켜 놓은 한국의 역사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서 역사의 진실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조국의 역사와 고유문화 정신을 우습게 아는 무서운 독버섯이 깊숙이 뿌리박혀서 체질화돼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가치

자, 그럼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첫째, 『환단고기』는 서양문명의 근원과 동북아 한·중·일을 건국한 시조를 밝혀 줍니다. 뿐만 아니라 수학, 천문학, 과학, 철학, 종교, 언어, 인류 생활문화의 원형의 실상을 보여 주고 있어요. 한마디로 『환단고기』는 우주사상의 원전입니다.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는 태고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그 속에서 오늘의 우리는 어떤 지혜를 배울 수 있는가? 잃어버린 동방의 고대 원형문화와 역사에서, ‘오늘의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본질적인 위기의 핵심이 뭐냐?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오늘의 인류가 어떻게 한 형제가 될 것이냐? 동서 문명이 진정으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신 있게 외칠 수가 있어요. ‘『환단고기』는 지구촌에 있는 모든 역사, 종교, 문화 원전 가운데 유일한 인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의 원전이다.’라고! 

그런데 지금의 강단사학자들이 합창을 하는 게, ‘『환단고기』는 독립운동을 할 때 하나의 방편으로 조작해서 만든 책으로 최근에 나온 사서이지, 한민족과 인류의 창세문화와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런 사서의 자격이 없다. 거짓말 책, 위서僞書다.’라는 겁니다. 그러고서 위서 바이러스를 퍼뜨렸어요.

그러나 근래에 동서가 개방되면서 4대 문명권을 비롯한 태고문명 유적지 등 역사 현장을 돌아다녀 보면 『환단고기』의 기록을 입증하는 유물, 유적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참으로 끊임없이 터져 나옵니다. 역사의 현장에 가 보면 『환단고기』는 결코 조작된 책이 아닙니다. 

『환단고기』는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입니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을, 근세조선이 패망당한 다음해인 1911년에, 전라도의 최고 문장가인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 두 분이 한마음으로 ‘때는 이때다. 이제는 조선사람 누구도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 조선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내자.’ 해서 『환단고기』 초간본을 출간한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구성

『환단고기』 앞의 책 두 권이 「삼성기三聖紀」예요. 『삼국유사』를 통해 일본제국이 철저히 뿌리를 뽑아버린환국과 배달과 조선, 환인과 환웅, 단군, 이 세 분 성조의 역사를 간결하게 그 핵심 뼈대를 세워 놓았어요. 

「삼성기」는 안함로安含老(579~640), 원동중元董仲(?~?), 두 분이 썼습니다. 경주에 가면 박목월 기념관 바로 건너편에 신라 십대성인十大聖人 기념관이 있는데요. 거기 입구를 들어가면 정 반대편에 안함로, 이분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어요. 십대성인의 한 분입니다. 이분은 중국에 유학하여 불법을 공부하고,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황룡사 구층 석탑을 건립할 것과 그 뒤 왕조의 위기를 예언했는데, 석가부처 못지않게 큰 도통을 한 분이에요. 아마 유불선, 기독교 문화의 근본 하나님관에도 정통한 분일 것입니다. 『환단고기』 「삼성기」 첫 문장에서부터 ‘아, 이건 유불선 기독교 등 모든 종교의 우주관, 신관의 핵심을 통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구나!’ 하는, 놀라운 원형문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원동중은, 지난 백 년 동안 ‘원동중이 누구냐?’ 하고 찾아왔는데 알 수가 없습니다. 족보박물관을 뒤져도 원동중이라는 분을 모릅니다. 다만 짐작이 가는 것은, 마지막 왕조인 근세조선의 태종의 스승이 원천석이라는 분인데, 태종이 국가를 위해 좀 봉사해 주시라고 하니까 도망을 다녔다는 거예요. 너와는 상종을 안 한다고. 이분이 역사를 정통한 분인데 돌아가실 때 책을 여섯 권 가지고 무덤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강원도에 가 보니까 그분의 무덤과 사당 주변에 그런 사연이 쭉 기록돼 있었습니다. 

원동중은 그 자손들이 ‘우리 할아버지가 남긴 이 책이 만약에 유교 문화권에 돌아다니면 가문이 멸절한다.’고 해서 이름을 숨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원천석이라는 분이 원동중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가 마음속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삼성기」가 상·하 두 권으로 돼 있고, 그 다음이 「단군세기檀君世紀」예요. 아까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홀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1,908년을 살다 가셨다고 했는데, 단군은 한 분이 아니고 마흔 일곱 분이 정확하게 2,090년 동안 옛 조선, 단군조선의 왕조시대를 운영했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이 「단군세기」입니다. 이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위협으로 아주 위태롭던 시절에 공민왕에게 마음의 거울 노릇을 했던 행촌 이암李嵒(1297~1364)이 썼어요. 이분은 어린 시절 10대 때 참성단에 올라, 동방 역사의 참모습을 꼭 빛내겠다고 맹세를 한 분입니다. 

그다음, 행촌 이암과 같은 시절에 범장范樟(?~?)이라는 분이 한민족 9천년 역사의 잘려나간 허리, 북부여 역사를 바로 세웠어요. 연전에 방영된 고주몽 드라마가 중동에도 퍼져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탤런트 송일국이 크게 인기가 있는데, 거기에 고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로 돼 있습니다. 북부여의 182년 역사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세워 주는 유일한 사서가 『환단고기』 「북부여기」인 것입니다.

그다음이 『환단고기』 전체에서 70%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는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여덟 권입니다. 

『환단고기』 가 나오게 된 배경

『환단고기』는 이렇게 다섯 분이 기록한 다섯 책을 묶어서 발간한 것인데, 이 9천년 문화 역사를 전수해 주신, 인류 역사의 태양과 같은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경기도 양주 천보산에서 오랜 세월을 은둔하면서 동방 역사 문화의 참모습을 전해주는 그날을 기다려 왔어요. 그리고 마침내 결의동맹을 한 3인에게 9천년 문화 역사를 전수하였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암과 범장과 『진역유기』를 쓴 이명이란 분 세 분이 동방의 숭고한 은둔 도사, 소전거사素佺居士를 만난 겁니다.

전佺은 우주광명과 하나 된 인간으로, ‘전도’는 불교의 원형입니다. 그러므로 ‘소전’은 ‘본래 하늘과 하나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호를 가진 분이 당대 최고 지성인들에게 문서를 전하면서 ‘우리 문화 역사의 핵심 정신이 이것이다.’ 하고 가르침을 내려준 거예요. 

그렇게 해서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쓰고, 그 4대 후손인 이맥이라는 분은 조선 연산군 중종 때 역사 기록관으로서 조선 왕조에서 은밀히 내려오는 모든 역사서를 읽고, 충청북도 괴산에 귀양 갔을 때 들었던 내용들을 집대성해서 「태백일사」 여덟 권을 묶어냅니다. 여기에 인류 창세 시대인 환국과 배달, 조선, 그리고 최초의 인류 문화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경」에 관한 내용, 그리고 고구려, 대진국, 고려 역사까지 담았어요. 

실로 이 책은 1,500년 전부터 근세조선까지 천년에 걸쳐 쓰였고, 400년 동안 숨겨졌던 책입니다. 「태백일사」라는 제목과 같이 ‘일사’, 숨겨진 역사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 때부터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는 왕명으로 『환단고기』에 나오는 책들을 가지고 있는 자는 국가에 보고하라고 하면서, ‘닉자처참匿者處斬’이라 하여 책을 숨겨놓은 자는 전부 목을 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조선왕조가 패망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우리 역사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태백일사」라고 제목을 붙인 것인데, 조선 왕조가 망한 다음 해에 「태백일사」를 갖고 있던 해학 이기가 뛰어난 제자 운초 계연수를 데리고 이것을 묶는 작업을 한 겁니다. 『환단고기』 서문인 범례를 보면 첫 문장이 “고기 인용은 일연씨가 처음 시작을 했는데 내가 이 다섯 권을 묶어서 『환단고기』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핵심 가르침, 삼일심법

『환단고기』의 핵심, 기본적인 주요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환단고기』는 환국, 배달, 조선 삼성조 시대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합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인간 마음의 구성원리, 인간이란 무엇이냐?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에 대한 답을 풀어 줍니다. 인간의 마음을 기성종교처럼 그냥 한마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이하게 인류 원형문화 언어로 삼일심법三一心法이라 합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삼일심법의 참된 가르침이 오직 이 책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인류 원형문화 시대인 환국과 배달 조선, 7천년 역사 문화 정신에 눈 뜰 때 인간 마음의 원형, 인간의 진정한 본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환국, 배달, 조선, 삼성조 역사 문화의 정신을 되찾을 때 우리는 본래의 참마음, 원 마인드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이 삼일심법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이걸 제대로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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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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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수 여동빈

증산도 2014. 11. 18. 12:37


여동빈 신선 이야기

 

  1 천지 안에 있는 말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느니라.
 2 세간에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말이 있나니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느니라.
 3 또 나의 일은 여동빈(呂洞賓)의 일과 같으니
 4 동빈이 사람들 중에서 인연 있는 자를 가려 장생술(長生術)을 전하려고 빗 장수로 변장하여 거리에서 외치기를 
 5 ‘이 빗으로 빗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고, 굽은 허리가 펴지고, 쇠한 기력이 왕성하여지고 
 6 늙은 얼굴이 다시 젊어져 불로장생하나니 이 빗 값이 천 냥이오.’ 하며 오랫동안 외쳐도 
 7 듣는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허탄하게 생각하여 믿지 아니하더라.
 8 이에 동빈이 그중 한 노파에게 시험하니 과연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는지라
 9 그제야 모든 사람이 다투어 사려고 모여드니 동빈이 그 때에 오색구름을 타고 홀연히 승천하였느니라.
10 간 뒤에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증산도 도전 道典 7:84:1∼10)

 

 

앞으로는 조화문명이 열린다. 
세속 인간정신으로는 알 수 없는 천지조화권이 펼쳐지는 조화문명이 열린다. 
이 문명을 여는 천상의 주역 중 한 분이 여동빈이다. 
태모님께서는 여동빈으로 하여금 “세계 창생들이 모두 갱소년 되게 하라.”고 하셨다. 
그는 당팔선(唐八仙) 중의 한 분으로 스승으로부터 도를 받고 신선이 되어 다시 그 도를 전해줄 사람을 찾아 1000여 년을 누볐다. 
인간으로의 삶과 신선으로의 삶을 통해 여동빈이 보여줬던 조화의 세계와 상제님 태모님께서 여동빈을 공사에 쓰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여동빈은 누구인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선을 꼽으라면 바로 여동빈(呂洞賓, 본명은 암巖, 호는 순양純陽)일 것이다. 그는 중국 도교의 정통파인 전진교(全眞敎)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흔히 여조(呂祖)라 불린다.
 
그는 종리권(鐘離權) 선인에게 도를 전해 받아 신선이 된 후, 11세기부터는 점차 세속에서 이름을 알리며 신선의 대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의 모습은 반드시 검을 등에 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검은 탐진, 애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진검(眞劍), 혹은 심검(心劍)이라 한다.
 
여동빈이 일반 민중의 두터운 신앙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민중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소원을 이뤄주기 때문이었다. “개가 여동빈을 보고 짖다니, 좋은 사람을 몰라본다”(狗咬呂洞濱, 不識好人心)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사람이 진심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하여 이루어준다’는 유구필응(有求必應)의 모범이었다. 
  
 
방랑 끝에 스승을 만나다

여동빈은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14년(798년)에 포주(浦州) 영락현(永樂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가 벼슬을 지냈으니 당시로서는 명문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눈으로 보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대로 말하면 글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 20에 부친의 명을 따라 유교위(劉校尉)의 딸과 혼인했는데 비록 결혼은 했으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후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과거급제를 바랐으나 2번의 진사시험에 낙방한 후 강주(江州)에서 방랑하였다. 세상을 떠돌며 그가 평생에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번의 시험과정을 통과하다

62세에 이르러 또 다시 장안(長安)에 과거를 치르러 갔다가 술집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급제하여 부모 마음을 위로할 날 언제이고, 득도하여 내 마음을 달랠 날은 언제련가?” 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늙은 도사가 웃으며 묻기를 “젊은이, 출세할 뜻이 있는가?” 하였다. 
  
그 도사는 푸른 도건에 흰옷을 입고 허리에 큰 표주박을 차고 있었다. 이윽고 벽에 시 한 수를 썼는데 그 시정이 표연히 세속을 떠나 있었다. 여동빈은 깜짝 놀라 절을 올리고 성씨를 물었다. 도사가 말하길 “내 성은 종리(鐘離)요 이름은 권(權), 자는 운방(雲房)이네.” 하였다.
  
그가 바로 당팔선 중의 한 사람으로 훗날 여동빈의 스승이 되는 종리권인데, 이것이 여동빈과 종리권의 첫만남이었다. 종리권은 한나라 때 사람이므로 이미 500세도 더 된 신선이었다. 여동빈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선도 배우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종리권은 여동빈의 속세의 인연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 뒷날을 기약하고 나는 듯 가버렸다.
  
이후 종리권은 여동빈이 도를 받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를 보기 위해 10가지 관문의 혹독한 시험을 치르게 한다. 이것이 ‘운방십시동빈(雲房十試洞賓)’의 일화인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 번째는 여동빈이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집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슬퍼함 없이 다만 후하게 갖추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또 하나는, 정월 초하루에 거지가 문에 기대어 구걸하기에 돈을 주었다. 그런데 돈이 적다고 짜증을 내기에 여동빈이 더 주었는데도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으며 함부로 꾸짖었다. 그럼에도 여동빈이 예의를 갖추어 사의를 표하자 거지가 웃으며 가버렸다.
  
그리고 하루는 교외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 있는 물건들을 도적들이 싹 쓸어가 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동빈은 성내지 않았다. 이후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이 없어 밭을 갈아 자급하는데 홀연 호미 밑에서 금 수십 덩이가 나왔다. 그러나 그는 급히 덮어버리고 이를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으로, 밤에 야차(夜叉) 수십이 나타나서 사형수를 쥐어틀어 피와 살이 엉기었다. 그러자 사형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전세에 나를 죽였으니 급히 내 목숨을 살려내라.”고 했다. 이에 동빈이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보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려 하자 홀연 공중에서 꾸짖는 소리가 나더니 귀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종리권이 나타나 여동빈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속세의 마음은 없어지기 어렵고, 선인의 재주는 만나기가 어렵다. 내가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남이 나를 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네.” 하였다. 
  
스승이 제자를 찾는 것은 오히려 제자가 스승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니 도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가를 느끼게 해주는 말이다.
  
종리권이 계속해서 이르기를 “내가 열 번을 시험했으나 모두 꺾이지 않으니 그대는 반드시 득도할 것이네. 세상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하여 3,000의 공(功)을 꽉 채워 800행(行)을 원만히 하면 바야흐로 신선이 될 것이네.” 하였다. 여동빈의 스승은 신선의 길을 감에 있어 모든 고난과 고통을 뛰어넘어 자신의 생명을 완성시키는 것[行]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함께 사는 세상사람을 구제하는 것[功]이 몇 배나 소중한 과정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리고 “세간에 살며 공행을 닦은 후에 나와 같이 살도록 하게.” 했다. 그러자 여동빈이 말하기를 “저의 뜻은 선생님과 다릅니다. 반드시 중생을 모두 구제하고 떳떳이 상계에 오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종리권은 여동빈이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도를 깨닫는 신선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여동빈이 원하던 바는 단순히 득도하여 자신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을 등지지 않은 도세(度世)의 삶

대개 사람이 득도를 하면 답답한 몸을 벗고 천상으로 오르고자 한다. 하지만 세속의 오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중생을 구하는 큰 보살과 같은 삶을 산 신선들도 많이 있었다. 도교에서는 속세를 초탈하여 신선의 경지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을 ‘도세(度世)’한다고 한다. 
  
여동빈은 종리권이 떠난 후 73세에 대도를 원만히 이루고 도세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여동빈은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신선의 재목을 고르라는 선선사(選仙史)의 관직을 받고, 인간 세상에서 오래도록 활동을 하게 되었다. 훗날 여동빈은 인연있는 사람을 찾아 금단(金丹)의 도로써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선맥을 전한다. 지금껏 신선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은 한사람이라도 더 인간을 세속에서 건져내어 선맥을 전수하려는 그의 애틋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 수시로 모습을 나타내어서 때로는 걸식하는 사람으로, 때로는 늙고 쇠잔한 영감으로, 때로는 누추한 중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가름질하고 그의 공덕을 헤아린 후에 도를 전하였다.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빗장수 이야기(道典 7편 84장)도 그 중 한 일화이다.
 

송대에 이르러 여동빈이 무창(武昌)의 천심교(天心橋)에서 해진 나무빗을 팔고 있었다. 값을 1000전이라 부르니 여러 달이 흘러도 팔리지 않았다. 동빈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다 뛰어난 의견이 없으니 어찌 더불어 도를 이야기하겠는가?” 하였다. 그때 병든 노파가 구걸하며 다니는 것을 보고 불러서, 빗으로 할머니의 머리를 고르니 긴 머리가 땅에 늘어지고, 작은 조개같은 쪽머리가 높은 소반처럼 되며 모습이 변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비로소 신이한 일로 여기고 다투어 빗을 사고자 하니, “보아도 모르고, 알아도 못 본다.” 하고는 빗을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러자 빗은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노파와 빗장수가 모두 사라지니,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여동빈임을 알았다.
  
한번은 여동빈이 기름장사로 변신하여 기름을 팔면서 악양(岳陽)에 갔다. 기름을 사는 사람들마다 더 달라고 요구했다. 다만 한 노파만 기름을 사면서 더 달라고 하지 않았다. 동빈은 그녀가 신선공부를 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제도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가서 한 줌의 쌀을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당신은 이 우물물을 팔면 부자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노파는 여동빈이 간 후 우물 속의 물이 전부 미주(美酒)로 변한 것을 알았다. 그 노파는 우물 속의 술을 팔아 일 년 후에 부자가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여동빈은 그 노파 집에 갔는데 마침 노파가 없고 그녀의 아들이 집에 있었다. 여동빈이 “당신들 집은 지난 일 년 동안 술을 팔아 부자가 되었는데, 느낌이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그 노파의 아들은 “좋기는 좋은데 단지 돼지 먹일 술 찌꺼기가 없어서 힘들다.”고 하였다. 
  
여동빈이 탄식하면서 ‘인심이 탐욕스러워 부끄러움도 모른다.’고 하면서 우물 속의 쌀을 거두어 들였다. 노파는 외출에서 돌아와서 우물 속의 술이 모두 물로 변한 것을 알았다. ‘사람의 욕심은 이렇게도 끝이 없는가?’ 여동빈은 이렇게 사람들에 실망을 하고, 또 세상 속에서 미친 사람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천지를 집 삼아 세상에 동출우돌하는 도세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도를 받아 신선의 길을 간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의 자취는 당, 북, 남송, 원, 명, 청조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이 훨씬 넘게 역사에 실려 있다. 
  
 
중국 도교를 일으킨 여동빈의 가르침

그러면 그가 중국 도교1 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자.
흔히 도교의 뿌리를 노자로 생각하지만, 노자의 철학과는 별도로 고조선에 인접한 연·제나라를 중심으로 신선사상이 넓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는 주나라의 제후로서 제나라 왕이 된 강태공이 삼신상제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일월을 받드는 제사문화2 를 체계화하여 보급한 까닭이다. 
  
이런 신선에 대한 이야기들은 전국 말기에 퍼진 방사술(方士術)과 크게 합쳐져 마침내 단약을 먹어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것을 전업으로 삼는 방사(方士)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한대에 이르러서는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3를 필두로 선도(仙道)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후 종리권과 여동빈에 의해서 내단법(內丹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이른바 ‘종려금단도(鐘呂金丹道)’4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성명쌍수(性命雙修)를 통한 내단의 성취만이 사람이 신선으로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광물질을 복용하는 것이나 방중술과 같은 것은 하찮게 취급되어 갔다.
  
여동빈의 가르침은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에 잘 실려 있다. 여조전서(呂祖全書) 서문에 여동빈의 가르침에 대해 말하기를 “무릇 단종(丹宗)의 비밀스런 가르침은 본래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 억지로 말로 하자면 심성을 지극히 양성하는데 있으니, 음양의 운용을 시험하고 도덕의 묘함을 추구하며 천지조화에 통하고 생사의 진리를 깨우치고, 자연의 법칙에 순종할 따름이다.”고 하였다.
  
여동빈이 송대에 왕중양(王中陽)에게 도를 전한 이래, 왕중양이 개척한 전진교(全眞敎) 교단은 마단양, 구처기(일명 장춘진인長春眞人) 등에게 전해진 후 원·명대에는 도교의 주류가 되었다.
  
 
불로장생 시대를 여는 일에 역사하다

여동빈 선인은 세상의 온갖 고난을 두루 겪고, 다시 3,000 공덕을 가득히 행하여 진선(眞仙)에 올랐다. 그러나 다시 커다란 자비심을 내어 모든 창생과 성인될 씨앗이 있는 사람들을 제도하기를 서원하였다. 
  
세상을 등지고 은둔했던 다른 신선들과 달리 세상을 제도하기 위해 바쁘게 뛴 그의 활동은 역사 속에 길이 빛나고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천하 만민에게 영원한 생명을 전해주고자 신선의 몸으로 대륙을 누볐던 여동빈의 천하사 정신을 높이 사시어, 그의 조화법으로 인류의 불로장생의 신문명을 개벽시키기를 명하셨다. 
  
여동빈에 관한 도전 말씀을 살펴보자.
  
  천상 여동빈 선관(仙官)의 조화권능으로 머리 빗겨 갱소년(更少年)시켜 주옵소서.(증산도 도전 道典 11:210)
  
  앞세상에는 흰머리가 나지 않게 할 것이며 허리도 굽지 않게 하리라.(증산도 도전 道典 11:298)
 
 
여동빈 선인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천상의 생명불을 인류에게 전수하기 위해서 뛰고 있을 것이다.
  
선천문명과 후천문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조화주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는 “선천은 기계선경(機械仙境)이요, 후천은 조화선경(造化仙境)이니라.”(道典 7:8)고 하셨다. 인류문명은 종교, 철학, 과학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영생(永生), 조화(造化)를 꿈꾼다. 그러나 선천에는 물질문명을 발전시켜오는 과정에서 생명의 뿌리, 정신의 뿌리를 잃어버리면서 반쪽의 문명을 발달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만물이 하나로 돌아가는 후천에는 물질문명이 낳는 모든 상극대립을 조화로써 다스리는 조화문명이 활짝 열린다.
  
조화문명은 어떻게 열리는가? 
인간이 천지의 마음을 보고 만물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만사지(萬事知) 문화를 바탕으로 해서 열린다. 
상제님은 천지조화의 주체인 상제님을 올곧게 모시어 천지의 성신(聖神)을 받는 시천주(侍天主) 신앙으로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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