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 139주 태모고수부님 성탄치성 안내 예고



https://youtu.be/XJKRMnMF42s


인간으로 강세하신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종통 대권을 전수받으신 태모 고수부님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 1911년 신해년 도장개창을 선언하시고

일제시대 보천교 600만 대부흥의 역사시대를 여셨습니다.

"이 세상에 옳은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살려야지요."(도전 11:324:5)

억조창생의 생명의 어머니로서 대속의 삶을 살다 가신 태모 고수부님!

태모 고수부님은 천지의 가을 개벽기를 맞아 증산 상제님과 합덕하시어

새 천지를 열어주신 우리들의 어머니이십니다.

음력 3월 26일은 모든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 하나님이신

태모 고수부님께서 탄강하신 성스러운 날입니다.


일시 : 5월 11일(음력3.26) 오후 8시

장소 : 증산도 교육문화회관(대전)

문의 : 1577-1691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은 보천교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을 일제강점기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한 민족종단의 하나인 보천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오는 26일 전주 전북의회 의원총회의실에서 ‘전북지역 민족종교 세력의 항일운동’을 주제로 열리는 전국 규모의 학술대회에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보천교 운동 지도자인 차경석에 대한 1차 사료에 기초한 다양한 최신 연구 성과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발표는 1920년대 보천교 운동세력의 간태합덕론이 한미동맹 전략의 원형이 됐다는 내용이다.


보천교 교리에는 일본이 침략전쟁의 화살을 미국으로까지 돌리면 미군 참전과 함께 일본이 대패하고 한국이 해방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남창희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발표 논문에서 보천교 후손들의 증언과 다양한 문서자료를 근거로 보천교의 ‘한미 찰떡 궁합론’과 이승만의 한미동맹 간 유사점을 발견했다.


남 교수는 한미동맹이 이승만대통령의 혜안이나 독단에 의한 것이라는 통설은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제강점기 한때 신도 규모 600백만 명을 보유한 보천교의 교리, 즉 미국의 일제 축출설에서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을 조명해야 한다는 것.


남 교수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 재정지원의 중심이었던 전북지역 보천교 운동세력은 1920년대부터 미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유포시켰다. 보천교 장학생이었던 불교계의 거성 탄허 스님의 유명한 한미동맹 운수론도 보천교의 한미찰떡 궁합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전북지역 민족종교 세력의 독립운동 학술회의는 향후 학회 창설로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399207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만유 생명의 어머니 태모 고수부님 소개
증산도, 만유 생명의 어머니 태모 고수부님 소개
https://youtu.be/pPcQo13PrVY

태모 고수부님. 하늘땅과 억조창생의 머릿여자-수부-이시며, 가을 개벽천지의 정음정양 도수를 인사로 실현하시는 천지 만물과 온 인류의 생명의 어머니-태모 Great Mother-이시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상생칼럼 |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정읍의 보천교


주미라 / 교무녹사장, 나주남내도장

우리나라의 역사는 뿌리 역사 7천년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고대사를 잃어버린 그 악업으로 근세 역사까지 왜곡되고 은폐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보는 두 눈을 잃어버린 셈이다. 잃어버린 근세사, 그 중심에 우리의 민족종교가 있었으니 바로 보천교普天敎(1916~1936)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탄압으로 절망에 빠져 있던 우리 민중들의 유일한 희망이 보천교였다. 지금 보천교에 대한 역사는 까맣게 잊혀졌으니 일본이 지워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 실로 다급한 일이다. 

보천교는 증산도 제1변 부흥기에 증산상제님을 신앙한 교단으로 증산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차경석 성도가 전라북도 정읍 대흥리에 세운 교단이다. 증산도 제1변 부흥시대는 증산상제님으로부터 직접 종통宗統을 전수 받으신 태모 고 수부님이 첫 교단을 개창하신 신해(1911)년 이후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무엇보다 태을주太乙呪의 수많은 기적이 터지면서 당시 조선의 인구 1800만 중 700만 명에 이르는 구도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대부흥 시대를 열었다. 1920년 주한 미 총영사관인 밀러가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보천교 자료에는 신도수가 6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정도의 도세면 거의 나라의 국교國敎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 암울했던 시대에 민중의 마음속에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후천개벽’ 과 ‘지상 선경 건설’ 이라는 보천교 교리는 그야말로 구원의 복음이었다. 당시 태을교 또는 훔치교, 선도교로 불리던 이 종교단체의 수장은 차경석車京石이란 분이었다. 사람들은 교주 차경석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인으로 섬기며 ‘차천자車天子’라 불렀다. 차경석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증산도 도전道典 속에는 차경석 성도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차경석 성도는 본인도 동학의 간부였고 아버지(차치구)도 동학의 접주였다. 이미 10대 중반의 소년 시절에 정읍에서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어났던 아버지를 모시고 직접 전쟁터에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혁명가로서 역동적인 삶을 산 것이다. 그는 28세 되던 1907년에 증산상제님을 만나게 된다. 이후 인생이 바뀌게 되는데 상제님을 뵙자마자 신성함에 놀라서 줄기차게 모시기를 간청하다 결국 허락을 받고 그 이후로 줄곧 상제님을 모셨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에는 차경석이 교단을 주도하면서 전국에 걸쳐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포교 대부흥을 이루었다. 기유년(1909)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차경석 성도의 인물을 평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석은 대재大才요 만인지장萬人之長이 될 만하다. 너한테 일극一極을 주노라”(도전 3편 291장). 경석은 큰 격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다는 말씀이다. 상제님은 차경석 성도에게 과거 동학혁명 때 죽어간 30만 신명들의 해원 도수를 붙여 일세를 풍미하게 하셨다. 

보천교는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을 계기로 산하 24방주가 드러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았는데, 그때 차경석 성도도 수배령이 내려지고 지리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게 되고 보천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종교와 사상단체의 본보기인 보천교 조직의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일제는 1922년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된 60방주의 한 사람인 이상호를 회유하여 교단을 정식으로 등록하도록 했다. 이에 이상호는 ‘보천교(원래는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명으로 등록하게 되는데 이로써 문제가 생기게 된다. 교명 등록과 동시에 이전의 ‘비밀결사 조직운동’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는 집요하고도 교활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보천교 신법」을 만들어 대규모로 교인들을 검거, 구속했는데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탄허 스님의 아버지)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 일제 당시 천도교, 대종교 등의 민족단체와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가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전개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증산상제님을 신앙한 보천교가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항일비밀 결사투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구 선생은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정읍을 방문하여 “임정臨政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고 하였다. 또 이승만 박사는 1946년 정읍을 방문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창하였다. 많은 빚은 무엇이며 왜 하필 역사적인 선언을 정읍에서 하였을까? 보천교는 한때 상해임시정부의 중요한 자금줄이었다. 보천교가 막대한 독립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교주 차경석 성도가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천교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1929년 정읍 대흥리에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큰 규모의 십일전十一殿을 비롯한 45동의 건물이 지어졌는데, 그 건축 비용이 자그마치 150만원이었다. 그 당시 쌀 한 가마니가 5원 30전이었으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흥리 일대는 당시 15호에 지나지 않았던 가구 수가 1,500호로 급격히 늘어났다. 일제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파괴해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보천교 조직을 미신,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꾀하는 언론조작에 나섰다. 마침 세운世運도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며, 이후 보천교는 이와 같은 불비한 시운과 일제 치하 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급격한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세계 종교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부흥했던 보천교는 1936년 교주 차경석의 사망 이후 일제에 의해 하루아침에 해체되고 말았다. 웅장했던 성전인 십일전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과 정읍 내장사 대웅전, 전주 역사驛舍를 건축하는데 사용되었다. 지금 정읍의 보천교 성전 터를 가보면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주춧돌과 벽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급변할 때면 으레 민족운동이 일어나곤 하는데 항상 종교를 중심으로 발현되었다. 우리나라의 동학농민운동이 그랬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도 그런 유형이었다. 일제치하 항일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시 보천교를 중심으로 한 증산도 초기 교단들이었다. 최근 보천교의 발상지 정읍에서 향토사학자들과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보천교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보천교의 역사는 정읍이라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연구가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맥을 바로잡는 차원에서도 학계와 정부차원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보천교의 진실은 아직 역사 속에 묻혀 있다. 보천교의 역사가 밝혀지면 근대 역사의 진정한 출발인 동학의 참뜻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잃어버린 고대사와 원형문화를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지원 중심은 ‘정읍’정읍 소재 보천교가 10년 간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최고 500억원 2015.08.16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7458


☞최근 10년동안 일제 강점시 당시 독립운동 자금지원을 파악하기 위해 국내 현지 답사와 일본 총독부 사료 수집 등을 통해 전북지역이 상임임시정부와 민주독립군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입증됐다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당시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 본부를 둔 보천교에서 주도했다”며 “보천교에서 1920년부터 10년 동안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최고 500억원(현재 화폐가치 기준)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최대 민족종교로 세력으로 활동했던 보천교가 지원했던 독립자금은 현재 밝혀진 규모는 ‘빙산의 일각’ 수준이다”며 “보천교는 처음부터 비밀결사로 출발해 총독부 감시망을 피했기 때문에 그 활동이 감추졌던 만큼 보천교에서 지원한 독립자금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보천교 간부였던 신채호 선생 부인이 만주정의부의 자금 지원을 보천교를 통해 시도한 점이나 보천교 간부인 임규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로 재정을 연결했다는 사실들은 아직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조차 못하고 있어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내일은 증산도의 어머니 하나님 태모님 선화절입니다.


태모님의 선화(仙化)치성 공사

  

 10월 초에 태모님께서 성도들에게 명하시기를 “초엿샛날 치성을 준비하라.” 하시거늘  성도들이 그 까닭을 몰라 여쭈매 대답지 않으시고 “서둘러 준비하라.” 하시므로 정성을 다해 치성 준비를 마치니 태모님께서 치성을 봉행하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을해년에 임옥에서 땅 꺼진다.” 하시니라.

  

391장 선화치성. 전북대 이강오 교수가 쓴 태모님에 관한 자료(「이강오 필사본」)를 보면, 태모님께서 오성산 도장에 계실 때 춘분, 추분, 동지, 하지, 상제님 성탄, 상제님 어천, 태모님 성탄, 태모님 선화치성 등 8대치성을 봉행하셨다 한다. 


 (증산도 도전 11편 391장)


천상으로 떠나신 태모님

  

 이어 태모님께서 “목욕물을 데워라.” 하시고 홀로 목욕을 하신 뒤에

 “새 옷을 다 내놓으라.” 하시고 일전에 성도들이 해 올린 새 옷으로 갈아입으신 다음 요에 누우시어 고민환을 불러 머리맡에 앉히시니라.

 두어 시간 후에 문득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마음만 잘 고치면 선경세계를 보게 되건만…, 선경세계가 바로 눈앞에 있건만….” 하시고 다시 이르시기를 “잘 꾸리고 있으라.” 하시므로 민환이 무슨 뜻인지를 여쭈니 “글쎄 말이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내 자리 옆에 새 요를 하나 더 깔아라.” 하시고 “증산 상제님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상제님도 오시리라.” 하시더니 잠시 후에 “나의 머리에 손을 대라.” 하시고 상제님 어진을 향하여 손을 흔드시며 “너희 아버지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 하고 세 번 거듭 말씀하신 뒤에 눈을 감으시고 선화(仙化)하시니라.

 태모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10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통해 창생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어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한(恨)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

 이 날은 환기(桓紀) 9134년, 신시개천(神市開天) 5833년, 단군기원 4268년, 을해(乙亥 : 道紀 65, 1935)년 10월 6일 축(丑)시요, 서력기원 1935년 11월 1일이니, 이 때 성수(聖壽)는 56세이시니라. 이 날 태모님을 곁에서 모신 성도는 고민환, 전선필, 박종오, 이길수 등이니 날이 밝아 수의(壽衣)를 수습하매 태모님께서 이미 횃대에 걸어 놓으셨더라

 (증산도 도전 11편 416장)


오성산 북변 봉우재에 장사하다

  

 고민환이 각처 성도들에게 부고(訃告)를 보내니 고찬홍, 이진묵, 전선필, 문명수, 문기수, 이중진, 유일태, 오수엽, 조학구, 김수열, 김내언(金乃彦), 이재균(李在均) 등이 달려오니라.

 9일에 성도들이 태모님의 성체를 입관(入棺)하려 하는데 성체가 방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지라

 이 때 민환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지난날 태모님과의 사무친 정이 솟구쳐 올라 서럽게 통곡하니 집 안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니라.  한참 후에 성체를 간신히 떼어 입관을 한 다음 오성산 북변(北邊)에 있는 봉우재에 장사(葬事)하니라.

 (11편 417장)


을해년에 임옥에서 땅 꺼진다


 태모님께서 선화하시기 2년 전인 계유년부터 종종 말씀하시기를 “을해년에 임옥에서 땅 꺼진다.” 하시거늘  성도들은 그 말씀을 무심히 듣고 지나치나 전선필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임옥 땅이 꺼질까 염려하니라.

 을해년 어느 날 문득 그 말씀이 떠오르므로 곧 임실(任實)로 도피하여, 날마다 그곳 불재에 올라가 하루 종일 옥구 방면을 바라보며 임옥 땅이 꺼질까 걱정하거늘

 매번 올라가 해가 넘어갈 때까지 기다려도 옥구 땅이 꺼지지 않으매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오더니

 몇 달 후 태모님께서 선화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태모님께서 세상 떠나실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닫게 되니라.   (증산도 도전 11편 418장)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정읍 일제하 해외독립운동 자금지원의 중심지 http://www.jsisa.net/news/articleView.html?idxno=33809

한국정치학회(회장 한양대 최진우 교수)의 세계대회는 2007년 처음 개최된 이후 격년으로 열리며 2년전 고려대 회의에 이어 금년이 제5차 회의다. 조직위원장 경희대 윤성이 교수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100명에 가까운 한국학 전문가들이 참여해 금년에는 특히 성황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 경주현대호텔에서 8월 25일 화요일 오전 10시 10분 개최되는 이 패널에는 일반인도 방청이 가능하다. 경주현대호텔 마호가니룸에서 열리는 ‘한국 정치사로의 초대’ 패널에서의 발표는 인하대학교와 사단법인 대한사랑(이사장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이 후원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인하대 남창희 교수는 10년간의 국내 현지답사, 일본 소재 총독부 사료 수집을 통해 발굴한 새로운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는 다양한 1차 자료를 통해 전북지역이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독립군에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동학혁명의 중심지였고 가혹한 쌀 수탈의 피해 지역이었던 전라북도가 일본 헌병대의 통계에 의하면 의외로 항일색채가 가장 약한 것에 주목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폭력적인 항일집단운동을 금지한 내부 교리 때문에 한때는 친일단체로서 오해받았다는 것. 하지만 일본 코베시 청구문고와 학습원대 우방문고 등 국내외 조선총독부 자료를 정밀 검토한 결과, 흥미롭게도 전라북도가 항일운동 자금원이었다고 한다. 보천교는 처음부터 비밀결사로 출발해 총독부의 감시망을 피했기 때문에 그 활동이 감춰졌다는 논리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영화 암살 속 실존인물 김원봉과 김구>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 1958년 11월?)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혁명가·정치가다. 1919년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으나 실력의 한계를 느껴 이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후 국민당 장교 신분으로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국민혁명(북벌)에 가담했다. 이후 군사 양성을 위해 남경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을 추진했고,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했다. 1935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민족혁명당을 창당 활동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통합 요구에 부응, 1940년대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 강홍렬과 보천교 그리고 김원봉 : 경남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가지고 고향인 경남 합천(陜川)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합천의 전군(全郡)에 전달 배포하는 등 3·1독립운동의 조직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1923년 5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에 보천교(普天敎)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으며 그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 : 영화 암살 독립자금 누가줬나요?  영화 마지막에 달러로 김구선생에게 전달된 독립자금은 누구 준건가요?  http://tip.daum.net/question/84575800


◈김구 주석과 보천교 : 김구 주석이 정읍을 방문해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다한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여 당시 정치인 중 처음으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이다. 그리고 정읍출신 조계종 탄허스님 증언에 의하면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정읍을 방문해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다한다. (2015.06.09 정읍시사 ) http://www.jsisa.net/news/articleView.html?idxno=32534 


◈보천교의 독립운동자금지원 (3:02) https://youtu.be/AuYQRNTeLm8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조명되지 않은 놀라운 사실 ! 한국의 독립운동 중심지 정읍 ! 

전북도의회 장학수 의원 (2015.06.09 정읍시사)  http://www.jsisa.net/news/articleView.html?idxno=32534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여 당시 정치인 중 처음으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이다. 그리고 정읍출신 조계종 탄허스님 증언에 의하면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정읍을 방문해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다한다. ....

호남의 동학세력은 일제 핍박을 피해 증산교, 보천교(보화교, 훔치교, 선도교, 태을교), 황극교, 선교, 미륵불교 등 다양한 민족종교들이 정읍을 거점으로 만들어지며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많은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동학의 정읍접주 차치구의 아들 차경석은 정읍시 입암면에 보천교를 설립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에게 엄청난 독립자금을 지원하였고 정읍출신 독립운동가 라용균을 통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거금 5만원을 전달하는등 ‘조선건국단’과 ‘신인동맹’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보천교도들이 왕성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하였다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국가보훈처참조). 

정읍출신 독립운동가로 백정기, 박준승, 김현곤, 이익겸, 박환규, 권승욱, 이동환, 김홍규, 배상일 등이 있지만 현재 보천교도들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독립유공자가 100여명에 가깝다. 

일부 역사학자와 보천교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일제시대의 법원, 검찰, 경찰서의 각종 속기록과 당시 신문보도문 등의 자료들을 통해 조명되지 않은 정읍의 독립운동 역사들이 하나씩 둘씩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김구와 이승만이라는 독립운동의 두 거두가 광복직후 왜 정읍에 찾아와 중대한 선언과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는 말을 하였는지를 곱씹어보며 적극적인 자세로 숨겨진 정읍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해야 한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