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도기 137(2007)년 4월 27일(金) 금요진리 교육 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윤창렬 _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오늘 이 시간에는 살아서는 충의와 정의의 표상이었고, 돌아가셔서는 정의의 신이 되어 불의를 응징하고 복마를 물리치는 관운장, 즉 관성제군의 삶과 그 분의 천지공사 속에서의 역할, 그리고 운장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반드시 운장주를 읽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성공하는 일꾼의 세 가지 상
 
먼저 도전 2편 43장을 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온 천하가 가을 운수의 시작으로 들어서고 있느니라. 내가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 후천을 개벽하고 천하의 선악을 심판하여 후천선경의 무량대운을 열려 하나니 너희들은 오직 정의와 일심에 힘써 만세의 큰 복을 구하라. 
 
이 때는 천지성공 시대니라. 천지신명이 나의 명을 받들어 가을 운의 대의로써 불의를 숙청하고 의로운 사람을 은밀히 도와주나니 악한 자는 가을에 지는 낙엽같이 떨어져 멸망할 것이요, 참된 자는 온갖 과실이 가을에 결실함과 같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만물의 생명이 다 새로워지고 만복이 다시 시작되느니라 (道典 2:43)
 
“너희들은 오직 정의와 일심에 힘써 만세의 큰 복을 구하라.”
 
이 정의(正義)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나는 천지의 모든 보배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의로움을 가장 으뜸가는 보배로 삼느니라’(4:15)는 말씀을 내려주셨습니다. 
 
위 성구에서 상제님께서는 이때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인데,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심법을 가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상제님의 도문에서 성공하느냐 아니면 낙오되느냐 하는 것은 돈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요, 권력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요, ‘나는 오직 마음만 볼 뿐이니라’는 상제님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심법에 달려있습니다. 
 
그 성공하는 마음의 첫 번째가 정의로운 마음입니다. 상제님 도문에 입도하면 그때부터는 진리에 입각해서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의’란 무엇일까요? 
 
유가에서는 ‘義(의)는 의야(宜也)라’,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일, 그것을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상제님 도문에서 진리를 올바르게 신앙하는 것, 지도자님을 바르게 보필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의입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를 판단했을 때, 옳은 일이라면 정의로운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일, 그것이 의이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이때는 정의로운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고, 만세의 큰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상제님 도문에서 성공하는 일꾼의 모습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정의로운 일꾼, 두 번째는 참된 일꾼입니다. 상제님께서 ‘참된 자는 큰 열매를 맺어 운수가 길이 창성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할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일심하는 일꾼입니다. 상제님 말씀에도 ‘오직 정의와 일심에 힘써 만세의 큰 복을 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일심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상제님 도문에 들어와서 시작하는 그날부터 매듭짓는 그날까지 변치 않는 마음, 그것을 일심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심을 가진 사람만이 상제님 도문에서 성공할 수 있고, 만세의 큰 복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의롭고 참되고 일심을 가지면, 천지성공시대에 우리 도생들도 상제님 도문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정의의 화신, 관운장
 
그럼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충의로운 분, ‘정의의 화신’이신 관운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전 4편 15장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운장은 병마대권을 맡아 성제군의 열에 서게 되었나니 운장이 오늘과 같이 된 것은 재주와 지략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의리 때문이니라. 천지간에 의로움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은 없느니라. 하늘이 하지 못할 바가 없지마는 오직 의로운 사람에게만은 못 하는 바가 있느니라. 사람이 의로운 말을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천지도 감동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천지의 모든 보배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의로움을 가장 으뜸가는 보배로 삼느니라. 나는 추상같은 절개와 태양같이 뜨거운 충의를 사랑하노라. (道典 4:15)
 
관운장의 일생에 대해서는 『삼국지』를 통해 누구든지 기본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관운장께서 언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A.D.160(庚子)년에 태어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219년에 맥성에서 오나라 손권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우리 나이로 60세를 사셨고, 슬하에는 관평, 관흥, 관색 세 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는 관평이 양자로 나오는데, 다른 책에는 적자라고 얘기하는 곳도 많이 있습니다. 
 
관운장의 원 고향은 산서성입니다. 중국의 황하가 진섬협곡을 내려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흐르는데, 꺾어지는 곳에 운성시가 있습니다. 거기가 관성제군의 고향인데, 그 곳에 중국에서 가장 큰 관제묘가 있습니다. 
 
관운장께서는 산서성에서 태어나서 하북성, 북경 바로 밑에 있는 지금의 탁주시로 갑니다. 유비의 고향도 탁주이고, 장비의 고향도 탁주입니다. 여기서 세 사람이 만나 도원결의를 하게 됩니다. 이후 관운장은 결의형제한 유비를 위해 일생을 아주 정의롭게 살다 가십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운장의 정의로운 삶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유비와 장비가 소패에서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하비성에서 유비의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보호하고 있던 관운장도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고 쫓겨 가게 되면서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조조의 부하장수이면서 관운장과 친했던 장요가 찾아와 자결을 막으며 그 이유에 대해 세 가지의 불가론을 얘기해 줍니다. 
 
첫째는 도원결의에서 삼형제가 한날한시에 죽기로 했는데 여기서 자결하면 그 결의를 져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유비가 두 형수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당신에게 의탁시켰는데 자결을 하면 두 사람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그리고 셋째는 지금 자결하는 것은 한(漢) 왕실을 받들어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겠다는 대망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하며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자 관운장도 세 가지의 조건을 걸고 투항을 합니다. 
 
첫째로 자신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漢)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이며, 둘째 두 형수님의 생명을 보존해줘야 하며, 마지막으로 형님이신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떠날 것이라는 것. 그것을 허락한다면 항복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투항을 하자, 조조는 자기 밑에 관운장을 데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온갖 환대를 다합니다. 3일, 5일마다 연회를 베풀어주고, 벼슬도 주고, 적토마도 주고, 금포도 주면서 마음을 뺏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관운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유비가 원소 밑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적토마를 타고 떠나게 됩니다.
 
조조 아래 있을 때 관운장이 의리를 지킨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투항 당시 관운장은 무명으로 만든 낡은 전포를 입고 있었어요. 그걸 보고 조조가 비단으로 만든 새 전포를 줍니다. 그러자 관운장은 새 전포를 안에 입고, 유비가 준 낡은 전포를 다시 겉에 입으면서 유비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적토마를 줍니다. 그런데 전포를 줬을 때는 절을 안했는데, 적토마를 주니까 절을 합니다. 그래서 ‘왜 절을 하느냐?’ 하고 물으니 ‘이 말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니 적토마를 타면 하루 만에 우리 형님을 만나러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유비의 편지를 받고나서 유비한테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조가 관운장이 도착하기 전에 유비가 죽었으면 어떻게 할꺼냐고 물으니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고 나서 관운장은 조조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다 봉해서 두고, 오직 적토마만 타고서 두 형수를 호위해서 다섯 관문, 오관을 돌파해서 유비를 찾아갑니다. 
 


 
 
 정의와 정의로운 삶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는 우리 양심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주자도 의에 대해 정의내리기를, ‘의자(義者)는 심지제(心之制)며, 사지의야(事之宜也)라’ 의라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면서 억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의와 의에 대해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는데, 양심에 비추어서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옳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하는 것, 그것이 또한 정의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을 갑니다. 그때 관운장은 자신이 가서 조조를 잡겠다며 공명에게 자기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조조를 살려주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군령장까지 써놓고 화용도로 갑니다. 하지만 관운장은 과거에 조조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결국 조조를 살려주게 됩니다. 
 
불의를 극복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의를 실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관운장은 맥성에서 손권에게 잡혀 목이 잘리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옥은 깨져도 그 빛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죽더라도 나의 의로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운장에게 내려진 시호
 
관운장께서 돌아가신 뒤, 역대 중국의 많은 임금들이 관운장에게 시호를 내리고 벼슬을 높여주었습니다. 관운장이 살아있을 때는 한수정후 전장군이었습니다. 한수정후는 헌제가 내려주었고, 전장군은 유비가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시호는 장목후((壯繆侯)였습니다. 수나라 환(開皇) 2년에는 충혜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송나라 휘종은 무안왕 숭령진군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증산도 도전』에 관운장에 대한 측주(도전 원전 439쪽)를 보면 ‘만력 42년(1614) 제호(帝號)를 받으며 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 천존 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 遠鎭 天尊 關聖帝君)’이라는 봉호를 받게 됩니다. 
 
뜻을 살펴보면, 삼계복마대제, 천지인 하늘땅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대제이면서, 그 신령스러운 위엄으로 원진(遠鎭), 아주 멀리까지 가서 모든 마와 척신을 진압하는, 천존이신 관성제군이라는 뜻입니다. ‘삼계복마대제 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이라는 봉호를 만력제가 내리고, 그 뒤 청나라 때도 봉호를 계속 높여줍니다. 
 
이런 걸 보면 신명세계에서 상제님께서 관운장에게 봉호를 주면, 인간세계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어 관운장에게 계속 봉호를 주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지공사에 관운장을 쓰심
 
다음은 관운장의 천지공사에서의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4월에 신원일을 데리고 태인 관왕묘 제원(關王廟 祭員) 신경원(辛京元)의 집에 머무르실 때 하루는 원일, 경원과 함께 관왕묘에 가시어 관운장(關雲長)에게 천명을 내리시며 공사를 행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동양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약소국을 건지려면 서양 열강 사이에 싸움을 일으켜야 하리라.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극진한 공대를 받았으니 그 보답으로 당연히 공사에 진력 협조함이 옳으리라.”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며 관운장을 초혼하시니 경원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이상히 생각하니라.
 
이 때 자못 엄숙한 가운데 상제님께서 세계대세의 위급함을 설하시고 서양에 가서 대전쟁을 일으키라는 천명을 내리시거늘 관운장이 감히 거역할 수는 없으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는지라. 상제님께서 노기를 띠시며 “때가 때이니만큼 네가 나서야 하나니 속히 나의 명을 받들라. 네가 언제까지 옥경삼문(玉京三門)의 수문장 노릇이나 하려느냐!” 하고 엄중히 꾸짖으시니라. 관운장이 그래도 대답을 아니하매 상제님께서 관운장의 수염을 휙 잡아당기시고 옷을 찢어 버리시니 이 때 조상(彫像)에서 삼각수(三角鬚) 한 갈래가 바닥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하룻밤을 지새시며 ‘이놈, 저놈’ 하고 불호령을 내리시거늘 관운장이 마침내 굴복하고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서양으로 가니라. 이후에 김경학(金京學), 최창조(崔昌祚), 최내경(崔乃敬), 최덕겸(崔德兼) 등 태인 사람들이 상제님의 면모를 숭배하여 상제님을 따르니라.
 
그 뒤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김성연(金成淵)과 함께 말을 타고 관왕묘에 이르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냈는데 여기서 무슨 제사를 지내느냐.” 하시고 성냥을 그어 관왕묘에 불을 지르려 하시다가 성연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시니라. (道典 5:166:1 15)
 
상제님께서 관왕묘에 가서 공사를 보시는데, 동양에서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서양의 제국주의들끼리 싸움을 붙입니다. 서양의 제국주의들끼리 싸우면, 자기들 집안일이 바쁘기 때문에 동양이나 아프리카 같은 약소국들을 침략할 여력이 없게 되죠. 그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입니다. 
 
관운장을 주벽신으로 삼아 모든 우리 민족의 신명들을 서양으로 건너보내서 대전쟁, 난리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관운장을 중심으로 동양의 그리고 조선의 신명들을 서양으로 내보내어 서양에서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도록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처음엔 관운장이 명령을 듣지 않아요. 왜냐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 내키지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상제님께서 노기를 띠시며 엄중히 꾸짖으십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상제님께서 수염을 잡아당기고 옷을 찢으십니다. 그때 태인 관왕묘에 있는 관운장 조상(彫像)의 수염이 두 자(60cm)로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삼각수 중 한 갈래가 뚝 떨어졌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옥경문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제가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 『관성제군 명성경』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어요. 관운장이 직접 내려준 경전이라고 하는데, 너무나 잘된 글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나에 대한 경전은 없다고 하면서 관운장이 맥성에 있는 옥천사의 스님에게 나타나서 이 경전을 전해줬다고 합니다. 맥성은 관운장이 최후에 사로잡힌 곳인데 지금의 호북성 당양시입니다. 
 
그 『관성제군 명성경』에 보면, ‘옥황상제께서 나를 옥경삼문의 수문장으로 임명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삼문에 대한 주를 보면, 옥경의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데 북쪽은 옥황상제님께서 앉아계시기 때문에 항상 닫혀있고, 동문과 남문과 서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관운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옥경 삼문이라는 것은 동문, 서문, 남문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삼문’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명성경』에도 ‘옥황상제께서 나에게 삼문을 관장하게 하셔서’ 라는 구절이 나와 있는 걸 보고, 이건 진짜 관운장께서 세상에 전해준 경전같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상제님께서 천지공사 속에서 동양에서 서양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제국주의끼리 싸움을 붙이신 것이 1, 2차 세계대전입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하는, 제국주의로써 제국주의를 제압하는 거죠. 그 공사에 관성제군을 쓰신 것입니다. 
 
 
 
 동남풍과 운장주
 
다음은 운장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유년 봄에 와룡리에 사는 황응종이 누런 암탉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상제님께 올리니 말씀하시기를 “황계(黃鷄)가 동하니 필시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조짐이라. 어서 관운장을 불러 화용도(華容道)의 목을 단단히 지키게 하리라.” 하시고 일어서시어 멀리 청도원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시니 문득 동남풍(東南風)이 일어나니라. 
 
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형렬에게 그 닭을 삶아 오게 하시어 성도들과 나누어 잡수신 뒤에 운장주(雲長呪)를 써 주시니 이러하니라. 
 
운장주雲長呪
天下英雄關雲長천하영웅관운장 依幕處의막처 謹請天地八位諸將근청천지팔위제장
六丁六甲육정육갑 六丙六乙육병육을 所率諸將소솔제장 一別屛營邪鬼일별병영사귀
唵唵口急口急엄엄급급 如律令여율령 娑婆訶사파하
 
또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대차력주(大借力呪)니라." 하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한 번 보아 외우게 하시니 이 때 참석한 사람은 형렬, 공숙, 찬명, 자현, 갑칠, 송환, 광찬, 응종 등이더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운장주를 많이 읽으라." 하시니라.(道典 5:363:1 9)
 
 
기유년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마치는 해입니다. 따라서 개벽과 아주 가까운 시점에 벌어질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와룡리에 사는 황응종이 누런 암탉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상제님께 올립니다. 기유년은 닭띠 해인데 닭을 가지고 공사를 보시는 것입니다. 
 
‘황계가 동하니 필시 적벽대전의 조짐이라.’ 그런데 이 황계에 대한 이야기는 『도전』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도전』 6편 73장에도 ‘황계성이 죽지 털면 판밖 소식 이르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도전』 6편 137장에는 ‘봉명일창에 천하계명이라.’ 봉황새가 한번 울매 천하의 닭이 모두 울게 된다는 등 닭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닭을 가져온 주인공 황응종 성도가 일꾼의 표상으로 이 공사에 나옵니다. 황계라는 것은 상제님의 일꾼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서 관운장을 불러 화용도의 목을 단단히 지키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것은 전쟁이 났을 때 거기에서 일꾼들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일어서시어 멀리 청도원 쪽을 바라보시며 손을 흔드시니 문득 동남풍이 일어나니라.’ 동남풍에 관한 내용은 도전에 많이 나오는데 이 동남풍의 실체에 대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A.D.208년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과 조조가 장강(양자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제갈공명이 남병산에 단을 쌓고 49일 동안 기도를 해서 동남풍을 빌리게 됩니다. 
 
그런데 동남풍이라는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삼국지』를 많이 보고, 또 한의학 강의를 하다 보니 동남풍에 대해 어떤 깨달음이 왔어요. 동남풍은 봄여름에 부는 바람이에요. 그런데 그때가 11월입니다. 동남풍이 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도를 해서 바람을 빌어 오게 됩니다. 
 
그런데 한의학에서 계절과 반대되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대병(大病)이 유행한다고 말합니다. 봄에는 동풍이 불어야 되는데 서풍이 불면 병이 생기는 것이고, 여름에는 남풍이 불어야 되는데 북풍이 불면 그때도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도전 5편 291장을 보면, 
상제님께서 금산사 서전에서 손사풍을 불리시며 
"손사풍은 봄에 부는 것이나 나는 동지섣달에도 손사풍을 일으켜 병을 내놓느니라." 
"내가 이곳에 무명악질(無名惡疾)을 가진 괴질신장들을 주둔시켰나니 신장들이 움직이면 전 세계에 병이 일어나리라."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얘기입니다. 동남풍(손사풍)이 봄여름에 불면 병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겨울에 동남풍이 불면 괴질이 오는 것입니다. 
 
한의학에서는 계절과 반대되는 바람은 적풍(賊風)이라고 합니다. 적풍은 질병을 가져옵니다. 괴질, 큰 질병을 몰고 옵니다. 『황제내경』에서도 적풍이 오면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피하는 것처럼 피해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도운에서 동남풍은 적풍으로 오는 것입니다. 
 
다시 성구를 보면, ‘황계’를 썼다는 것은 일꾼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남풍을 불리십니다. 이것은 거의 준 개벽상황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형렬에게 그 닭을 삶아오게 하시어 성도들과 나누어 잡수십니다. 
 
이것은 모든 일꾼들에게 기운을 넣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운장주를 써주십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개벽상황에서 운장주를 통해 개벽을 극복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운장주의 뜻
 
그러면 운장주를 풀이해 보겠습니다. 운장주는 46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天下英雄關雲長천하영웅관운장 依幕處의막처 謹請天地八位諸將근청천지팔위제장
 
천하의 으뜸가는 영웅이신 관운장님이시여. 의막은 장수가 머무는 막사를 얘기합니다. 
야전에 머물고 계신 관운장님께 근청, 삼가 청하옵나이다. 누구를 청하느냐? 천지팔위제장과 육정육갑육병육을의 소솔제장을 삼가 청하옵나이다. 천지는 대팔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동서남북 사정방(四正方)과 그 사이사이의 사간방(四間方)을 관장하는 장수가 천지팔위제장입니다. 
 
六丁六甲육정육갑 六丙六乙육병육을 所率諸將소솔제장 一別屛營邪鬼일별병영사귀
 
육정육갑육병육을의 소솔제장에서 육정육갑육병육을이라는 것은 24명의 장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가 10개인데, 갑 병 무 경 임을 양간(陽干)이라 하고, 을 정 기 신 계를 음간(陰干)이라 합니다. 
 
그리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12지지에서는 자 인 진 오 신 술을 양지(陽支)라 하고, 축 묘 사 미 유 해를 음지(陰支)라고 얘기합니다. 
 
60갑자에서 양간은 양지하고만 결합하고, 음간은 음지하고만 결합합니다. 
 
따라서 육정신(六丁神)이라면, 육정은 음이기 때문에 축 묘 사 미 유 해하고만 결합하여 정축신 정묘신 정사신 정미신 정유신 정해신. 이렇게 여섯 신장이 육정신이 됩니다. 
 
그리고 육갑신장(六甲神將)이라고 하면 갑이라는 것이 양간이기 때문에 자 인 진 오 신 술하고 결합하여 갑자신, 갑인신, 갑진신, 갑오신, 갑신신, 갑술신 여섯 신장입니다. 
 
특히 개벽주에서는 육정육갑신장을 둔갑신장이라고 얘기합니다. 육정육갑신장은 한나라 때부터 유명했던 신장입니다. 도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육정육갑신장을 불러서 모든 잡귀들을 몰아내고 나서 비로소 초제를 지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육정육갑신은 본래 진무대제의 수하신으로 중국에서는 진무전에 진무대제의 초상을 만들어놓고, 육정신과 육갑신의 12명의 신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정신은 전부 여신의 모습으로 모셔놓았고, 육갑신은 남신의 장군으로 모셔놓았습니다. 그런데 육정신에도 보면 남자 이름도 있고 하여 후세에는 남녀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게 됩니다. 
 
어쨌든 육정신은 음신이고, 육갑신은 양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병신, 육을신까지 총 24명의 신장을 청하며, 또한 장수들이 오면 거기에 딸린 장수와 군사들이 다 따라옵니다. 소솔제장, 거느리는 바의 모든 장수들까지를 삼가 청하옵나이다 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관운장주를 한번 읽으면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천상의 천병들이 호위를 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관운장을 한번 보기만 해도 모든 복마와 척신들이 그 순간에 다 기가 죽을 텐데, 이런 수수 십만 명의 천병들이 오기 때문에 운장주의 위력을 상제님께서는 ‘대차력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천지의 기운을 받는 주문인 것입니다.
 
일별병영사귀(一別屛營邪鬼). ‘일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많이 찾아봤지만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별(別)’ 자를 ‘별(瞥)’ 자의 뜻으로 보면, ‘잠깐 보다’, ‘언뜻 보다’ 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일별, 한번 힐끗 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척신과 복마들이 관운장이나 그 수많은 신장들을 한번 힐끗 쳐다보기만 해도, 병영사귀. 숨죽일 병 자, 두려워할 영 자, 사귀들이 숨을 죽이고 두려워 한다는 뜻입니다. 
 
唵唵急急엄엄급급 如律令여율령 娑婆訶사파하
 
율령이라는 것은 한나라 때 공문서 끝에 쓰는 것으로서, 율령 그대로 화급히 집행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엄엄급급 여율령이라는 것은 율령처럼 화급하게 집행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파하는 불교 주문에 다 들어가는 것인데, 속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이 글이 ‘대차력주니라’ 하시고, 마지막 구절에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운장주를 많이 읽으라’고 하십니다. 박공우 성도는 개벽대장으로 수많은 천병을 거느려야 될 주인공이므로 관운장의 기운을 받아야만 천병을 통솔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읽으라고 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옛날 도사들은 육정육갑신장들을 잘 부려서 먼데 있는 물건도 그들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고, 또 그들을 통해서 길흉도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도가에서는 육정육갑신이 보편화된 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웅적인 기개와 심법을 열어주는 ‘운장주’
 
마지막으로 우리는 왜 운장주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운장은 살아서는 충의의 전형이었고 정의의 표상이었으며, 돌아가셔서는 복마대제가 되어 정의의 신이 되셨습니다. 이 우주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신이 누구냐. 바로 관운장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운장주를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정의로워집니다. 정의의 신을 찾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도 정의로워져서 의로운 구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상제님 도문에서는 불의한 난법자가 되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합니다. 
 
정의로운 신앙을 하는 것이 성공하는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운장주를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마음이 정의롭게 되어 의로운 구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운장주에는 관운장은 천하의 으뜸가는 ‘영웅’이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운장주를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또한 영웅적인 기개와 심법으로 변하게 됩니다. 
 
상제님께서는 이 글이 대차력주라고 하셨습니다. 차력이라는 것은 엄청난 기운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심약하다든지 겁이 많다든지, 또 상제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헤치고 나가야 하는데 용기가 부족할 때, 운장주를 읽으면 영웅적인 기개와 배짱,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일꾼들이 운장주를 통해 차력(借力), 기운을 빌어쓰면 세상에 나아가 두려움 없이 상제님의 일을 성사재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제님께서 관운장을 ‘삼계복마대제’로 임명하셨기 때문에, 운장주를 읽으면 모든 척신의 난동과 복마의 발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도 한번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위눌림을 당했는데, 시커먼 놈이 와서 목을 조르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더라구요. 처음엔 운장주 생각이 안 났어요. 그러다 잠시 뒤에 생각이 나서 운장주를 읽었는데, 한번을 채 다 읽기도 전에 그냥 풀렸어요. 운장주를 읽으니까 바로 도망을 간 거죠. 그때 운장주라는 것이 대단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그리고 우리는 척신과 복마를 인격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비인격적인 것도 엄청나게 많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을 막는 모든 영적인 장애물들을 운장주를 읽으면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잘 안 풀린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마음이 불안하다든지, 또는 가족 간에 자꾸 불화가 생긴다든지, 친구나 이웃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그런 것들도 알게 모르게 보이지 않는 복마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운장주를 읽으면 그 모든 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척신과 복마뿐만 아니라 삿된 기운까지도 운장주를 통해 모두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일꾼이 일을 도모함에 무서워서 못하는 것은 의기가 부족한 연고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정의로운 마음, 용기, 이런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하는데, 운장주를 읽으면 정의로운 마음이 우리 가슴에 충만되어 용기백배해서 화지진(火地晉)도 할 수 있는 당당한 기백이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운장주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운장주를 읽으면 읽는 만큼 그 기운을 받아서 일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성제군 명성경』에 나오는 좋은 구절 하나를 소개하고 제 얘기를 마칠까 합니다. 
 
 精忠은 충日月이요
 義氣는 貫乾坤이라. 
 面赤에 心尤赤하고 
 鬚長에 義更長이라.
  
 정기와 충성심은 해와 달을 찌르고, 
 의로운 마음과 기상은 건곤을 꿰뚫는구나. 
 얼굴도 붉지만 마음은 더욱 붉고,
 수염이 길다지만 의로운 마음은 더욱 길구나.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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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씨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인가
 
지난 4월 29일, 북경에 도착했다. 해외촬영이라는 설렘도 잠시, 곧바로 촬영스케줄로 돌입하면서 우리의 빡빡한 일정이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많은 복희묘와 복희씨의 사당이 있다.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가장 큰 규모의 하남성 회양현 복희묘, 가장 최초로 세워진 신락시 인조묘, 『환단고기』에 나온 산동성 미산현 복희묘, 그 외에도 하남성 맹진현의 용마부도사, 감숙성 천수시의 복희묘, 괘태산 복희대, 서화현 구지애가 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 전부터 몇 가지 의문점을 안고 출발했다. 첫 번째는 왜 이렇게 복희묘와 사당이 여러 곳에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자료조사 중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 신시에서 태어나 송화강(추정)에서 팔괘를 그으시고 산동성 어대현(현재 미산현)에 묻히셨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중국 동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그와 반대로 중국대륙 서쪽 깊숙한 곳(현재 감숙성 천수시)에서 태어나 하남성 회양현에서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고 본다. 

 
하남성 회양현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산동성 미산현이 있다. 즉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왔는데, 산동성까지는 뻗어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명확히 엇갈리는 두 가지 이동경로,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든지, 아니면 둘 다 지어낸 이야기?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복희씨에 대한 문헌기록은 「제왕세기」이다. 거기에 따르면, 복희씨는 ‘구이에서 태어나 성기(成紀)에서 자라고 어대현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성기(成紀)라는 지명을 중국대륙 서쪽에서 찾다보니 현재 감숙성 천수시 주변의 ‘성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구이에서 태어났다는 대목은 구이족(九夷族, 동이족의 다른 말)이 아닌 구지산(仇地山)에서 태어난 것으로 끼워 맞추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복희씨를 동방 동이족이 아닌 서방 중국인의 조상이며, 동방으로 문물을 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관점이 정해졌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졌다. 현지 답사 중 알게 된 것은 강택민 주석이 천수시에 ‘희왕고리(羲王古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시를 복희씨의 고향으로 정해 버렸던 것이다. 
 
중국 전역에 펼쳐진 수많은 복희묘와 복희사당은 문화혁명(1966∼1976) 때 파손되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런데 강택민 주석이 글을 쓴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묘와 사당이 새로이 복원, 보수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배달국 영역에는 ‘성기’라는 지명이 없을까. 안타깝게도 『환단고기』에는 거기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어쩌면 본래 있었던 성기라는 지명을 중국 정부에서 바꾸어 놓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산동성 미산현의 복희묘는 현재 중국 복희묘 중 규모가 가장 작으며, 더욱이 사당 내부는 사당을 보수하는 인부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산동성의 복희묘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몇 가지 단서만 찾아낸다면 한민족의 조상인 복희씨의 역사, 나아가 배달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을 듯했다.
 


이미 중국사가 되어버린 태호 복희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희망은 하북성 신락시의 ‘복희제의’라는 축제에 참석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절실히 실감했다. 
 
하북성 신락시는 소림사가 있는 석가장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도시다. 그 신락시에 제곡고신께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복희묘인 ‘인조묘(人祖墓)’가 있다. 그곳에서 지난 5월 2일부터 5일까지 제3회 ‘복희제의’가 벌어졌다. 
 
원래 그 축제기간 동안 신락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행사 참가는 물론 촬영도 불가한 지역이다. 
 
그런데 북경에서부터 안면을 튼 복희문화연구소 소장, 신락시 시장, 축제관계자 등의 인맥을 통해 운 좋게도(?) 신락시 행사관계자의 자격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이번 행사 관람인원이 약 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규모를 실감케 했던 큰 행사였다. 또한 그곳에 200명 가량의 복희 전문가들이 모였다.
 
국내에서 복희씨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복희씨에 대한 자료의 빈곤함, 강단사학계과 재야사학계의 견해차 등으로 인한 어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복희씨 연구와 관련해서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전문가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작은 도시 신락에서 만난 복희 관련 전문가들은 수십 개 단체, 수백의 인원이었고, 또한 그들은 매년 이러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욱이 축제에 참가한 20만 명의 중국인들 대부분이,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터지만, 복희씨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인 복희씨를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 사이, 이곳에선 복희씨에 대한 제사는 이미 그들의 생활 일부였고, 인류의 시원문화가 복희씨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 힘으로 자기네들이 세계를 통일 지배할 수 있다는 역사적 우월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묘는 행사가 열리면 100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저력을 무시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상고사를 밝혀 세계무대에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술 더 떠서,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은 ‘태호 복희씨는 동이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동이족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한족에 흡수된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에 불과했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문화의 태일신(泰一神), 태호 복희 

이렇게 태호 복희씨를 추앙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아이러니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당과 무덤에 수많은 팔괘와 육십사괘가 그려져 있지만 제대로 그려진 팔괘는 단 한 곳(하남성 천하제일묘)밖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실소하기도 했다.
 
태호 복희씨의 사당에 가보면 웬만한 곳에는 일획개천(一劃開天)이란 글귀가 써 있고 용마상이 있으며 복희씨의 업적도가 그려져 있다(하지만 미산현에는 없다). 업적도를 한 장씩 사진으로 담으면서 지금까지 글로써만 읽어왔던,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태호 복희씨의 업적을 마음속에 새겨볼 수 있었다.
 
복희씨께서는 인류문화의 모태라고 하는 팔괘와 하도를 지어 후세에 전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문자를 만들고, 인류의 최초의 성씨를 열었으며, 결혼제도를 세우고, 가축사육법을 개발하는 등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류문화의 근간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는 이러한 복희씨에 대해 “태호 복희(太昊伏犧)는 인류문화(人類文化)의 태일신(泰一神)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감숙성 천수시에서 복희씨의 업적도를 보며 『도전(道典)』 말씀을 떠올렸다. 진정 인류문화의 시조이신 태호 복희씨, 가슴속에서 그 분이 큰 태양처럼 밝아오는 것 같았다. 
 
황사의 발원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 아래의 천수시 복희묘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용마를 만날 수 있었다(참고로, 용마라고 하면 중국에서도 대부분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가진 괴수를 생각한다. 
 
그런데 용마란 본래 8척(2.4m) 이상의 아주 큰 말, 혹은 물에서 나왔으므로 비늘이 있는 말을 뜻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문질러서 콧등이 반질반질해진, 비늘까지 달려있는, 실제와 가장 가까울 것이라 생각되는 용마였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눈빛에 사로잡혀 사진 한 장을 남기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 
 
 
‘물속에서 말이 나와서 선천문화가 열리게 되었다!’ 이 얼마나 멋진 상징인가! 
 


상생방송의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하루 3∼5시간의 수면, 길게는 10시간씩 좁은 승합차로 장소를 옮겨가며 중국 전역을 누볐다. 때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위험한 빗속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중국 공안의 횡포에 촬영한 테잎을 지우고, 그러면서 다시 또 몰래 촬영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간절함이 뚝배기에 국 넘치듯 끓어올랐던 보름간의 치열했던 일정들. 짧은 지면으로 미처 다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은 곧 제작될 다큐멘터리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상생방송(STB)은 태호 복희씨 뿐 아니라 많은 프로그램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정신을 바로 세워나가고자 한다. 
 
세계무대 속에서 가장 한국적인 방송국이자 가장 세계적인 방송국으로 우뚝 설 STB의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며, 도전의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 일곱 글자에서 시작한 이 다큐멘터리가 한국 사학계와 방송계에 던질 파문을 생각해 본다. _ 이창욱/STV 상생방송 제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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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운장



의로움의 상징 관운장(關雲長)

박수영 / 객원기자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 왔다가는, 영원히 살지 못하고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살다가는 저 세상으로 갑니다. 사람 가운데는 역사 위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도 하는 반면 추한 이름을 남기기도 합니다. 유방백세(流芳百世)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유방백세는 꽃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말이요, 유취만년은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오래도록 남긴다는 뜻입니다.


관운장2

우리는 신묘년의 새해를 열면서 한 역사의 인물을 조명해봄으로써 우리들 각자의 고귀한 삶에 거울을 삼고자 합니다. 그 주인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삼국지의 주인공 관운장입니다. 일개 무장에 불과하였던 관운장이 어찌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아름다운 이름이 회자되며 살아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사람의 지상에서의 삶은 잠깐이지만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비결을 깨우치게 됩니다.


조선에 세 번 보은하는 관운장
관운장은 의리와 용맹의 표상으로 손꼽히는 성인입니다. 관운장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대인대의(大仁大義)를 기려 역대 왕조에서 관왕묘를 세워 극진히 대접을 하며 성제군(聖帝君)으로 추앙해 왔습니다.


관운장은 우리 민족과 어떤 인연이 있길래, 우리 민족이 수백년간 관운장을 경애하며 잘 받들어 주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인즉, 임진(壬辰)왜란과 정유(丁酉)왜란 때에 관운장이 영혼으로 나타나 우리나라의 국운을 도왔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었다.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하였다. 행주(幸州) 싸움에서 이길 때에도 신병이 나타났다 한다.
(《연려실기술》,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조선시대 야사의 총서. 기사본 말체로 서술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전투1593.01와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성전투1597.12를 말함)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성전투와 울산 도산성전투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과 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임진록」(壬辰錄)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나온 작자와 연대 미상의 군담소설로한글본과 한문본이 있다. 사명당, 이순신, 서산대사 등의 활약으로 적군을 물리치고,일본까지 쳐들어가 도술로써 일본 왕의 항복을 받고 개선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까지 침략해오니 선조(1552-1608)는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명나라 신종(1563-1620)이 보낸 이여송의 구원병이 합세하니,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되찾기 위해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왜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수천의 신병이 나타나 왜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빼앗겼던 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날 밤, 신병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관운장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연은 이러합니다.


선조대왕 25년 때였습니다. 선조는 춘곤을 못이겨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보니, 위풍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든 채 삼각수를 휘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선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삼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여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와 동생은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순국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우리 삼형제는 생애를 마치고 영혼이 되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의리를 지켜오지 않았는가.


이에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친 고로 환생이 안되고, 아우는 현재 조선의 선조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 큰 병란이 일어날 것인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세월만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곧 표독한 왜적이 조선에 쳐들어올 텐데 7~8년이나 걸릴 테니 명나라 신종에게 구원을 청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 테니 주저말고 행하게.”


선연히 사라지는 장군의 뒷모습에 깜짝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대왕이 조정의 백관을 소집해 방책을 논의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지라 힘없고 나약한 조정에서는 별다른 도리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선조 25년 4월, 15만에 달하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서울로 진격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입니다.선조는 할 수 없선조는 할 수 없이 서울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삼천리강산은 초토화되었고 피가 강이 되어 흘렀습니다.


선조는 의주에서 명나라 신종에게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신종은 이여송을 총수로 한 5만의 군사를 파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전쟁은 가까스로 끝이 납니다. 처절했던 7년간의 오욕과 수모를 남긴 채 말입니다.


조정에서는 그 후에 관우를 기리어 관왕묘*를 건립하였으며 이에 명나라 신종이 사신을 보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합니다. 이처럼 조선에 원정 와서 왜적을 무찔렀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조선에 처음으로 관운장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관왕묘최초로 세워진 것은 1598년(선조 31)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지금의 남대문) 밖에 건립된 남관왕묘입니다. 남관왕묘는 명나라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요청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서울에 건립된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공사 끝에 1602년 봄에 준공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도 1598년을 전후하여 강진·안동·성주·남원 등4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그뒤 고종 때에 와서 다시서울에 북묘·서묘를,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세웠습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과 중구 장충동에 남아 있는 관성묘가 각각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호와 제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관운장이 조선에 세 번 보답을 한다는 뜻으로 삼보조선(三保朝鮮)이라는 말이 「춘산채지가」에도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옵니다.


도원결의 하실적에 만고대의 누구신고
황금갑옷 떨쳐입고 적토마상 비껴앉아
봉의 눈을 부릅뜨고 삼각수를 거사리고

청룡도를 손에들고 중원회복 하려들 제
추상같이 높은의리 만고일인 이아닌가
임진출세 하실적에 삼보조선 하신다니
무섭더라 무섭더라 의리의자 무섭더라


「( 춘산채지가」(春山採芝歌) 남조선뱃노래 편, 한학의 4대가 중 한명으로 조선 순
조 때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남긴 비결서.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함께 우리 민족의 비서(秘書)로 꼽힌다.)


정의의 화신 관운장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의 정의로운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유비와 장비가 소패에서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비성에서 유비의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보호하고 있던 관운장도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었지요. 조조의 공격을 피해유비의 두 아내와 도망을 가던 관운장은 조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게 되면서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조조의 부하장수이면서 관운장과 친했던 장요가 찾아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관운장의 자결을 막습니다.“첫째는 도원결의에서 삼형제가 한날한시에 죽기로 했는데 여기서 자결하면 그 결의를 져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유비가 두 형수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당신에게 의탁시켰는데 자결을 하면 두 사람은 누구에게 의지를 하겠는가. 셋째는 지금 자결하는 것은 한(漢) 왕실을 받들어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겠다는 대망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며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자 관운장도 세 가지의 조건을 내걸며 투항을 하였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漢)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이다. 둘째 두 형수님의 생명을 보존해줘야 하며, 마지막으로 형님이신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 면 언제든지 떠날 것이다. 그것을 허락한다면 항복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투항을 하자, 조조는 자기 밑에 관운장을 데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3일, 5일마다 연회를 베풀어주고, 벼슬도 주고,적토마도 주고, 금은보화도 주면서 마음을 뺏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관운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조조의 뜻은잘 알겠으나,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었으며,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을 져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수훈을 세워 은혜를 갚고 떠날 것이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리고 유비가 원소 밑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유비의 두 부인과함께 적토마를 타고 떠나게 됩니다.


그 밖에 관운장이 의리를 지킨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투항 당시 관운장은 무명으로 만든 낡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조조가 비단으로 만든 새 옷을 줍니다. 그러자 관운장은 새 옷을 안에 입고, 유비에게 받은 낡은 옷을 다시 겉에 입으면서 유비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적토마를 줍니다. 그런데 옷을 줬을 때는 시큰둥하던 관운장이 적토마를 받고서는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왜 절을 하느냐?’하고 물으니‘이 말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니 적토마를 타면 형님이 어디에 계시든 하루 만에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유비의 편지를 받고나서 유비한테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조가 관운장이 도착하기 전에 유비가 죽었으면 어떻게 할꺼냐고 물으며 남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이라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관운장은 조조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다 봉해서 두고, 오직 적토마만 타고 두 형수를 호위해서 다섯 관문, 오관을 돌파해서 유비를 찾아갑니다.


뒷날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도망을 갑니다. 그때 관운장은 자신이 조조를 잡겠다며 제갈공명에게 자기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조조를 살려주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명세를 하고 조조를 잡으려 갑니다. 하지만 관운장은 과거에 조조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결국 조조를 살려주게 됩니다. 결국 관운장은 손권에게 잡혀 목이 잘리게 됩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옥은 깨어져도 그 빛은 변하지 않는다.’내가 죽더라도 나의 의로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운장은 왜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까?


삼국지를 읽어보면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등장합니다. 지략이 뛰어난 제갈공명을 비롯하여 싸움을 잘한 기라성같은많은 장수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는 관운장보다 더 용맹했던 장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제치고 관운장은 역사의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에의해 칭송받으며 나아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관운장은 비록 100년도 안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또한 그의 최후는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는 슬픈 과정 속에 끝났지만, 그는 죽음과 함께 부활하여 역사 속에 영원히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과연 그의 어떠한 행동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의로운 행동때문입니다. 만일 관운장이 조조에게 붙잡혔을 때, 조조의 회유책에 마음을 뺏겨, 조조에게 충성을 받치고 도원결의를 변절하였다면 그는 훨씬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쁜 여자들에 의해 둘러싸이고, 좀더 좋은 집에서 살며, 부귀영화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운장은 현실의 눈앞에 보이는 영화를 구하지않고 의리를 지켰습니다.


바로 관운장을 역사에 부활시킨 것은 그 의로움, 의리였습니다.이제 음력도 설이 지나 본격적인 신묘년 토끼의 해를 맞았습니다. 독자여러분도 올 한 해 의를 저버리지 않는 정의로운 한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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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영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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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빈(家貧)에 사현처(思賢妻)요 국란(國亂)에 사양상(思良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세계는 국가간에 경제력을 중심으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인재를 꾸준히 기르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척하는 나라는 국민을 배불리 먹이며 일등국이 되지만, 인재를 기르지 못하고 국가 경영에 실패한 나라는 국민을 고생시키며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만물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 역사의 인물을 조명해 봄으로써 정말로 능력있는 한 사람의 힘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나아가 천하만민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주인공은 우리 한민족의 선조 가운데 한분이셨던 강태공입니다. 강태공하면 흔히들 낚시꾼의 대명사로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삶을 알게 되면 과연 천하를 경영했던 위대한 CEO였음을 알게 됩니다. 아울러 그의 인간경영, 국가경영의 가르침은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영원한 교훈을 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난세에 세상을 낚는 낚시꾼…
오늘날 낚시꾼의 대명사가 된 강태공. 본명은 강상(姜尙)이며, 여망(呂望) 혹은 태공망(太公望) 등으로 불리웁니다. 강태공은 기원전 1,100년 전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100년 전의 인물입니다. 주(周)나라 초의 정치가로서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모두 모신 인물입니다.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을 만나며, 넓은 식견과 지혜로 문왕의 스승이 됩니다. 문왕이 죽은 후에 뒤를 이은 무왕을 도와, 폭군인 주왕(紂王)에 의해 혼란한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켰습니다. 그가 문왕을 만나기 위해 10년 동안 위수가에서 낚시를 하였기에 오늘날까지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강태공이라고 불러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태공은 낚시를 한 것이 아니라 세월을 보내며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지요. 강태공의 낚시 바늘은 굽은 것이 아니라 일자였다 합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낚시를 한 것입니다.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영광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 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강태공이 죽고나서 그를 장사지내려 하자 시체가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상은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한편 영구(營丘, 강태공이 다스린 제나라의 수도 유적지)에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태공망의 묘는 섬서성 함양시 주능향 문왕능 우측에 있으며, 의관총(衣冠塚)은 고향 영구(지금의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 영류향)에 있고 상당도 같은 곳에 있다고 합니다. 『육도삼략』이라는 유명한 여섯 권의 병법서를 남겼습니다.



주나라 문왕과의 첫 만남


강태공과 주나라 문왕의 첫 만남은 은나라의 주(紂)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 갖은 폭정을 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결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의하여 타도되었는데 이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사냥을 가려다가 귀갑(龜甲)으로 점을 쳐보니 이번 사냥에서는 짐승 대신 훌륭한 인재를 얻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얻는 것은 용도, 곰도, 범도 아닙니다. 얻는 것은 왕을 보좌할 인물입니다.”


“장차 임금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거나 제후가 될 그 인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폐하께 스승을 보내시어 국사를 보좌토록 하신 것이니, 이 나라를 3대에 걸쳐 돕게 될 것입니다.”


당시 사관인 편(編)이라는 자가 문왕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왕은 내심 기뻐하며 이리저리 달리며 사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따라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레는 어느새 위수(중국 황하강의 가장 큰 지류) 가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한 노인이 홀로 강가에 앉아서 낚싯줄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낚시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왕은 첫눈에 노인이 비범한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 노인이 바로 여상 강태공이었습니다.


문왕은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곁에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놀랍게도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낚시를 즐겨하시는가 봅니다.”


이것이 태공과 문왕과의 첫 대화였습니다. 그러자 강태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군자는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즐기지만 소인배는 일의 결과에 어떤 이익이 생기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제가 지금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그와 비슷한데 저는 지금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문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과 비슷하다는 것인지 좀더 자세히 말해 주시겠소.”


강태공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낚시에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미끼로서 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祿)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먹이라야 더욱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는 법인데 인재에게 녹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크기에 따라 요리법이 다른데, 이는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면서 강태공은, 낚시질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이처럼 심오한 이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낚시하는 자체로 천하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뜻이 깊으면, 물고기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더욱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침내 이 말에 감탄한 문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낚시 비법에 숨은 이치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강태공이 대답했습니다.


“샘은 근원이 깊을수록 물이 많이 쉼없이 흐르는 법이고, 또 물이 많이 쉼없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늘 물고기가 사는 법입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크게 성장하고, 결과적으로 열매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습니다.


낚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낚시줄이 가늘고 미끼가 작으면 작은 물고기가 잡힐 것이요, 낚시줄이 중간 정도이고 미끼도 그러하다면 중간 정도의 물고기가 걸릴 것이요, 만일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크다면 당연히 큰 물고기가 걸릴 것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지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도 봉록에 따라 대우를 잘하면 전국의 인재가 모여들게 됩니다. 대장부 대우로 인재를 구하면 ‘한 나라’를 얻게 될것이요 제후의 예로 인재를 구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모여든 인재를 소홀히 대하면 곧 인재들이 떠나버립니다. 이는 물이 더러우면 물고기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듯 자연스런 이치지요.”


강태공의 말이 끝나자 문왕은 ‘점괘에서 만나리라고 한 인물이 이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을 숨기고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하 백성의 민심을 얻을 수 있겠소이까.”


강태공이 일사천리로 한점 의혹도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천하는 군주의 것이 아니라 만백성의 것입니다. 만백성과 같이 천하의 이익을 나누는 군주는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고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음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늘에 사계가 있고 땅에 만물을 키워내는 힘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은혜를 천하 만민과 같이 나누어 가지는 군주야말로 진실로 인(仁)을 몸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인(仁)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지요. 어진 사람이 정치를 하면 그 덕이 저절로 나타나며 어렵지 않게 민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생(生)에 대해 애착이 있으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어려움 속에서 건지는 것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德)이라는 것입니다.”


강태공이 이 말을 마치자 문왕이 일어나 그에게 경의의 뜻으로 두 번 절을 한 뒤 말했습니다.


“그 말씀은 하늘의 이치라 할 수 있군요. 당신은 하늘에서 내게 내려준 분이니 어찌 하늘의 명을 거역하겠소이까.”


이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은 핵심을 묻고 핵심을 답한 현문현답(賢問賢答)이었습니다. 문왕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나의 조부인 고공단보(주나라 왕실의 뿌리, 후에 무왕이 태왕太王으로 추존)께서는 세상을 뜨기 전,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도와 주족(周族)을 번창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삼가 가르침을받고자 합니다.”


그때 문왕이 이렇게 말했다 하여 이로부터 강태공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문왕은 강태공을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강태공은 문왕의 스승, 태사(太師)가 되었고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현 국무총리)를 겸임하게 됩니다.


강태공은 좋은 정책을 아뢰었고, 주나라는 은나라를 3분의2까지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또한 은의 제후들이 주나라를 따르게 하고 풍읍에 도읍을 건설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지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왕이 그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전쟁 중에 죽자 아들 희발(姬發)이 왕위를 계승하여 무왕에 올랐으며 강태공을 상부(尙父)와 태사(太師)로 모시게 됩니다.



강태공,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다
주 무왕 때에 강태공을 주축으로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 융거(戎車) 300대와 800제후들의 지원 하에 목야(牧野: 하남성 급현 조가진)에서 주신(紂辛)군 70만을 궤멸시키고 조가(朝歌: 지금 하북성 기현)를 함락하였습니다. 폭군 주신(紂辛)은 달아나 스스로 분신(焚身)하였으며 은왕조는 마침내 멸망을 하였습니다.


대승을 거둔 무왕은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하늘에 보고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피를 빨아 긁어모았던 은나라의 보화와 곡식을 모조리 내어다가 백성에게 내려줌으로써 다시 한번 백성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의 작위로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여 제후로 봉합니다. 그때 공(公), 후(候)는 사방 100리, 백(伯)은 사방 70리, 자(子), 남(男)은 사방 50리의 땅을 받았다 합니다. 강태공도 BC1,122년 천하통일 및 천자국 주(周)나라의 개국 일등공신으로 제(齊) 땅 사방 100리를 받아 제왕(齊王)이 되었습니다.


그후 태공은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며 예법을 간소화 하는 등 백성들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나가고 어업 외에 제염업 등 상공업을 진작하고 수산을 장려함으로써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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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의 다음인 성왕(成王) 때에 무왕의 아우들(관숙과 채숙)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성왕은 사자를 보내 태공에게 동쪽은 해안선까지 서쪽은 황하, 남쪽은 삼릉, 북쪽은 무체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있는 제후를 임의로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합니다. 이로써 태공은 천자에 속하는 대권의 3분의 1을 위임받게 됩니다. 그후 봉토가 점점 확대되어 처음 받았던 100리가 5,000리가 되었고 그 후손인 환공이 뒷날 밝은 정치를 펴 제후들을 통수하게 되기까지 토대를 놓았습니다.


강태공이 지휘한 목야대전(牧野大戰)과 강태공의 병법 모두 세계 최초의 역사기록 사건입니다. 따라서 강태공은 병법과 군사의 시조입니다. 역대 황제들이 강태공을 무성(武聖)으로 봉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무성왕(武聖王)으로, 송나라 때에는 조열무성왕(照烈武聖王)으로 봉해졌습니다. 원나라 때부터 민간에서는 강태공이 신화와 전설로 발전하였고, 명나라 때는 허중림(許仲琳)이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소설을 창조하여 마침내 강태공이 신선으로 변모하였으며 민간에서 강태공을 신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학에 바탕한 창업 및 경영 정신
강태공은 오늘날로 말하면 위대한 CEO입니다. 사람을 다룰줄 알았습니다. 나라의 부국강병을 도모할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책 속에 집약돼 있습니다. 강태공이 지은 『육도삼략』은 강태공과 문왕, 무왕의 일문일답을 엮은 책입니다.


『육도삼략』은 단순한 병법서(군사를 지휘하여 전쟁을 하는 방법이 실린 책)가 아닙니다. 병서(兵書)이면서 동시에 정전(政戰) 및 치세(治世)의 대도를 논한 책입니다. 오늘날의 인간학 및 조직학에 관심을 갖고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눈여겨 봐야 할 책입니다. 이 책은 모든 병법의 시초이며 역대 전략사 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후대의 손자(孫子), 오자(吳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제가(諸家) 병법사상도 『육도삼략』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소진은 태공망의 병법서를 접하고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다스릴 도를 터득하게되었다고 했습니다.


육도(六韜)라 이름한 것은 그 속에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의 여섯 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략(三略)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숨어사는 군자가 이고( )라는 곳에서 장량(張良)에게 전해준 태공망의 병서라고 전해져 옵니다. 이 책을 삼략이라고 한 것은 상략, 중략, 하략의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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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기원전 1,100년 전후)은 누구?


199강태공은 염제 신농의 후손입니다(염제 신농은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농사짓는 법과 의술을 인류에게 전한 위대한 선조입니다). 성은 강(姜)씨이고 이름은 아(牙)인데 그를 존칭하여 자아(子牙)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 四方제후의 장관)이 되어 우임금을 보좌했으며 치수사업(治水事業, 하천과 호수의 범람을 막는 일)에도 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그후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해졌으므로 본성은 강씨이지만 지명을 따라 씨를 삼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습니다(보통 태공이나 태공망(太公望)으로 부를 때는 강씨를 많이 쓰고 상(尙)이란 이름을 쓸 때는 여(呂)씨를 많이 사용합니다).


『사기』에는 동쪽 해안지방 사람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다른 기록에는 중국의 동쪽 산동성 일조(日照) 시(市)에서 출생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혹은 지금의 산동성 제주(齊州) 출신일 것이라는 설도 있음). 강태공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태공이 주나라의 문왕, 무왕의 스승이 되어 천하를 통일한 것에는 모두 일치합니다. 강태공은 주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태공은 문왕의 조부(태왕=고공단보)가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이라고 불려졌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후세 민간에서는 모두 그를 ‘강태공’이라고 불렀습니다.



200강태공에서 뻗어나간 많은 성씨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상으로부터 자손이 생기고 그 자손의 몸에는 선조의 피(혈통)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피는 같은 성(姓)이지요.


인류 최초의 성씨가 발원한 곳은 중국 서부 황토고원 섬서성 보계시 무공현 강수(姜水) 지역입니다.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천황 때 소전이라는 분이 이곳 강수에 군병감독관으로 왔는데 그의 아들 염제신농 씨가 지명을 따서 강씨성이 생겨났습니다.


강태공은 창성시조이신 신농황제의 16세손인 백이씨시조의 35세손입니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 곧 태사(太師)가 되어 부국강병을 하였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그 공으로 제나라 왕에 봉해졌습니다. 제나라의 수도는 영구(營丘: 현 산동성 치박시임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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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나라는 강태공의 후손들에 의해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습니다.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이었다고 합니다.


강태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 오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高), 여(呂), 허(許), 노(盧), 구(丘,邱), 강(强),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 등 수많은 성씨들이 강태공의 자손들로부터 갈라져 나갔습니다. 지금도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 강태공의 후손들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들이 대거 참례를 온다고 합니다. 오늘날 강태공의 자손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70여개 이상의 성씨가 분파되었다고 합니다.


[강태공과 마부인 이야기]
강태공이 부인을 위해 세운 서낭당


주나라가 세워진 후 강태공이 제나라(지금의 산동지방) 땅의 제후가 되었습니다. 강태공이 부임할 때 주위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 무리 중에 초라하고 늙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강태공이 보니 낯이 익은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마씨 부인이었습니다. 강태공은 시종을 시켜 그 여인을 수레 앞에 대령시켰습니다.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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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제후로 부임하는 휘황찬란한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여인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아내로 맞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강태공은 시종을 시켜 물 한 그릇을 가져오게한 후 그릇의 땅바닥에 물을 쏟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이 다시 그릇으로 돌아올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가 없는 법이오.”


강태공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여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습니다.


이 일화에서 ‘엎질러진 물이다’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합니다. 그후 강태공은 지난날 자신으로 인해 고생한 마씨 부인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 서낭신을 만들었다합니다. 살아서 못다한 영광을 죽어서 수 천년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대접받도록하여 마씨 부인에게 은공을 갚았다는 것입니다.


서낭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고 잡귀를 막는 신입니다.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뿔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나 장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귀신도 마음대로 부린 강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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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은 1년을 72후로 나눠(1후는 5일)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름을 붙여 농사에 이용하였습니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도 마음대로 부리는 신권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설화 속에 많은 일화들이 전해 옵니다. 『봉신연의』(삼국지, 수호지, 서유기와 더불어 중국 4대소설중 하나)에 보면, 곤륜산에서 40년간 수행을 한 강태공이 도술로 여우를 물리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곤륜산(도교의 성산)의 천년 묵은 암 여우가 주왕의 애첩 달기의 혼백을 빼앗고 그녀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왕의 비(妃)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또 정산지방에 좋은 진흙이 있는데 미꾸라지 정령의 방해로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육로로 운송해야 했습니다. 이에 강태공이 미꾸라지 정령을 잡아 수로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정산에는 그 증거로 조어대(釣魚臺)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미리 재앙을 막음)의 한 풍속이 있습니다. 디딜방아 몸체에는 반드시, 강태공이 태어났다는 연월일시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 조작(姜太公 造作)’이라고 씁니다. 이를 ‘방아 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서, 방아 동티(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를 막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하무적, 천하를 통일한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의 해악을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흥망의 열쇠는 사람에게 있다

무릇 병사를 쓰는 요체는
예를 숭상하고 녹을 중히 여김에 있나니
예를 숭상하면 지사(智士)가 모여들고
녹을 중히 여기면 의사(義士)가 죽음도 불사하나니
그러므로 현자(賢者)에게 녹을 주되 재물을 아끼지 않고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줌에 때를 넘기지 않으면
장교와 사병이 다 함께 적을 무찌르느니라. (출처: 삼략의 한권인 「상략」)

무왕이 태공에게 물었다. “장수에 대하여 논하면 그 도는 어떻습니까.”
태공이 대답하였다. “장수에게는 다섯 가지 재간과 열 가지 허물이 있습니다.”
무왕이 물었다. “그 조목을 듣고 싶습니다.”
태공이 대답하였다.

“이른바 다섯 가지 재간이라 하는 것은 용(勇),지(智),인(仁),신(信),충(忠)입니다.
용맹스러우면 범치 못하며, 지혜로우면 어지럽히지 못하며, 인덕이 있으면 사람을 사랑하고, 신의가 있으면 속이지 않으며, 충성심이 있으면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른바 열 가지 허물이라는 것은 용감하여 죽음을 가벼이 하는 자 있으며, 성급하여 마음이 조급한 자 있으며, 탐이 많아 이익을 좋아하는 자 있으며, 어질어 인정에 약한 자 있으며, 지혜로우나 마음에 겁이 많은 자 있으며, 신의 있으나 사람을 쉽게 믿는 자 있으며, 청렴결백하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 있으며, 지능이 있으나 마음이 태만한 자 있으며, 굳세고 씩씩하여 자기 고집을 쓰는 자 있으며, 나약하여 사람에게 맡기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처: 육도 중 한권인 「용도(龍韜)」)



난세에는 전쟁이 있으니, 전쟁은 나라의 대사이며 존망이 달린 일입니다. 이럴 때에 국가의 운명은 장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일찍부터 간파했던 강태공은 무왕에게 장수를 잘펴서 두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전쟁에서뿐이겠습니까. 모든 일의 흥망성쇄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나 크고 작은 조직에 속한 개인들이 스스로 돌아볼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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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박수영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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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찬사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종교인, 마테오 리치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16세기말, 가톨릭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와서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중국 선교에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가톨릭 선교사로서 신부님은, 개인적 선교 업적에 구애받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동서양이 인종과 문화적 편견을 넘어 천국건설의 이념 하에 하나로 화합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과학 지식과 문물을 번역해 동양에 알리고 전했으며, 또 동양의 최고 엘리트와의 교분을 통해 배운 사상철학을 서양에 번역해 알리는 등, 동서양 문명 교류에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하나의 문화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해온 개인이,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 위대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모범적 사례를 신부님은 직접 실증해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종교인으로서, 자기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살다가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주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신부님은 인류 보편의 이념을 위해 한 생애를 살다가셨습니다. 신부님이 남긴 업적에 비해, 이 세상은 아직 신부님의 생애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선교를 위하여 어느 나라에서든 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소도시 시장이었던 아버지의 맏아들로서, 시장 직을 계승하지 않고 예수회 수도원 수사修士가 된 마테오 리치가 생애 처음 하나님께 한 서약.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편집자주)



선교를 위해 동양을 배우다

마테오 리치가 태어났을 당시의 서양은, 종교개혁(16세기 서방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에 싸여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가 대립하였습니다. 북부 유럽은 신교가, 남부 유럽은 구교가 차지해 이미 지형도가 그려진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일어난 가톨릭 내부에서의 혁신운동이었습니다. 인재양성과 선교활동, 신앙심의 확립 및 외교력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 등을 도모하였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19세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외지 선교를 희망하였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로마를 떠나 인도의 고아에서 4년간 머물며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어 1582년, 30세 되던 해, 중국의 마카오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명(明)나라 수도 베이징 내 궁궐에 입성하기까지 십여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아닌 이마두(利瑪竇)로서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14103_p184_07리치 신부가 중국식 이름을 지은 것은, 중국 체류를 허가받은 지 2년이 경과한 1585년이었습니다. 개명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중국에 귀화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리(利)’는 ‘리치(Ricci)’에서 따온 중국어 음사인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어로 ‘리’는‘Ri’가 아니라 ‘Ly’입니다. 
‘마두’는 ‘마테오(Matteo)’의 중국어 음사입니다. 그는 또한 ‘서양에서 온 현자’라는 뜻의 ‘서태(西泰)’라는 별호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합쳐서 ‘리 서태 마두’ 혹은 ‘서태자’로 불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마테오(Matteo)’는 그의 세례명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역 선교에 열정적이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복식에 관한 일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중국인들은 자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매우 견고한 중화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러한 중화사상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 중국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사제에 해당하는 계층이 승려였으므로, 리치도 그에 상응하는 선교의 방편으로 불교 승려의 복색을 갖추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동양에 전하다

[과학 기구의 제작]

리치는 사제 시절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독일 출신의 클라비우스 교수에게 기하학, 천문학, 역학 등을 배웠으며 해시계, 자명종, 지구의 등의 제작법도 전수받았습니다. 남경에서는 황족인 건안왕에게 지구의, 천체의, 프리즘, 해시계 등을 선사했습니다. 북경에 도착해서는 세계지도와 자명종, 성화(聖畵), 프리즘, 클라비코드, 수학책을 포함한 서적 등 20여 가지를 공품 목록에 작성해 황제께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황궁의 고장 난 자명종을 수리한다는 이유로 정기적으로 황궁에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리치는 천문을 맡아보는 흠천감에 유숙하며 자명종 사용법을 가르쳤으며, 많은 벗을 사귀며 해시계와 관상의(觀象儀) 제작법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스승 클라비우스의 일궤측시학과 관상의, 실용수학 등을 한문으로 편역하였습니다.


[새로운 지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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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중국의 지도는 한가운데에 중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일본, 캄보디아, 월남, 보르네오, 수마트라, 인도, 아라비아 반도가 아주 작게 표시된 천하도(天下圖)가 전부였습니다. 그런 중국 사람들에게 실제 크기를 바탕으로 그려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충격이었습니다. 이 지도에는 유럽, 아프리카, 인도,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등 모든 나라가 그려져 있습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으로 알던 중국 사람들은, 중국이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변방에 있으며 천하도에 그려진 중국의 크기보다 더 작다는 사실에 놀라, 이 지도 내용을 믿으려 하지도 않았답니다. 이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무려 1천여개, 각국에 대한 자세한 인문지리적 정보도 수록되어 있어, 중국은 물론 조선과 일본의 지성계에 엄청난 사상사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새로운 달력, 시헌력]

14103_p184_04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2년에 새롭게 만든 그레고리 역법입니다. 리치는 그레고리 역을 한문으로 번역해 서양의 천문학과 역학을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청나라에서는 1644년부터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한 ‘시헌력’(時憲曆)이 시행되었습니다. 시헌은 리치의 호(號)이며, 시헌력은 태음력(太陰曆)에 태양력(太陽曆)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만든 역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653년(효종4)부터 조선말까지 이를 사용하였습니다. 1895년 (고종32)에 태양력이 채택되었을 당시 시헌력도 같이 참용(參用)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구력(舊曆)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학문의 세계]

리치는 학창시절 라틴어와 헬라어를 연상에 의한 기억법으로 읽혔다 합니다. 어떤 책이든 한번 읽으면 모조리 외울 수 있었으며, 이런 천재적인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국에서 기법(記法)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법학을 전공하다 사제가 된 그는, 신학 외에도 수학 기하학 천문학 역학 등 박학다식하기 이를 데 없어 중국인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천문학과 역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은 아무런 증명도 없이 단지 명제를 주장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유로 진사에 급제한 서광계와 더불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 15권중 첫 6권을 『기하원본』이란 이름으로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동양인에게 수학적, 논리적 사고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새로운 예술의 세계]

마테오 리치가 황제에게 진상한 명품 가운데 클라비코드(피아노의 전신)라는 악기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악관들로 하여금 선교사에게서 연주법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전통 악곡이 5음 14성으로 되어 있고 반음 처리가 되지 않아 음계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진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태감들에게 유럽의 음계와 연주법을 전수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민요인 ‘아니무치아’와 ‘나니노’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서금곡의 팔장』이라는 한문곡을 지었는데 이 곡은 중국인의 심성과 사고에 부합하는 가사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후 클라비코드는 오랫동안 중국의 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투시법에 의한 원근법을 적용하는 화법도 전해 주었습니다. 처음 그림을 접한 황제는 그림이 살아있다며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동양의 문화를 서양에 전하다

14103_p184_06리치는 중국어를 배우고 한문을 익혔으며, 중국의 관습과 법을 연구하였습니다. 사서삼경 등 특히 유학을 공부하여 라틴어로 번역하는 등 유가와 천주교 교리의 유사성에 천착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사원행론』(四元行論)이라는 책을 펴내 우주관과 인식론 등 당대 최고 수준의 학식을 갖춘 사대부들과 토론을 벌이며 학식과 인품을 널리 인정받는 등 푸른 눈의 신부의 열정이 동양문화의 정수를 파악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유비쿼터스 문화로 발전하는 컴퓨와 디지털 문화의 기반은 0과 1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2진법입니다. 수학자 라이프니쯔가 2진법을 발견하면서 세계 최초로 4칙연산(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을 할 수 있는 계산기를 발명합니다. 사실인즉 2진법이란 태극의 궤의 원리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라이프니쯔는 중국에 간 친구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보낸 편지에서 우연히 두 장의 ‘태극도’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는 태극도 64괘의 배열이 바로 0에서 63에 이르는 이진법 수학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원리에서 계산기 작동의 힌트를 얻었으며, 이진법의 원리는 오늘날 컴퓨터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코드가 되었습니다.



천주(天主)와 상제(上帝)는 동일한 분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 중국에서 생활하며 유교, 불교, 도가, 양자, 묵자 등을 공부하면서 동서 문화의 다양성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동양문화에 대한 깊은 안목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기 신앙관에 결단을 내리게 되었으며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구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모시고 있는 천주(天主)와 유교의 하늘(天)과 상제(上帝)님 신앙의 맥이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하면서, 책의 서두에 ‘천주(天主)는 경서(經書)에 나오는 상제(上帝)와 동일한 분’이라고 정의합니다. 유교의 상제와 서교의 하느님은 결코 다른 신이 아니라 같은 신이요, 같은 신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교리는 중국 전통의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관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유교적 세계관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고대의 천(天) 사상으로 돌아가 거기서 상제를 만나야 한다고까지 설파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명나라의 고위 관료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게 됩니다.



참 성인(聖人)이 돌아가시다

14103_p184_09마테오 리치에게 안정된 생활은 없었습니다. 긴 여행과 이질적인 풍토로 인해서 중병을 많이 앓았습니다. 또한 선교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난항을 겪을 때마다 격심한 심신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추방되거나 억류되는가 하면 심지어 도적(盜賊)으로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친형제같이 사랑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덕인(德人)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수천명의 지인이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 종교 과학 수학 지리 음악 미술 기억술 등에 관해 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그런 논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로로 쓰러져, 중국에 들어온 지 27년이 되던 해 1610년, 향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제는 북경성 밖 책란(柵欄) 땅에 리치 신부의 장지를 윤허하였습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직접 서양인에게 묘지를 하사한 보기드문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숨졌을 때, 중국인들은 리치 신부를 “성인, 진정한 성인”이라고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현대 문명이 인도하는 지상 천국


살아생전 동서양의 지식을 두루 섭렵한 마테오 리치는 원대한 이상을 품게 됩니다. 동양을 무대로 ‘천주교 중심의 천국’을 건설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이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지상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로 기독교 역사상 아무도 품어보지 못한 실천적인 대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망을 다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불세출의 업적을 지상에 남기고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성인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리치는 육신 없는 인간인 신명이 되어서도 ‘천국건설’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상 신도(神道)세계에서 더욱 정열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우수한 두뇌와 부드러운 사교술, 폭넓은 인간관계와 근대과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지적 능력, 천주님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을 근간으로 하여, 그는 사후 신도(神道) 세계에서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가서 문명 발전에 역사하였습니다. 17,18세기 약 200여년 동안 서양의 문명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19세기 현대 문명을 근대화로 인도하였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천주님 ‘상제님’을 알현하고 ‘지상천국 건설’을 탄원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증산도 도전(道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오직 단 한 사람, 마테오 리치 대성사만이 서양의 하느님과 동양의 상제님이 같다는 결론을 실천적으로 얻어낸 성인입니다. 『증산도 도전(道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뜻 것이 바로 현대 문명이라”(道典 2:30:7),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라.”(道典 2:30:8)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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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비약적 문명문명 발전을 이뤄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 리치의 순수한 구도 정신이 이 천지 안에 울려펴지고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 지고한 일심 노력을 다한 그분만이 천상의 여러 문명신들을 움직여, 지상의 문명 혁신을 이뤄냈다는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구는 땅에 사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천상 신도세계에서의 선행된 노력, 즉 마테오 리치와 여러 문명신들의 지고한 노력에 의한 합작품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 마테오 리치. 생사를 넘어선한 사람의 일심과 노력으로, 동양 문화와 서양 문물이 서로 교류를 하고, 천상과 지하의 문명이 교류했다는 점은, 인간의 일심 노력이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놀라운 진실을 증거하는 것 같습니다.



꿈을 실현하는 위대한 사람들


마테오 리치의 생애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소망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신명계 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말입니다. 지나간 세상에서 살다간 위대한 성인들은 모두 그러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저 천상에서 뒷짐지고 지상을 조롱하며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강력한 일심의 원력이 대우주에 영원한 자취를 남기고 또 시간을 초월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연 과학과 인간의 문명에까지 선인(先人)들의 도과(道果)가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세상은 인종과 계층을 넘어, 지역을 넘어, 모든 장벽을 열어제치고 완벽히 열려 하나되는 ‘꿈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인이 하나라는 신념은 400년 전에는 단지 꿈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한 꿈,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존하는 목적이요 살아가는 원동력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힘이 상생으로 하나된 지구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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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간된 마테오 리치 서적들 
·천국문명을 건설하는 마테오 리치(양우석, 상생출판 2008)

·동서문명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마테오 리치 (히라카와 스케히로, 동아시아 2002)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조너선D. 스펜스, 이산 2002)

·西方(서방)에서 온 賢者(현자)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중국 전교 (빈센트 크로닌, 분도출판사 1989)


-번역서

·천주실의 (송영배 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교우론 스물다섯 마디 잠언 기인십편 (송영배 역,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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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에서 발간된 미니북 시리즈 「천국문명을 건설하는 마테오 리치』(상생문화총서 002)에 의하면, 마테오 리치의 업적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막혀 있던 동서 문명의 장벽을 허물고 문명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점, 둘째 천지간의 신들을 서로 왕래하게 하고 천국 문명을 본떠 내려서 지상의 문명을 크게 발달시켰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지상에서 동서 간의 지역 장벽을 허물어 만국을 하나되게 했다면 천상과 지상의 경계마저도 허물어 천국문명과 지상문명을 하나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의 업적이 천지간 우주간에 미쳐서 역사 속에서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모델입니다.


2) 마테오 리치(이마두利瑪竇, 호는 시헌時憲; 1552~1610)는 누구인가?

마테오 리치(이탈리아 이름 Matteo Ricci, 중국 이름 이마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이자, 가톨릭을 아시아 대륙에 정착시킨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입니다. 가톨릭을 오늘날 천주교라고 부르게 된 배경이 신부님의 유명한 저서 <천주실의>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유럽을 구라파(歐羅巴)로 표기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1552년 이탈리아 중부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는데 현재에도 마체레타 대학교 본관에는 중국의 사대부 모자를 쓴 신부님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19세인 1571년, 예수회에 가입하였고 입교 후 동양 전도의 뜻을 품었습니다. 로마 대학교에서 1575년부터 수사학 인문과정을 공부했으며, 1577년부터 1579년까지 같은 대학교에서 철학 과정을 마쳤습니다. 나머지 신학공부는 1582년까지 인도의 ‘고아’(Goa) 지역에서 받았습니다(1580년 로마 가톨릭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4103_p184_031582년 예수회로부터 중국에서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한문을 배웠습니다. 중국어 실력이 유창하여 문서 선교, 즉 문서로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역자(同役者) 루지에리와 함께 1583년 중국 조경(肇慶)에 정착하였습니다(이때부터 계속된 세계지도 제작은 1602년 곤여만국전도 제3판 발행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지도로써,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밖의 나라들은 오랑캐라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중국어로 교리문답서를 쓰고 한문저서 교우론을 저술하는 등 예수회 중국 선교 책임자가 됩니다. 그후 남경에 정착하여 고관 명사들에게 천문·지리·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황제를 만나 북경 거주허가를 받아 1601년 중국 베이징으로 왔습니다. 1603년 교리문답서인 천주실의를 출간하였습니다. 신종 황제의 호의로 선무문(宣武門) 안에 천주당을 세워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으며, 1605년 베이징에 천주당(중국에서 천주교회를 가리키는 말)을 세우고 200여명의 신도를 얻어 비로소 천주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수회에서는 ‘위에서 아래로의 전도’라고 하여 상위계급이나 지식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 복음이 확대되게 하려는 전도방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리치는 비록 명나라 황제 만력제를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나라의 쇠락을 걱정하는 개혁파 사대부들과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광계(1562년-1633년), 이지조(1565-1630), 양정균(1562-1627) 등 일부 사대부 지식인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서광계·이지조의 협력을 얻어 과학기술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천주교 서적을 저작하는 등, 나머지 일생을 중국에서 활약하였습니다. 한국 실학파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609년 중국 최초로 ‘성모 마리아회’를 창립하였고, 이듬해 1610년 58세에 별세하여 베이징에 묻혔습니다.


3)《천주실의》(天主實義)는 어떤 책일까

14103_p184_08《천주실의》(天主實義)는 1593년 경 저술된 책으로, 루지에리 선교사가 1584년 저술한 《천주실록》(天主實錄)의 개정판입니다. 저술 당시 해당선교지 책임자의 검열을 통과하기도 전에, 리치의 저술은 이미 그 라틴어 요약본이 명나라 말기 사대부들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서교의 하느님이 유교의 상제와 같다는 주장과 서교의 인간 이해가 양명학과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1594년 남창(南昌)에서 초판이 인쇄되었고, 1601년 베이징에서 《1601년 베이징판 천주실의》가 출간되었습니다. 선교 책임자의 출간 승인을 받은 후에는 1603년 베이징에서 증보판 《천주실의》가 출간되었으며, 1605년이나 1606년 항주(抗州)에서 《항주판 천주실의》가 출간되었습니다. 천주실의의 내용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이를 유지하시는 하느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ㆍ유교의 상제(上帝)는 기독교의 하느님(天主)이라고 주장

ㆍ유교의 기초적 교리를 인정

ㆍ하늘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인간의 영혼 불멸성을 강조

ㆍ인간의 영혼이 신령스러움을 중국 고전들을 통해 입증

ㆍ하느님이 동물을 창조한 것은 인간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임

ㆍ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

ㆍ성선설을 지지, 모든 행위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림

ㆍ《천주교해략》을 읽을 것을 권함


4) [그외 저서 및 번역서]

ㆍ《교우론》(交友論,1595년경): 마테오 리치의 첫 한문저서이다.

ㆍ《서양기법》(西洋記法,1596년):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고전암기술을 소개한 책

ㆍ《이십오언》(二十五言,1599년): 고대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의 잠언집을 중국인들에게 맞게 고쳐 쓴 편역서

ㆍ《기하원본》(機何原本,유클리드 저) 전6권 번역서: 한림원 서광계(徐光啓)와 함께 번역함

ㆍ《기인십편》(畸人十篇): 중국 사대부, 선비들과 나눈 토론을 언급하며 기독교 신앙을 소개한 기독교 변증서이다. 성서말씀(마태복음서7:14, 로마서8:18)을 한자로 풀어서 소개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5) 관련 증산도 『도전道典』 성구

* [道典 2:30:1∼8] 이마두(利瑪竇)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현 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되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어다. 그러나 그 공덕을 은미(隱微) 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서양 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 산업혁명을 신명계에서 주도한 분이 이마두 대성사와 진묵대사이다. (도전 측주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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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조선사회는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타개하고 조선 백성에게 새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대안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그러했기에 성리학 이념을 정치로 이화시키고자 뭉친 붕당들간의 격돌과 대립이 불가피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의견 개진과 첨예한 논쟁이 있었던 시기였다.


173송시열, 전환시대의 중심 인물


그 당시 전환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단연 우암 송시열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00년 이상 지속된 긴 대립의 양상 속에서 가장 오랜 정치 생명을 유지했으며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은 이 예학을 실제 정치 현실에 적용시킨 인물로 사후(死後)에 그는 유가의 성인에게 붙이는 자(子)가 붙여져 송자(宋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조선 문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는 당쟁을 조장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으며, 그를 이야기할 때 ‘소인배에게 보내는 공허한 찬사’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


송시열은 1635년에 봉림대군(뒤에 효종)의 스승인 사부(師傅)관직으로 출발하여 이율곡의 계열인 서인의 영수로서 한평생 그의 이념을 실천하고 반대파들로부터 사상을 지키는 완고한 인생을 살다갔다. 그는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었으며, 명나라를 문명의 종주국으로 높이면서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론을 효종과 도모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시열과 허미수의 예송(禮訟) 논쟁


송시열에 관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예송(禮訟)논쟁이라 불리우는 궁중의례에 관한 문제였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왕(효종)을 서자로 보느냐, 아니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특별히 장자로 대우하느냐의 선택을 두고(그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르다) 남인과 서인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효종이 세상을 떴을 때 벌어졌던 1차예송 때(서기 1659년) 송시열이 제시한 서자론을 반박한 인물이 바로 남인의 영수인 허미수(許眉受)이다. 1차 예송 논쟁 후, 15년 뒤에 효종의 비(인선왕후)의 국상(國喪)을 치룰 때에야 비로소 이 논쟁이 매듭이 지어지게 된다.


허미수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송시열과 벌인 예론(禮論) 논쟁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175


허미수가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의 유학자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 일환으로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허미수이다. 허미수를 비롯한 민족주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하였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허미수 역시 1670년대에 『동사(東事)』라는 역사서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치는데, 당시 정권의 주요 실세였던 남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자학적 입장에서 우리민족을 중국과 구별하며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단군문화 정통론’을 추구하였다.


허미수와 송시열은 당시 통상적인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대결은 올바른 한민족 역사의 원시반본을 추구하는 정신과 중국 중심의 존화사대주의 정신간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미수의 역사관


허미수가 쓴 『동사(東事)』는 기존의 중화사대주의적인 사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첫째, 한국사의 첫머리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내세워 단군조선이 우리역사의 기원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을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하고 있다. 


둘째, 그는 숙신, 예맥, 말갈 등 백두산 북쪽의 족속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모두 함께 단군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후에 20세기 초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영향을 준다. 


셋째, 그는 당시 유가들이 신화적인 요소를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척한 것과는 달리 단군의 신이성(神異性)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단군의 순방한 정치가 1천 년간 지속되었다면서 이상정치의 연원을 요순이 아닌 단군 통치시대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허미수의 역사관은 훗날 민족주의 역사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허미수의 영향을 받은 홍대용 이후 북학사상가들은 ‘조선=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 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해 간다. 이러한 인식은 다시 근대 민족주의 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고 오늘날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시금석이 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사대주의에 매몰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주의에 빠졌지만, 허미수의 『동사』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 고유의 정통성을 복구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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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강세와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린 최수운


박수영 / 객원기자


동학이라고 하면 흔히들 인내천(人乃天)을 생각합니다.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최고의 인본주의와 ‘만민 평등사상’으로 알고 있지요. 하지만 인내천이란 말은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 바꾼 3대 교주 손병희의 용어입니다. 그러면 동학을 창시한 최수운이 동학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최수운(1824~1864)은 누구인가?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아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입니다.


최수운은 경주의 몰락한 양반인 아버지 최옥(崔鋈)과 재가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흔히들 말하는 신동이라 불리며 어른들의 큰 관심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10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더욱이 그즈음 집에 화재가 나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생활고를 겪으면서 자신의 미래와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던 수운은 세상을 구원할 큰 도를 구하리라 마음을 먹고 10년간 유랑을 떠납니다.


세상을 구하리라
19세기 말, 세계는 근대화의 태동으로 서로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혼란스러웠고 당시의 조선은, 화친(和親)이 나라를 파는 것이라 여겨 더욱 문을 닫으려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점점 유교의 질서가 무너지는 혼란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1971855년(철종 6년) 3월 최수운이 32세 되던 을묘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며 한 승려가 100일간 정성을 들여 받아냈다는 신기한 책을 건네주면서 그에게 해석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책이 바로 〈을묘천서 乙卯天書〉입니다. 수운이 책을 해석해 주자 그 책과 승려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책의 내용이 전해지는 바는 없고, 다만 그 가운데 “지극한 정성으로 한울님께 49일간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梁山郡) 천성산(千聖山, 원효스님이 당나라에서 온 1,000명의 스님을 화엄경으로 득도하게 했다고 전해진다)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숙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다음해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다시 49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습니다. 이 무렵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濟愚)라고 고쳤습니다.


“너는 상제(上帝)를 알지 못하느냐?”
세상 사람을 구하리라는 큰 뜻을 품고 구도에 정진하던 중 1860(경신)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당시 조정을 장악한 세도가문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고, 탐관오리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양을 집어삼키려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더욱 거세게 밀려들어와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져만 갔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수운은 더욱 수련에 정진하고 마침내 세상 누구도 듣기 힘든 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4월 초닷샛날, 갑자기 크게 두려움이 느껴지면서 온몸에 오한이 나고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천주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최제우)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勿懼 勿恐하라. 世人이 謂我上帝어늘, 汝 不知 上帝耶라. 『동경대전』 포덕문)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최제우)에게 무궁무궁한 도법를 주노니 닦고 다듬어 수련하여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하여금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동경대전』 논학문)

侍天主(시천주) 造化定(조화정) 永世不忘(영세불망)萬事知(만사지)
(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이때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수운이 인류의 새 세계를 알리라는 한울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하였으니 이것을 천주님과의 ‘천상문답사건’이라고 합니다.


수운이 한울님의 명을 받들어 동학을 창도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상도 일대에 동학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 급속한 전파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는 ‘사악한 가르침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사도난정邪道亂正]’는 죄목으로 수운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자년 (1864년) 3월, 대구 감영에서 수운이 처형을 당할 때 그가 청수를 모시고 상제님께 기도를 올리자 비로소 목이 베이니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그는 한울님의 천명에 따라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약 4년동안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펴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라는 가사를 지었습니다.



동학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최수운이 한울님의 음성을 듣고 천명을 받아 우리에게 전하려 했던 참뜻은 무엇일까요?


첫째, 세계 정치, 문화, 종교를 통일하는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출현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알까보냐. (『용담유사』 용담가)
유도 불도 누(累) 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용담유사』 교훈가)
만고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연천해서 억조창생 많은 백성 태평곡 격앙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


둘째로, 이 무극대도를 펴시는 한울님이 친히 이 땅에 강세하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신앙의 시대, 즉 천주(성부하나님) 시대를 선포하였습니다.


한울님이 내 몸 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용담유사』 안심가)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용담유사』 안심가)
호천금궐 상제님도 불택선악 하신다네. (『용담유사』 안심가)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용담유사』 도덕가)


셋째로, 새로운 우주시대가 도래했다는 개벽의 소식입니다. 이 개벽은 전 세계의 3년 괴질병을 통한 개벽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지극한 정성으로 참하느님을 믿어야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5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용담유사』 용담가)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용담유사』 용담가)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
그말 저말 다 던지고 한울님을 공경하면 아동방 3년 괴질 죽을 염려 있을쏘냐. (『용담유사』 권학가)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가련하다…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 (『용담유사』 안심가)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나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 믿고. (『용담유사』 교훈가)


수운은 자신을 믿지 말고, 장차 “인간으로 강세하실 새 하느님(한울님)을 신앙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천주교가 들어와서 천주와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라고 열을 올리고 있던 19세기 말, 수운은 ‘하느님이 친히 이 땅에 강세하시게 되므로 사람으로 오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새 시대를 개벽하는 무극대도가 출현한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 복음을 5년간 전한 최수운은 갑자년(1864) 3월 10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유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다


최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직접 천명을 받고 또한 한울님의 가르침을 펴 세상을 구원하려 했지만, 그는 중화주의 세계관과 유교적 환경의 당시 사회에서 한울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의 떳떳한 것이요, 오직 한결같이 중도를 잡는 것은 인사의 살핌이니라.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아는 것은 공부자의 성스러운 바탕이요, 배워서 아는 것은 선비들의 서로 전한 것이니라. 비록 애써서 얻은 천견박식이라도 다 우리 스승이신 공자님의 성덕으로 된 것이요 옛 선왕들이 지켜 내려온 바른 예법을 잃지 아니한 것이니라. (『동경대전』 수덕문)


공자를 인류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수운 자신은 공자가 이미 완성시킨 도법을 조금 고쳐 쓸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동학은 2대, 3대를 거치면서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한울님을 점점 상실하게 됩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모실 시(侍)’ 자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면서 ‘모신다는 것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순수한 마음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자 우주의 기운과 한울님의 기와 접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한울님의 인격적인 면은 사라지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또한 각자의 마음이 모두 한울님에게서 온 것이므로 모두가 평등하며, 사람의 마음과 하늘이 같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양천주(養天主)’로 왜곡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천주’의 가르침은 ‘신분 차별 타파’를 주장하는 데에 이용되는 등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본격적으로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펴 하늘과 인간이 같은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맺는 말


한번 얼어버린 물을 모양이 다른 그릇에 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부를 버려야 겨우 담아지게 되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것이 어쩌면 수운의 유교처럼 우리를 가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그 틀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남의 손에 의해깨어지기보다는 스스로 깨어나 비상해 보면 어떨까요? 안 될 거야 하기보다는 가능하다는 적극적인 신념으로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앞에 세상에서 들어보기 힘든 큰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동경대전(東經大全)』
최수운이 처형될 때 이 책도 불태워졌으나 동학의 제2세 교조 최시형이 1880년(고종 17년) 비밀리에 간행했습니다. 내용은 본문과 별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과 그 뒤에 운문체의 여러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담유사(龍潭遺詞)』
최수운 대성사가 지은 모두 9편의 가사를 싣고 있는데, 서양세력이 밀려오는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이에 맞서는 정신적 자세로서 동학을 내세우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 가사체의 형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①용담가(龍潭歌):수운의 고향인 경주구미산 용담의 경치와 득도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풍수지리사상과 충효사상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②안심가(安心歌):당시 사회에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려는목적으로 지었습니다. 천대받던 부녀자들의 덕을 칭송하고 좋은 시절이 오면 여성이 주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③교훈가(敎訓歌):동학교도들에게 수도에 더욱 힘쓰라는 내용입니다.
④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자식이 없던 노인이 금강산에 들어가 빌어 옥동자를 얻었는데, 이 아이는 난세를 한탄하며 천하를 돌아다니던 중 금강산에 이르러 꿈속의 도사를 만나 득도했다는 내용입니다. 최수운 자신의 삶과 득도과정을 나타낸 내용입니다.
⑤도수사(道修詞):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떠나게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도 닦기를 간절히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⑥권학가(勸學歌):동학을 믿음으로써 다함께 동귀일체(同歸一體, 인간의 정신적 결합을 뜻하는 말로 저마다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울님의 참뜻으로 돌아가 한몸같이 되는 일을 이르는 말) 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입니
다.
⑦도덕가(道德歌):가문과 학식보다는 도덕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내 몸에 이미 모시고 있는 한울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내용입니다.
⑧흥비가(興比歌):시경(詩經)※의 노래체인 흥과 비를 이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도는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⑨검결(劍訣):이 노래가 문제가 되어 최수운은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시『용담유사』가 간행될 때에는 이런이유로 수록되지 못했습니다. 갑오농민전쟁 때 군가로 불리기도 했으며 최수운의 변혁의지가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 시경(詩經): 오경(五經)의 하나. 중국 최고의 시집으로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주나라 초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시311편을 세 부문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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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맥을 이은 장군 강감찬


박수영 / 객원기자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은 우리나라 선맥(仙脈)을 인물별로 정 리한 『해동이적(海東異蹟)』이란 책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 중 한분입니다. 강감찬 장군의 놀라운 행적을 따라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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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948~1031)은 누구인가? 


14108_p172_01강감찬(姜邯贊)은 고려의 문신입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고려 제3대 정종 948년 11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983년(성종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 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예부시랑이 되었습니다. 그 뒤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학 사, 승지, 중추원사, 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습니다.


사후에는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입니다.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습니다.


하늘의 별이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아이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인 낙성대는 ‘별이 떨어진 곳(落星)’이란 뜻으로, 장군의 탄생 이후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어느 날 한 사신이 밤에 동리로 들어서는데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관리를 보내어 그 집을 잘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강감찬이었습니다. 강감찬은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감식안(鑑識眼. 어떤 사물의 가치나 진위 따위를 구별하여 알아내는 눈)이 뛰어난 중국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여 여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신의 눈에는 딱 한 사람만이 눈에 띌 뿐이었습니다. 사신의 눈에 띈 그 사람은 맨 앞줄에 서 있었는데, 허름한 옷에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사신은 불현듯 그 쪽으로 가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문곡성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몰랐었는데 여기 동방(東方) 고려에 있으시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강감찬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문곡성이 하늘에서 죄를 입어 인간 세상에 내려와 벌을 받게 되신 것이라 말했다 합니다.


천기누설을 막기 위해 입을 닫다


14108_p172_02강감찬은 아홉 살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의관이 멀쩡하고 글도 배우고 무엇이든 잘하는데, 단지 말 만 못한 것이죠. 어머니는 “언젠가는 감찬이가 말을 하겠지” 믿으며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보살폈습니다. 

아홉 살 가을, 고종사촌 누나의 혼인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잔치에 갈려고 부산히 준비하고 있는데, 감찬이 다가와서 “어머니 고종누나 혼례식에 소자도 갈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응!? 네가 말을 했느냐, 어찌 말을 하는구나, 이런 축복이 어디 있느냐. 암, 가고말고. 가야지, 친척 어른들도 뵙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감찬은 한마디만 하고선 더 이상 말이 없습니다. 어머니 혼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습니 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못한다고 생각한 아들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으니까요. 저녁 무렵의 혼례청에는 하객들이 가득했습니다. 고대하던 새 신랑이 혼례 마당 초석자리 위에 섰습니다. 훤칠하게 잘 생긴 신랑을 보느라 웅성웅성 정신들이 없었습니다. 그때 별안간,

“이 노옴. 네 본색을 밝혀라.”

감찬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하객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새 신랑도 놀란 토끼눈으로 소리 난 쪽을 살피 고 있었습니다. 한걸음 앞으로 쓱 나선 감찬이 또 다시 크게 외치며 새 신랑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이 노~옴! 네 정체를 밝히지 못하겠느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둔갑(遁甲)술로 속이려 드느냐!”

하객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말 못한다고 집안의 걱정거리였던 감찬이가 그것도 새 신랑을 보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감찬을 쳐다보던 새 신랑 얼굴이 푸르락 불그락하고 몸을 들썩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노~옴! 그래도 네 놈이!”

감찬의 우레와 같은 이 한마디에 버티던 새 신랑이 서너 번 곤두박질을 치고 넘어져 턱 뻗었습니다. 그리고는 스르르 여우로 변해갔습니다.

“오다가 새 신랑이 소피 본 일 있지요?”

새 신랑과 함께 온 하인들에게 감찬이 물었습니다.

“예, 까치 고개에서 소피를 보고 왔습죠!”

감찬은 그 말에 서두르며 말했습니다.

“시각이 급하니 속히 가보시오.”

새 신랑이 소피를 본 장소에 이르자 천년 묵은 여우가 새 신랑을 발가벗겨 바위틈에 쿡 끼워 놓은 것이 아니 겠습니까?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며 저체온으로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같은 일화에 의하면, 하늘의 상제께서 강감찬이 열 살까지 천기누설을 못하도록 입을 봉해 고려에 보내신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고종사촌 누나 때문에 명(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만약 열 살까지 명을 받들었으면 대국(大國: 중국)의 천자가 되거나 아니면 대국을 호령할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강감찬의 놀라운 능력

-마마신을 수하처럼 부리다
원래 강감찬은 얼굴이 아주 잘생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추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마신 곧 시두손님은 천자(天子)의 출현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막강한 신인데, 강감찬은 마마신을 수하처럼 부렸으니 그 도력의 경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호랑이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다
강감찬이 한양판관으로 새로 부임하였을 때 경내에 호랑이가 많아 관리와 백성이 많이 물려 죽는 일이 발생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잠시 생각에 몰두하던 강감찬은 아전(衙前, 지방 관아에 속한 벼슬아치)을 불렀습니다. 

“내일 새벽에 삼각산에 올라가면 늙은 중이 바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려 오너라.” 

다음날 새벽, 아전이 삼각산을 올라가 보니 과연 늙은 중이 바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전은 그를 강감찬 앞에 데려 왔습니다. 강감찬이 중을 보고 꾸짖기를 “너는 비록 금수(禽獸)이지만 또한 영(靈)이 있는 동물인데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해하느냐. 너에게 5일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무리를 인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굳센 화살로 모두 죽이겠다.” 

이 말에 늙은 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뿐이었습니다. 이 이상한 광경을 보던 아전이 강감찬에게 영문을 물으니 강감찬이 늙은 중을 보고 명하기를 “본 모양으로 화하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한 마디에 그 중은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한 마리의 호랑이로 변하여 난간과 기둥으로 뛰어 오르니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아전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강감찬이 “그만 두어라.” 하니 호랑이는 다시 늙은 중으로 돌아가서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습니다. 다음날 아전이 동쪽 교외로 나가 살펴보니 늙은 호랑이가 앞장서고 작은 호랑이 수십 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갔다고 합니다. 

-개구리의 소리를 멈추게 함
강감찬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백성들은 강감찬을 추남이라고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백성들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강감찬이 돌에다 명령서를 써서 개구리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 이후로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못생긴 사또라 하여 강감찬을 무시하던 고을 백성들이 강감찬의 말을 잘 따르게 되었습니다.

-고을의 물을 마르게 하다
강감찬이 한여름 강릉에서 원주로 행군하던 중 대화면 하안미를 지날 때였습니다. 이 일대는 늘 물이 귀하여 봄가을에는 먹을 물이 부족하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강감찬이 목이 말라 물 긷는 아낙네한테 물을 청했으나 아낙네가 인심이 고약하여 물이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강감찬은 이를 괘씸하게 여겨 이 마을에 다시는 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부적을 한 장 써 붙이고 갔습니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벼락을 잘라버리다


14108_p172_04강감찬은 전쟁 중에 벼락으로 죽은 병사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고 염려해서 벼락 칼을 분질러 없애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똥을 누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벼락 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을 치려고 했습니다. 강감찬은 얼른 벼락 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 칼도 반이 잘려버린 터라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감찬이 죽은 후 다시 문곡성의 원신으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 뇌신(번개신)이 나타나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벼락 칼이 반토막이 난 것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문곡성은 그 이후부터 벼락 칼을 잇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원상태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은 칼은 직선으로 잇기가 불가능하여 엇갈리게 접합시켜 지금의 벼락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푼 깊은 배려
거란족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한 강감찬을, 당시의 왕 현종은 큰 연회를 베풀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 꽃 장식)를 만들어 머리에 꽂아주는 극진한 환영을 하였습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장군은 슬며시 일어나 내시를 향해 따라 오라고 눈짓을 보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주위를 살핀 후 아무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시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주발을 열었더니 빈 그릇이더구나. 아마도 너희들이 실수를 한 모양이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내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습니다. 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감찬 장군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됐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한 가지 묘안이 있으니 그대로 하거라.” 

강감찬은 내시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장군은 자리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울렸습니다. 그때 내시가 다가와 장군에게 말하기를 

“장군님, 진지가 식은 듯하오니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빈 밥그릇을 들고 나온 내시는 따뜻한 밥이 든 밥그릇을 들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은 귀주대첩


거란의 성종은 여러 차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018년 12월, 소배압(거란족 출신의 요나라 장군)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 감찬과 강민첨이 군사 20만 8,300명을 안주(황해남도 재령군의 고려때 이름)에 주둔시켰습니다. 강감찬은 다시 흥화진(평안북도 의주군 일대를 칭하는 고려 때 이름)으로 나아가 정예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내(흥화진 앞의 삼교천)를 댐처럼 막고 거란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려로 진격하던 거란군은 수심이 얕아진 삼교천을 아무런 의심 없이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란의 군사들이 삼교천의 중심부에 이르자, 고려군은 막았던 물을 터서 거란군에게 공격을 가하였고 거란군이 혼란에 빠지자 이번에는 매복해 두었던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배압은 이에 아랑곳없이 개경(개성의 고려 때 이름)을 향하여 공격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에 강민첨이 이를 추격하여 10만 대군을 대파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계속 하여 개경을 향해 공격을 하니 고려군은 이에 대한 새로운 방어계획을 준비하였습니다. 귀주(압록강이남 청천강 이북에 있는 강동 6주의 하나)는 우리나라 서북쪽의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오기 위해서는 서북계의 북로와 남로 두 통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귀주는 북로의 중심지입니다. 그런 까닭에 귀주는 중국으로부터 침공이 있게 되면 항상 대접전이 벌어졌던 지역이었습니다.

14108_p172_05한편 소배압의 거란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019년 1월 3일에는 개경에서 백리(1리는 약 0.4㎞ 그러므로 약 40 ㎞정도) 떨어진 신은현(황해북도 신계군의 고려 때 이름)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청야전술*로 대응해 도성 밖의 곡식은 모두 제거하고 백성들은 성 안에 대비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군의 대비가 강화되자 소배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고려군은 개천(평안남도 서북부의 도시)에 이른 거란군을 급습하여 5백여 명을 죽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이 2월 1일 귀주를 황급히 빠져 나가려 하였습니다. 이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이를 요격(공격해 오는 대상을 기다리고 있다가 도중에서 맞받아치다)하였는데, 마침 개경에서부터 추격해오던 고려군이 가세하고 또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몰아와 고려군에게 유리해져서 이를 틈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들을 덮었으며, 말과 무기 등 거란군에게서 빼앗은 물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 다고 합니다. 처음 10만이라고 칭하던 요나라 군사 중 살아 돌아간 자는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거란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려 침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참패였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이 전투 패배의 책임 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가벼이 여겨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여 버리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 70이었습니다. 


맺는 말


주변의 분들에게 강감찬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답은 귀주대첩, 키가 작다, 못 생겼다, 얼마 전 드라마 속의 인물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난세에 나라를 구한 분들도, 자신을 희생해서 만인에게 도움을 준 분들도 분명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우리 조상들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 입시위주의 암기 교육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이를 낳아놓고 마치 성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는 불과 200년 남짓한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우리는 일만 년 역사를 반 토막 낸 것도 모자라 오천년 역사마저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알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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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고려 태조 왕건 이후 삼국을 통일한 뒤 신흥사(新興寺)를짓고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벽에 삼한공신의 초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 한벽상공신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북두칠성과 문곡성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서 벌성(伐星)이라고도 하니, 하늘의 이법으로 무도한 것을 치는 일을 합니다. 오행 중 수(水)에 속하며 하늘의 모든 권리를 한 손에 거머쥔 별입니다. 하늘의 저울추인 천권성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로는 김유신(등에 칠성무늬), 강감찬 장군(문곡성), 정몽주(어깨 위 칠성모양의 검은 점 7개), 안중근(가슴에 흑점 7개, 그래서 칠성이 응했다 하여 ‘응칠’이라고 불렀다) 등이 있습니다.

낙성대
14108_p172_03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落星垈)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기 위해 3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거란의 40만 대군을 무찌르는 등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 그를 기리기 위해 1973년 사당과 부속 건물을 새로 세우고 석탑도 지금의 낙성대 경내로 옮겼다고 합니다. 1974년 2m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사적임을 표시하였습니다. 
특히 층 석탑(서울지방문화재 제4호)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탑에는 ‘강감찬 낙성대(姜邯贊落星垈)’란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강감찬 나무
서울시 자료와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울시 기념물로 최고령 나무는 수령 1천 살이 넘은 관악구 신림동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입니다. 이는 강감찬이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나무로,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아 아직도 굵은 도토리를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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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대성사(732~?)는 누구인가? 
진표대성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성덕왕*때 완주군(完山州:전주) 벽골군(碧骨郡) 두내산현(豆乃山縣:지금의 만경) 대정리(大井里)에서 사냥꾼인 정(井)씨 성(姓)의 아버지 진내말(眞乃末)과 어머니 길보랑(吉寶郞)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에 얼굴이 부처와 닮아서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3살 때에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불경을 읽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마을에서 대대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진표는 날쌔고 민첩하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합니다.


소년, 구도의 길을 떠나다

진표가 11세 되던 해에 동네 아이들과 같이 산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가던 중 개울가에서 잠시 쉬면서 개구리를 열 마리 가량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개울 물속에 담가 두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개구리는 까맣게 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이듬해 봄, 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물 속에서 개구리 소리를 듣고 그 물속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지난해 잡아두었던 개구리들이 버드나무 가지에 꿰인 채 죽지 않고 울고 있었습니다. 이에 진표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날부터 생사의 문제를 비롯한 인생의 본질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출가할 뜻을 밝혀 허락을 얻어내고는 12세 때에 드디어 험난한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숭제법사를 만나다
금산사로 들어간 진표는 숭제법사 강하로 가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어느 날 숭제법사는 진표에게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고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전해주면서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 지장 앞에서 간절히 진리(法)를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숭제법사로부터 부지런히 수행하여 1년이면 계(戒)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해들은 진표는 미륵님으로부터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겠다는 큰 이상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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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진표대성사는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수행하고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어느덧 그의 나이 27세 되던 신라 경덕왕 19년(서기 760년), 쌀 두 가마를 쪄서 말린 식량을 가지고 부안 변산에 있는 선계산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갔습니다. 쌀 다섯 홉을 하루의 양식으로 삼고 한 홉(1홉=약180CC)의 쌀을 덜어내어 쥐를 기르며 미륵불상 앞에서 미륵불의 계법을 구하기 위해 역사상 보기 드문 초인의 정열을 발휘하며 지극정성으로 도를 구하기 위해 정진합니다.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법을 구하다
온갖 정성을 다해 계법을 구한 지 3년이 되어도 어떠한 깨달음도 얻지 못하자 좌절과 울분을 참지 못해 죽을 결심을 하고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몸이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진표대성사를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이에 용기를 크게 얻은 진표대성사는 더욱 분발하여 생사를 걸고 3·7일(21일)을 기약하며 수행에 정진하였습니다. 이 때 진표대성사가 행한 수행법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입니다. 망신참법이란 자기 온몸을 돌로 찧으며 참회하고 수도하는 혈심수행법이었습니다. 망신참법보다 더 진실되게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쳐 참회하는 법은 달리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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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만에 팔과 두 무릎이 뚫어져 피가 흐르고 힘줄이 드러나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에 돌입한 지라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피범벅의 고통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더 수행에 정진하였습니다.


7일째 되던 날 밤, 진표대성사의 지극한 정성이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켰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진표대성사 앞에 불현 듯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금장(비단으로 된 휘장이나 장막)을 흔들며 와서 진표대성사를 간호하였습니다. 그러자 떨어졌던 손과 발이 회복되었습니다. 지장보살은 진표대성사의 손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참으로 지극한 정성이로다. 그대의 정성에 감동하여 이것을 내리노라” 하면서 가사(승려가 입는 옷)와 바리때(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그릇)를 내려주었습니다. 진표대성사는 그 신령스런 감응에 용기백배하여 더욱 수도에 정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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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망신참법으로 수행을 시작한 지 21일이 되는 날, 문득 천안(天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한 마음의 눈)이 열려 멀리 시방세계에서 도솔천의 하느님 미륵존불께서 지장보살과 수많은 도솔천중(兜率天衆)을 거느리고 오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륵존불께서 진표대성사의 머리를 어루만지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참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다니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지장보살은 계본을 주고 미륵존불은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 글을 적은 대 조각)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제 9간자(簡子), 다른 하나에는 제8간자(簡子)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미륵존불은 진표대성사에게 말했습니다.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이름이요, 제 9간자는 구족계(具足戒)를 더 얻은 것을 이름이라.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침향과 전단향 나무로 만든 것으로 모든 번뇌를 이르는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훗날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천상으로 돌아가셨으니 이때가 바로 진표대성사가 30세 되던 신라 경덕왕 21년(서기 762년) 4월 27일이었습니다.




네가 본 그대로 불상을 세워라

도솔천의 미륵불을 친견한 진표대성사는 자신의 도의 경지에서 미래에 닥쳐올 대 환란과 석가불이 예언한 미륵불의 지상강세 모습을 다시 한 번 환하게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진표대성사는 미래의 대 환란기에 미륵불께서 우리 한반도에 오셔서 우리 민족을 구해주실 것과 그 때 자신도 다시 태어나 사람 살리는 큰 일꾼으로 써 주실 것을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하였습니다. 

“네가 본 나의 모습대로 불상을 세워, 나의 강세를 준비하고 미륵불의 진리를 세상에 널리 펴라.” 


진표대성사의 간절한 기도에 미륵불께서 감응하시어 진표대성사에게 당시 모악산 금산사 내에 있는 “사답(寺沓) 칠두락(마지기)” 정도 넓이의 연못인 용추못을 메우고 미륵존불 모양의 불상을 세우라고 계시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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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을 세우기까지 기묘한 사건들 

-메워지지 않는 연못
미륵불로부터 계시를 받은 진표대성사는 금산사 옆에 있는 연못을 메우고 미륵전을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762년 건립시작)에는 연못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하지만 이튿날 보면 다 파헤쳐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몇 번을 반복해도 그 연못은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진표대성사는 지장보살로부터 숯으로 연못을 메워야만 된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진표대성사는 연못을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도력을 써서 인근에 눈병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눈병을 앓는 사람은 누구든지 숯을 연못에 던지고 그 물을 바르면 즉시 효험이 있다’고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러자 안질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이 숯을 한 아름씩 들고 와서 연못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흙을 아무리 넣어도 메워지지 않던 연못이 메워지게 되었습니다.

-옮겨지는 석련대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연못의 중앙 부분은 아무리 하여도 메워지지 않고 샘(우물)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진표대성사는 미륵 불상을 받쳐 세우기 위해 샘 위에 연꽃모양을 조각한 큰 바위(석조 연화대, 일명 석련대)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불상이 채 세워지기도 전에 석련대는 밤새 20미터나 떨어진 곳(현재 석련대가 있는 위치)으로 옮겨져 버렸습니다. 


석련대는 불상을 봉안하는 대석으로 높이가 1.67m, 둘레가 10m 이상이 되는 대형 돌수미좌입니다. 


밑 없는 철 시루 위에 뜬 미륵불

이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아 고심하던 중에 진표대성사에게 다시 ‘밑 없는 시루를 걸고 그 위에 미륵불을 모시라’는 계시가 내려졌습니다. 이에 다시 진표대성사는 연못 중앙에 밑이 없는 대형 무쇠시루를 걸고 그 위에 우물 정(井)자 형태의 나무 받침목을 얹은 다음 철로 된 미륵 불상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공사를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서기 766년에 드디어 완공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금산사 미륵전에 가보면 1200여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오늘까지 전해져오는 석련대와 철수미좌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표대성사가 무쇠 솥을 걸고 그 위에 33척(1척은 약 30cm 정도, 33척은 약 10m)의 금미륵 불상을 세우니, 높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입불상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 금산미륵불은 규모 뿐만 아니라 미륵 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철수미좌(철시루) 위에 올라서 있는 유일무이한 불상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것은 불상의 좌대로 특이하게도 철을 사용했으며 그 크기가 지름이 2.5~3m, 두께가 10cm, 높이가 약 1m의 원통형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금산사 미륵 불상 밑에는 밑이 없는 거대한 시루가 봉안되어 있는데, 지금 이 미륵존불상은 이를 모시고 있는 3층 미륵전과 함께 국보6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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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입구, 법주사내 미륵불
진표대성사는 금산사 미륵불상 외에도 금강산의 발연사와 속리산의 법주사에 모두 3개의 미륵도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점찰법회를 통해 전생과 이생에서 지은 악업을 닦고 10가지 선업을 쌓음으로써 앞으로 미륵불이 이 땅에 오셔서 펼쳐지는 용화세계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평생을 미륵불의 계법과 복음을 대중화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바쳤습니다. 


진표대성사는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금강산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 떨어지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맺는 말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얼마나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뭔가를 이룬 사람을 보면 부러움의 시선과 함께 질투의 시선도 같이 동반을 하지요. 우리는 진정 뭔가를 이루기 위해 진표대성사처럼 목숨을 걸고 시도해 본 적이 있을까요? 망신참법만큼의 정성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결실을 이루지 않을까요? 



------------------------각주-------------------------- 
금산사
통일신라 시기 진표대성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대성사는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진표대성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유사》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산사 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미륵불과 미륵신앙
미륵불은 석가불이 펼친 진리로는 더 이상 세상을 제도할 수 없는 말법 시대가 도래했을 때 도탄에 빠진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건져 이 지상에 용화낙원(龍華樂園)을 건설한다는 희망의 부처요 구원의 부처다. 


용화낙원을 희구하는 미륵 신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천상 도솔천에 계신 미륵불이 언젠가 인간 세상에 하생(下生)할 때 미륵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이를 미륵 하생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석가불 사후 곧바로 시작된 미륵신앙의 본류(本流)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미륵신앙이 생겨난다.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가 아직 멀었으므로 우선 이승의 삶을 마친 직후에 곧바로 미륵불이 계신 천상 도솔천에 태어났다가 후일 미륵불이 하생할 때 같이 내려오겠다는 신앙이다. 이를 미륵 상생(上生) 신앙이라고 한다. 


미륵불 신앙이야말로 불교의 결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부처요 이 지상이 바로 불국토 자체인 세계, 그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세계일진대 미륵불은 바로 그러한 세계를 만드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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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후략)


이상은 충북 옥천 태생의 시인 정지용의 〈향수〉이다. 시어의 조탁과 대상에 대한 묘사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정지용의 이 시는 노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다보면 제목 그대로 우리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면서도 고향, 근본을 생각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의 서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동(東)쪽은 생기가 샘솟는, 생명의 시작이면서 고향과도 같은 방향이다. 바로 이 생명의 기운을 듬뿍 받아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경농(耕農)의 신인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에게 제사지낸 장소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다. 바로 ‘선농단’(先農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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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답사를 서울의 서쪽을 위주로 다녔는데, 이곳은 민족의 시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역들이 많아서 그런지 비장함과 한스러움이 있었다. 반면에 서울의 동쪽을 둘러보면서는 평안하면서도, 새로운 약동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우리 생명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보은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곳이 많은 것 같았다.

선농단은 어떤 곳인가
한양 조선의 수도인 서울의 동쪽은 야트막하다. 한양을 풍수지리학상 볼 때 동쪽에 해당하는 낙산이 서쪽에 해당하는 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낮은 형국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우리 비보풍수(裨補風水) 사상에 의해 동대문의 현판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길게 써서 부족한 기운을 보완하기도 했다. 
동대문 일대를 포함한 지역인 한양의 동교(東郊)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으로 가는 **점이기도 하고, 태조 자신의 능묘(건원릉)도 동교 끝에서 조성되어 있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능묘(고종의 홍릉)도 동교가 끝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동교는 뿌리에 대한 인식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이 동대문 밖 용두동 일대는 홍릉천, 성북천, 정릉천 등에서 내린 물줄기가 지나고 있어 예부터 ‘물맛 좋은 지역’으로 이름나 있다. 여기에 중랑천 일대의 비옥한 땅은 살찐 어미의 젖처럼 창생들에게 생명의 먹을거리를 일궈주었다. 바로 이 벌판 중심에 선농단이 있다. 
선농단은 ‘선농제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뜻이다. 선농단에서 이루어지는 ‘선농대제’(先農大祭)를 지내는 장소, 즉 제터(祭基)라는 이름을 딴 제기 역에서 내려 안암동 로터리에서 종암초등학교 올라가는 다소 언덕진 곳에 선농단이 위치해 있다.

선농단과 선농대제, 그리고 설렁탕
14109_p148_02선농단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단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선농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소급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서는 입춘 뒤 선농제를, 입하 후 중농제를, 입추 후 후농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성종 때 와서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향한 것으로 보이고, 이후부터는 선농제만 지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선농제를 지내는 대상인 ‘신농씨’가 바로 ‘선농신’으로 인식됐다.

조선에 와서는 경칩 뒤 길한 해일(亥日)을 골라 제를 올렸다. 이 때 제물로는 쌀과 기장, 고기는 소와 돼지를 통째로 날것으로(血食) 올렸고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후 근처 친경지에서 왕이 직접 밭가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례(親耕禮)를 지냈다 한다. 
이 때 수고한 조정대신과 일반 백성들에게 소를 잡아 국말이 밥과 술을 내렸는데 그 국밥을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 했고, 이게 닿소리의 이어 바꿈(자음접변) 현상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아는 ‘설렁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농단 일대에는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천하지대본인 농업의 시작과 소중함을 알리는 의식을 행한 적전(籍田)이 있었다. 이 적전에서 행하던 의례[籍田禮]는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이어져 왔다. 융희 4년인 1910년 경술년 5월 5일에 마지막 선농제가 지내졌는데, 그 전해인 융희 3년 융희제가 쓴 〈친경가〉를 잠깐 살펴보자.

“융희 3년 춘 4월 5일이라 선농단하 동적전 친임하시와 
천하대본 농사로 세우모야 만민이 표준으로 미시는 장가
삼천리강산 이리로 개간(開墾)일세 농상(農桑)증(增) 호구(戶口)증(增)…….”


이 선농단에서는 선농제 외에도 가을에 왕이 벼를 벼는 행사라든가, 기우제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 민족말살정책으로 중단되었고, 선농단 자리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사범대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원형이 훼손되었다. 
이후 선농제는 1979년 제기동의 뜻있는 주민들의 조직으로 치제(致祭)를 지내다 1992년 이후부터 동대문구가 중심이 된 국가행사가 되었다. 원래는 경칩 후 첫 해일(亥日: 길한 해일이라 해서 길해吉亥)에 지내던 것을 현재는 곡우에 지내고 있다.

현재 선농단에는 사방 4m의 석축단과 제를 지내는 장소와 천연기념물 240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남아있다. 몰지각한 일부 시민과 청소년에 의해 석축이 훼손되고, 천연기념물 보호 차원에서 현재는 특별한 행사때 외에는 개방하고 있지 않다.

선농단의 주인 신농씨와 후직씨
그렇다면 여기서 경농의 신이라 해서 선농단에서 제를 올리는 신농씨와 후직씨는 어떤 인물일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신농씨는 전설상의 제왕이고, 후직씨는 중국 주나라의 시조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삼황오제와 고대 하상주 왕조에 이르는 문화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들은 중국민족과 별 관련이 없는 우리 배달 조선족이 현 중국대륙을 경영할 때의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상세한 사항은 개벽실제상황 184쪽 표 참조)

14109_p148_03사실 신농씨에 대한 온전한 모습은 우리 고구려 벽화 속에 살아 있다.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오회분 4호묘, 5호묘 벽화를 보면 소머리에 오른손에 벼이삭을 든 신농씨의 모습이 나온다. 또한 삼실총에는 소 얼굴에 제비 옷을 입은 신이 하늘을 날고 있으며 한손에는 풀, 나무, 혹은 무기를 들고 있고, 머리 근처에 태양이 떠 있기도 하다. 우리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신화적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생동적인 신농씨에 대한 묘사나 그림이 없다. 이는 자기네 조상과 직접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소의 머리를 한 신이 농업을 가르치다
흔히들 신농씨를 묘사하길 소의 머리 형상 또는 용의 머리 형상을 한 인물로 한 손에는 벼이삭 또는 백초를 맛보는 데 사용했다는 채찍을 들고 있다. 신화에서 신의 이름은 그 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특징을 말해주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 신의 업적들을 잘 나타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염제 신농씨는 배달국 8세 안부련 환웅천황의 신하인 소전씨(유웅국의 임금)의 아들이다. 염제 신농씨는 강수(姜水: 즉 기수岐水로 지금의 산시성 봉상현 북쪽 기산岐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감)에서 태어나 성을 ‘강姜’이라 하였다 한다. 이 강 씨 성은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래된 성의 시원이다. 성씨를 가졌다는 것은 고대에도 문명화된 집단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염제 신농씨는 최초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붙는다. 
문화, 문명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경작(耕作, 耕田)이듯이 수렵채취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을 시켜준 이가 바로 신농씨였다. 당시에는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산이나 들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는 농사가 선행되었다. 즉 인류 첫 농사는 화전농사였다. 그래서 신농씨의 앞에 붙은 염제(炎帝) 또는 열산씨(烈山氏)는 바로 이 화전 농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농사의 신(神農)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농업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4109_p148_04또한 신농씨의 얼굴이 소머리로 묘사된 것은 우경농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신농씨는 농경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었다. 이후 소를 이용해 쟁기를 끌어 고랑을 만들었고 사람은 이곳에 씨를 뿌리는 일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이 쟁기를 사람이 끌다가 조금 지나서는 작은 동물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가 끌었다. 소가 쟁기를 끄는 일은 20세기 후반까지 변치 않은 농법이다. 소는 농부 10여 명의 힘을 발휘하면서 신에 버금가는 역할을 했다. 

또한 신농씨는 인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 경농의 시작과 함께 의약의 시초가 된 것이다. 즉 약을 발명하였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신농씨에게는 의약과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그 대강을 보면, 백초를 맛보아 독초를 가려내고, 중독된 독을 회복하기 위해 차를 처음 마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독초에 의해 중독돼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전설로는 단장(斷腸)초를 먹어서 산채로 장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 죽었다고 하는 기록들이 나오는데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해 스스로를 헌신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한의학에서는 신농씨를 의약의 창시자로 추존하고 있다.

여기에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여 태양이 머리 위 정 중앙에 올 때 지정된 장소에서 상품거래를 하고 일정시간 후에는 해산하게 하는 교역(置市)을 최초로 하게 하였다 한다. 즉 경제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장이란 형태를 최초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신농씨는 인간이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복록(먹을거리: 경농과 시장 설치 등)과 수명(의약 발명등)에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내려준 동방의 성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자는 신농씨 시대를 ‘태평성대요 걱정이 없는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자』외편 거협胠篋편 참조)

신농씨의 후손들, 강태공, 후직씨
신농씨는 현존하는 인류 성씨의 시원인 강(姜)씨의 시조이다. 원래 가장 먼저 생겨난 성씨는 풍(風)씨였지만 그 맥이 이어져 내려오지 못했다. 가을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고자 동방의 조선 땅에 강세하신 증산 상제님의 존성(尊姓) 또한 강(姜)씨다.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신농씨이기에 그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도 많고 실제 그 후손들도 많다. 대표적 인물로는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보좌하여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서주왕조를 세운 태공 여상이 있다. 강태공은 후에 지금의 산둥반도를 다스리는 제(齊)나라를 봉토로 하사받았다. 그 외 베트남 등지에도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또한 선농단에 같이 배향된 후직씨의 어머니 역시 신농씨의 후손으로 강원(姜嫄)이다.

후직씨의 초기 이름은 기(棄:버릴 기: 후직씨의 탄생 설화는 고구려 추모대왕과 유사하다. 자세한 사항은 『사기』「주본기」참조)로 어릴 때부터 삼과 콩 따위를 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는 요임금 시대로 기(棄)는 농업에 관한 직책을 맡아 크게 흥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주 왕실의 성인 희(姬)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이 후직씨의 15대 손이 바로 주나라 문왕이다. 

한해 농사를 마감하며 보은의 기도를 올리다
올해도 어느덧 한 해의 농사를 거두는 추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유래 없는 폭우로 인해 흉년이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농사짓는 일은 생산 활동이기도 하면서 기원의 행사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신농씨와 땅을 지키는 신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노동요를 통해 자신들을 위로하고 씨 뿌리는 들판을 축복했다.

농사는 천지의 신과 인간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늘과 땅, 씨앗, 기후와 농부 사이의 쉼 없는 대화인 것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하늘의 따뜻한 양기를 받아 싹이 터 오르면, 기름지고 습한 지기는 이를 품어 뿌리마다 흙속에서 긴 발을 곧게 드리우게 한다. 여기에 인간이 정성스럽게 가꿀 때 잎사귀는 땅 위로 뾰족한 끝을 내밀면서 움터 무성하게 자라난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한 줌 뿌린 씨앗들이 구덩이마다 천배의 낟알로 되돌아온다. 이렇듯 곡식 포기를 받들어 밥 한 그릇을 짓는 일은 결코 사람이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닌 천지와 더불어 살림을 하는 일이다.

선농단 향나무를 바라보며 기원해 본다. 생명의 뿌리인 조상에 대한 보은 의식과 농사를 짓는 법을 알려 인류문명 발전에 기여한 신농씨와 후직씨에 대한 보은의 마음을 지니게 해달라고. 천지에서는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조화로써 지어주시고, 이를 정성껏 가꾸고 거두는 농부의 수고로움으로 인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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