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의 치라 불리우는 위징과 당태종

난세에 등장한 불세출의 영웅, 위징
중국 역사에 나오는 강직한 신하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위징”이란 신하가 있었다. 그는 유능한 황제 당나라 태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위징(魏徵, 580∼643)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 학자로서 자는 현성(玄成),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그는 중국 산동성 곡성에서 출생하였다.
 



수(隋)나라 말 혼란기에 이밀(李密)의 군대에 참가하였으나 곧 당 고조(唐高祖)에게 귀순하여 고조(高祖)의 장자 이건성(李建成)의 유력한 측근이 되었다. 황태자 건성이 아우 세민(世民: 후의 太宗)과의 경쟁에서 패하였으나 위징의 인격에 끌린 태종(太宗)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한 후 재상(宰相)으로 중용되었다. 특히 굽힐 줄 모르는 직간(直諫)으로 황제를 보필한 위징은 주(周), 수, 오대(五代) 등의 정사편찬(正史編纂) 사업과 『유례(類禮』, 『군서치요(群書治要)』등의 편찬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관중, 제갈공명의 맥을 이어 중국사에서 명재상의 전통을 계승한 특출한 인물의 하나가 ‘위징’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징은 당(唐)의 창업에 일등공신인 이세민(李世民)이 황제가 된 후 제국을 경영[守成]하는데도 성공하도록 힘쓴 명재상이다.
 
수(隋: 581∼619)나라 말의 혼란기에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인 이연(李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양제(煬帝)가 암살되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공제(恭帝)를 폐하고 당(唐: 618∼907)나라를 창업한다. 626년 고조(高祖)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태종(太宗)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외정(外征)을 통해 국토를 넓히는 한편, 제도적으로 민생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학문·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치세(治世)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盛世)를 이룩했다. 
 
당태종의 시대(서기 627∼649)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하여 중국사에서 길이 추앙되는 황금시대를 맞이하는데 위징은 그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정관의 치’라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좌복야(左僕射) 두여회(杜如晦), 기획력이 빼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 강직한 대부(大夫) 위징(魏徵) 등과 같은 많은 현신(賢臣)들이 선정(善政)에 힘쓰는 태종(太宗)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창업과 수성 중에 어느 쪽이 더 어렵냐”고 질문을 했다.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옵니다”고 한다. 그러나 위징은 대답이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 만큼 수성(守成)이 어렵습니다”라고 아뢴다.
 
그러자 태종이 말을 했다. “방공(房公)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驕奢: 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禍亂)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守成)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守成)에 힘쓸까 하오”라고 말한다. 
 
이처럼 명민한 군주 밑에 위징과 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었기에 당태종의 치적은 중국사에서 『논어』, 『맹자』, 『춘추좌전』, 『서경』, 『자치통감』과 더불어 제왕학(宰王學)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통해 치세의 법방을 후대에 전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정관정요』는 바로 당태종과 위징의 치국문답(治國問答)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원정에 패배한 당태종이 위징이 살았다면 원정을 말렸을 것이라며 그의 무덤을 돌보고 유족을 후대한 것만 보아도 위징의 진면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태종 시대에는 무엇보다 과거제도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전통 명문과 한미한 집안(寒門), 그리고 서족(庶族)까지 포함하여 신구(新舊) 세력의 조화 속에 능력 위주의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위징은 원래 태종과 왕권을 다툰 태종의 형 이건성(李建成)의 전략가로서 태종을 죽여야 한다던 인물이 었으나 추후 태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태종의 시대에는 중앙관제, 토지제도, 세금제도, 병제 등이 637년 율령격식(律令格式)으로 정비되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되었고 그 중심에 위징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시된 것은 강력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완성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을 천하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토대는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문화·군사력에 기초한다. 그것은 기원전 2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말까지 2천년의 역사를 갖지만 그 토대는 한무제(漢武帝) 시대에 다져지고 당태종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위징은 중화체제라는 동아시아의 중국패권체제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역량있는 건설자였고, 유장한 중국사에서 명재상으로서 태평성대의 전통을 이은 걸출한 영웅이었다.
 
 
강직한 위징 그리고 지혜로운 황후가 성군聖君을 만들다
하루는 황제가 조회(朝會)를 마치고 들어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황후에게 말하기를 “그 촌놈을 죽여버려야지…” 하면서 단칼로 목을 칠 것 같은 위세를 보이기에, “왜 그러십니까?” 하고 황후가 물었다. 그러자 당태종은 “위징이란 놈이 조회 때마다 나를 욕보인단 말이요.”라고 말한다.
 
황후가 듣고 물러갔다가 조복을 갈아입고 황실에 들어와 황제께 넙죽 절을 한다. 황제가 의아해서 물으니 황후의 말이 이러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君明臣直]하였습니다. 이제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이 드러나는지라 경하 올리옵니다.” 황제가 황후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화를 풀고 기뻐하며 직언하는 위징의 모습을 되새겼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참으로 많다. 먼저 위징이란 신하의 사람 됨됨이이다.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임금에게 ‘죽이면 죽으리다.’라는 심정으로 국정의 흐름을 바르게 직언한 위징의 정직함을 눈여겨 볼 수 있다. 
 
비록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될지라도 정사에 옳은 길이라고 판단이 설 때 옳고 그름을 제시할 줄 아는 충신을 둔 임금은 복 있는 사람일 것이다. 또한 자신의 남편이자 황제인 당태종을 지혜롭게 내조한 황후의 덕성을 유념해서 살펴보면, 황후의 지혜가 국정을 바로하고 성군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 황제 태종이 훌륭한 황후를 가진 것이 두 번째의 복인 것이다. 
 
통치자의 첫 번째 자질은 사람과 사물을 바로 보는 바른 판단력이다. 혀끝을 달게 하는 사탕발림하는 신하는 충신으로 끌어안고 병이 치료되는 쓴 약을 올리는 신하에게는 목을 쳐 내버리는 현대판 황제들이 지금도 이 땅에 얼마나 즐비한가! 비단 국가의 통치자에게만 적용된 말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 회사, 공장, 군대, 학계, 나아가서는 종교계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 그래서 수레가 잘 굴러가지 않는 것이다. 직언 하는 충언(忠言)을 누르기 위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은 세상물정도 알고 나름대로 충직한 사람이라 말하며, 정작 실상을 정확히 지적하여 보고하는 부하간부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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