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와 제帝

도道와 제帝의 관계에는 인류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道와 도道의 주재자主宰者인 상제上帝와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을 태고의 황금시절로 되돌릴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도와 도의 주재자는 이 땅위에서 인간이 우주적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근원적 구심점이다.

이 책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도道와 제帝의 관계가 어떤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겪어왔고,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지상에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도와 도의 주재자, 양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Chapter 1 왜 도道와 제帝가 문제인가

도道와 제帝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해명한 것은 증산도이다.

증산도에서 도道는 유불선의 동도東道와 서도西道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포함하여 동서문화를 하나로 융합하려는 무극대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증산도에서 제帝는 천상에서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주재자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으로 지상에 강세한 인존상제라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노자에서 증산도에 이르는 도와 제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서구 현대신학이 봉착한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와 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문명을 그 뿌리에서부터 반성하여 온 생명이 독자적 자유와 공동체적 화해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이상적 꿈의 문명인 조화선경을 여는 데 결정적인 계기와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와 제의 관계를 문제로 제기하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Chapter 2 도가道家의 도道와 제帝

도道는 동아시아 철학의 핵심개념이다. 동아시아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도교와 유교와 불교는 각기 길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모두 도道를 그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는 측면에서는 같은 길을 걸었다. 제帝는 동아시아 신학의 중심개념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우주만물의 주재자를 뜻하는 것은‘ 제’ 또는‘ 상제’이다.

①노자

고대중국의 도道와 주재자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길을 개척한 것은 노자이다. 노자는 고대의 신화사유를 바탕으로 도道를 제시하고, 기존의 전통적 지고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 『노자』 「4장」에 도와 제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술이 있다.

도는 텅 비어 있으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 듯하도다. 깊구나! 만물의 근원 같도다. …… 그윽하도다! 있는 것 같구나. 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노니, 아마도 상제보다 앞서는 듯하도다.

노자에서 도와 제의 관계는 우주만물의 자연성과 지고신의 주재성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노자는 제帝를 비롯한 모든 사물이 도道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노자가 우주만물의 궁극적 주재자로 설정되던 제帝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자는 그 당시의 인격적 주재자의 실재성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우주 만물의 존재근원인 도道를 제시함으로써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역동적 과정을 이전보다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노자가 도와 제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②장자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의 모순과 역설의 특성에 주목하여 도를 ‘형체 아닌 형체’(불형지형不形之形)를 지닌 것으로 규정한다. 장자는 「대종사」에서 도와 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도는 실정이 있고 미더움이 있으나 함이 없고 형체가 없으니,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밑둥이 되고 뿌리가 되어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본래 존재하는 것이다. 귀신과 제를 신묘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생겨나게 한다.

장자에서 도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궁극적 존재근원이다. 도는 우주만물뿐만 아니라 귀신과 상제의 존재근거이기도 하다. 귀신과 상제도 도의 통일적 작용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장자는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하는 존재로 제帝와 제가 머무는 곳인 ‘제향帝鄕’을 제시한다. 그는 「천지」에서 “천 년을 살다가 세상이 싫어지면 세속을 떠나 올라가 신선이 되어 저 흰구름을 타고 제향에 올라갑니다.”라고 한다.

Chapter 3 도교道敎에서 도道와 제帝

도가철학을 계승, 발전시켜 그것을 종교화한 도교철학은 자연학과 신학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첫째, 도교는 도가의 자연철학과 공부론을 하나의 구조체계로 융합한 양생론을 전개한다. 우주만물의 존재근원 및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도道와 기氣의 사유방식을 공부론과 연결시켜 우주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도道는 모든 생명의 존재근거이고, 기氣는 온갖 생명의 근원적 힘이다. 도교의 수련은 이 도와 기에 근거한다.

둘째, 도교는 도와 기를 종교화 또는 신격화하여 비인격적인 존재인 도道와 기氣, 그리고 인격신인 제帝가 삼위일체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 도교의 지고신은 도와 기를 온전하게 발현하고 주재하는 최고신이다. 도교의 신 계보는 도道와 기氣가 발현된 완성도에 따라 설정된 위계체계이기 때문에 최고신은 도와 기의 조화작용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는 신을 말한다.

남북조시기에 이르러 도교의 새로운 신 개념이 출현한다. ‘옥황玉皇’이 바로 그것이다. 옥玉은 본래 정미하거나 진귀하다는 뜻이다. 고대 사람들은 아주 아름다운 것을 옥으로 형용하였다. 옥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몸을 보호하는 ‘호신부護身符’의 역할을 하고, 신과 소통하기 위해 바치는 제물이었으며, 세계의 기운을 조화롭게 다스려야 하는 왕권을 상징하는 신물神物이기도 했다.

Chapter 4 동학의 도道와 제帝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 도道와 제帝의 관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시도가 줄기차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김일부의 역학과 최수운의 동학이 바로 그것이다.

수운과 비교하여 볼 때, 일부는 상대적으로 상제를 인격적인 존재로 선명하게 부각하지 않고 있는듯이 보인다. 그것은 일부가 상제를 ‘천지무궁화무옹’,‘ 화옹’,‘ 화화옹’,‘ 보화일천화옹’ 등으로 호칭하여 상제의 특성을 주로 천지조화를 주재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수운은 동양의 유불선과 서양의 천주학을 하나로 융합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천주와 천주의 가르침에 있다. 수운이 유불선의 하나인 선도를 포함하는 그 근거는 천주에 있다. 즉 자연조화의 존재근거를 이루는 ‘천주조화’이다. 수운이 보기에 모든 자연조화에는 그 조화를 주관하는 조화주 상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불교와 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해탈과 유교의 도덕은 모두 천주의 가르침에 근거할 때, 비로소 온전할 수 있다.

수운에 따르면, 천지만물의 자연변화를 가능케 하는 그 바탕에는 모든 변화를 주관하는 조화주의 주재성이 전제되어 있다. 모든 변화는 ‘천주조화’의 자취가 온 천하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다.

천주가 우주변화를 주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지이법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제군주처럼 자신의 의지와 주관에 따라 마음대로 주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수운에서 모든 변화는 결국 ‘천주조화’의 주재성과 통치성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Chapter 5 증산도에서 도道와 제帝

증산도는 “동방에서는 우주 삼계(천지인天地人)의 생명의 근원과 그 변화의 길을 일러 도道라 하고, 이 도의‘ 주재자 하느님’을 제帝 또는 상제上帝라 불러”(『도전』 1:4) 왔다고 하여, 도道와 제帝의 관계를 문제로 설정한다.

증산도에서 무극대도無極大道와 일기一氣(지기至氣)와 상제는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조화주 증산상제님은 조화의 도인 무극대도를 바탕으로 신도를 주재하면서 우주생명을 주재하고 통치한다. 증산상제님은 인간사회의 문명질서를 포함한 우주만물의 자연질서를 주관하는 무극대도의 주재자인 옥황상제를 말한다. 증산상제님은 우주만물을 ‘무위이화無爲以化’로 주재한다. ‘천지공사天地公事’가 바로 그것이다. 천지공사란 삼계대권의 조화권능을 지닌 우주생명의 조화주가 우주만물의 자연질서와 인간사회의 문명질서를 동시에 전환시키려는 새 조화문명의 설계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천지공사는 조화공사라고 부를 수 있다.

증산도에서 도道는 천지조화의 존재근거인 무극대도이고, 제帝는 천지조화의 도인 무극대도에 의거하여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조화권능을 지닌 조화주이다. 증산도에서 도道와 제帝는 삼위일체적 연관관계를 이룬다. 증산도는 삼자의 관계를 통해 자연과 문명이 새롭게 소통될 수 있는 새 생명의 다리를 놓음으로써 인류의 영원한 꿈인 신천지를 열려고 한다.

Chapter 6 대도문화大道文化와 상제문화上帝文化의 복원을 위하여

한민족의 삼신상제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천天과 제帝의 관계뿐만 아니라, 도道와 제帝의 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준 것은 증산도이다. 동학의 제가 천상의 주인인 옥황상제로 설정되고 있는 반면 증산도의 제는 동학의 제와 비교하여 볼 때 여러 가지 다양한 호칭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증산도는 불교에 대한 논점이 뚜렷하지 않는 동학과는 달리 조선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미륵불교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도道와 제帝의 문제는 결국 제帝의 문제이다. 제의 인식은 결국 우주의 본질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로 귀결된다. 제의 인식의 문제는 자신의 공부 정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만 하여도 반도통은 되었느니라” (도전 3:18:3)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열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통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道와 제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정도正道일 것이다. (정리/장광주)




<차례>
들어가는 말
Chapter 1 왜 도道와 제帝가 문제인가
Chapter 2 도가道家의 도道와 제帝
1) 노자
2) 장자
Chapter 3 도교道敎에서 도道와 제帝
1) 도교의 기원과 전개
2) 초기도교에서 도와 태상노군
3) 수당 도교에서 도와 삼청존신
4) 송대도교에서 도와 옥황상제
Chapter 4 동학의 도道와 제帝
1) 무극대도
2) 상제
3) 지기至氣
4) 도道와 기氣와 제帝
Chapter 5 증산도에서 도道와 제帝
1) 무극대도
2) 옥황상제
3) 지기至氣와 일기一氣
4) 도道와 기氣와 제帝
Chapter 6 대도문화와 상제문화의 복원을 위
하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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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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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고쳐라. 
-일본국왕은 천황으로 바꿔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사진설명에서 김구를 삭제하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2012년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심사에서 수정권고한 내용입니다. 일제의 한국침략을 합법화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국사편찬위원회가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주류사학계는 단군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에 대한 연구를 국수주의로 몰아붙입니다. 

광복 68년, 여전히 우리는 일제가 채운 족쇄를 차고 있습니다. 1945년 일제는 패망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아직도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한 이들이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교원양성소를 통해 일제식민사관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 국사교과서를 통해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군국주의, 중화패권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이 땅의 역사교과서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사를 약술하는 데서 그치고 있고, 일제의 역사날조만행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중일의 역사전쟁이 날로 격화되는 가운데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일제 식민사관의 틀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오늘의 식민사학자들은 역사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지금 식민사관 구조를 해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영구히 일제 식민사학에 지배될지 모릅니다.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박사의 강연에서 식민사학, 그 실체를 밝힙니다. 

[들어가는 글] 
2012년 11월 15일, 오늘이 무슨 날이냐? 102년전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점령당한 후 67년전 우리 대한민국은 해방이 됐죠. 

그러나 우리의 역사관은 67년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제 식민사관이 지배해 왔습니다. 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대한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해왔습니다. 상해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백암 박은식 선생, 만주에서 돌아가신 석주 이상용 선생, 여순감옥에서 돌아가신 단재 신채호 선생, 이분들에 대한 공격은 해방 6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그런 공격이 과연 합당한가. 역사학의 가장 기초적인 일반원칙에 비춰봤을 때 과연 합당한가.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검증해보는 자리입니다. 


일본 강경파와 손잡은 친일세력 _일진회와 노론당파


102년 전, 우리나라가 망할 때 온 백성들이 울고불고 목숨을 끊고 망명하고 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부동반하여 일본 가서 자랑스럽게 사진 찍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1908~9년 무렵 친일파들의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게 되냐 하면, 나라 팔아먹는 경쟁을 서로 치열하게 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일진회라고 불렸던 친일세력과 인조반정 이래로 250년을 집권한 노론 당파, 일진회와 노론, 양쪽에서 나라 팔아먹는 경쟁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는 정치 주류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문관 온건파가 있고, 또 하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심의 무관 강경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강경파와 손잡고 바로 조선을 점령하자는 합의를 했는데, 석 달 후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에서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후 일본 통감부로 부임하는 인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입니다. 대한제국을 바로 점령하자는 강경파입니다. 

매국경쟁에 앞장선 이완용과 이인직

그렇게 되니까 이완용이 대단히 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 계열의 데라우치가 일진회와 손을 잡고 나라를 먹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런 불안감이 든 이완용이 비서인 이인직을 시켜서 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쓰와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몰래 주도하게 됩니다. 이 비밀협상에서 이완용과 이인직이 가장 알고 싶은 게 뭐였겠습니까? ‘우리가 나라를 넘기면 우리에겐 뭘 줄거냐?’ 통감부 외사국장이 외교부 장관입니다. 고마쓰가 하는 말이 ‘나라를 넘기면 조선 귀족령을 만들어서 너희들은 조선의 귀족으로 봉해주고 그리고 따로 특별예산을 편성해서 막대한 돈도 주겠다.’ 그랬더니 이인직이 ‘그렇게 관대한 조건이라면 하등 어려울 것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간 뒤 일사천리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인직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혈의 누’가 생각나죠?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인직을 뭐라고 가르칩니까? ‘혈의 누’를 쓴 선각자, 이렇게 가르치고 있죠?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한 매국노를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사교과서는 선각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혈의 누의 내용은 안 가르칩니다. 혈의 누의 내용이 뭐냐면,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줬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21세기 백주대낮에 대한민국 학생들이 선각자로 알아야 하는 이인직의 실체죠.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은 76명중 56명이 노론

일본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 나라를 점령하고 10월 7일 약속대로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훈장을 줍니다. 그 중에 왕족들이 있고 당파로 알 수 있는 사람이 64명쯤 됩니다. 조선의 사색당파로 분류를 해보면 남인들은 한명도 없고 북인은 두 명이고 소론은 여섯 명이고 나머지 56명이 전부 다 노론입니다. 250년 동안 인조반정 이래로 집권했던 당파가 조직적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가담을 한 것이죠. 

이 후예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특히 역사학계의 주류를 장악해서 우리 국민들의 역사관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①한사군

우리가 역사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좁히면 일제 식민사관의 대부분, 일제식민사관의 논리구조가 주로 고대사에 집중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이 일제식민사관의 복사판인데 마찬가지로 고대사에 집중돼 있죠. 그런데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고대사 논리가 뭐냐? 

한사군 한반도설을 가르치는 한국 역사교육


한사군은 한강 북부에 있었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반도 북부도 식민지로 시작했고 한반도 남부도 식민지였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식민지는 너희 나라의 운명이다.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해방된 나라에서 초등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려면 먼저 뭘 가르쳐야 됩니까? 이순신 장군을 가르치고 을지문덕을 가르치고 세종대왕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죠. 그런데 우리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인직을 갖다가 선각자로 가르친 그 논리구조, 그 속에서 한사군을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가르쳐왔던 것이죠. 그럼 이 시점에서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왜 한사군은 일관되게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을까요. 

중국의 고대 사서에도 낙랑군은 만주에 있었다


여기서 보시는 『한서』 「설전 열전」에 보면 사고왈, 낙랑속유주. 낙랑은 유주에 속해 있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보면 낙랑군은 옛날 조선국이다, 재요동. 요동에 있다. 『후한서』 「최인 열전, 장잠현」은 속낙랑군, 기지재요동. 낙랑군에 속해 있다.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제가 일부만 뽑아왔습니다만 중국의 고대사서는 한사군, 낙랑군은 만주에 있다고 시종일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것을 인용한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불리한 글은 일체 인용을 안하죠. 

그런데 이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획정하기 위한 구절이 『사기』 「하본기 태강지리지」에 나오는 제일 아랫귀절입니다. 낙랑군에는 첫째 수성현이 있고 두 번째 갈석산이 있고 세 번째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이렇게 기록돼 있죠? 그래서 요 세 가지 정보를 만족시키는 지역을 찾으면 그곳이 낙랑군 지역이고 그 주변 일대가 한사군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류 식민사학계에서는 지금 황해도 수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가 뭐냐? 이병도가 세칭 ‘낙랑군고’라는, 저는 이게 논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성서처럼 떠받드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중국 성은 벽돌성, 우리나라 성은 석성


“수성현,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의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란 이야기죠. 그런데 그 다음에 “수안에는 승람산천 쪽에 요동산이라는 산명이 보이고.” 승람, 동국여지승람이란 책에 황해도 수안군 조에 요동산이라는 산이 나온다. 그게 갈석산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갈석산은 갈석산이고 요동산은 요동산이죠?

그 다음에 동국여지승람 황해도 수안군 관방 방어수세를 적어놓은 “관방조에 후대 소축의 성이지만 방원진의 동서행성의 석성이 있고.” 이 방원진 석성이 만리장성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중국 만리장성 가보시면 벽돌로 만들었죠? 우리나라 성들은 뭘로 만듭니까? 자연석으로, 돌로 만든 석성이죠? 저희가 이번에 지난 7월 내몽골 적봉에 갔더니 중국 사람들도 이야기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쌓은 석성이다. 단군 조선의 석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석성에 올라가봤습니다. 지금의 고구려, 백제성하고 똑같습니다. 석성이라는 것 자체는 벌써 우리 민족의 성이지, 중국의 성이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병도와 그의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역사날조

“또 진지의 수성현 뒤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기효기라는 기재도 있다.” 이건 한마디로 문장 자체가 아니에요. 비문이에요. 왜냐면 이병도씨의 사전 전제가 자기는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 라고 그랬죠? 그러다 논리로 전개하다가 논리가 부족하니까 진지, 진지는 뭐냐면은 중국 고대진서 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조에 보면은 ‘진대장성기소기-진나라 때 장성이 일어나는 지역이다’라고 쓴 이 구절은 그야말로 낙랑군 수성현, 만주에 있는 낙랑군 수성현을 말한 것이지, 황해도 수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논리가 부족하니까 아무거나 뒤죽박죽 섞어놓은 이야기죠? 터무니없는 말이라면 논문에다 쓰지 말아야죠? 


그런데 이병도씨의 모든 논리가 그렇듯이 이것도 자기가 만든 게 아니어요. 이 문장은 원래 이나바 이와기치라는 이병도의 스승이 「낙랑군 수성현 및 진장성 동단에 관한 고」라는 이것도 논문인지 아닌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다 뭐라고 써놨냐면 “수성, 진나라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써놓은 걸 무비판적으로 이병도씨가 추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현재의 주류 식민사학계가 성서처럼 떠받들다 보니까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데 너무 신이 난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한반도에 그려넣었지만 갈석산은 못 그려넣은 이유


중국 동북공정이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작하다가 한국 주류 식민사학계가 자기네 학설에 동조를 하니까 너무 신나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가 바로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중국 사학계의 공식 역사지도집입니다. 이 지도집을 보면은 만리장성이 한반도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죠? 여기 수성이 보이죠? 이게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만든 중국의 공식 지도집이예요.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그런데 이 지도에 보면 낙랑군 수성현을 한반도 내로 끌어들였죠. 만리장성을 끌어들였죠. 그럼 뭐가 빠졌습니까? 갈석산이 빠졌죠? 갈석산은 바로 여기 중국 하북성에다 그려놨어요. 우리 시각만 제대로 서 있으면 이 지도 한장으로 중국 동북공정의 모든 논리는 무너집니다. 

그러면 중국 사람들이 수성현을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만리장성도 끌어들였는데 왜 갈석산은 못 끌어들였을까요? 


갈석산은 너무 유명한 산입니다. 갈석산은 중국에서는 진시황을 비롯해서 아홉 명의 황제가 올라갔다 그래서 구등황제산이라고 불리우는 대단히 유명한 산입니다. 그런데 한나라때 저술된 회남자에 보면, 한사군이 있었다는 시대의 지리인식을 반영하는 회남자 십초군에 동방의 끝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다. 갈석산을 지나면 바로 고조선이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사료들은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석산 주변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이 있습니다. 갈석산이 있는 곳이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인데 중국 수서에 보면 하북성 창려현은 옛날에 수성현, 낙랑군 수성현이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낙랑현에는 수성현이 있고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라고 말한 것이 지금의 중국의 하북성에 있는 창려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믿어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중국의 하북성까지 고조선 강역이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너희들이 먼저 시작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다 너희들 고대 사료에 나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역사관이 바로 서면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ㄷ’ 자도 못 꺼내게 돼 있습니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②임나일본부

그런데 또 하나의 일제 식민사관,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소위 말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입니다. 이 이론은 왜 나왔냐? 쓰다 소키치라는 이병도의 스승, 이 식민사학자가 삼국사기를 보니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그 시기에 경상도 지역에는 강력한 고대국가 신라가 있었고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는 강력한 고대 국가 백제가 있었다. 이렇게 강력한 두 고대국가가 있는데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서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다 가짜로 몰아야 되겠다 이런 발상을 하게 되죠. 그래서 이 쓰다 소키치라는 인물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발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발명품의 가장 원조, 첫 번째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과 원삼국 발명


여기서 시종일관 쓰다 소키치의 사고는,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왜 혹은 왜인 기록대로라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최초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 마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런 식의 논리를 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최근까지도 가보면 원삼국실이라는 게 있었어요. 원삼국실이 뭐냐? 낙동강 유역에서 칼이 하나 나왔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해보니까 A.D2세기 때라고 나옵니다. 그럼 뭐라고 쓰면 됩니까? 신라시대! 그럼 간단하죠?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A.D1세기 때 금동관이 나왔어요. 뭐라고 쓰면 되요? 백제시대! 하면 간단하죠? 그러나 이 식민사학자들 머릿속에 3세기 4세기에 백제 신라는 없었다. 있어도 조그만 부락이었다. 그러니까 신라 백제란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원삼국, 이런 걸 하나 발명해가지고 원삼국론이라고 써놓은 것입니다. 

백제사 400년을 말살하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 뭐라고 쓰고 있느냐. 백제에 관해서 여기 보시는 대로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B.C18년에 온조 임금이 백제를 건국했다’ 라고 기록했죠? 그런데도 국사교과서에서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백제가 건국됐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 이병도 씨가 “나의 연구한 바로는 엄밀한 의미의 백제의 건국은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 되었다고 믿는 바이다. 고이왕 이전은 부락정치 시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라고 해서, 자기의 스승 쓰다 소키치가 이야기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백제사 400년을 전부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③식민지 정체성론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에 해체됐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전혀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주류대학 국사학과, 국사관, 국사교원양성소를 장악하여 주요대학 국사학과와 국사관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하고 가르친 결과 여러분이 초등학교 때 한사군에 대한 이야기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됐지만 우리 역사는 지금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교육현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한국역사의 정체성 주장

그렇다보니 이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뉴라이트라 말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 이것이 왜 문제냐? 이 문제는 좌우의 잣대로 바라보시면 안됩니다. 여야의 잣대로 바라봐서도 안됩니다. 이 이야기는 좌우 여야를 뛰어넘는 우리가 코리안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 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에요.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한 논리 중에 하나가 정체성론停滯性論입니다. 정체성론은 뭐냐? 우리 역사는, 한국 역사는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때부터 19세기까지 상태가 똑같았다. 한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병도씨가 자기 책에 한사군을 극찬하는 논리가 나오고, 21세기 백주대낮에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되었다’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죠. 일제정체성론에 따르면은 우리는 해방 이후에 지금쯤 다 굶어죽었어야 돼요. 지금 우리사회가 이렇게 발전한 것과 저 식민사관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사 바로세우기 과제

이뿐만 아니라 법학, 음악, 미술, 국문학 등 조금 공부해보면 전부 다 일제 통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 67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종합적으로 연구검토한 적이 없습니다. 이걸 연구 검토해가지고 받아들일 점이 있으면 계승하고, 버릴 점이 있으면 철저하게 버리는 작업을 해야 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두번째로 한국사 관련 국가기구, 여러분이 낸 세금 가지고는 식민사학 하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 자민당 돈을 받아서 해야죠. 일본에 가서 일본 극우파 돈을 받고 중국에 가서 중국 패권주의 공산당의 돈을 받아가지고 식민사학 하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식민사학을 하느냐? 이제는 ‘이 구조를 해체하고 판을 전면적으로 새로 짤 때가 됐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국사교과서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다시 써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이 너무 재밌어서 국사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게 돼 있어요. 국사교육이 암기과목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기초사안

이제는 식민사관 비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나아가 이들이 장악한 한국사 관련기구를 해체, 재편하여 한국사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재구성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여야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21세기에 순국선열의 피와 한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21세기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사안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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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 한민족의 문화원형 신교


신교神敎는 상고 이래 한민족을 이끌어온 삶의 이념이다. 그 핵심은 모두가 참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무병장생과 천지조화의 선仙으로 사는 세상을 이룩하라는 것이다. 이 책은 먼 옛적 동방의 이 땅에 하느님신앙 및 선仙의 일체성을 중핵으로 하는 신교가 어떻게 하늘의 섭리에 따라 생겨났으며, 그것이 어떻게 수운 최제우에게 이어지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이 가운데 후천개벽의 소식은 무엇이며 그것이 신교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도 밝혀나간다. (이하 원문발췌)


신神의 뜻으로 살다

신교 미리보기 신교神敎는 신의 뜻과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신을 인간생활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한 종교나 신앙형태가 아니라 정치나 종교 등 모든 삶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신교는 이른바 확산종교diffused religion에 가까운 것으로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특한 민족적 종교요, 사상이요, 문화형태”였다. 신교는 하늘을 섬기고 모든 것이 신의 주재 아래 있다고 믿으며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문화 혹은 삶의 방식임을 파악할 수 있다. 신교에서 비롯한 선仙의 근본 특성은 무엇보다도 상제신앙과 결속된 점에서 구해진다. 신교에서는 상제신앙 안에서 그것을 통해 선을 향하며, 선에 이름으로써 상제신앙이 완결된다고 믿는다.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섬김은 참된 나의 본성을 회복하여 신의 뜻을 세상에 펴는 것이다. 이른바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가르침이다.

가장 크고 높은 신 신교문화에서 우주 생명을 주관하는 신은 삼신三神으로 불린다. 그런데 삼신은 단순히 인격신이거나 비인격적인 신성이 아니다. 오히려 둘 다 의미를 갖는다. 삼신은 이위일체二位一體의 신으로 파악돼야 한다. 달리 말하면 신교문화는 인격적 실재와 비인격적 실재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비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삼신은 우선 대자연의 순수 영기와 같은 것으로 인간을 비롯한 만유 생명의 뿌리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산이나 들, 짐승과 식물, 하나의 돌멩이, 나아가 자연과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등 모든 것들이 그러하게끔 하는 궁극의 바탕자리는 신이라는 것이다. 삼신의 일차적 의미는 우주에 충만한, 그 창조적[조화를 짓는] 신성이다.

신의 뜻은 홍익인간에 환인, 환웅, 단군의 국조삼신의 가르침은 참된 마음과 상제에 대한 섬김[祭天], 홍익인간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곧 그들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 신의 뜻이다. 그 이념은 신시의 옛 규범을 회복한 단군의 다음과 같은 말에 아주 잘 표현돼 있다. “너희 무리는 오로지 하늘이 내려주신 법을 지켜… 성性이 통하고 공功이 이뤄지면[性通功完] 하늘에 이를 것이다[朝天].”(『규원사화』「단군기」) ‘성통’은 한 신[삼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틔우는 것이다. 그리고 본성은 삼신이 우리 안에 이화된 것이다. 따라서 본성을 틔우는 것은 내 안의 신성을 찾아 삼신과 하나 되는 것이다. ‘공완’은 천명을 깨달아 공업을 완수하는 일이다. 환인, 환웅, 단군의 가르침을 통해 천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명백해졌다. “널리 인간을 보람 있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가르침은 환인천제께서 환웅에게 내려주신 것.”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수운, 신교의 도맥을 잇다

상제와 수운의 약속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 (「포덕문」) … 상제와 친히 만나 이뤄진, 이 문답에는 수운(최제우)의 도가 상제에게서 연원한다는 사실이 수운 자신의 입을 통해 증언되고 있다. 수운이 상제의 명을 받아 인류를 교화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수운의 동학은 곧 신교로써 이뤄진 것. 

상제와 지기 수운은 시천주주呪의 강령주문인 “지기금지원위대강”에서 지기至氣를 일러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이라고 밝힌다. 그것은 우주 시원에 만물화생의 본원을 이루고 있는 음양미분 혹은 음양혼돈의 원초적 생명기운을 말한 것이다. 그런 즉 수운은 지기란 사실은 우주 본래의 혼원한, 한 뿌리의 기운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금지의 때에 크게 내리는 지기는 새로운 기운이로되 가장 오랜 것이며, 시원의 생명기운과 한 기운이로되 전혀 새롭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연의 참됨을 되찾은 것으로서 천지와 인간 삶을 혁신하는 새 기운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특성들 “내 도는 원래 유도 아니며 불도 아니며 선도 아니니라. 그러나 오도吾道는 유儒·불佛·선仙 합일合一이니라. 천도天道는 유·불·선은 아니로되 유·불·선은 천도의 한 부분이니라. 유儒의 윤리倫理, 불佛의 각성覺性, 선仙의 양기養氣는 사람성(人性)의 자연自然한 품부稟賦이며…” 이것은 삼교를 포함하는 신교의 성격이 그의 천도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밝혀준다. 특히 후자의 인용문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삼교를 포함한다고 신교의 특성을 전한 최치원의 말을 연상시킨다.

수운이 이루지 못한 것 수운에게는 시천주와 선, 개벽과 새로운 선경세상 등 주요 주제들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 속에서 체계적으로 종합적으로 제시되지 못한다. 이 같은 한계는 그가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했다는데 기인한다. 그는 새 시대의 여명을 바라보았음에도 여전히 구시대의 어둠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수운이 천명을 수행함에 있어 결정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은 그를 내세운 상제의 몫이 된다. 그것이 상제가 직접 이 땅에 강세한 배경이 된다. 수운 동학의 천주가 자신임을 알린 상제는 그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라고 선언한다.

신교神敎, 선仙의 세상에서 완성되다

우리 도는 선仙 신해(1911)년 도장을 개창한 태모 고수부는 교 이름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를 묻는 물음에 우선 선도仙道라고 부르도록 한다. “천하를 통일하는 도道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다시 진법眞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도전』11:29:2) 상제님과 태모님은 당신들의 일이 인간이 성숙하여 조화와 장생의 선이 되도록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다시 증산 상제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통해 확인된다.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경仙境을 건설하려 하노라.”(2:16:2) “때가 오면 너희들은 모두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선풍도골仙風道骨이 되느니라.”(7:59:5)

우주가 변화하는 이치 우주의 가을이 되면 천지만물의 본성을 이루고 온갖 변화를 짓는, 한 뿌리의 생명기운도 제 모습을 찾는다. 가을의 천지기운은 신으로, 지기로 화한다. 그래서 상제의 주재로 하늘, 땅과 모든 것들의 성숙과 결실을 이끄는 가을생명이 된다. 만물을 익게 하는 가을바람이 된다. 선천 말대가 당면한 절체절명의 고비를 넘겨 새로운 가을세상이 들어서도록 하는 구원자가 1871년 이 땅에 인간으로 강세한 증산 상제다. 증산 상제는 성숙의 새 세상 가을우주를 여는 구원자로 온 것이다. 

가을의 주재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것을 가을개벽, 후천개벽이라고 한다. 증산 상제는 가을을 맞아 새롭게 일어나는 성숙과 통일의 기운인 지기를 만방에 돌려 개벽을 주재한다. 지기는 곧 상제의 손길이 더해진 것이란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을 갖는다. 증산 상제는 가을천지의 신령한 조화기운으로써 천지의 질서를 바로잡고 하늘, 땅과 우리의 의식에까지 들어찬 원한을 말끔히 비워낸다. 이로써 우주는 새 몸으로 거듭난다. 그 신천지 위에 비로소 천지의 조화성신과 소통하며 장생과 조화의 선으로 사는 선경세상이 열린다. 그런 점에서 증산도의 선은 세상을 치유하는 선이다.

성사成事는 인간의 몫 하느님의 뜻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숙한 인간, 완성된 인간으로 열매맺도록 하는 홍익인간, 애인愛人에 있음이 거듭 확인됐다. 이제 그 인간농사의 과제는 이윽고 성숙의 계절인 가을에 들어 결실을 얻는다. 그런데 가을에 들어서는 길목은 가장 위험한 국면인 동시에 선경세상이 열리는 호기다. 그 과업은 어떤 인간도 어떤 신명의 능력으로도, 설사 모든 신명들의 능력들이 더해진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상제가 직접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인간열매를 거두는 그 일은 인간의 참여 속에 이룩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성도들을 내세워, 혹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글을 읽게 하여 치병, 다시 말하면 인간을 인간열매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일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섬기고 자신의 가르침과 뜻을 실현하는 인간을 대행자로, 일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과 짝하여 인간농사를 완수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산도에서는 모사재천謨事在天 성사재인成事在人의 조화로 설명한다. 

다른 특성들 신교에서 싹트고 수운의 동학이 이어받은 선에서 그 중핵을 차지하는 시천주와 선이 상제의 도 안에서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 살펴봤다. 이어서 신교의 또 다른 유산들은 어떻게 완성되는지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 보자. 첫째 신교문화에 우주의 조화성신을 써 만물을 짓는 상제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천지부모 또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분이다. 둘째 유불선의 핵심을 이루는 가치들이 상제의 도 안에서 이뤄짐으로써 삼교를 포함하는 신교의 특성이 온전히 구현된다. 셋째 신교와 수운의 선에서 차지했던 영부나 주문의 역할 혹은 의미가 상제의 도에서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맺음말

하늘이 신교에 심은 싹이 수운을 거쳐 증산도의 구원론에서 어떻게 열매맺는지 살펴보았다. 신교의 가르침은 인간을 위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고 본성을 틔워 상생 혹은 홍익인간의 공덕을 펼침으로써 완성된 인간, 열매인간인 선으로 거듭나라는 것이다. 인간을 낳고 기른 천지와 천지의 주재자 상제의 공도, 인간 삶의 성패도 거기에 걸려 있다. 새로운 도 안에서 선의 새 생명을 얻을 때 천지와 하느님도 뜻을 이루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식으로 새로 나서 영원한 생명과 조화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천지와 하느님, 인간 모두가 바라는 바다. (정리/장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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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반전反轉의 해

갑오甲午는 푸른 말(馬)입니다. 갑이 청색을 뜻하고 오가 말을 뜻하니 갑오는 청마靑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마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말로서, 이런 상상 속의 동물인 말로 유명한 것이 유니콘unicorn입니다. 유니콘하면 먼저 머리에 솟은 뿔을 떠올리는데 그 뿔로 온갖 조화를 부린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뜨거운 열정과 활력있는 기상으로 말의 해를 풀이하기도 하지만, 뭔가 변화가 심한 격동의 이미지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 갑오년 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2014 갑오년을 맞아 ‘갑오甲午’에 실린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갑甲의 의미

갑의 성질은 목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은 계절로는 봄, 방위로는 동쪽을 뜻합니다. 봄은 양기가 발동하는 때로 생명이 탄생하여 움직이기 시작하며,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광명의 뿌리가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간의 첫 번째인 갑에는 첫째, 양기의 발동, 생명의 탄생, 광명의 뿌리 등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 때문에 갑사甲寺, 갑천甲川 등 갑甲자가 들어간 명칭에는 ‘최고, 으뜸’의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십간을 음양으로 나누면 ‘갑을병정무’는 양陽, ‘기경신임계’는 음陰입니다. 즉 갑은 양의 시작이고, 기는 음의 시작입니다. 양의 시간대를 선천, 음의 시간대를 후천이라고 하며, 양이 열리는 현상을 천개天開, 음이 열리는 현상을 지벽地闢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갑은 선천이 시작하는 선천개벽의 시간대이고, 기는 후천이 열리는 후천개벽의 시간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午의 의미

오의 성질은 화火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는 계절로는 여름, 방위로는 남쪽을 뜻합니다. 여름은 양기의 분열이 최고에 다다른 때로 성장하는 시기이며,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라 세상을 광명으로 환히 비추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화는 태양(해) 그 자체이자, 일월합명이라 하여 광명을 뜻합니다.

십이지에서는 음양을 나누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에 배속하는 것으로, 자시子時는 오후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이고, 오시午時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입니다. 하루는 자정子正(밤 12시)과 정오正午(낮 12시)를 기준으로 오전과 오후가 나눠지는데, 이때는 축미가 아닌 자오子午가 음양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는 선천이 시작하는 선천개벽의 시간대이며, 오는 후천이 시작하는 후천개벽의 시간대입니다.

갑오년

60갑자의 시작은 갑자이고 끝은 계해입니다. 60갑자를 선천과 후천으로 나누면 첫 번째인 갑자甲子부터 계사癸巳까지는 선천, 60갑자의 31번째인 갑오甲午부터 계해癸亥까지가 후천입니다. 즉 갑자는 선천이 시작되는 때이고, 갑오는 후천이 시작되는 때인 것입니다. 

60간지를 절節로 삼을 때, 31번째 간지는 갑오이다. 예로부터 “갑오갑작골(갑오갑자꼬리)”이라는 말이 있으니 선천갑자의 뒤(꼬리)를 이어 갑오로써 후천을 열게 되는 뜻이며, 구한말 동학의 갑오혁명에도 이와 관계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_ 『대산주역강해』<하경> 13쪽)

어찌 보면 동학혁명은 당시 사람들이 갑오년을 후천의 시작으로 생각하고 때에 맞춰 계획적으로 일으켰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원갑下元甲

최수운 대신사의 『용담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연천年淺해서 억조창생 많은 사람 태평곡 격앙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_ 『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

동양의 시간은 60갑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60년마다 상중하로 해서 180년이 하나의 주기로 돌아갑니다. 지구와 칠요七曜(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가 일렬이 된 해부터 60년은 상원上元갑자, 다음 60년은 중원中元갑자, 마지막 60년은 하원下元갑자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시 음양으로 2회 결합하면 360년이 됩니다.

최수운 대신사(음 1824.10.28~음 1864.3.10)는 하원갑에 태어나서 하원갑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자신이 죽고 난 다음 열리는 ‘상원갑자에 무극대도가 이 세상에 나서 억조창생이 태평곡 격앙가를 부른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본래 ‘하원갑자를 지나고 다음 상원갑자인 1871(신미)년에 증산상제님께서 강세하셔서 무극대도를 여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동학신도들이 ‘상원갑자의 후천(후반기)이 열리는 갑오년에 후천개벽이 되어 태평곡 격앙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잘못 해석해서 갑오동학혁명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갑오동학혁명 120주년을 맞는 올해는 하원갑자의 후반기(후천)을 맞는 해입니다.

갑오년은 시대의 변곡점입니다. 갑오에 대한 상수학적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정한 흐름을 반전시켜 새로운 변화의 장을 전개하는 첫머리로서 작용을 하는 자리가 ‘갑오’입니다. 천도의 법칙은 그대로 인류의 역사 여정에 투영되고 현실로 반영되어 왔습니다. 이번 갑오년에도 그 역할과 변화의 상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려면 변화의 객체인 인간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동북아 역사전쟁과 북한 정세의 변동, 그리고 극심한 기후 변동과 재난 등 문명적인 환경 조건들이 예측 불가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 시기에 맞는 변혁의 갑오년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천하 대세의 틀과 흐름을 바로 보고 그에 상응한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 2014년 벽두에 선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희망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知天下之勢者는 有天下之生氣하고 
暗天下之勢者는 有天下之死氣니라 
천하대세를 아는 자에게는 천하의 살 기운(生氣)이 붙어 있고 천하대세에 어두운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死氣)밖에 없느니라.(도전 2:137:3) 



갑오년의 대표적인 역사,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4 갑오년에는 조선 민중의 사회변혁 운동인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였고 텐진조약(3조: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청나라나 일본 어느 한 쪽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에 의거하여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곧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어 1894년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 양국간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국력 증강의 열쇠임을 알고 준비에 충실했던 일본은 청나라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는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로 바뀌게 됩니다. 일본은 러시아와도 한판 승부를 벌이는 등 강대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청나라는 국력이 약해져서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이라는 새 나라가 세워짐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894 갑오년의 조선은 국내외에 걸쳐 혼란과 변혁의 큰 파고를 겪은 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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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은,주,진과 북방유목민족오순제 1부 1강 


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은,주,진과 북방유목민족오순제 1부 2강 






오 순 제 박사 약력


1. 학력:
서울공업고등학교 주물목형과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졸업(석사)
명지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박사)

2. 경력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 역임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역임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부회장
재단법인 한민족문화산업진흥재단 부총재
사단법인 하천협회 역사문화특별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촛불봉사단 이사장

3. 교직경력
한성디지털대학교 교양학부 외래교수 역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보존관리학과 겸임교수 역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외래교수


4. 저서
『한국역사기행』, 형설출판사, 1994.
『한성백제사』, 집문당, 1995.
『우리 高句麗 찾아가기』, 다시, 2003.
『漢城百濟의 都城體制 연구』, 학연문화사, 2005.

5. 공저
『高句麗山城과 海洋防禦體制 연구』, 백산자료원, 2000.
『河南의 역사와 문화』, 국학자료원, 2001.
『大高句麗 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2004.
『韓國 여성들 무엇을 믿고 살았을까』, 집문당, 2005.
『高句麗의 역사와 대외관계』, 서경문화사, 2006.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국토해양부, 2009.
『한국하천 콘텐츠 개발연구』, 국토해양부, 2009.
『칼과 철』, 시몽, 2010.
『한국 하천 지명사전』, 국토해양부, 2011.
『한국의 하천경관』, 국토해양부, 2011.
『강과 한국인의 삶』, 나남, 2012.

6. 논문
「<日本書紀>를 통해본 韓·日 關係」,『자유』142호, 자유사, 1985.
「滿洲와 滿洲族의 역사」, 『國學』, 국학연구소, 1992. 
「2C말~3C중엽에 걸친 遼東地域 정치권력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伽倻史 新考」,『가야문화』4호, 가야문화연구회, 1994. 
「가야사신고」,『昌寧文化』14호, 창녕문화원, 1994. 
「2C말~3C중엽 高句麗의 遼東 진출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선사와 고대』 11집. 한국고대학회, 1998.
「百濟의 東明과 高句麗의 朱蒙」,『실학사상연구』12집. 박상환박사 정년기념. 무악실학회, 1999. 
「百濟佛敎 初傳地에 대한 연구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 -」,『명지사론』11, 12집 (명지대학교 사학과 창설 20주년 기념특집). 명지사학회, 2000. 
「百濟 漢城時期 都城體制의 연구」,명지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0.
「百濟 佛敎에 대한 재고찰 -摩羅難陀와 初傳地를 중심으로-」,『명지사론』13집, 명지사학회, 2002.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의 재고찰-放學洞土城과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향토서울』62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2.
「百濟 都城의 都市構造와 信仰遺跡의 공간적 배치」,『선사와 고대』19, 한국고대학회, 2003.
「漢城百濟時代 漢北地域의 防禦體制」,『한북사학』제1집, 한북사학회, 2003.
「古代 洞窟 信仰遺跡 및 거북바위(龜岩)에 대한 연구」 『명지사론』14. 15합집, 명지사학회, 2004.
「河南市, 江東區地域 漢城百濟時代의 金星墳 발생과 鴨綠江, 臨津江, 日本地域의 前方後圓墳 관련연구」,『漢北史學』 제3집, 한북사학회, 2006.
「遼西지역 紅山文化의 前方後圓墳 발생과 卒本扶餘, 百濟, 日本의 前方後圓墳에 대한 관련성 연구」,『한북사학』 제4집, 한북사학회, 2007.
「漢城百濟의 都城과 3韓5加, 3山5嶽의 傳統思想」,『한북사학』 제5집, 한북사학회, 2008.
「河南市 고골의 漢城百濟時代 平地都城과 南漢山城의 推定 王宮址에 대한 연구」,『山城論誌』제2집, 광주문화권협의회, 2008.
「하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4권 제4호, 한국하천협회, 2008.
「古代 運河에 대한 연구」,『한북사학』제6집, 한북사학회, 2009.
「二聖山城 신앙유적의 재해석」,『山城論誌』제3집,광주문화권협의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삼국시대유적」,『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고려·조선시대 유적」,『물과 미래』제42권 제12호, 한국수자원학회, 2009. 
「오산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한강하구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수자원학회논문집』43권 7호, 한국수자원학회, 2010년.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위례문화』13호, 하남문화원,2010
「이성산성 건축유구의 성격분석」,『위례문화』14호, 하남문화원, 2011.
「강과 한국의 역대 왕도」,『국토연구』통권369호, 국토연구원, 2012.7. 
「칠지도의 곡나철산과 한성백제시기 서산지역의 담로」,『서산의 문화』,서산향토문 화연구회,2012.12.29

7. 학술활동

* 고구려 유물, 유적, 문화, 역사 등의 멀티미디어 컨텐츠 개발, 이구식, 윤명철, 오순제,정보정보통신산업진흥원,1999년
* 백제한성시기 하남시 고골일대의 도성체제,21세기 하남의 재발견,하남역사문화연구회,2001.2.2
* 백제불교 초전지와 하남,이성산성 국제학술 심포지엄,하남신문사,2002.5.10
* 한성백제시기 한반도 중부지방의 중요매장문화, 한민족의 기원과 매장문화 학술세미나, 세계거석문화협회,2006.5.26
* 하남시와 강동구지역 한성백제시대의 금성분과 압록강·임진강유역 및 일본의 전방후원분,제3회 학사재학술세 미나,강화역사문화연구소·학사재,2006.5.27 
* 하천의 역사와 문화-역사와 문화유적을 통해 본 하천의 중요성 고찰-, 2008 하천환경 세미나, 한국하천협회, 2008. 12. 2
* 한국 고대의 운하,2010 세계도시물포럼, 한국수자원공사, 2010. 
*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하남문화원,2010.11.12
* 이성산성의 건축유구의 성격분석,하남학술세미나,하남문화원,2011.10.7
* 4대강의 역사와 문화, 2012 세계강포럼, 한국수자원공사,2012.9.
* 시베리아 바이칼,몽골,한반도를 통해본 한민족의 시원문화,제1회 학술대회,국제신인류학회,2012.12.8

8. 언론활동

* 한배달, 북소리, 자유, 해동불교신문 등에 역사관련 연재
* EBS "역사속으로 여행(일연스님의 일생:개천절 특집)"에 출연
*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 백제하남위례성 관련 출연
* KBS 9시뉴스 등에 “백제 하남위례성 발견(1992)”, “마한의 왕궁 발견(2004.10.25)”, “세계최대고분 발견(2005.10.31)” 와 MBC,SBS 뉴스 등에 다수출연
* 2001년 5월 31일 한계레신문(고구려유적훼손)
* 2003년 1월 2,3,4일 문화일보(한성백제의 서남방어선을 찾다)

9. 국내조사

* 백제의 하남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백제의 하북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마한의 목지국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맥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예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원가야 왕궁터와 우두봉(소시머리)의 발견 및 조사
* 고령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금관가야,아라가야,대가야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통일신라의 북원경(원주),서원경(청주),중원경(충주),금관경(김해)의 치소발견 및 조사
* 화순 지석천의 마한의 왕궁 및 소도유적, 백제시대의 역사문화유적 조사
* 4대강사업기획 자문(역사문화분야)
* 금강변 공주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임하댐 주변 안동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및 자문
* 낙동강변 창녕,영산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안성의 안성천,한천유역의 역사문화유적조사
* 한강변 남양주지역 역사문화유적조사

10. 해외학술답사
* 중국의 고구려,백두산,장보고유적 답사
* 중국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유적 답사
* 일본 속의 백제,고구려유적 답사
* 국내성, 졸본지역의 고구려유적조사 
* 중국의 황하문명(상해,소주,항주,곡부,정주,낙양,서안) 대탐사
* 대마도의 우리문화 학술답사 
* 중국 산동지역의 우리문화유적답사
* 중국의 상해,소주,항주지역 답사
* 실크로드답사
* 내몽골유적답사
* 인도, 네팔 불교유적 답사
* 티벳, 촉나라유적 답사
* 파키스탄의 인더스, 간다라문명과 실크로드유적 답사
* 바이칼, 몽골 답사
* 일본 구주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일본 오사카,아스카,나라,교토,오쯔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몽골 고비사막유적 조사
* 몽골 동부지역유적 조사 
* 일본 구주,야마구찌,오카야마,히로시마,시코쿠,와카야마,이즈모 등 우리유적조사
* 중국 남경,단양,양주 지역 삼국과 육조시대 유적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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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말하는 식민사관 해체론

- 식민사관에 의한 근대사의 병폐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잔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두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쾌락을 다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저에게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이봉창 의사가 거사 직전 백범 김구 선생께 한 말 



민족 항일기 어릴 적 상해에서 배웠던 역사 이야기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를 그냥 어깨 너머로 읽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식민사관이 어떻게 주류 사학이 되었나’ 하는 역사적인 해설을 하기 이전에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전에 중앙아시아에 사는 어떤 고려인, 우리 민족 중에 거기 추방당해 있었던 분들을 고려인이라고 그러죠. 우리 동포들입니다. 제가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를 하기 때문에 고려인들하고 조금 유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하는 얘기가, 우리 부모님께 배우기를 단군이 우리 할아버지인줄 알고 있었는데 요새 선교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같이 들린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단군이 신화로 날아가 버렸으니 단군이 없는 자리에 누가 나타납니까. 아브라함이 나타났죠. 주체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단군상의 목이 어느 날 갑자기 다 달아나 버렸어요. 신화인데 왜 귀신을 여기다 갖다놨냐 이거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유태인이 얼마나 강합니까? 미국에 있는 여야 정치인 전부 이스라엘 유태인에게 굽실거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여러분이 생각하는 월스트리트가 뭡니까? 유태인들의 월스트리트입니다. 이 정도로 힘을 쓰는데 실상 유태인은 얼마 안 됩니다. 세계 인구로 따지면 0.5% 될까 말까예요. 이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879년에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태인 출신 헤롯이라는 사람이 시오니즘이라는 걸 처음 만들었어요. 시오니즘이라는 게 뭐냐? 유태인의 역사를 똑바로 하고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자. 말하자면 우리 독립운동 하시는 분들이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세우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자” 이것과 똑같은 정신입니다. 

지금 우리는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이유는 뭐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됐는데 일제가 남겨준 유산인 식민사학에 젖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지금 식민사학인지 구민사학인지 모르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발전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금까지 발전한 것은 솔직히 우리의 창조적 기능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 베끼고 남의 것 수입해서 조립하는 이런 거 잘해왔어요. 맞죠? 우리가 애플처럼 창조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창조적 능력이 없는 건 왜냐? 우리가 아직도 남에게 의존하고 우리의 것은 못났고 남의 것이 좋아 보이고 남의 것을 배워야 되고. 남의 것이 우리 것보다 우월하다고 늘 생각하는 이 열등감, 이런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식민사학의 병입니다. 지금 일본은 이렇고 중국은 저렇고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근본은 뭐냐? 식민지 근성, 식민지적으로 살아온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야말로 새로운 주류 사학, 주체적인 창조적인 데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모임의 주된 생각이며, 주된 흐름이며, 주된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같이 갑시다. 감사합니다. ◎ 


독립운동 편찬사업으로 탄압받은 이승만 정권기 이야기


오늘은 그동안 우리 집안에서 목격했던 이야기 중에서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편찬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친 선열들의 추도식을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무명용사들의 추도식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바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었습니다.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죠. 독립운동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한 것입니다. 둘째는 친일반역자에 대한 의법조치입니다. 법에 의해서 그 사람들을 처단하고 징계하는, 이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라는 것이죠. <그림 희산 김승학>

그래서 희산 할아버지께서 해방 후에 독립운동사에 착수한 것은 이러한 의지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당시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 임정에 함께 있을 때, 한국통사와 한국독립혈서를 쓰면서 약속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독립사라는 할아버지 저서에 그대로 담겨 있는데 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일찍 조국광복을 위한 운동 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주재하던 때에 백암 박은식 선생이 저술한 〈한국통사〉라는 나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지혈서〉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 모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후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로부터 여러 해 그 참담한 투쟁을 통하여 사료가 작성되는 대로 당시 내몽골 포두에 계셨던 조병준 선생께 보관시키고 불행히 왜경에게 체포된 후 팔다리가 부서지는 수십 차례의 악형은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모처에 은신하면서 자료를 수합하였다가 일제 항복 후 이 사료를 40여년간 내 피땀의 결정으로 삼아 귀국하였다.” 



이것이 당시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자, 그런데 해방 후 46년부터 49년까지 독립운동사를 주재해서 독립운동사 복간사업을 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1949년 독립신문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백범 피살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혹을 천명한 사설이 문제가 되어서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날 바로 정간이 되었고, 그후 복간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피난지 부산에서 겨우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1953년 5월입니다. 지금 부산의 초량동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애국동지원호회〉라는 독립운동단체 산하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벌써 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사무실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결국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독립운동사가 발간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사 집필에 힘쓰다가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시고 1964년 12월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저희 아버님(김대업)께서 그것을 이어서 196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독립사를 간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 독립운동사가 나타나는 것을 집요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친일세력입니다. 독립운동사가 나타나게 되면 그들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까닭에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사는 198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계에서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1980년이 되면 독립운동의 지도급에 있던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는 그분들의 기록이나 생생한 증언자료를 남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에 지금 현재 우리 독립운동사는 일제가 남긴 재판기록이나 일제자료를 가지고 역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는 찾았으나 역사는 찾지 못한 그런 민족입니다. 단재 선생은 일찍이 역사로 망하면 100년을 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방된 지 67년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식민사관이 여전히 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라가 앞장서서 식민사관을 강요하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의 득세로 이 땅에서는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친일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됐습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호는 백암(白巖)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1915년 3편 114장으로 구성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했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는『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 동기를 한국통사로 지적할 만큼 민족적 자쉼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해 봉안 일화


식민지생활, 독재,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체제이고 억압적 존재입니다. 지금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지난 식민지 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아직 식민지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관만 문제가 아니라 해방 후 70년에 가까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근성 가운데 노예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 뼈아픈 사실을,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끼며 자신을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식민지 근성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노예근성이죠. 노예적 근성입니다. 사대주의 국제주의 운운하는 가운데, 해방 후 제 나라는 찾지 못하고 국제적 교류에 따라 국제사회가 시키는 대로 눈치껏 따라가면서 약삭빠르게 출세하고 감투을 찾고 돈을 벌고, 해보자고 하는 이런 생각! 해방되던 그날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것이 팽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명칭을 대기도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것이 소위 건국준비활동이었고 이것이 소위 나라를 미국 혹은 소련에 의지해 나라를 혹은 내 출세 길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시대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군상 속을 헤매고 다니는 가운데 제가 만난 것이 아나키스트 그룹이었고 그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일은 일제 잔재를 소탕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제 잔재의 소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일제의 가장 악질적인 경찰, 이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박살내자. 이것이 그분들이 제 1차로 한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소탕하지 않고서 내가 어떻게 독립을 찾을 수 있겠느냐. 이것이 그분들의 1차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 동지들이 그 다음에 한 일은 무엇이냐. 선열들을 추모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순국선열들이 일제와 싸우면서 피를 흘렸고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이 죽어갔는데 해방된 공간에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을 빼놓고서 무슨 일을 할 것이냐. <그림 윤봉길 이봉창 유해 이관> 

1945년 12월 20일 전후 태고사, 지금의 조계사에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며 성재 이시영 선생이며 많은 어른들이 모였었습니다. 광복회의 회장을 하셨던 이강훈 선생이 그 당시에 발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모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어른들의 유해를 봉안하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일본에서 총살 당하고 쓰러진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분들이 일본 어느 구석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 이런 세태인데, 우선 이분들을 국내로 모시는 일부터 우리 해봅시다. 만장일치로 결의가 됐습니다. 

결국 1946년 6월 15일 부산으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울부짖으면서 삼인의 유해 앞에 경배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3열사를 효창공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민족의 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파괴, 암살 등을 필요조건으로 보고 급진적 폭력주의를 택하여 강한 항일운동의 한 면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운동사, 묻혀진 이야기


제가 일제 식민사관이라고 쓰지 않고 식민사관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굉장히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갔지만, 겉으로는 갔지만, 지금 후유증으로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죠.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신제국주의, 신식민사관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아까 잠깐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국사 전부 엉터리예요. 이거 정말 만신창이가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때 국사교육을 선택과목으로 했다가 지금 필수로 한다고 그러죠. 그러나 누더기가 된 국사를 그대로 가르치면 하면 뭘 하느냐 이거예요. 고장 난 자동차를 타고 가면 사고 나죠? 수리를 하고 깨끗한 자동차를 타고 가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고대사 근대사 조선사 고려사, 이거 전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고치자, 고쳐가지고 타고 나가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강자를 좋아하고 돈 많은 사람을 좋아하고 절대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을 편들지 않습니다. 요즘 독립운동사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서울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있잖아요. ‘뉴라이트’라고 합니다. 좌냐 우냐. 지금은 그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식민사관에 반대되는 역사관이 뭡니까? 민족사관입니다. 민족사관이 아니면 안 됩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일본은 황국사관이 있었어요. 이것이 우익입니다. 극우파예요. 여러분, 극우파 무섭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칼 들고 온 깡패, 구마모토 깡패들이 동아일보에 숙소를 정해놓고 명성황후를 찔렀고, 지금도 그 칼을 전시하고 있어요. 구마모토에 가보시면 박물관에다가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전시해놓고 있어요. 일본에 가면 검은 차가 방송하고 다녀요. 극우의 자동차입니다. 

일본에서 기차를 타면 터널이 많은데 그 터널 다 우리가 팠어요. 파다가 죽은 사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중국도 당한 적이 있지만 정말 우리 약한 나라 되면 안 됩니다. 패자는 말이 없다. 역사에 등록이 안 되요. 그러기 때문에 민족사관을 하려면 우리가 이겨야 됩니다. 과거와 같은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아까 말씀하신 의사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어떻게 했어요? 총살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민족의 손에 의해 처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쓰지 않고 뭐 암살했다, 뭐 등등 정말 힘없는 역사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사관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우리가, 한국이 중심이 돼야 해요. 세상에 1년에 250억이나 돈 들여가지고 왜 남의 역사를 연구해 줍니까? 중국 역사를 연구해 주더군요. 우리가 우리 역사를 해야지 왜 남의 역사를 하고 있습니까? 한국이 중심인 민족사관을 정립합시다. 감사합니다. ◎


식민사관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면


오늘 식민사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식민사관이라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제 나라 역사를 작게 만들고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그래서 우리는 원래부터 형편없는 민족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한 하나의 기본생각이라고 봅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얘기가 여러 번 나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제가 심란합니다. 왜 심란한가 하면 중국에서 동북공정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총리공관 삼청각에서 장관들 하고 여럿이 모였습니다. 총리 주재 하에 회의를 했는데 대응할 방법이 있습니까? 여러분, 대응하는 방법은 있잖아요. 우리가 역사연구를 열심히 하고 잘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중요한 학술지에 실어서, 그 사람들의 논리가 허구고 이론적으로 틀리고 실제적으로도 틀리다고 바꿔주면 됩니다. 그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연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교수 출신은 저밖에 없었거든요. 

아, 그래서 돈을 300억인가 들여가지고 고구려재단인가 하는 연구재단을 만들어줬더니, 그후 다시 좀더 증자를 한 거 같은데, 설마 그 자리에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취직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야말로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더니, 뽑아 쓸 사람, 책임자 한 사람을 잘못 앉혔어요. 나중에 보니 전부 다 그런 부류들만 자리에 앉혀 놨어요. 

여러분, 역사 기록을 잘 남겨놔야 고위 공직자들이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을 합니다. 이승만 정권 십수년 동안 독립운동 위해서 애썼다고 훈장받은 사람이 몇분이나 될까요? 딱 두명밖에 없습니다. 한분은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고, 한분은 여기 계시는 이종찬 원장님의 종조부, 이시영 부통령님입니다. 해방 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추서하고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죠. 

그리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국회도 없었고 거기서 법도 만들었습니다. 그때 국가기록보존소라는 것을 제가 국가기록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연락을 해서 거기에 이관된 문서목록을 좀 가져오라고 그랬더니, 이관된 문서가 딱 두 건밖에 없더라구요. 한 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현판이고 또 한 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직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나라입니까.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한테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 거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다 고쳐나가야 합니다. 

36년이라는 세월 잠깐이지만 그후에도 60년 세월이 지나고 거의 100년의 세월에 거쳐 이런 식민사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역사강연이 아니라 어찌 보면 운동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 운동에 동참해주시는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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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전한,후한제국과 흉노제국 오순제 2부 1강 


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전한,후한제국과 흉노제국 오순제 2부 2강 






STB 콜로키움 강좌는 기존의 강의물 형식에서 벗어나 각계 저명한 교수 한 분을 초청하여 매회 색다른 주제를 가지고 상생문화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함께 강좌를 진행하여 서로의 토론의 장을 마련한 프로그램입니다.


사회자는 발표자의 의견을 정리하고 콜로키움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발표 내용에 대한 의문사항을 주체적으로 말하고 들으며 토론을 통해 주제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간다.

 

STB 콜로키움을 통해 보다 넓고 깊은 지성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 입니다.


오 순 제 박사 약력


1. 학력:
서울공업고등학교 주물목형과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졸업(석사)
명지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박사)

2. 경력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 역임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역임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부회장
재단법인 한민족문화산업진흥재단 부총재
사단법인 하천협회 역사문화특별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촛불봉사단 이사장

3. 교직경력
한성디지털대학교 교양학부 외래교수 역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보존관리학과 겸임교수 역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외래교수


4. 저서
『한국역사기행』, 형설출판사, 1994.
『한성백제사』, 집문당, 1995.
『우리 高句麗 찾아가기』, 다시, 2003.
『漢城百濟의 都城體制 연구』, 학연문화사, 2005.

5. 공저
『高句麗山城과 海洋防禦體制 연구』, 백산자료원, 2000.
『河南의 역사와 문화』, 국학자료원, 2001.
『大高句麗 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2004.
『韓國 여성들 무엇을 믿고 살았을까』, 집문당, 2005.
『高句麗의 역사와 대외관계』, 서경문화사, 2006.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국토해양부, 2009.
『한국하천 콘텐츠 개발연구』, 국토해양부, 2009.
『칼과 철』, 시몽, 2010.
『한국 하천 지명사전』, 국토해양부, 2011.
『한국의 하천경관』, 국토해양부, 2011.
『강과 한국인의 삶』, 나남, 2012.

6. 논문
「<日本書紀>를 통해본 韓·日 關係」,『자유』142호, 자유사, 1985.
「滿洲와 滿洲族의 역사」, 『國學』, 국학연구소, 1992. 
「2C말~3C중엽에 걸친 遼東地域 정치권력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伽倻史 新考」,『가야문화』4호, 가야문화연구회, 1994. 
「가야사신고」,『昌寧文化』14호, 창녕문화원, 1994. 
「2C말~3C중엽 高句麗의 遼東 진출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선사와 고대』 11집. 한국고대학회, 1998.
「百濟의 東明과 高句麗의 朱蒙」,『실학사상연구』12집. 박상환박사 정년기념. 무악실학회, 1999. 
「百濟佛敎 初傳地에 대한 연구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 -」,『명지사론』11, 12집 (명지대학교 사학과 창설 20주년 기념특집). 명지사학회, 2000. 
「百濟 漢城時期 都城體制의 연구」,명지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0.
「百濟 佛敎에 대한 재고찰 -摩羅難陀와 初傳地를 중심으로-」,『명지사론』13집, 명지사학회, 2002.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의 재고찰-放學洞土城과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향토서울』62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2.
「百濟 都城의 都市構造와 信仰遺跡의 공간적 배치」,『선사와 고대』19, 한국고대학회, 2003.
「漢城百濟時代 漢北地域의 防禦體制」,『한북사학』제1집, 한북사학회, 2003.
「古代 洞窟 信仰遺跡 및 거북바위(龜岩)에 대한 연구」 『명지사론』14. 15합집, 명지사학회, 2004.
「河南市, 江東區地域 漢城百濟時代의 金星墳 발생과 鴨綠江, 臨津江, 日本地域의 前方後圓墳 관련연구」,『漢北史學』 제3집, 한북사학회, 2006.
「遼西지역 紅山文化의 前方後圓墳 발생과 卒本扶餘, 百濟, 日本의 前方後圓墳에 대한 관련성 연구」,『한북사학』 제4집, 한북사학회, 2007.
「漢城百濟의 都城과 3韓5加, 3山5嶽의 傳統思想」,『한북사학』 제5집, 한북사학회, 2008.
「河南市 고골의 漢城百濟時代 平地都城과 南漢山城의 推定 王宮址에 대한 연구」,『山城論誌』제2집, 광주문화권협의회, 2008.
「하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4권 제4호, 한국하천협회, 2008.
「古代 運河에 대한 연구」,『한북사학』제6집, 한북사학회, 2009.
「二聖山城 신앙유적의 재해석」,『山城論誌』제3집,광주문화권협의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삼국시대유적」,『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고려·조선시대 유적」,『물과 미래』제42권 제12호, 한국수자원학회, 2009. 
「오산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한강하구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수자원학회논문집』43권 7호, 한국수자원학회, 2010년.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위례문화』13호, 하남문화원,2010
「이성산성 건축유구의 성격분석」,『위례문화』14호, 하남문화원, 2011.
「강과 한국의 역대 왕도」,『국토연구』통권369호, 국토연구원, 2012.7. 
「칠지도의 곡나철산과 한성백제시기 서산지역의 담로」,『서산의 문화』,서산향토문 화연구회,2012.12.29

7. 학술활동

* 고구려 유물, 유적, 문화, 역사 등의 멀티미디어 컨텐츠 개발, 이구식, 윤명철, 오순제,정보정보통신산업진흥원,1999년
* 백제한성시기 하남시 고골일대의 도성체제,21세기 하남의 재발견,하남역사문화연구회,2001.2.2
* 백제불교 초전지와 하남,이성산성 국제학술 심포지엄,하남신문사,2002.5.10
* 한성백제시기 한반도 중부지방의 중요매장문화, 한민족의 기원과 매장문화 학술세미나, 세계거석문화협회,2006.5.26
* 하남시와 강동구지역 한성백제시대의 금성분과 압록강·임진강유역 및 일본의 전방후원분,제3회 학사재학술세 미나,강화역사문화연구소·학사재,2006.5.27 
* 하천의 역사와 문화-역사와 문화유적을 통해 본 하천의 중요성 고찰-, 2008 하천환경 세미나, 한국하천협회, 2008. 12. 2
* 한국 고대의 운하,2010 세계도시물포럼, 한국수자원공사, 2010. 
*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하남문화원,2010.11.12
* 이성산성의 건축유구의 성격분석,하남학술세미나,하남문화원,2011.10.7
* 4대강의 역사와 문화, 2012 세계강포럼, 한국수자원공사,2012.9.
* 시베리아 바이칼,몽골,한반도를 통해본 한민족의 시원문화,제1회 학술대회,국제신인류학회,2012.12.8

8. 언론활동

* 한배달, 북소리, 자유, 해동불교신문 등에 역사관련 연재
* EBS "역사속으로 여행(일연스님의 일생:개천절 특집)"에 출연
*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 백제하남위례성 관련 출연
* KBS 9시뉴스 등에 “백제 하남위례성 발견(1992)”, “마한의 왕궁 발견(2004.10.25)”, “세계최대고분 발견(2005.10.31)” 와 MBC,SBS 뉴스 등에 다수출연
* 2001년 5월 31일 한계레신문(고구려유적훼손)
* 2003년 1월 2,3,4일 문화일보(한성백제의 서남방어선을 찾다)

9. 국내조사

* 백제의 하남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백제의 하북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마한의 목지국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맥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예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원가야 왕궁터와 우두봉(소시머리)의 발견 및 조사
* 고령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금관가야,아라가야,대가야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통일신라의 북원경(원주),서원경(청주),중원경(충주),금관경(김해)의 치소발견 및 조사
* 화순 지석천의 마한의 왕궁 및 소도유적, 백제시대의 역사문화유적 조사
* 4대강사업기획 자문(역사문화분야)
* 금강변 공주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임하댐 주변 안동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및 자문
* 낙동강변 창녕,영산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안성의 안성천,한천유역의 역사문화유적조사
* 한강변 남양주지역 역사문화유적조사

10. 해외학술답사
* 중국의 고구려,백두산,장보고유적 답사
* 중국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유적 답사
* 일본 속의 백제,고구려유적 답사
* 국내성, 졸본지역의 고구려유적조사 
* 중국의 황하문명(상해,소주,항주,곡부,정주,낙양,서안) 대탐사
* 대마도의 우리문화 학술답사 
* 중국 산동지역의 우리문화유적답사
* 중국의 상해,소주,항주지역 답사
* 실크로드답사
* 내몽골유적답사
* 인도, 네팔 불교유적 답사
* 티벳, 촉나라유적 답사
* 파키스탄의 인더스, 간다라문명과 실크로드유적 답사
* 바이칼, 몽골 답사
* 일본 구주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일본 오사카,아스카,나라,교토,오쯔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몽골 고비사막유적 조사
* 몽골 동부지역유적 조사 
* 일본 구주,야마구찌,오카야마,히로시마,시코쿠,와카야마,이즈모 등 우리유적조사
* 중국 남경,단양,양주 지역 삼국과 육조시대 유적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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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스페셜〉 동북아 안보진단 특별대담(1)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2013년 10월 방송> 사회 STB 최원호 / 대담자 前 공군중장 배창식 사령관 / 前 해군중장 서양원 제독 / 前 육군소장 송길섭 장군

새로운 밀레니엄을 외치면서 시작했던 2천년도 벌써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을 꿈꾸었지만 2001년 미국의 9.11 테러를 시작으로 20세기 문명의 행태로 회귀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으로 오늘날의 시리아 사태까지 전세계적으로 전쟁과 갈등, 대결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도, 2013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정전이란 말 그대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 전쟁이 민족과 인류의 앞날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육해공군 예비역 장성들을 모시고‘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그런 주제로 대담을 나눠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군사전략가치

세계 여러 곳곳에서 지금 갈등과 대립,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 그중 특별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왜 한반도가 전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가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배 사령관 과거에는 문화 흐름의 중심이 유럽이었으나 최근에 문화, 경제, 군사력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되고 있죠. 특히 경제대국 일본과, 최근 양극체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중국과 미국이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특수전부대, 화학전 대비 등 여러 가지 지역내 안보위협이 있다보니 세계 언론들이 한반도를 주목한다고 생각합니다.

서 제독 군사적인 측면에서 한반도는 아시아의 발칸반도, 즉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륙세력에겐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해양세력에겐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기 때문에 주변국의 충돌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쪽으로 주변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안정을 바라는 시진핑 체제로서는 호전적인 북한 김정은 체제가 상당히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6.25한국전쟁과 정전의 의미

올해가 정전 60주년이잖아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말씀해 주십시오.

송 장군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열강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육교적인 위치죠. 그래서 1945년부터 1990년까지 냉전시대가 45년간 지속되는 가운데 1950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분단되는 운명에 처합니다.

그 외에도 양대 세력간 대립각은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열강들은 우리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를 오히려 희망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것이 열강들의 대한반도 정책기조가 되는 ‘현상유지 정책’인데, 우리가 통일을 앞두고 해결해야 될 큰 과제죠.

최근에 중국이 G2 국가로 부상하면서 미중간 경쟁패턴, 패권경쟁에서 한반도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고, 또다시 6.25와 같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3차대전으로 확전할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지역이 한반도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피해사상자 그림]

배 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우리 남북한 3천만 인구로 볼 때 사상자 인원은 정말 대단한 숫자죠. 지금 남북한을 비교해보면 당시보다 훨씬 많은 무기와 성능이니 만일 다시 이땅에 제2의 6.25가 난다면 우리는 재건하기 힘든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겁니다.

서 제독 6.25전쟁의 교훈은 한마디로 전쟁에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잘 보여주는 전쟁입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을 믿고 전쟁에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였던 역사가 있습니다(임금이 의주까지 피난). 전쟁의 뼈아픈 역사를 우리 민족은 금방 잊어버렸고 그 뒤 전쟁에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뼈아픈 역사를 겪었고, 광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6.25전쟁을 겪었죠.

휴전 이후 남북의 대치와 도발

송 장군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60년대까지는 전후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이후부터 북한은 소규모 국지도발을 계속 해왔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안보의식이나 군의 경계태세를 점검하는 의도도 있다고 봅니다. 즉 적의 준비태세, 경계태세를 시험하는 소규모 도발이었죠.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은 IMF시대를 맞기 전 1996년 9월입니다. 18일 새벽 한시 반경, 강릉시 안인진리 대포리 인근 해안가에서 북한에서 독자적으로 제조한 상어급 잠수함(약 300톤급)이 발견되었죠. 이들의 침투목적은 군사 정찰이었습니다. 문제는 잠수함을 발견한 장본인이 초소 경계병이 아니라 택시기사였다는 거죠. 그날부터 11월5일까지 50일간에 거쳐 게릴라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전개합니다. 50일이라는 것은 대단히 장기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봐야 될 부분은 이 50일 작전기간 동안 강원도에 살고있던 주민들은 그야말로 공포와 불안 속에 살 수밖에 없었고 생업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 마비상태였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생포한 이광수 상위 수첩에는 여러번 우리 해안 NLL을 넘어 동해안을 침투해 군사정찰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대전에서 가장 자유로운 무기체계가 잠수함입니다. 바다 속에서 움직이는 잠수함은 인공위성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북한은 70여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오늘날도 잠수함을 이용해서 북한군이 정찰 내지는 정보수집 임무를 하려고 언제든 NLL을 넘을 수 있다 이러한 교훈을 되새겨봐야 합니다. 또 택시기사가 신고했다는 것은, 이제는 민간인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경계병 역할을 해야 되고 민간군이 통합일체가 되는 총력전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북한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도출하게 된 것이죠.

서북도서와 NLL(북방한계선)

정전 이후 국지적인 도발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이 바다 아닙니까? 그 중 서해쪽 NLL 국지도발에 대해서 정리를 해주시죠.

서 제독 북한은 1970년대부터 NLL이 무효한 선이다 라고 주장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NLL문제는 근본배경이 뭐냐면 그동안 양측의 군사작전 경계선(=해상작전경계선, 해상영토선)으로 쭉 유지되어 왔던 유효한 선이다 라고 주장하는 우리측 주장과, 이것은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선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라는 북한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대결해온 것이죠.

원래 6.25전쟁 당시에는 연합군 해군이 한반도 전체 해역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각 도서들도 유엔군이 운영해오고 있었죠. 가령 대동강 입구에 있는 석도라는 섬이라든가, 동해 영흥만 안에 있던 각종 섬들이 우리가 장악한 것이었기에 그 섬을 기준으로 유격대나 특수작전부대가 북한지역에서 작전을 해왔었습니다. 그러다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지금의 NLL북쪽에 있는 섬들은 관리차원에서 포기하고 다 철수를 했는데 그중 남아있던 섬이 지금의 서해 5개 도서 곧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이런 섬들이었죠.

그런데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바다를 작전수행에 이용하다 보니 어민들이 바다에서 생업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민들이 바다에서 생업을 할 수 있도록 선포한 선이 NLL입니다. 통항이나 생업을 위해 우리 한국이나 유엔군 선박이 위로 올라가지 말아라 이렇게 양보해준 선이니, 북쪽에서 볼 때는 당시로선 아주 감지덕지한 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던 것이 1973년도가 되면서 북한에서 기습공격전력을 좀 갖추게 되고 또 잠수함도 갖게 되니까 이제 그 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NLL과 북 주장 해상경계선 그림] 북한에서는 그림에 보이는 엉터리 같은 빨간 선을 지켜라 주장하면서 수시로 NLL선 남쪽으로 도발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연평해전, 2차 연평해전(=서해교전), 천안함 사건, 대청해전,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모두 다 NLL을 무시하려는 북한의 책동에 의해 이루어졌던 사건들입니다.

서해 NLL(북방한계선) 남북대치전력

서 제독 NLL에서 교전도 벌어지고 포격사건도 있다보니 남과 북이 상당히 많은 전력을 NLL 주변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도발을 해야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제가 볼 때는 틀림없이 NLL부근 수역이 아니겠느냐. 왜냐하면 북한의 속성이 궁지에 몰리거나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항상 도발을 해왔는데 가장 쉬운 곳이 서로 의견충돌이 있는 NLL지역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배 사령관 운전을 하면 교통규칙을 지켜야 하고 스포츠를 하면 룰을 지켜야 되죠?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전규칙은 전시와 평시 두 가지 교전규칙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군은 정전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게릴라전, 국지도발에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까 해서 평시교전규칙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북한의 도발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연평도 포격사건 때는, 적이 공격해오면 비슷한 화력으로 공격해라 이렇게 했지만 이런 문제점을 없앴죠. 이제는 만일 북한이 도발한다면 ①공격받는 즉시 공격하라. 비례성으로 하지말고 ②도발하는 세력과 지원세력까지 완전히 제압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북한도 연평도 같은 포격은 섣불리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고 우리 군이 참으로 대응을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남북 공군 전력현황

현대전에서는 공군의 역할이 대단히 크잖아요. 현재 남북한 공군의 상황이 어느 정도입니까? [공군 작전수행능력비교 사진]

배 사령관 우리 공군이 작전하는 걸 실제로 보여드리지 못하는게 안타깝습니다. 아시겠지만 걸프전, 아프간전, 코소보전, 이라크전… 현대전에서는 인명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전쟁의 큰 목표 중 하나입니다. 특히 육군의 인명피해가 많은데,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대부분 공군과 해군이 제압을 합니다. 나중에 육군이 진입을 하는데, 특히 산악지대 같으면 공군이 먼저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북한 공군을 비교하면 제가 볼 때 숫자는 북한이 좀 많습니다. 그러나 숫자보다 ①얼마나 정밀하게 필요한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느냐. 그 다음에 ②얼마만큼 파괴할 수 있느냐. 이런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숫자는 적지만 우리는 신예기로 아주 정밀하게 필요한 부분을 공격할 수 있다. 그래서 대체적인 비교는 한국 공군이 북한 공군보다 조금 앞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스포츠에서 비슷한 사람이 경기하면 결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전시에 쌍방이 비슷해서 결론이 안날 경우, 전쟁이 오래가고, 그러면 양쪽이 다 피해를 입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우수한 전력을 가지고 빨리종결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니 우리는 한미연합 공군전력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죠. 한미연합작전을 하면 짧은 시간 내에 북한을 완전히 괴멸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전시작전권을 재검토해야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전시작전권의 개념과 이전문제

전시작전권이 무엇인지, 역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좀 정리해 주십시오.

송 장군 전쟁은 제군과 제해권이 확보돼야만 지상작전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죠. 그런 측면에서 전시작전권이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 국군을 누가 지휘하느냐 하는 작전지휘 및 통제권을 말합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은 7월14일 유엔군 사령관한테 서한을 보냅니다. 작전의 일원화와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우리국군을 포함, 미8군 사령관이 당시 한국동란에 투입된 모든 병력을 통제하고 지휘하라, 이것이 뿌리가 된 것이죠. 당시 우리 한국군은 전쟁경험도 없었고 병력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쟁을 경험한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는 전시에 지휘통제능력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것을 고려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 한국군 지상군은 미8군 사령관에게 지휘권이 이양되고 해군과 공군은 각각 극동해군 구성군 사령관한테 이양됩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 주한미군의 역할조정문제가 정치권에서 거론되고, 그후 1992년 한미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합의하기를 1994년까지는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한테 이양하고 2012년 4월1일까지 전시작전권을 한국군한테 이양하기로 합니다. 평시작전권이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라든지 국지도발이 일어났을 때 우리 한국군이 단독으로 작전통제나 지휘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94년도에 한국군에 이양됐습니다. 전시작전 통제권은 준비가 어렵다 해서 우리정부 요청으로, 현재는 한미연합사령관이면서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지휘권, 통제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2015년 12월1일부로 합참의장한테 이양한다 이런 배경과 내용이 골자인데요.

문제는 한국 합참이 주도하고 미군은 보조역할, 지원역할로 변하게 될 때 우리가 여기에 얼마나 준비가 돼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적이고 하드웨어적인 부분을 다 구비해야 됩니다. 소프트웨어란 전쟁수행능력, 운용능력이고 하드웨어란 주한미군한테 의지하던 정보자산 같은 것입니다. 국군의 사정을 제일 잘 아는 국방장관이 언급한 측면을 고려할 때 아직도 2015년 12월1일부로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죠. 그러나 미국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2015년 12월1일부로 합참으로 전시작전 통제권을 이양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 정부와 국민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앞으로 제2의 6.25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려가 있습니다. 전쟁 원칙에 보면 우리의 작전계획은 방어개념입니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의사도, 그런 계획도 없다는 뜻인데 물론 북한은 공세적인 공격개념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적이 100이라는 전력을 보유했을 때는 최소한 70이라는 전력은 보유해야만 방어할 수 있다는 통계, 전례가 있습니다. 미군의 지원없이 한국군 독자적으로 북한군 대비 과연 70% 전력을 확보했느냐 이 부분을 우리는 예의주시하는 것이죠.

배 사령관 고려해야 될 사항이 참 많죠. 한반도처럼 핵과 미사일과 화학무기와 세균전, 게다가 특수부대, 이런 전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준비하면 되겠다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남북한의 상황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장인데, 내가 힘이 되면 우리집을 내가 지키면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힘이 버거울 때는 경찰 요청하고 개인경호도 사서 쓰고 해서 내 가족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느 것이 중요한가는 국가지도자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안전, 국가의 안전이 더 우선돼야 된다고 저는 봅니다. 특히 최근 북이 핵을 개발하는 소위 비대칭 전력, 아주 위험하거든요.

6.25 한국전쟁이 나던 해 1월 미 국방장관 에치슨이 에치슨 라인을 선언했죠. 우방국을 지켜준다는 방어구역이 오키나와, 필리핀까지 연결되면서 지도상으로 보면 한국이 제외돼버린 것입니다. 물론 전쟁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일어나진 않지만, 북한으로 하여금 오판하는데 상당히 큰 작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5개월 후에 6.25가 일어났거든요. 전/작/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북한이 전면전을 못합니다. 연합전력으로 하면 북한이 자기가 멸망한다는 걸 알거든요. 내가 죽는데 왜 덤비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전작권이 한국에 넘어와 미국의 지원이 소홀해지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연합사령관이 하면 자기 전력을 요청해서 불러오겠지만, 만일 여기서 제가 합동사령관이 돼서 미국에 어, 폭격기 부족합니다, 몇대 보내주십시오. 쉽게 보내줄까요? 그러한 예상을 해야 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이런 안보위협과 현상황을 좀더 많이 고려해서 전/작/권 환수시기를 재검토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대남전략

송 장군 손자병법에도 나옵니다만 적을 모르고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북한의 대남전략은 선남조선 혁명인데요, 쉽게 얘기해서 남한을 분홍색으로 물들여놓고 그 후에 인민군을 투입시키겠다는 개념이죠. 매우 주목해야 되고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이를 위해서 북한은 일찍부터 3대혁명역랑 강화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북한사회주의 혁명역량강화, 남한사회주의 혁명역량강화, 국제사회주의 혁명역량강화, 이 세 가지 혁명역량이 강화됐을 때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하겠다. 즉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여건을 마련하는 것인데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남한사회주의 혁명 역량강화를 위해 북한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

쉽게 얘기하면 간첩과 공작원을 통해 남한세력을 동맹세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공세력, 즉 북한 공산주의를 따르는 세력을 많이 확충하고 이런 사람들을 동맹세력으로 포섭해서 한마디로 ①연공정권(북한 공산주의와 연계되거나 공산주의를 따르는 정권)을 서울에 수립하게 한다.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②인민군을 투입해서 무력통일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것이 대남전략의 기조입니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소위 공작원, 간첩들이죠.

남조선혁명이라는 큰 틀 안에서 간첩들이 우리 정부나 군에 대한 정보수집을 해서 북한에 보고하는 시스템인데, 최근 들어 우리가 중국과 많은 교류를 하지 않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간첩 운영하는데 있어서 정말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아주 자유로운 사회 아닙니까. 중국을 통해서 많은 공작원, 간첩들이 침투하고 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핵개발과 한반도 정세

분단과 대결 과정의 정점에 있는 것이 북한 핵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북한의 핵개발이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 국민들이 아직 인식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핵무기라는 것은 어떤 무기입니까?

배 사령관 딱 하나만 예를 들면 현대 미, 중,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갖고 있는 핵들은 전부 메가톤급이거든요. 100메가톤 한 발이 대전 2km 상공에서 떨어지면 남한은 완전히 초토화 됩니다. 그게 핵무기입니다. 단 한 발에.

과거 미소 냉전시대 때 핵은 탄두로 몇천개가 됩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호멸망하기 싫으니까 사용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스타트START, 썰트SALT 해서 감축을 하고 있죠.

2차대전 때 아시아대륙, 태평양까지 그렇게 쟁쟁하던 일본이 두발 맞고 그냥 항복을 했거든요. 종말 무대가 되었죠. 이것이 핵무기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북한이 개발하는 핵무기는 이보다 성능이 좋다고 봐야 됩니다. 올해 개발됐다면 더 위험한 것이고, 거기다 소형화까지 되고 나면 정말 우리는 방법이 없는 것이죠.

송 장군 북한은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전후복구 사업에 매진합니다. 해외 자본과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는데, 그 일환으로 1956년, 전쟁 끝나고 3년 후 소련과 핵연구소 조직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고 1959년에는 조소朝蘇 원자력평화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변 핵시설 단지에 제1원자로, 그것은 소형입니다만 연구용 원자로인데,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아 설비를 합니다. 자, 김일성은 애초에 소련과 협정을 맺을 당시에는 평화적인 분야에 핵을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기도 부족했고 수풍발전소도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봤고.

그런데 생각을 바꾸게 되는 시점이 옵니다. 북한은 많은 재래식 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핵폭탄을 한번 만들어놓으면 다 해소가 된다. 그래서 김일성은 드보나 연구소라고 모스크바 북방에 국립핵연구소가 있는데 매년 수명씩 연구원 또는 기술자를 보냅니다. 기술축적을 위해서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대 같은데서도 핵공학 분야에 젊은이들을 양성해 현재 약 3천명의 핵관련 기술자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1980년대 우리가 아시안게임을 했을 때 벌써 영변 핵시설 단지에서 고폭실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고폭실험이라는 것은 뇌관실험입니다. 소위 신관의 발화실험인데, 150여회 실험을 하면서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 239를 추출해내기 시작한 거죠.

원자폭탄은 플루토늄과 우라늄으로 구분되는데 우라늄 235를 응축시켜서 만들어낸 것이 우라늄탄, 플루토늄 239를 이용해서 만들어낸 것이 플루토늄탄입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투하한 것이 우라늄탄이고, 나가사끼에는 플루토늄탄을 투하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 플루토늄을 계속 추출해낸 겁니다. 그리고 2006년 10월9일 드디어 1차 핵실험을 한 거죠. 그렇게 보면 약 20년에 걸쳐서 핵무기를 개발했다.

실제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은 아주 소규모고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그 다음에 2009년 5월에 한번, 또 금년 2013년 2월12일 3차에 걸쳐서 핵실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군에서는 거의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노골적으로 금번 핵실험은 소형화와 경량화를 성공시킨 핵실험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아주 심각한 얘기입니다. 소형화와 경량화를 이뤘다, 달성했다는 것은 스커드미사일이나 노동미사일, 또는 대포동 미사일에 탄두를 (고폭탄이 아닌) 원자탄으로 장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투발 수단면에서 대단히 발전된 단계거든요.

[히로시마 원폭사진] 미국이 히로시마나 나가사끼에 투하할 때 원자탄은 3톤에 가까운, 닉네임도 Fat-Man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큽니다. 초기단계의 핵탄은 크게 만들 수밖에 없는데 과학기술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자꾸 작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은 말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무기체계를 강의하고 있습니다만 소총탄만한 우라늄, 초정밀 우라늄탄을 만들어낼 정도입니다. 소총으로 실은 원자탄을 쏜다는 거죠. 그런 단계까지 왔는데.

아무튼 북한은 현재 미국 정보당국의 분석에 의하면 한 10발 정도의 플루토늄 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일부에서는 북한이 핵을 갖고 또 그 핵을 소형화시켜서 미사일에 탑재하게 되면 미국을 향해서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는데, 그건 가당치도 않은 얘기입니다. 

일단은 ①북한의 목표는 대한민국입니다. 어떻게든지 대한민국을 무력 적화통일하겠다는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이고. 두 번째로 국제정세 속에서 북한의 소형화된 핵폭탄(=미사일)이 테러분자들한테 팔려나간다면 그게 어디로 돌아오겠습니까? ②제2의 9.11사태가 또다시 미국을 향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개발한 소형 핵미사일이 테러분자들한테 넘어갔을 때 그게 심각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미국이 걱정하는 부분이죠.

북한의 핵개발과 6자회담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동된 것이 6자회담이잖아요. 6자회담이 몇년 동안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 말씀해주시죠?

배 사령관 핵개발을 못하게 하는 것이 6자회담이었는데 지금 핵개발이 됐지 않았습니까. 여러 차례 핵실험도 했고. 그러니 6자회담은 실패했다고 저는 정리하고 싶고요. 그동안 6자회담은 시간을 벌어주고 개발할 수 있는 자금도 오히려 지원을 해줬던 것입니다. 이건 정말 우리가 잘못한 거죠.

그 핵이 어디로 돌아옵니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한테 돌아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으로 6자회담을 한다면 현지에 있는 핵폐기까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핵을 완전히 폐기하는 쪽으로 6자회담을 유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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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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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스페셜〉 동북아 안보진단 특별대담(1)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2

<2013년 10월 방송> 사회 STB 최원호 / 대담자 前 공군중장 배창식 사령관 / 前 해군중장 서양원 제독 / 前 육군소장 송길섭 장군


9천년의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약 7천년간의 상고시대를 지나면서부터 분단과 통일을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뿌리문화인 제천문화가 빛을 발하던 때는 통일국가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제천문화가 퇴색할 때는 어김없이 분열의 역사를 통과해 왔습니다. 영토는 한반도로 축소되었지만 통일 고려와 통일 조선을 거쳐 왔던 우리 한민족은 일제 35년의 치욕을 극복하고 해방되던 날 또다시 분단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광복 68주년, 분단 68주년,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오늘, 이 작은 한반도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간은 남북한의 전력비교를 통해 전쟁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환상적인 기대를 경계할까 합니다. 

잠수함, 보이지 않는 적

서 제독 핵을 제외하고는 비대칭 전력의 가장 대표주자가 잠수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수함은 적한테 탐지가 되지 않고 적의 수상함에 대해 치명적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 여러 가지 작전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의 잠수함 한 척에 순양함이 어뢰를 맞아 침몰했고 천안함도 소형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잠수함 전력을 매우 많이 확보했습니다. 6.25전쟁 때 유엔군에게 해양통제(인천상륙작전)를 빼앗겼기 때문에 북한이 거의 다 이긴 전쟁을 역전당해 압록강까지 패퇴한 경험은 북한에게는 아주 뼈저린 교훈이었을 것입니다. 북한은 유엔군 해군에 대응하자는 목적으로 70여척의 잠수함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땅굴처럼 바다에서 잠수함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아주 은밀하게 접근해 치명적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북한 비대칭전력 그림] 

북한의 장사정포 [북한 장사정포 그림]

송 장군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무기체계를 내가 보유함으로써 전력의 균형을 깨트리는 것을 비대칭 전력이라고 합니다. 핵무기가 최고 중요한 비대칭 전력이고, 다음에 북한이 갖고 있는 생화학무기와 장사정포가 위협적인 비대칭 전력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이, 240미리 방사포와 170미리 자주포들이 평상시에는 동굴진지에 들어가 있습니다. 유사시에는 동굴에서 나와서 바로 포를 쏘고 다시 들어갑니다. 그렇게 대응타격 할 수 없게 전술적인 전법을 쓰는데, 이 방사포들이 서울을 한 시간 정도 타격했을 때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북한군 수백명이 휴전선 동굴진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최전방에서 60키로라면 사실 서울 이남까지 사격 가능한 것이죠. 

1994년 3월 남북간 판문점 실무회담에서 북한의 조평통(통일전선부 산하조직) 서기국장 박영수라는 사람이 우리 송영대 통일부차관한테 서울 불바다 얘기를 합니다. 그때는 핵무기를 만들기 이전이므로 그 호언장담은 170미리 자주포와 240미리 방사포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죠. 우리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되는데, 북한이 대남공작을 해올 경우 일단 전술적으로 포병사격을 하게 됩니다. 공격준비사격이라고 하는데, 한 시간 이상 전방지역 및 수도권까지 계속 집중포격을 하는데 이때 피해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합니다. 포병화력과 장사정포로 서울 북방까지 집결해 있는 우리 전방전력에 대해 사격을 가해온다면 우리 전투준비태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이죠. 실질적인 위협으로서 명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배 사령관 징후경보란 것이 있습니다. 전쟁하기 위한 징후가 뭐냐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정보가 없으면 전쟁의 승패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정보를 점령하는 사람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북한은 워낙 감추는 걸 좋아해서 전방의 땅굴만이 아니라 후방의 탱크를 비롯한 기계화 군단까지 지하로 들어갑니다. 공군비행장에 비행기까지 다 지하에 가 있습니다. 심지어 활주로까지 산속에 낸다는 상상하기 어려운 실정이 곧 북한입니다. 군사용어를 쓰면, 위성 카메라 30센치 정도를 식별해야 군사정보로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성도 이용하고 항공기도 이용하고 사람도 이용하고 또 무선감청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주 소규모 국지도발은 탐지가 어렵지만, 대규모 국지도발이라든지 혹은 전면전 준비는 현재 있는 우리 시스템 가지고 전부 다 포착됩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안심하셔도 되고 그만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생화학무기, 무색무취의 대량살상무기

송 장군 비대칭 전력 중 핵무기에 이어 생화학무기가 굉장히 치명적이고 엄청난 살상력을 발휘합니다. 생화학무기*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비용 대 효과면에서 유용한 무기체계입니다. 

제네바 협정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했습니다만 북한이 유사시에 이를 지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1970년대부터 북한은 생화학무기를 대량 만들라는 김일성 지시로 상당량의 화학무기를 비축해놓았습니다. 생물무기*란 쉽게 말해 병원균입니다. 
실제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화학무기는 엄밀히 말해 화학작용제라고 해야 맞는데, 화학독극물을 포탄이나 미사일에 충전시켜야만 화학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독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원화시스템으로 용기에 담아 놓습니다. 전쟁 발발 한 열흘 전부터 충전시키는 것이죠. 

땅굴, 북한의 특수부대 [제4땅굴 & 땅굴도표]

송 장군 땅굴은 무기체계는 아니지만 비대칭 시스템화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북한은 70년대초 서유럽에서 굴삭기를 대규모로 수입합니다. 땅굴부설에 사용했던 것이죠. 땅굴을 이용해서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그들은 피해없이 온전한 상태로 남한의 어느 지점까지 진군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만일 전방부대 GOP라인 후방에 땅굴의 출구가 형성됐다면 전방에 있는 우리 전력들이 고스란히 포위되는, 그래서 혼란에 빠지고 전의를 상실하는, 매우 충격적인 시스템이 땅굴입니다. 그래서 땅굴을 더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북한에는 특수부대 12만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특전사령군이라고 생각하면 맞는데 어마어마한 병력입니다. 전쟁이 날 경우 12만명의 특수부대 중 일부 부대들은 북한의 전쟁지도본부나 핵무기 보유시설에서 경계근무방어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수가 우리 남한에 침투하게 되는데 공군에도 특수부대가 있고 해군에도 저격여단이라는 특수부대가 있습니다. 

북한군의 전략이 기습전, 속도전, 배합전입니다. 특수부대는 정규전과 아울러 비정규부대와의 배합전을 후방지역에서 동시에 전개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군 일반 병사에 비해 고도로 전투기술이 숙달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비대칭전력 중 하나입니다. 

북한의 전자전, EMT탄

배 사령관 EMP탄이란 일렉트로 마그네틱 펄스탄이라고 해서 전자파 폭탄입니다. 인명손상도 별로 없고 건물도 부수지 못하지만 핵으로 만들어져 폭발할 때 감마선이 나옵니다. 이 감마선이 공기 중에 산소, 질소와 결합하면서 강력한 펄스를 생산하거든요. 얼마나 강력하냐면 반경 내에 들어가 있으면 수Km까지 전자시계, 컴퓨터, 스마트폰, 모든 전자장비들이 아웃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웬만한 지하속 땅굴이나 벙커에 들어가 있어도 환기구나 안테나를 통해 이 파가 들어갑니다. 그럼 그 속에 있는 전자장비도 역시 쓰기가 어렵습니다. 핵은 세계적으로 비난도 많고 파괴가 크기 때문에 쓰기 어렵지만 이럴 때 EMP탄은 쓸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지금은 컴퓨터 없으면 전쟁이 안 되는데, 컴퓨터 시스템을 포함한 전자회로를 다 망가뜨려버리니까 EMP탄이 상당히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1958년 태평양에서 미군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는데 수백Km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기서 착안해서 만든 것이 EMP탄이고 그리고 대략 한 발에 주파수 용량 10GW(기가와트) 급이고 180만 암페어입니다. 집에서 쓰는 TV나 전류가 3, 5암페어 정도, 좀 높은 게 15암페어 됩니다.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보통 우리 여름에 번개를 많이 보는데, 번개보다 100 내지 1,000배 이상의 위력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전시에 쓴다면 컴퓨터로 이뤄지는 현대 전쟁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김정일체제와 국제정세

서 제독 그동안 북한 지도자들이 세 번 바뀌었는데 밖에서 볼 때 북한시스템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마 북한체제는 자기들 특성에 맞게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평도 포격도발이나 천안함 폭침 같은 상황이 생기는 것은 지도자가 갖고 있는 호전적인 성격이 독재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과 맞아떨어져서 쉽게 일어났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면 안정적인 상태를 북한체제가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이 젊은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리고 절대자로서의 권한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우발적인 상황들은 항상 우리가 대비를 해야 됩니다. 

배 사령관 강대국들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요. 미국도 과거보다는 상당히 강도높게 대북제제를 하고 북한이 양자회담을 하자 해도 거들떠보지 않거든요. 중국도 북한이 3차 핵실험하고 나서는 상당히 달라졌어요. 일본도 그렇죠. 특히 대한민국이 달라졌거든요. 이러한 여러 가지 입장변화 때문에 가장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은 북한 지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방법을 다 내놓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전협정*[사진]을 폐기한 것인데, 그러나 정전협정이 바뀌었다고 대한민국이 갑자기 불안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러나 저렇게 불안하고 폭력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북한이 언제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 놓는 건 아니고 늘 깨어서 준비해야 전쟁을 예방할 수 있지 않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송 장군 얼마전 중국 고위간부가 김정은을 만났을 때 김정은이 극동지역에서 불안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하고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믿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내부문제가 복잡해지면 출구전략 차원에서 대남도발을 해왔던 것이 북한의 전례입니다. 항상 안보태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서 제독 중국은 북한을 항상 안고 있을 것입니다. 환탕불환약, 탕재를 바꿔도 약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북한은 중국의 대미전략을 대신 수행해줄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적절한 완충작용을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주변 안정을 해치는 행동을 자제하도록 중국에서 충분히 압력을 넣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 그 압력의 일환으로 더 이상 어떤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은 북한을 항상 끌어안고 가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을 어떤 범위 내에서 그대로 둘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미국이 과도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는 그대로 놔두는 역할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습니다. 

중국 동북공정의 정치군사적 평가

서 제독 얼마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언론기자가 세미나 하는데 참가했습니다. 동북공정 문제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에 대해 언급하는데 동북공정 문제를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 사람이다 이렇게 중국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중국 영토로 돼 있는 곳을 한국 사람들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 하는 우려 때문에 동북공정이라는 용어를 시작을 했다. 이런 농담 반 진담 반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역사에서는 항상 강자의 주장이 약자한테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정치 경제적인 힘을 키워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힘을 키워야 된다는 논리가 거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배 사령관 동북공정은 동북변강 역사와 현 상황에 대한 계획연구공정인데, 동북 3성(랴오닝성=요녕성, 지린성=길림성, 헤이룽장성=흑룡강성)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이 모든 역사내용이 뭐냐 하면 그 시조가 중국 황제의 후손이다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과거 한국에서 했던 모든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있습니다. 학교 교과서나 기념비, 기념탑 내용을 다 지우면서 그곳의 학생들의 교육도 그렇게 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북한에 급변사태가 생긴다든지 한국의 통일(참 어렵긴 하지만)이 된다면, 중국이 영향을 많이 미칠 것으로 봅니다. 특히 얼마전 중국이 국경선에 많은 군을 배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북한의 급변사태 때 북한으로 진주하려고 와 있었지 않았냐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우리는 동북공정이나 주변국이 변화해가는 정치를 보고서 적절한 대응을 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 실상

송 장군 1997년 IMF시기에 제가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있는 미안보연구소에 연구원으로 1년간 공부하러 갔었는데 그 당시 연구원들이 2015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 이건 경제적 군사적인 면이 다 포함되는 겁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미국의 대응 준비가 대단히 빠르고 기민하구나. 미리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는데, 벌써 20년 전이네요. 

자, 1990년을 전후해서 구소련과 동부유럽이 붕괴됩니다. 지금까지 최대의 초강대국인 소련과 대치하고 있던 라이벌이었던 미국은 사실 대항마를 잃은 결과거든요. 미 국방부 입장에서는 국방비 삭감이라는 것은 아주 치명적이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전세계의 경찰국가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국방비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차기 경쟁상대를 찾아보니 중국이 딱 버티고 있는 겁니다. 

미국이 걱정하는 부분은 중국의 잠재력입니다. 인구도 미국은 3억 1천만명밖에 안되는데 중국은 13억 4천만명입니다. 그리고 세계경제가 계속 침체되고 있는 가운데도 중국은 변함없이 8~10% 고속성장을 계속 해오고 있었거든요. 여기에 미국은 사실 당황하고 우려했던 것이죠. 

세계경제가 침체된 가운데 미국경제도 쉽게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조급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본적으로 국력비교라는 것은 영토, 인구, GDP를 가지고 따져요. 아직까지 이런 부분에서 미국을 추월하기는 어렵습니다. 

서 제독 해군력을 가지고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중국의 해군력이 우리 주변에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해군이 그렇게 발전하게 된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원래 중국은 대륙중심주의적 사고라고 해서 해군을 항상 육군에 소속돼 있는 군 정도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군은 육군 중심으로 운영을 하되 해군은 육군을 지원하는 개념으로만 발전시켜왔다는 것이 대륙중심적 사고였는데, 그러다보니 중국 해군력이 초기에는 해안방어유도탄, 해안포, 소형어뢰정, 그리고 큰 것이 잠수함 정도를 운영해왔습니다. 그러니까 해양국가 미국이 간섭해오면 그때 방어할 수 있는 수준만 가지면 된다 하는 개념으로 해안방어 전력에 중점적으로 투자했다가, 1980년도가 되면서 유화청*[사진]이 해군사령관이 되면서부터 해군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우경화와 한반도전략

송 장군 1983년에 북한이 합영법을 만듭니다. 재일조총련계 기업체가 중심이 돼서 50개 기업이 북한에 투자합니다. 일본제품을 파는 낙원백화점만 성공했지 나머지는 다 실패하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북한이 나진, 선봉 특구를 개발하면서 일본에도 투자 종용을 했지만 일본은 위험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일본이 미국과의 공조없이 독자적으로 북한과 수교하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아베정권이 극우정치인들과 합세해 우경화 헌법개정, 자위대의 기능변환 등을 도모한다면 지역안보 구도에 아주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만약에 일본이 헌법도 개정하고 자위대의 위상을 변환시킨다면 곧바로 군사력 증강으로 가는 겁니다. 이럴 경우 중국은 또다른 군사력 증강을 할 것이고 일본과 중국 두 나라가 군사력 팽창의 라이벌로서 극동아시아는 그야말로 세계 속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배 사령관 일본 군국주의 시절, 당시 아시아 인구 가운데 일본군에 희생된 사람이 약 2천만명 가까이 됩니다. 대단한 숫자거든요. 독일 메르켈 총리*[사진]가 나치 강제수용소에 가서 사과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자행된 범죄에 대해 우리는 영원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건 참 부끄럽고 슬프다” 그랬습니다. 독일 총리로는 처음입니다. 아베 수상이 좀 배워야 됩니다. 

일본헌법 9조에 자위대 이외에는 군대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바꾸려 하거든요. 보통 국가로서 군대를 갖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방어도 되지만 침략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헌법 96조에 헌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3분의 2 출석에 3분의 2 찬성을 해야 된다는 조항이 있거든요. 아베의 꼼수가 먼저 96조를 바꾸고 그 다음에 9조를 바꾸자는 얘기거든요. 다행인 것은 최근에 헌법개정에 절반이 불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도 아베 정권의 우경화에는 상당히 반대하고 있으니 아마 헌법개정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북 대치상황과 안보의식

서 제독 전쟁역사교육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전쟁에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겪었던 아픔을 역사교육에 반영해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이 우리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 가슴 속에 담아질 수 있도록 산 역사교육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송 장군 우리 국민의 국민성은 아주 빠르게 발전되고 변해가는 거 같습니다. 특히 전후세대들은 아예 국가안보에 대한 생각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아주 안타까운 면을 많이 보는데. 통일도 그렇습니다. 통일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면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 형태로 통일할 것이냐, 이것도 민족의 장기목표거든요.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외침을 900번이나 받았다는 고통과 역사적인 어려움에 대해 책에서나 말로는 잘합니다. 그러나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는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폭침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국가가 있어야 내가 있고, 국가가 안정되고 발전되어야 나도 그속에서 일원으로서 잘살 수 있고 편안하게 가족과 더불어 삶의 질을 높여서 살 수 있습니다. 국가 없이 어떻게 내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안보라는 것은 개인적인 삶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배 사령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이 말이 진리입니다. 프랑스 역사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실천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되어야 전쟁도 준비하고 평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통일에 왕도는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남남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단합된 국민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고, 또 그 다음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북한에 단호하게, 즉 남북관계를 잘 고려해 대화를 하면서 보상을 해준다든지, 도발에는 적극적 대응을 하는 자세를 가져야 안보유지가 되고 통일도 이뤄지지 않을까 합니다. 

[마무리말] 
역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유비무환, 역사는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하지 않은 만큼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로운 상생의 새 세상을 준비한다면 인류는 늘 전쟁을 경계하고 대비하며 깨어있어야 되겠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오늘 대담의 주제와 같이 바쁘신 가운데 한 자리에 함께 해주신 육해공군 예비역 장성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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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콜로키움〉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해 본 우리 고대의 역사

1강 광개토태왕 비문의 발견과 한국의 근현대사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역사학 현황, 동북공정이라든가 고구려, 대진국, 발해사까지 편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도전』에도“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이 무의무탁하니 불가불 문자계어인이니라”(5:347:16)라고 역사의 혼을 망각한 동방 한민족에게 상제님께서 상당히 준엄한 경책의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물론 편협한 국수주의도 큰 문제지만 역사의 혼을 잃어버리는 일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는 상당히 의미있고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류승국 교수님을 모시고「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 고대사상의 원형 탐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STB


고대 기록의 문제

광개토대왕1) 비문은 전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국 사람도 놀라고 일본 사람도 놀라고 또 프랑스의 학자들도 와서 모두 놀라고, 전세계가 놀라는 대(大)문자예요. 1600년 전의 기록이거든요. 그런 기록은 없어요. 책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할 때 반만년 역사라 하는데, 그 기록이 어디 있냐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 연대가 얼마나 올라가는 거냐. 세종실록2)은 불과 5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고 삼국유사3)를 말하면 13세기 이상 올라가지 못하거든요.

반만년인데 1300년전 가지고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냐.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부정하거든요. 당시의 기록이 아닌데 후대 기록 갖고 어떻게 논쟁을 하느냐. 또 김부식의 삼국사기4)라고 하는데 13세기에서 12세기 올라갈까, 대략 1200년 갖고 4천년전 얘기를 하려니까 어렵지 않느냐, 이런 것이죠.

물론 남아 있는 기록으로 종이 위에 쓴 개인의 문집, 원효문집이라든가 최치원 문집이 있어요. 그것은 신라통일기로 올라간다든지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올라가지만 역사 기록이 아니라서 직접 논술한 게 못 되거든요.

고전의 가치란 어떤 것인가

그럼 중국의 기록으로 보면 어떻게 되나. 꽤 올라가죠. 중국에서도 우리역사하고 거의 같은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데, 실제 기록으로 보면 사마천의 사기5)라는 책이 있어요. 사기, 한서, 후한서, 위지동이전, 진서, 수서, 당서, 해서, 25사6)가 쭉 있어요.

왕조가 바뀌어지면 다음 세대에서 전(前) 세대 역사를 써요.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거든요. 고대에서부터 춘추전국시대, 그 이전 하, 은, 주, 그리고 진시황의 통일기, 그리고 한나라(전한, 후한),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그런 다음에 5호16국, 송나라(북송, 남송), 그 다음에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중화민국의 현대화. 반만년 역사라고 하더라도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바뀔 적마다 역사를 쓰죠. 원래 통치하면서 자기가 역사를 쓴 것은 인정 안해요. 자기 역사를 자기가 평가 못해요. 자기는 역사적인 사실만 기록해놓는 거예요.7)

그러니까 중국의 역사가 반만년으로 올라가지 못해요. 기원전 2세기까지는 올라갑니다. 그것도 많이 올라가는 거죠. 그런데 그조차 오래된 옛날 것을 그때 기록했다면 자료는 되겠지만 신빙성에 문제가 돼요. 어쨌든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 1세기, 기원 초기에 쓴 것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사기, 한서8)라는 중국 책 속에 「조선전」이라는 게 있거든요. 조선에 관한 걸 썼어요.

한서 지리지나 위지 동이전을 썼는데 예맥, 삼한,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써놨어요. 굉장히 귀한 거죠. 그러나 우리 한국역사를 타민족이 썼으니 일차자료라고는 볼 수 없어요. 참고는 하지만 우리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시 기록이 있다면 좋은데 없으니까 뭐 한 5백년 전으로 올라가면 그건 무가지보예요. 1593년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라도 있다면 그게 귀본인데, 1천년 전이나 옛날 것이라면 굉장하죠. 책 한권 가치가 굉장히 비쌉니다. 고전이란 그런 겁니다.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기록, 비문

한반도에서 역사기록으로 제일 오래된 것은 종이 위에 쓴 게 아니라 돌에다 쓴 비문입니다. 돌에다 썼기 때문에 썩지를 않죠. 가령 종이는 아무리 잘 보존했다 해도 한 500년 이상 가기 어려워요.

원래 우리는 조선반도에만 살지 않았어요. 고대의 산동반도, 발해지역, 요동반도, 남만주, 서북조선, 거기가 우리 고조선의 거주지9)예요. 우리 조상들이 거기 살았다고요. 한반도로 내려온 건 훨씬 후기예요.

그 옛날 거주지에서 나오는 유물과 유적, 지하에서 나오는 출토물은 문화가 전부 우리꺼예요. 그렇게 되면 고구려의 땅, 부여의 땅, 옛날 만주지역이 지금 전부 다 중국지역이라고요. 그러니까 한반도에만 있는 비문, 석문으로 오래된 게 뭐냐면 신라 때 진흥왕순수비10)입니다. 신라의 국경을 순수하고 순행한 국경지대에다 기념비를 세웠어요. 이것이 오래됐어요. 진흥왕이라는 왕이 신라를 벌떡 일으킨 분인데 삼국통일 이전의 왕이죠.

AD로 말하면 552년이예요. 지금 2004년이니까 1500년 가깝지 않습니까. 1400년 전의 글씨를 직접 본다는 것은 굉장히 귀한 무가지보예요. 그런데 이것이 네 개나 있어요. 경상남도 창녕비는 자연석이예요. 큰 바위에다가 새겼어요. 뚜렷하게 보입니다. 또 하나는 서울 북한산 진흥왕비. 금석학을 한 김정희가 조사해서 이조시대 무학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순수비라는 걸 발견했죠. 거기 쓴 문구(文句), 고유명사, 관직, 지역, 지명, 이런 것을 따져본 거죠. 그리고 함경북도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있어요. 거기까지 신라의 경계였어요. 네 개가 있어 사산비문이라 하고 석문으로서는 오래된 것인데, 이거보다 더 오래된 것이 있다면 뭔가? 그게 바로 광개토대왕비입니다.

광개토대왕비가 가장 오래되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11), 호태왕비라고도 하는데 원 이름은 이렇게 길어요. <널리 국토의 경계를 넓힌 평안한 좋은 태왕의 비>라는 뜻이죠.

저 비석의 글자 하나가 커요. 이렇게 큰 글자는 없거든요. 금속에는 조그맣잖아요. 이렇게 큰 게 무려 1800자입니다. 비문이라면 그저 200자 미만입니다. 이렇게 큰 자로 뚜렷하게, 고구려 중창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숙신과의 관계, 백제 신라의 관계 등 국제관계가 다 여기 들어 있어요. 그리고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본적인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떤 철학가도, 경제학자도, 언어학자도, 글씨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광개토대왕비가 최고예요. 우리나라에 추사가 글씨 잘 쓴다고 해도 여기는 못 따라와요. 중국사람도 못 따라와요. 깜짝 놀래요. 크기도 그렇지, 내용도 그렇지, 글씨도 좋지. 그리고 웅장해서 전세계를 놀라게 해버렸거든요. 중국도 일본도 꼼짝 못해요. 이렇게 웅장한 비가 서 있는데. 여기 일본에 관한 기록이 있으니까 일본이 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어요. 그것도 자기들이 유리하게 해석해 가지고 <고대의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에 있다> 이렇게 선전했죠. 그런데 워낙 크고 무거우니까 가져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어디 있냐 하면 압록강 건너 만포진 건너편, 집안현 통구라는 옛날 국내성(고구려의 서울)근처에 있어요. 거기에 광개토대왕릉이 있고 떨어져서 이 비가 커다랗게 서 있어요. 이렇게 귀한 것을 갖고 있는데, 우리 역사교육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남북조시대의 기념비, 광개토태왕비문

고구려가 망한 후에 고구려 후손들이 다시 나라를 세운 것이 발해(渤海)죠. 발해 역사가 300년 가까이 되거든요. 그러면 고구려 700년에 발해 300년 더하면 근 1천년입니다. 발해 남쪽에는 신라가 있었고 나중에 통일했죠. 통일신라가 200여년 정도되니까 신라도 한 900년 됩니다. 이렇게 우리 한민족 북쪽에는 고구려, 발해가 있고 남쪽에는 신라, 백제가 있었어요. 그러면 남북조시대라 이렇게 불러야 되는데, 지금 신라통일기12)라고 가르치고 있거든요. 잘못된 겁니다. 수정해야 돼요.

그리고 발해문화라는 게 굉장히 좋습니다. 거기도 왕들이 전부 연호가 있어요. 독립국가가 아니면 연호라는 게 없죠. 조선조 500년 동안 28대 왕이 있었는데 연호가 없잖아요. 일본에는 뭐 소화, 대정, 명치, 평성, 이런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발해에는 다 있거든요. 독립국가였지 예속국가가 아니죠. 최근 동북공정이니 뭐니하는 건 엉터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건 나중에 역사적인 치욕을 받을 겁니다. 그런 억설로 되는게 아니거든요.

남북조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뚜렷하고 최상의 것으로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예요. 414년에 선 고비(古碑)입니다. 한두 글자도 아니라 판독할 수 있는 것만 무려 1700여자예요. 일본인들이 불리한 부분은 많이 깼어요. 그렇게 위대한 비가,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망한 후에 땅속에 묻혔어요. 그 후에 재발견된 것이 강화도 병자수호조약을 한 1876년입니다.

일본이 최초 발견한 배경_서세동점기 한반도 현실

한국역사가 굉장히 기구합니다. 구한말에 18세기 전부터 서세동점이라고,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오죠. 서양사람들이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후에 점점 세력을 갖고 세계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섭니다. 중동지방, 아프리카 지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남쪽으로 들어와요. 동남아시아라는 건 전부 서양 세력권에 들어가요. 인도는 400년 동안 영국 식민지가 되었잖아요? 월남도 프랑스령 지배를 받고. 그리고 중국으로 올라와요.

중국은 말이죠. 천하의 중심국이고 다른 민족은 다 야만이라고 해서 큰 소리를 하지만 서양 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단 말이죠. 서양사람들은 벌써 과학적으로 군함을 가졌지, 대포를 가졌지, 그리고 여러 가지 자본도 많이 축적돼 있죠. 힘이 있다 말입니다. 중국에 와서 뭘 하냐면 아편을 파는 겁니다. 동남아에다 아편을 심어서 중국에 갖다 팔아먹어요. 그럼 중국사람들이 이걸 사다가 늙은이고 젊은이고 다 그걸 피우면 정신이 썩어버려요. 그러면 나라를 점령하는데 문제가 없죠. 애국심이고 자주성이고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강경정책으로 차단을 합니다. 그러니까 영국사람들이 대포를 끌어다 놓고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아편전쟁에서 1842년 중국이 항복했어요. 남경조약을 맺죠. 어떡합니까. 홍콩 내놔라, 마카오 내놔라, 샹하이 내놔라, 서반아고 불란서고 영국이고 전체가 들어와서 안 줄 수도 없고 중국이 절단 났다 말입니다. 이것이 식민지 쟁탈이죠.

중국만 그런 게 아니라 또 한국으로 들어오거든요? 러시아 군대는 내려오고, 중국은 지배하려 하고, 미국은 밑으로 오고…. 영국이 오고 독일도 오고. 한반도의 구한말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사람들의 사냥꾼 놀이터와 같아요. 우린 국방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다 없어요. 그런데 한반도를 뺏어먹으려고 서로 싸우는 거에요. 세계전쟁13)이라는 게 여기서 다난 것입니다. 1차 대전의 근원이 되고. 이렇게 세계전쟁의 단서가 한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한국은 제쳐놓고 저희들끼리 싸우는 거예요. 일본과 중국이 먼저 싸워요. 청일전쟁. 중국이 졌죠. 또 러시아하고 일본하고 싸움이 나는데 러시아가 지죠. 그러니까 일본이 <더 이상 아무도 손대지 마라> 하고 운양호라는 함대가 한반도로 오죠. 이때 미국의 샤만호가 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하게 외교하자고 왔어요. 또 서학을 가지고 오죠. 서학이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서양의 과학입니다. 천문, 지리, 측량, 역사, 수학, 다 가지고 와요. 그건 좋거든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교가 들어와요. 천주교.

처음에는 실학파14)들이 좋아했어요. 그런데 자꾸 들어가보니까 종교가 있거든요. 종교인데 가치관이라는 게 전혀 우리하고 다르다 말입니다. 우리 종래의 믿던 신앙하고. 가령 관혼상제에 대해 조상숭배라는 건 우상숭배다, 장사 지낼 때 제청을 놓는 건 우상이다, 이런 식이에요. 신주를 갖다가 불을 놓고 말이죠. 우리 전통적 가치에 대해 도전을 해오니까, 처음에는 환영하다가 나중에 배척했어요. 중국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그때 여기서 척사(斥邪)라는 말을 썼어요, 간사한 걸 배척한다. 그리고 정당한 우리 정통을 호위한다. 해서 척사위정15)이라고 그래요. 우리것을 잘 보호하고 간사한 외국의 사교(邪敎)를 배척한다.

그리고 나니까 천주교에서는 이건 박해다, 종교에 대한 박해다, 해서 천주교 박해사라고 썼습니다. 그럼 척사위정이 옳으냐, 박해사가 옳으냐. 아직 해결 안 됐어요. 종교간의 대립은 지금도 싸우잖아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건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과제예요. 처음엔 척사라는 말을 썼지만 나중엔 척양, 척왜다 했어요. 왜냐하면 서양 세력이 군함, 대포를 끌고와서 공격을 하니까 서양사람 배척한다, 일본 군국주의를 배척한다, 했는데 그래도 오거든요. 대원군이 1787년에 쇄국(鎖國)을 했죠. 못 들어온다, 관계 안한다, 문을 막았거든요. 그리고 전국 거리마다 척화비16)를 세웠어요. 절대로 서양이나 일본사람하고는 화해할 수 없다, 배척한다.

헌데 대포를 가지고 와서 막 쏘아대고 하니까 문을 안 열 수가 없죠. 1875년 일본의 운양호 사건으로 한국이 굴복했어요. 그때 병자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이게 수호조약17)이에요. 불평등조약입니다. 이 해에 척화비를 다 철거했어요.

조약이나 계약이란 평등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인정돼요. 불평등계약이라는 건 원래 무효예요.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죠. 병자수호조약을 보면 우리에게 불리한 것만 썼어요. 일본사람은 부산만 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디든지 군함이 정박할 수 있다. 또는 일본사람에게 잘못된 사건이 생기면 일본재판소에서 하지 한국재판소에서는 못한다. 쭉 조항이 있는데 전부 불리한 조건만 해서 조약한 거예요. 그러나 일본사람들한테 꼼짝 못하죠. 그렇게 되는 때니까 말이죠. (중략) 이러한 소용돌이가 바로 한국근현대사라고요.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연구 5년

그러니까 1876년인가 병자수호조약 후에, 일본의 공군대위인가 사까와라는 사람이 일행을 데리고 만주를 시찰했어요. 정보를 수집해 그쪽으로 세력을 뻗치려고 하는 거죠. 그때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집안현에 가요. 소문을 들어보니까 <옛날 고비가 여기 있다.> 그래 쫓아가보니 흙속에서 일부는 겉이 드러나 보이는데 딱 보니까 이게 고구려 광개토왕비였죠.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니 일본에 유리한 얘기가 있거든요. <일본사람들이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서 신민을 삼아가지고 지배했다.> 기록이 그런게 나온단 말이죠. <야, 이거 참 좋다. 아, 옛날에 1500, 1600년 전부터 지배한 사실이 여기 있구만. 야, 이거 됐다.> 그래가지고 몰래 사람을 사서 탁본18)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를 때 일본이 그걸 가지고 가서 한 5년 연구를 했어요. 해서 회여록19)이라는 책에 그걸 발표했어요. <일본 사람이 한국을 점령한 사실이 광개토 큰 대(大)문자 속에 있더라.>

한중일 삼국의 논쟁, 120년

아, 이걸 한국사람들이 들어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 이게 어떻게 된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연구하게 되었단 말이에요. 최남선, 독립운동하던 신채호, 정인보, 유명한 사람이 다 그 책을 봤어요. <역사적으로 일본사람이 한국을 지배한 일이 없는데 어째서 그 비에 그렇게 써 있냐.> 역사적으로 일본사람이 한국에 식민지를 두고 지배한 일이 없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비를 잘못 해석했다 말입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놓은 거죠. <아, 이건 해석이 틀렸다.> 그래가지고 정인보씨가 1930년에 한문으로도 쓰고 한글 겸해서도 썼고, 1955년에는 순한문으로 백낙송 선생 회갑기념논문집에 썼어요. 한글로 쓴 거로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 조선문학』20)이라는 논문집에 쓴 반박논문이 유명해요.

한국사람들이 쓴 글이 정인보씨 설을 넘어가지는 못해요. 정인보씨 설안에서 약간 차이가 있는 거지. 그런데 이걸 반박한 사람이 누구냐? 중국학자예요. 중국사람은 일본사람의 설도 거론하고 한국의 정인보 선생설도 반박하는 거예요. <제3자가 그렇게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어법과 논법이 아니다>며 전부 들어서 설명했어요. 중국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정인보설을 부정해요. 권위있는 최고 권위로 생각했는데 그걸 부정하거든요. 일본사람이 주창한 걸 반박한 이론인데 그걸 부정하니까 어떻게 돼요? 그럼 중국사람이 말하는 걸 다시 이론으로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때부터 내려온 게 120여년 됐잖아요. 그 싸움이 말이죠. 중국의 한문 대가들, 일본의 최고 학자들 해서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쓴 것이 여기 지금 쭉~ 목록이 나왔는데 이렇게 많아요. 한국에도 최남선 이하 최고 학자만 쓰는 거예요. 결론이 안 나요. 특히 중국사람이 공격한 걸 설파해낼 수 있는 이론이 안 나왔어요.

광개토대왕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고대사상의 원형탐구

저는 한국철학을 하는 사람인데, 광개토대왕비에 철학사상이 많은데 연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네 안했네, 정치군사적 얘기만 하지 여기에 들어 있는 기막힌 철학에 대해 누구도 전혀 접근을 안한단 말예요. 한국철학사를 정리하는데 광개토대왕비만한 좋은 자료가 없고, 이런 대(大)문자가 없고, 금석에 써 있으니까 이런 확실한 게 없는데, <이걸 해야겠다>고 보니까 중국사람 주장, 일본사람 주장, 한국사람 주장, 내가 전체를 쭉 놓고 보니 알겠더라구요.

그러면 여기서 기본적인 문제가 뭐냐.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제가 쓴 제목이 말이죠.「 광개토대왕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고대사상의 원형탐구」
- 광개토대왕 비문 자체만 연구한 게 아니라 비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한국고대사상의 원형(元型=Archetype, 현상을 발생시키는 근본유형)이 뭐냐? 한국사상이라고 하는, 중국사상이나 일본사상이나 서양사상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이 뭐냐? 그걸 탐구하겠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 사유방식의 특징이 뭐냐 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이 고비(古碑)를 둘러싼 싸움에 대한 견해와 또 하나는 이것을 통해 본 한국고대사상의 특징이 뭐냐하는 것.

글씨를 놓고 보면 중국사람 글씨, 일본사람 글씨, 한국사람 글씨가 다 달라요. 옛날에 쓴 것 다르고 지금도 다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상도 중국적 사유, 일본적 사유, 한국인의 사유를 가를 수 있다고요. 고대에도 그렇고, 중세에도 그렇고, 현대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고, 한국사람의 사고다 하는 유사성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적 사유의 원형을 <광개토대왕비라는 1600년 전에 기록한 걸 가지고 고대도 보고 현대도 보고 미래도 조망하겠다.> 그 소리입니다. 쉬운 얘기가 아니죠. 굉장히 의미있고 중요한 얘기죠.

[마무리글]
지금 우리한테 남북문제도 있고 세계문제도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는게 옳은 거냐. 타당한 거냐. 그 향방이 어디로 가야만 정당한가. 이것을 시사하려는 거예요. 먼저 비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오류, 잘못된 것, 어떻게 읽는것이 정당한 판독이냐 하는 문제를 얘기하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 고대사상의 기본문제를 얘기하겠습니다.



1)광개토대왕비: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비석 호태왕비라고도 하며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리고자 건립.
2)세종실록: 조선 세종(재위 1418∼50) 재위기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
3)삼국유사: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89)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4)삼국사기: 1145년(인종23) 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를 담은 역사서
5)사기(史記): 사마천이 오제(五帝)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 시기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역사서
6)25사: 중국 역대 왕조(王朝)의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4종류의 사서(史書)
7)역사는 통치자가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8)한서지리지: 후한의 반고가 편찬한 전한 왕조 1대 역사를 기록한 한서 중의 한 편
9)고대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한반도 이북지방인 산동성, 만주, 요동지방
10)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신라 진흥왕이 국토확장과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세운 기념비. 552년에 세웠으니까 1510년 전에 가까우며 창녕비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등 4개가 있다.
11)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널리 국토의 경계를 넓히고 백성을 편안케 하신 호태왕의 비라는 의미로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으로 높이 6.3미터, 무게 37톤, 한문 1800자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역사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관계와 철학 등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담겨있다.
12)통일신라시대는 남쪽은 통일신라, 북쪽은 발해가 지배하는 남북조시대로 표기해야 한다.
13)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근원, 세계열강들의 싸움터가 된 한반도
14)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국력배양을 주장하는 실학파 대두. 서양 학문과 함께 들어온 종교로 인해 동서양의 가치관 대립을 야기
15)척사위정: 조선후기 외국의 세력 및 문물이 침투하자 이를 배척하고 우리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일어난 사회적 운동
16)척화비: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웠던 비석
17)병자수호조약: 조선 고종13(1876)년에 일본과 맺은 수호조약으로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한다. 외국과 맺은 최초의 수호조약으로 불평등조약이었다.
18)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한 사카와는 왜(일본)가 1600년전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 신민(臣民)을 삼았다고 왜곡하기 위해 비문의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가 연구
19)『회여록會余錄』: 1889년 육군 참모본부 소속 편찬과에서『 회여록』 5집 에 광개토 왕릉비문 내용을 날조하여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짐. 최남선, 신채호, 정인보 등 한국 학자들이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에 오류를 발견.
20)일본의 광개토대왕릉비 왜곡에 대해 정인보선생이『 조선문학』 논문집을 통해 반박했다. 그후 광개토대왕 비문 해석에 대한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논쟁은 120여년 동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논쟁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만 이뤄지고 철학적인 내용 연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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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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