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열리는 AI시대

10억 대의 카메라로 인공지능 도시 구축, 뇌 속의 AI가 기억 복원해 내


지난 5월 9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州 새너제이San Jose에서 열린 ‘GTC(GPU Technology Conference) 2017’에서는 ‘인공지능(AI) 도시’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과 플랫폼들이 소개됐다. GTC는 그래픽칩(GPU) 제조 기업 엔비디아NVIDIA가 매년 AI·자율주행차 등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활약하는 개발자와 전문가들을 초청하는 연례행사다. 엔비디아가 GTC 2017에서 선보인 ‘메트로폴리스 플랫폼Metropolis Platform’은 ‘인공지능 도시’의 구축을 돕는다. 이 플랫폼은 도로 위 카메라들이 인식한 행인·자동차·반려동물 등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학습한다. 도로 위의 수상한 물체나 차량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감지하여 그간 감지한 적 없는 얼굴이나 흉기 등 수상한 물체를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실시간으로 경찰에 통보할 수 있다. 2020년에는 전 세계 대중교통·도로 등 공공장소에 약 10억 대의 카메라가 설치될 것으로 예상한다. 카메라 10억 대는 1초에 약 300억 장, 1시간에 약 100조兆 장의 이미지를 찍는다. ‘메트로폴리스 플랫폼’은 이처럼 방대한 고화질의 이미지와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학습하고 분석한다. 이렇게 ‘딥 러닝deep learning’이 가능한 카메라들은 행인·강아지·자동차 등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이제 실종된 어린이나 반려동물을 찾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행인의 얼굴을 인식해 신원까지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카메라가 차주에게 주차할 구역을 제안해 주어 주차장에서 헤맬 필요도 없다. 슈퍼마켓에서는 손님들의 구매 패턴을 분석하고 재고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24시간 무인 마트도 쉽게 운영할 수 있다.

인간이 컴퓨터의 일부가 되고 컴퓨터도 인간의 일부가 된다. 이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들이 현실이 된다. 뇌와 컴퓨터가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구상을 엘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모터스 최고경영자(CEO)가 현실로 구현하겠다고 나섰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머스크가 ‘뉴럴링크Neuralink’라는 회사를 설립했다고 3월 27일 보도했다. 전기 차 양산에 이어 민간 우주여행, 화성 식민지 개척을 시도하는 머스크가 이번엔 ‘뇌와 컴퓨터가 결합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뉴럴링크는 ‘전자그물망(neural lace)’이란 기술에 주목한다. 이것은 액체 상태의 전자그물망을 뇌에 주입하면 특정 뇌 부위에서 액체가 최대 30배 크기의 그물처럼 펼쳐지는 기술이다. 이 그물망은 뇌세포들 사이에 자리 잡아 전기 신호·자극을 감지할 수 있다. 뇌에 일종의 인공지능(AI) 컴퓨터를 심겠다는 발상의 시작인 셈이다. 머스크는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면 인간은 AI가 시키는 대로 하는 ‘애완 고양이(house cat)’가 될 것”이라며 “전자그물망을 두뇌에 삽입해야 인간이 AI에 지배당하지 않고 공생한다.”고 말했다.

뉴럴링크의 우선 목표는 뇌질환 문제 해결이다. 간질·우울증 등 만성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뇌 삽입 물질이 뉴럴링크 최초의 제품이 될 것으로 외신은 전망한다. 나아가 뉴럴링크는 공각기동대처럼 컴퓨터와 뇌를 연결해 인간이 원하는 정보를 뇌에 입력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 기술이 성공하게 되면 반대로 인간의 기억을 PC의 서버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확인할 수 있다. 인지력·사고력 등 뇌의 특정 기능을 향상시키는 ‘뇌 미용 성형 수술’도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뇌 과학 연구가 효과적으로 결합한다면 의외로 빠른 시간 안에 신세계가 열릴 수 있다. 앞으로 뇌에 칩만 심으면 안 배운 외국어도 할 수 있고,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처럼 뇌에 매뉴얼 프로그램을 접속하면 헬기를 처음 타는 사람이 헬기 조종법을 익히는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서양철학사상 | 오늘날의 철학_1. 다양하게 전개된 19세기의 철학적 사유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道典』 2:30:8~10) 



이성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전개된 인식론은 대륙의 합리론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진리인식이 감각적 경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경험론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진영에서 주장된 내용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에서 꽃을 피운다.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서 태동하여 헤겔의 절대관념론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룬다. 

헤겔 이후 19세기 중반은 자연과학의 진보에 따른 기술혁명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사조 또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풍조로 바뀌어 갔고, 지성사에서는 관념론이 밀려나고 유물론(Materialism)이 철학의 권좌를 차지하여 득세하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귀한 정신의 관념이 아니라 신체적인 생명을 보존하는 물질이었고, 물질적 가치의 창조와 변형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산업과 경제가 중심이 됐던 것이다. 

유물론의 득세는 시대와 역사를 바꿔 놓았다. 국가체제는 강대국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바뀌었고, 물질문명에 따른 국부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결국 헤겔의 관념적 정신사精神史는 유물론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어 버리고, 이로부터 또 다른 새롭고 다양한 사상이 출범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조를 거론해 보면, 헤겔 좌파의 유물론, 인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실존철학의 태동, 진리의 기준이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는 실증, 공리, 실용성을 내세우는 현상주의, 감각적 경험에 바탕을 둔 귀납적 형이상학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1) 헤겔 좌파의 유물론


감각주의와 유물론을 철학의 권좌로 끌어올린 포이에르바흐
19세기 중반은 헤겔 좌파의 유물론이 출범하는 시기였다. 헤겔 좌파의 사상적인 혁명은 슈트라우스D.F Strauß가 1835년에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출판하면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 즉 영혼이나 초월적인 신 등이 모두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들과 그 변화의 법칙들만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해서 신의 계시가 해석되고 인간이 종교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자연종교가 말해 주듯이, 19세기에는 유물론이 득세하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일등공신은 바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1804~1872)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포이에르바흐의 사고는 어떠했을까? 그는 1839년에 “절대자”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헤겔철학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당시 헤겔의 철학은 독일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중심이념은 절대정신이었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과정이란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국가란 절대정신의 대변이자 실현도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즉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이 현실적인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규정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극적으로 반기를 든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헤겔을 극단적인 관념론자라고 비판한 포이에르바흐이다. 그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란 자신의 철학적 사고 안에서 말라 죽어 버린 채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빈껍데기의 신학적 성령聖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절대관념론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흐는 모든 존재란 원초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물질이고, 물질적인 토대에서 철학적 사유가 비롯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신체를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의 권리를 부활시키게 될 수밖에 없었고, 로마시대에 스토아학파 창궐 이후 오랫동안 경멸을 당해 왔던 유물론을 철학적 사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정신(영혼)과 물질(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포이에르바흐는 ‘신체가 영혼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헤겔의 근본철학에 대립한다. 헤겔의 관념론에서 보면, 현실적인 인간의 모든 것은 영혼과 정신으로부터 나온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육체적인 것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헤겔은 인간의 정신적인 사고가 인간 삶의 전반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란 그저 먹는 바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핵심내용은, 정신이 육체를 의식적으로 규정하지만, 정신 자체가 이미 육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포이에르바흐는 또한 헤겔의 관념론을 “위장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절대이념의 외적 전개[외화外化]로 인해 현실적인 존재가 형성된다고 하는 헤겔의 주장이란 단지 절대자인 ‘신에 의해 자연적인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통적인 신학적 학설을 합리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토대로 해서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이 말한 “무한자(das Unendliche)” 또한 현실적으로 유한한 것, 감각적인 것, 정해진 것이 추상화되고 신비화되어서 그리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헤겔의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조차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실재하는 현실적인 것이란 신도 아니고,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며, 오직 감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는 감각주의와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을 버리고, 무신론(Atheism)을 바탕으로 인간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는 최고의 존재를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요, 인간에게는 곧 “인간이 신이다(homo homini deus)”라는 얘기다. 만일 신이 인간의 주主라면 인간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신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러한 주장은 포이에르바흐가 인간의 존재를 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기초 또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흐의 감각주의와 유물론은 19세기의 새로운 질서가 개벽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칼 마르크스Karl Heinlich Marx(1818~1883)는 유물론을 전개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의 정치와 문명사가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다.

칼 마르크스라는 인물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유서 깊은 로마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랍비의 후예였고, 개신교로 개종한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 나머지 그를 본Bonn 대학의 법학과로 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법학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결국 그는 진로를 바꾸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를린 훔볼트Humboldt 대학교로 전학하여 역사와 철학의 배움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에는 헤겔의 기본 사상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석하여 인간성의 해방을 주도하려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청년헤겔학파가 그것이다. 베를린에 온 마르크스는 이 학파에 속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에 물들면서 헤겔 좌파의 길로 발을 옮기게 된다. 1841년 마르크스는 예나대학교(Universität Jena)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란 제목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3년에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에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뜬구름 잡는 관념론을 비판하게 된다. 

독일에서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론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는 비밀 결사 단체인 “정의의 동맹(Bund der Gerechten)”에 가입한다. 1844년 말경에 파리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함께 노동운동의 세계관을 완성하게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급진적인 인물로 찍혀 추방될 위기에 처하게 됐고, 결국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국으로 건너간 마르크스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청년헤겔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본주의 자체에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잉태되어 있다고 보고, 이로부터 역사유물론에 대한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1846년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하게 됐는데, 여기에서 유물론의 기본적인 원칙을 정해 놓은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확립한다. “소외론疎外論(Entfremdung)” 또한 이 시기에 작성된다. 

1947년에는 엥겔스와 함께 혁명적 노동자 정당인 ‘공산주의 동맹(Bund der Kommunisten)’을 결성하고, 1848년에는 프랑스 2월 혁명 직전에 런던에서 공산주의 동맹을 위한 강령으로 삼기 위해 『공산당 선언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출판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과정에서 그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도래한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이것이 그의 역사유물론의 시론이다. 

1850년에는 계급투쟁이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가를 내용으로 하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을 출간했다. 이후 미국 경제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동맹이 분열되자, 이로 인해 마르크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수년에 걸쳐 영국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게 되고, 경제에 관련된 집필을 구상해 나간다. 드디어 1860년에 역사유물론의 핵심을 담은 『자본론(Das Kapital)』이 출간된다.

당시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산과 소비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의 빈부의 격차는 점차 한계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인간은 경제적 이윤에 몰두한 나머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여 가고 있었고, 인간의 고귀한 주체성과 존엄성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 자본의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은 인간 삶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분석 비판했다는 것은 아주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절대관념론을 뒤집어 버린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헤겔에서 출발했지만 헤겔의 절대관념론과는 정반대인 유물론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그는 헤겔의 이념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대신에 물질적인 현실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면 정신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헤겔이라면, 물질의 경제적인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이념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규정한다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조건과 변화가 바로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물질적인 존재와 그 현실이야말로 진정으로 참된 존재가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관습, 윤리, 법, 종교나 문화 등의 이념적인 것은 물질에 따라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유물론적 사고”의 핵심이 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유물론(Materialism)”은 어떤 의미일까? 유물론은 현실적인 모든 것이란 관념이나 의식이 아니라 오직 물질적인 것임을 전제한다. 물질은 가장 근원적인 존재요, 감각, 표상, 의식 등은 물질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思考라는 것은 뇌腦라는 물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연, 실재, 물질의 세계가 1차적인 것이고, 의식과 사고는 제2차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과 그 존재가 일차적인 근원이며, 정신적인 삶과 사고는 거기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식과 사유와 이데올로기(관념)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인간의 실천적인 활동은 바로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의 발전을 요구하는 데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헤겔의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전환한 것이 포이에르바흐였다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실천적인 유물론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즉 헤겔이 체계화한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를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시킨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공헌이었다면, 마르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감각적인 활동이란 실천적이며, 곧 공동적인 활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그는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개혁을 자신의 과제로 삼은 것이다. 

실천적인 유물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인간이 감각으로 보는 것,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 몸으로 행위 하는 것 등은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을 규정하는 조건들이다. 이것들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생성의 기초는 생산관계의 총체인데, 이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Überbau)를 가진 사회의 현실적인 바탕이 된다. 정신적인 상부구조에 따라 역사, 철학, 종교, 예술, 정치 등은 그의 부수 현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과 “역사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으로 구분된다. 변증법이란 우리가 자연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와 그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자연현상에 대한 파악과 해석을 유물론적으로 이론화한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변증법적인 주된 명제들이 사회적인 생활 현상이나 사회적인 역사에 확대된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핵심과제는 “역사적인 유물론”에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란 곧 왕이나 국가의 정복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 조건으로 만들어진다. 역사를 이루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은 사회의 생산양식(사회의 경제)에서 찾아져야 한다. 사회의 생산양식은 도구, 인간, 생산경험을 일컫는 “생산력(Produktivkräfte)”과 인간이 그 안에 모여서 생산하는 집단인 “생산관계(Productionsverhältness)”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유물론이란 단순히 비인간화된 물질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관계 안에 있는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서 역사과정이 전개되는데, 이는 원시공동체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이상적 공산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진행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인간의 전체적인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곧 물질적인 경제에 관계하는 인간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유물론은 바로 인간의 감각 안에서 물질과 인간이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언제나 실천적인 면이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적인 경제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단순한 존재론적인 유물론이 아님을 뜻한다. 여기에서 그는 경제적 관계에서 인간의 경험과 정신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게 되는데, 그의 역사적 유물론의 새로운 특징은 바로 계급투쟁론階級鬪爭論(Klassenkampf)으로 집약된다. 

계급투쟁론이란 무슨 의미인가? 계급투쟁론의 기초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Mehrwert)에 있다. 잉여가치란 상품생산에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이윤을 말한다. 노동의 생산품에 대한 효용가치가 크면 클수록 잉여가치는 많아진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에게 최소의 임금만 지불한다.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손에 들어간다. 즉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윤을 착취하게 마련이고,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점점 더 큰 부富를 축적해 나간다. 자본가는 이윤착취로 인한 부의 축적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Bourgeoisie) 유산계급이 되고, 이윤을 빼앗긴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계급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은 서로 대립해 있으면서 결국 모두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Selbstentfremdung)”에 직면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상품세계에서의 소외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 여기에서 ‘자기소외’란 인간다운 삶이 노동 이외의 장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소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적소유私的所有와 사적노동을 버리고 사회적 소유와 공동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꿈꿔 온 진정한 인간의 삶이다. 그러한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마르크스는 대립도 없고 계급도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경제 개혁론자이다. 세계사의 과정에 있어서 관념의 영원한 생성, 대립의 지양止揚, 새로운 것에로의 전진을 내세운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물질에 바탕을 둔 자본의 사회질서(These),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질서(Antithese), 계급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Synthese)로의 전진이라는 실천적인 역사유물론을 내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유물론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고, 이로 인해 19세기에 이르러 유물론적인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1854년에 괴팅겐에서 열린 자연과학자회의는 19세기 유물론의 시대정신을 확증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유럽인들의 사고는 감각적인 데이터(datum)라고 하는 부분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의 증대와 인간성의 내적인 빈곤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에 입각해서 사고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고, 유물론이 탄생하게 되는 간접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헤겔 좌파의 유물론은 이러한 사회적 풍조의 영향으로부터 출범하게 된 것이다. 

유물론적인 사고를 대변하는 자연과학적 저서로는 1845년에 나온 카알 포크트Karl Vogt의 『생리학적인 편지들(Physiologische Briefe)』, 1852년에 출간된 야콥 몰레쇼트Jakob Moleschott의 『생명의 순환(Kreislauf des Lebens)』, 1855년에 나온 루우트비히 뷔히너Ludwig Büchner의 『힘과 물질(Kraft und Stoff)』, 1855년에 나온 하인리히 쏠베Heinlich Czolbe의 『감각론 신설(Neue Darstellung des Sensualismus)』 등이 유명하다.

당시의 자연과학적 저술은 고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볼 수 있는 유물론적 사고가 기본 바탕에 깔려 있다. 세계는 생성의 과정에 있으며, 물질과 운동의 힘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제시된 아낙사고라스의 “정신(Nous)”,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나 이를 본떠서 세계를 창조한 “데미오우르고스Demiourgos 신神”,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의 운동인으로 제시한 “부동의 원동자”, 그리스와 로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모든 신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학문을 탐구하는 인간의 의식이나 영혼은 물질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뇌腦의 작용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정신에서 나오는 사상과 물질적인 뇌의 관계를 육체에서 흐르는 땀[汗], 간에 붙어 있는 쓸개, 콩팥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오줌에 비유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유하는 정신은 신체적인 감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뇌 활동의 부수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학의 진보는 유물론적 사고를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1858년에 차알스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은 『자연도태에 바탕을 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을 간행하여 모든 종은 하나의 유일한 원세포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진화론을 도입했다. 1871년에 그는 『인간의 기원과 종에 관한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을 출판하여 인간도 진화해 왔음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9세기 말의 시대정신은 유물론적인 “일원론(Monismus)”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즉 1906년에 발족된 “일원론자협회(Monistbud)”는 ‘많음이 근원의 하나(das Eine)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부르짖었다. 근원의 ‘하나’를 에른스트 핵켈Ernst Haeckel(1834~1919)은 “실체(Substanz)”라고 했고,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wald(1853~1932)는 “에네르기(Energie)”라 했다. 특히 핵켈은 원자가 기계론적으로 진화하여 오늘날의 인간에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다윈보다 더 급진적인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는 1868년에 펴낸 『자연적인 창조의 역사(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에서 생명의 변종은 저절로 생긴다는 것, 원생동물이 계속적으로 분화함으로써 고등생물이 생겨났다는 것,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은 유인원類人猿이라는 것 등을 주장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us)으로 흐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분리되어 각자 유지되어 왔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즉 초월적인 신과 현실세계라는 이원성은 하나로 융합되어 기계론적 일원론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일원론은 오직 하나의 실체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원론에서는 물체와 정신, 신과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만이 실재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 하나는 바로 신이요 곧 세계이다. 그런데 만일 초월적인 신과 자연세계가 분리된다면, 인격적 유신론이 설 자리가 있겠지만, 일원론의 입장에서는 무신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근대에 발생한 범신론의 부활은 이런 입장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 

2)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의 태동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시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국가라는 대립적인 것을 조화하여 시민사회의 안정성을 추구한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와해되었다. 심지어 헤겔철학의 절대이념에 반기를 든 쇠렌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1813~1855)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복轉覆을 꾀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적 사고를 무너뜨렸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zsche(1844~1900)는 신에 기원하는 도덕적 가치를 뒤집음으로써 신[主]과 인간[客]에 대한 주객을 전도顚倒시켰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主體의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인간의 실존實存을 드러냈고, “신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라 하여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태동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카알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의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반면에 니체는 초인超人의 철학을 내놓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드러냈고, “신은 죽었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실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1841년에는 베를린에서 셸링Schelling의 강의를 들었고, 그 후에 문필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었고, 교회와의 타협을 보지 못하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그는 고독한 삶을 보내다가 얼마 살지 못하고 42세가 되던 1855년에 젊은 나이로 코펜하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전통적인 학문에서 밝혀져 전수되어 온 것도 아니요, 영원한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짜여진 교리를 깨닫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 앞에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객관적으로 규정된 진리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완전한 인간적인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실존實存”의 가장 깊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동양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진리는 바로 신적인 것 안으로 성장해 들어가 실존자實存者가 되는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실존”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오직 일회적인 존재인 각자는 내면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야 실존자가 될 수 있다.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른 자신의 존재는, 빛이 모여들고 내어 주는 광원光源과 같으며, 신이 받아들이고 내어 주는 중심체와도 같은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거기로부터 퍼져 나가는 독자적인 자기활동의 주체적인 개별자는 바로, 어느 누구도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 선 “단독자(Das Einzelne)”이다. 단독자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실존자가 되는 셈이다. 

실존을 말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이데아에다 생명을 가진 개별자를 맞세웠듯이, 헤겔의 사고로부터 추상된 보편자에다 개별적인 의미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맞세운다. 개별자는 절대로 보편자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개별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깊숙한 내면內面에 이름으로써 언제나 자립적으로 실존하며, 고유하게 활동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개별자는 완결되지 않은 채 언제나 고유하게 행동하는 존재이다. 고유하게 행동하는 개별자는 항상 “비약飛躍(Sprung)”을 감행敢行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삶의 과정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감으로써 전진前進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진에는 하나하나의 결단決斷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에는 ‘가능성’이 언제나 현존해 있다. 거기에는 ‘이리할까 저리할까’하는 선택의 망설임이 있고, 절망과 한계에 부딪힌 좌절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결단에는 항상 불안不安이 따라다니고, 신앙信仰이 떠오른다. 불안은 결과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앞질러 가 있고, 앞질러 가 있는 불안의 바탕에는 자유自由가 버티고 있다. 자유는 의지의 선택으로 무한한 것이며, 무無에서 생겨난다.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 없이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기분, 감행, 불안, 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유 등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범주들이다. 

하나하나의 상태에서 순간순간 확고한 결단을 주도하는 것은 내면의 주체이고, 주체적 결단은 곧 비약을 감행함으로써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에 이르는 길은 세 방식이 있다. 첫째는 이미 있었던 것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명상하는 “감성적인 길”이다. 둘째는 결단을 내리는 행위와 자유로운 선택, 즉 개별자의 독자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윤리적인 길”이다. 여기에는 이미 자신이 혼자(單獨)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마주치게 된다. 불안은 완전히 혼자인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홀로 감당해야 하므로 결단이 요구된다. 세 번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맡겨짐으로써 궁극적인 내면에 이른 “종교적인 길”이다. 

종교적인 신앙은 현존재(Dasein)와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神]에 매달려 그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설(Paradox)은 여기에서 나온다.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커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무조건 순종順從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역설은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때에 인간은 절망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럴 때 신앙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최고의 확증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실존자는 결국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세계에서 풀려나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진정한 실존자가 되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는 누구인가? 그는 1844년 프러시아Prussia의 뤼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울포르타를 졸업한 후 라이프찌히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때에 그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22살쯤부터 바그너R. Wagner와 친하게 지냈으며, 24세에 바아젤Basel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가 되었다. 1870~1871년에는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위생병으로 몇 달을 지냈는데, 이 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호되게 앓게 되자 휴가를 얻어 제대했다. 그는 휴양하러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1889년에 진행성마비증에 걸려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극진히 간호했지만 그는 결국 1900년 8월에 별세하게 됐다. 

니체의 초기 사상은 새로운 교양(Bildungsideal)을 형성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의 이상은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간상에 있었고, 그 원형을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즉 헤라클레이토스, 테오그니스, 아이스킬로스 등의 비극적인 시대성에서 찾았다. 특히 그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의 예술과 비극을 새로이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비극은 두 요소, 즉 현실적인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요인과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찢어 버리는 표상을 상징하는 “아폴론Apollon”적인 요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삶에 푹 빠져 있었고, 진정한 삶의 가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았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내놓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세계를 제시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다. 이는 1883년 이후에 나온 『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초인(Übermensch)”을 등장시켜 극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자이고, 초인은 이 가치들을 창조하는 자이고, 디오니소스는 이 가치들을 상징하는 자이다. 이 가치에 대립하는 것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린 죽은 자로 상징된다. 

니체의 고민은 진정한 철학자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 인간이 나아갈 길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세계를 열어주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외치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괴하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의 모든 도덕적 규범들을 파괴하고, 인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가치 창조로 나아가는 삶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이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그가 부수고자 하는 확립된 기존의 도덕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은 이러저러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도덕적 규범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적 규범이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풍부한 가치를 마비시켜 왔다고 보았다. 또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발명하여 삶의 본능, 삶의 기쁨과 풍부함을 억압하였고, 천국이라는 저세상[피안彼岸]을 발명해내어 이 세상[차안此岸]의 가치를 말살하였으며, 구원받는 영혼을 발명해 내어 신체적인 모든 것을 비방하였고, 죄와 양심을 발명해 내어 삶의 창조의지를 빼앗아 버렸다고 말한다. 

삶은 일회적이요 살과 피로 형성된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기존의 도덕은 새로운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은 허구요, 참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는 도덕현상이란 없다고 한다. 즉 열등한 사람들이 삶과 삶의 현상을 잘못 해석한 것이 도덕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적나라한 생존 자체요, 순수한 자연적인 모든 생성이다. 또한 사랑, 동정, 겸손, 자신을 낮춤,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노예의 도덕이요, 삶에 적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삶에 대한 저주’라고까지 말한다. 

기존의 도덕적 규범이나 이념이 모두 부서졌으니, 이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은 죽었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이다. 사실 이 초인 안에 니체의 의욕 전체가 응집해 있다. 초인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유일한 것이며, 인간도 아니고 괴로워하는 자도 아니고, 가장 착한 자도 아니다. 초인은 이상理想으로서 나타나는 일체의 피안의 세계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지大地를 위하여, 생生 자체를 위하여 스스로를 바치면서 이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는다. 초인은 세계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새로 솟아오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식과 창조의 가치 확립을 가져오지만 스스로 파탄에 직면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초인은 모든 가치란 삶을 위해서이고, 진정한 삶이란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초인은 자신이 이 세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힘에의 의지”를 뜻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초인은 생生 자체의 가장 요원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모순을 견디어 낼 줄도 알고 있었다. 

끝으로 초인은 “영겁회기永劫回歸(die ewige Wiederkunft)”의 사상도 체득할 수 있는 인간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輪迴를 거듭한다.”(『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 제3부). 다시 말해서 세계란 일정한 크기를 지닌 힘의 덩어리며, 여기에는 무수하게 많은 존재자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무한히 지속하는가? 아니다. 무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뿐이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무한한 시간 계열에서 수없이 생겨나고 없어진다. 만물은 반복적으로 영원히 회귀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이라는 것이다. 

3. 현상주의現象主義(Phänomenalismus) 출현


19세기의 철학은 한마디로 “현상주의現象主義”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상주의란 사물의 배후를 드러내는 본질적 탐구도 아니고 근원의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도 아닌,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진정한 실재라고 여기는 입장이다. 

사상적인 틀에서 보자면, 존재란 현상現象일 뿐이라는 19세기 현상주의는 프랑스에 일어난 실증주의(Positivism)와 독일에서 일어난 유물론(Materialism)이고,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포함하며, 그리고 미국에서 붐이 일어난 실용주의(Pragmatism)와 변질된 귀납적 형이상학이 현상주의에 속한다. 

프랑스의 실증주의實證主義
오늘날에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까지도 실증주의 사상이 파고들어 널리 유포되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역사관 또한 실증주의에 물들어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어떻게 태동해서 오늘날 인류의 정신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일까? 

실증주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오구스트 꽁트August Comte(1798~1857)이다. 그는 인류의 정신사를 검토하여 세 시기로 나누는데, 1단계는 신화적인 시기, 2단계는 형이상학적인 시기, 3단계는 실증주의 시기가 그것이다. 마지막 실증주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과학적 탐구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단계의 시기 :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원시적인 상태에서 맨 먼저 신화적인 혹은 신학적인 단계에 접어든다. 이는 자연의 모든 현상이 보다 높은 인격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시기이다. 먼저 인격적인 힘이 특별한 사물 안에 살아있다고 믿는 페티시즘(Fetischismus), 다음은 그 힘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여러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다신교(Polytheismus), 마지막으로 전능한 유일신이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는 유일신교(Monotheismus)가 여기에 속하는 시기로 나타난다. 

2단계의 시기 : 다음은 인간이 비판적 탐구능력이 발현되면서부터 시작한 형이상학적 시기이다. 대표적으로 아테네 시대의 철학적 탐구 시대가 그것이다. 철학은 신화적인 시대에서 탈피하여 창조변화의 힘을 추상적인 개념, 즉 사물의 본질, 형상, 영혼 등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꽁트의 눈에 여전히 허구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3단계의 시기 : 마지막 단계는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즉 현실적인 경험적 대상으로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인간이 진리 탐구로 간주하게 되는 시기이다. 실증적인 것들만이 실재이고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두 가지 업무에 주력하게 되는데, 첫째는 현상들로부터 언제나 반복적이고 동일한 것을 밝혀내어 개념을 창출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상들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일어나게 되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하여 2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신실증주의新實證主義가 등장한다. 

영국의 공리주의公理主義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인 흄D. Hume 이후 경험론은 새롭게 변질되어서 그 명맥이 유지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적 현상주의이다. 공리주의적 현상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J.S. Mill(1806~1873)의 사상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밀은 철학에서 추구하는 객관적인 본질이나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존재란 없고, 또한 지성의 선천적인 내용이나 개념도 없으며, 오직 순간적으로 지각되는 것만이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경험론의 입장을 깔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에서 다루는 것이란 경험적인 자료들뿐이고, 이로부터 귀납적인 법칙을 얻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추리가 보편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밀은 그 보완책으로 “자연의 과정이란 한결같다”(자연의 제1성질)는 전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이로부터 경험적 명제로부터 귀납추리의 학문적 타당성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것이다. 

경험적 진리를 토대로 해서 전개되는 영국의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가’의 물음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대표적인 인물은 벤담Bentham, J.(1748~1832)과 밀을 꼽을 수 있다. 벤담이나 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행복幸福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선善(good)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선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삶이야말로 즐거움[快樂]이 함께 따라다니고, 곧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선한 삶을 살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것이지, 즐겁게 살기 때문에 선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됨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벤담이나 밀은 행복한 삶이란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苦痛이나 악惡을 피하고 즐거움[快樂]을 추구함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이 유일한 악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쾌락만이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이 선이요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쾌락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적인 삶의 목적은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것이 곧 공리公利의 준칙準則이다. 그래야만 인간 모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흄이 마련한 행복주의幸福主義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행복주의는 벤담과 밀의 윤리학적 토대에 그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론을 말하지만, 벤담과 밀의 행복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담은 모든 쾌락이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쾌락의 양量만이 다를 뿐이지, 질적으로 고급의 쾌락이나 저급의 쾌락이란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벤담은 행복의 척도를 쾌락의 양으로 계산해 낸다.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반복성, 순수성, 빈도성이 그것이다. 쾌락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더 좋은 것이요 더 옳은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쾌락의 양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람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요컨대 나라를 폭력으로 통치하는 독재자가 가난에 찌들어 굶주린 삶을 살고 있었던 국민에게 먹을 것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여러 면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요구했다고 해 보자. 독재자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공급해 주자 많은 사람들은 많은 양의 쾌락을 누려 모두 행복해 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달라고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먹는 것만으로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독재자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밀은 벤담이 제시하는, 감각적으로 충당되는 양적 쾌락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충당되는 질적인 쾌락을 내세우게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훨씬 더 많은 쾌락을 향유할 수 있고, 따라서 그만큼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진리에 대한 갈급증에 시달려 온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충당되는 쾌락보다 정신적인 쾌락이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주고 더 많은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밀은 감성적인 만족을 통해서 계산되는 벤담의 양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통해서 느끼는 질적인 쾌락이 더 강도가 있고, 쾌락의 영원한 지속성과 순수성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미국의 정신을 세운 실용주의實用主義
실용주의 또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관을 거부하고 현상으로 드러난 경험적인 세계에만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실용주의 진리관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유용성이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함을 뜻한다. 그래서 실용주의는 ‘삶의 행동이 인식을 결정짓는 것이지 인식이 삶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바탕에 깔고서 삶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철학으로 나아간다. 

실용주의적 사고를 처음으로 창시한 자는 차알스 퍼어스Charles Peirce(1839~1914)이고, 이를 발전시킨 자는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라 볼 수 있다. 나아가 실용주의를 계승하여 새로운 철학, 일명 도구주의(Instrumentalism)로 전개해 나간 자는 존 듀이John Dewey(1859~1952)이다. 

퍼어스는 사물을 지각하는 관념을 명료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실천(pragma)”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로부터 실용주의란 말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 속에 개념으로만 있는 관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관념이 실천으로 규정되어 현실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실현된 관념만이 의미가 분명해지고 알려질 수 있다. 이는 관념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천의 차이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이다. 

퍼어스의 실용주의적 특성은 1877년에 발표한 “신념의 고정화(The Fixation of Brief)”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의심에서 시작하여 탐구의 과정을 거쳐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의심은 모르는 것, 생소한 것을 알기 위해서 탐구로 이끌기 때문이다. 탐구의 결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구란 의심에서 시작하여 신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사고과정이며, 그 목적은 신념의 확립에 있는 것이다. 퍼어스에 의하면, 신념의 확립에 기여하는 중요한 방법은 과학적 방법이다. 이와 같이 그는 ‘관념을 명료하게 하고 신념을 고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실용주의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제임스는 퍼어스가 말한 관념이나 신념이 인간의 경험에서 어떤 몫을 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사고한 철학자다. 제임스는 미국 특유의 또 다른 실용주의적 사고를 내놓게 되는데, 실용주의를 어떤 연구 성과가 아니라 연구방법론으로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학설이나 관념이 참된 것이냐 아니냐는 그것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효과에 의해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학설이나 관념은 사람에게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결과로서의 사실로 판명되는 것이다. 

제임스는 경험으로 검증 가능하면 그 관념은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검증이란 진리화의 과정이며, 진리는 관념이 경험에 의해 사실과 일치되는 것을 뜻한다. 진리는 항상 결과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관념은 언제나 경험에 의해 부단히 검증되어 새롭게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관념은 개인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 구체적인 활동에 가치가 되는 것, 행위로 옮겼을 때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관념은 개인에게 유용할 때 참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거짓이라는 얘기다. 만일 실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관념이라면, 이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듀이의 경험주의 철학은 전통적인 감각경험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확대된다. 경험은 감각적인 활동을 포함하여 생리적, 인류학적, 문화적 활동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경험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뜻에 가깝다. 경험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질서 있는 맥락을 가지고 연속되면서 성장한다. 경험이란 즉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면서 지속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듀이가 말하는 경험은 상호작용의 원리요 지속성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유기체로 살아간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고, 환경을 개척해서 바꾸기도 한다. 이 경우에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 혹은 도구가 되는 것은 개념, 지식, 사고, 논리, 학문이다. 듀이에 의하면 지성의 인식작용은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 형태이며, 관념이나 개념은 이러한 적응작용을 돕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생명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개념이나 관념이라면, 이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검증되고 끊임없이 수정돼야 마땅하다. 

듀이는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로서의 관념이나 개념이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리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나 관념은 인간이 환경에의 적응과정에서 능동적인 지성이 만들어 낸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환경에 접하여 적응하기 위해 개조된 실험적 행위의 성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나 관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로서 개조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개념, 관념, 사상 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듀이가 말하는 탐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관념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검증을 통해 진리화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변질된 귀납적 형이상학


19세기에는 유물론이 득세하고 자연과학적인 인식론이 유행하면서 관념론이 허물어지고 현상주의와 그 변형들이 유럽철학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이런 학풍 속에서 철학의 꽃이라 불렸던 형이상학은 풍전등하風前燈下였고, 겨우 명맥만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형이상학의 명맥을 유지한 철학자는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스콜라철학의 후광으로 새로운 형이상학적 방법을 창안한 독일의 페히너Gustav Theodor Fechner(1801~1887), 여기에 동조한 롯체Rudolpf Hermann Lotze(1817~1881) 등이다. 이 노선에 속하는 학자들을 묶어서 귀납적 형이상학자라 부른다. 

귀납적 형이상학자들은 시대정신에 맞추어 자연과학적 인식을 활용하여 전통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온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그들은 당시 경험적인 연구 내용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정신철학이 아닌 실증적인 경험이 언제나 인식의 근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두 경험론자이지만 고전적 형이상학의 명맥을 이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귀납적 형이상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경험을 앞질러야 하기 때문에, 결국 경험적 연구를 앞질러서 완성한 가설적인 성격에 머물고 만다.

페히너
페히너는 종교적인 신앙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형이상학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개념을 꾸며 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파악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세 가지 규칙을 정한다. 첫째의 규칙은 유비추리類比推理(Analogieschluß)를 권장하는 것이다. 유비추리의 결과가 근거가 있고, 확실한 과학적 인식에 모순되지 않을 때에는 개연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의 규칙은 실용성의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즉 개념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도 좋다는 것이다. 셋째의 규칙은 하나의 믿음이 오래도록 폭넓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 믿음의 개연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페히너는 이러한 규칙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가설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히너는 밝음[光明]과 어둠의 존재를 전제한다. 밝음 자체는 생명을 가진 전체적인 영혼이다. 전체적인 영혼은 하나님(Gottheit)이라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은 밝음의 정도에 따라 생명(영혼)이 있는 인간, 동물, 식물, 생명이 전혀 없는 물질적인 것이 구분된다. 따라서 생명을 가진 지구地球나 다른 별들, 즉 우주자연의 세계는 모두 영혼을 갖고 있고, 영혼이 깃들어 있는 개별적인 모든 생명은 전체적인 영혼의 한 부분이 된다. 

전체적인 영혼 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은 계속적으로 표상작용을 한다. 페히너는, 여러 표상들이 인간 각자의 영혼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감각적인 지각들에 대해서도 각기 관계를 맺고 있듯이, 신체가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영혼이 표상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고, 그러는 한에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세상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는 믿음을 떨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롯체
롯체는 형이상학을 부정하던 19세기에 살았던 자연과학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응용하여 형이상학적 이론을 펼치게 된다. 특히 그는 자연적인 사건의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을 인정하면서도 보다 높은 의미의 목적이 자연의 기계적인 인과론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인과적 힘이 궁극의 원인이요 존재의 근원인 신(인격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라이프니쯔의 예정조화설에서 보듯이, 세계의 모든 인과적 작용이란 결국 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근원으로 파고들어 가는 철학적 탐구는 바로 세계의 구성과 과정에서 살아 있는 원리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는 근거 지워진 것으로부터 근거 지우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라이프니쯔와 플라톤의 방법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방법적 토대 위에서 롯체는 하나의 절대자로부터 모든 것들을 이끌어 내려고 한 피히테와 헤겔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즉 그는 우주만물을 창조한 절대정신만이 피조물들에게 부여한 궁극의 목적을 알고 있고, 피조물들이란 절대정신이 부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라이프니쯔가 “활동할 수 있는 존재(être capable d’action)”로 영혼을 내세웠듯이, 롯체는 영혼의 실체성을 제시한다. 그는 영혼의 발생을 정신적인 세계의 근거가 작용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근거는 물질적인 씨앗이 형성되는 것을 통해 영혼을 낳도록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과학은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일 뿐이나 충분한 근거를 지닌 신념이다. 

영혼과 신체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로체는 데카르트가 말한 심신 상호작용설을 받아들인다. 감각에 있어서는 육체가 영혼에 작용하고, 의지의 행위에 있어서는 영혼이 육체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롯체가 19세기를 지배한 기계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결정론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는 라이프니쯔의 영혼론을 따라가고 있었다. 롯체의 영혼론은 후에 브렌타노Franz Brentano(1838~1917)의 행동심리학에 영향을 주었고, 논리적인 면에서는 훗설Edmund Husserl(1859~1938)의 현상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9세기에는 귀납적 형이상학의 출현 외에도 신적인 세계정신을 내다볼 수 있게 하는 두 주류, 즉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스콜라철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실재론적으로 결합한 바탕 위에서 존재에 대한 전체성을 파악하여 일원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이 구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다음 호 2. 20세기에 대두된 서양철학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4월 증산도대학교
더욱 깊어진 우주관 교육의 열기



봄기운이 슬그머니 온 가운데 어느덧 다가온 4월의 첫날, 증산도대학교 교육이 증산도 교육문화회관에서 진행되었다. 1일과 2일 양일에 걸쳐 이루어진 이번 4월 대학교 교육 역시 올해 들어 집중 교육으로 시행 중인 ‘우주관’ 교육으로 이루어졌다. 종도사님께서 직접 풀이해 주시는 『우주변화의 원리』(이하 ‘우변’) 교육이 토, 일 양일간 모두 진행되면서 우주론 공부는 더욱 고조된 열기 속에 그 심도 또한 깊어지고 있다.

이번 종도사님 우변 강독의 주요 주제는 ‘오행’이었다. 오행의 생성 순서(목-화-토-금-수)와 오행의 변화 순서(토-금-수-목-화), 토土의 중요성 등 오행 공부에 있어서 꼭 알아야 할 사항들을 수차례 강조해 주시며 종도사님께서는 늦은 밤 자子시까지 열정을 쏟아 내셨다. 

다음 날 ‘상생을 실천하는 참된 증산도인이 되라’(도기 138년 9월 증산도대학교)는 제하로 증산도 신앙의 참 사명을 다시금 강조해 주신 태상종도사님의 도훈을 받들고, 이어 ‘오행과 운’에 대한 두 법사의 핵심 요약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전날에 이어 다시 시작된 종도사님의 강독 말씀은 ‘태을랑의 사명’과 함께 ‘우주론 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시는 내용이었다.

지난달에 이어 종도사님께서 직접 일러 주시는 우변의 핵심 정리 말씀에 대학교 교육에 참여한 모두 도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였고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2017년을 맞아 매달 증산도대학교 교육시간에 진행되고 있는 우변 교육은 오직 증산도대학교에서만 들을 수 있는 우주관 심화 교육이다. 우주론 강독 교육에 참여한 도생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깊어지고 도심주가 더욱 단단해지는 알찬 시간이 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때는 천지성공 시대이니라” 하신 상제님 말씀대로 우주론의 정수를 잘 따 담아 다가오는 가을 개벽기를 진정으로 느끼고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고, 정성스러운 살릴 생生자 공부로 천지와 하나 되어 모두가 성공하는 태을랑이 되기를 기원한다. ◎

대학생 포교회


대학가 신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전국의 대학생 포교회(이하 ‘대포’) 도생들은 저마다의 활동 성과와 이야기를 품고 상생관에 모여 교육 일정을 시작했다.

이번 대포 증산도 대학교(이하 ‘증대’)는 진리의 체體를 잡는 『증산도의 진리』 「2장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강독과 용用공부를 위한 최근 시사와 영상자료 활용법에 대해 배우며 대학가 신학기 활동 사례를 공유하고 점검하는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진리 책 강독 시간을 통해 태초 이래 처음으로 중통인의中通人義라는 무상無上의 도道를 여시어, 천지 가을철 인존 시대의 도를 이루시고 인간 성숙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신, 인간으로 강세하신 하느님이요 미륵불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이 동방 땅에 강세하신 배경과 상제님을 모신 성도님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봄비처럼 대포 도생들의 마음을 적시며 살릴 생生자 의지를 강하게 틔워 주었다.

“순결한 마음으로 정심수도正心修道하여 천지공정에 참여하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도생들의 마음을 울리는 법언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개인 신앙인이 아니며,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몸과 함께 그런 정신과 심법을 가진 후천 인간으로 인류를 인도해 주는 상제님의 일꾼임을 각성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어서 정리된 국제 정세 자료를 함께 보며 최신 정보를 취득하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여 세상 사람들의 의식을 깨어줄 것인지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취득하는 무수한 최신 정보들은 대부분 보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 시대를 넘어 이젠 초超불확실성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인류를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각 도생들이 취득한 최신 정보를 적절히 편집하고 서로 공유해야 함이 강조되었다.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통감하며, 도생들 역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시간이었다.

끝으로 신학기 활동 사례 공유를 통해 전국 대포 도생들의 살릴 생生자 이야기를 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살릴 생生자 공부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상황들과 개척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서툴게 진리를 전하기도 하고 때론 넘어지기도 하며, 발심하고 각성하여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후천에 만들어질 현장 드라마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듣는 시간이었다. 이를 통해 대포 도생들은 서로의 좋은 마음가짐과 자세를 배우고 좋은 방법은 공유하여 마음에 담으면서 교육 일정을 매듭지었다. 

이번 대포 증대에는 여기저기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도생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는 3월 신학기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보냈는지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정유년 6기초를 짜는 8개월의 여정에서 이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어떤 날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날도 있었을 것이고 일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5분만 더! 5분만 더!”라 외치며 끝내 한 사람을 만난 한 대포 도생의 마음가짐처럼 세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우리들의 마음은 원력이 되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참 사람을 만날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서로가 앞장서 태을주 조화신권을 여는 대포 도생들이 될 것을 기대한다. 

청소년포교회


이번 청소년포교회(이하 ‘청포’) 증산도대학교(이하 ‘증대’) 주제는 지난 증대에 이어 『우주변화의 원리』 중 ‘오운’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첫째 날은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의 도훈 말씀을 받들었다. 종도사님께서 우주변화원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틀을 잡아 주시는 말씀이 한층 더 체계 있게 느껴지면서 깨달음이 생겼다는 도생들이 많았다. 더불어 글로벌 태을랑으로 성장하기 위해 진리를 영어로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영어도 익히고 진리도 배울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둘째 날 교육 첫 번째 시간에는 ‘도전, 이렇게 공부한다!’를 주제로 도전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 있었다. 도전을 읽기는 하지만 막상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도생들에게 이 교육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어서 이달 증대부터 시작되는 세계역사문화여행 시리즈 첫 번째 시간으로 이탈리아에 대해 알아보았다. 해외에서 열린 ‘환단고기 북콘서트’와 ‘태을주 수행문화 콘서트’에 직접 참여하고 여러 나라를 답사한 청포 포감의 현장감 있는 생생한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교육 반응도 좋았고 다음 달 교육 내용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거두었다. 

드디어 이번 증대의 하이라이트인 『우주변화의 원리』 ‘오운 편’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 분의 수호사가 오운의 개념, 오운의 대화 작용과 수화 일체론에 대해서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해 주었다. 그렇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꽤 있었는데, 청포 포감들과 함께 당일 공부한 주제를 가지고 조별로 토의를 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갔다. 끝으로 조별 대항전으로 우주변화의 원리 퀴즈를 함께 풀며 4월 청포 증대 교육을 마무리하였다.

올해 증산도대학교의 테마는 우주변화의 원리 교육이다. 쉬운 주제가 아니지만, 배울수록 깨달음이 생기고 재미있기도 한 것이 또한 이 우주론 공부다. 청포 도생들의 마음속에 우주론의 진귀한 핵심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깊어져 가기를 소망한다. 

어린이포교회


어린이포교회(이하 ‘어포’) 증산도대학교 첫날 교육 시간에는 이훈 어포 부 팀장이 ‘우주변화의 원리 주요 술어 정리’와 함께 태극기의 유래와 팔괘에 대해 교육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이길연 수호사의 ‘한자 배우기’ 교육이 있었는데, 우주관에 나오는 기본 한자에 대해 형성 원리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한자 교육은 회를 거듭할수록 어포 도생은 물론 학부형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어서 태전도안도장 김기수 부포정의 ‘오행의 상생과 상극’, 손경희 도생의 ‘우주일년 영어로 전하기’ 등의 수업을 통해 우주론에 대한 공부를 심화하였다. 

한자 공부와 함께 인기를 얻어 가고 있는 수업이 또 있는데 바로 권유미 어포 담당의 ‘영화로 배우는 진리 시간’이다.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트롤’을 정리하는 가운데 환한 광명의 인간이 되어 친구들을 많이 살리자는 다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를 표현해 봐’ 시간에는 대덕 도장의 김상윤, 정서영 도생이 강남스타일 노래에 맞추어 줄넘기를 해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또한 공부한 내용을 퀴즈로 정리하는 시간, 친구들과 함께 포교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등이 있었다. 어린이포교회에서는 후천의 기둥인 어포 도생이 상제님과 태모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의 기운을 듬뿍 받아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맛있는 간식과 알찬 프로그램을 준비해 어포 도생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종도사님 도훈 말씀

● 왜 우주관이 진리공부 깨달음의 원천적 밑천이요 진리의 눈동자가 되는가? 이 말의 결론적인 핵심뜻은 우주론을 깨치는 만큼 진리 의식이 열린다, 진리를 보는 눈이 번뜩인다는 것이다. 

● 우리가 환국-배달-조선-북부여의 칠천여 년 역사를 복원하면서 그 역사를 만든 근본 사상, 문화 사상, 역사 사상이 무엇인가? 그것이 음양론, 우주 음양 사상이다. 우주의 음양 사상은 하도 낙서가 근본이고 그리고 그 사상의 연원, 뿌리는 9천 년 전의 우주 광명의 나라 환국에서 나온 천부경이다. 우주 음양 사상은 신교 우주관이다.

● 오행五行은 다섯 성령이라는 오령五靈이다. 오행은 인위적으로 이름을 지어 만든 개념이 아니고 자연 개념이다. 

● 이 우주에는 이법이 있는데 우주의 이런 오행의 원리를 작동시키는 신의 세계, 신도神道가 있다. 그래서 우주관 공부와 같은 이법적인 공부는 반드시 태을주를 읽어서 신도 세계 경계에서 공부할 때에 제대로 공부가 된다. 

● 우주의 근원 자체가 뭐냐 하면, 이 대우주에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생명의 실체는 무엇이냐? 그게 물인가 불인가, 토인가. 그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발동을 해 가지고 음양으로 나눠진다. 원래는 태극으로 일체화되었다. 그게 하나인지 둘인지, 물인 듯 불인 듯... 그래서 중이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이 된 것이다. 그게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시一始’다. 하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하나가 뭔지 알 수 없지만 그런데 있는 거다.

● 진리에 대한 깨달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는 지식의 원천, 학문의 근원, 도를 닦고, 수행을 하고 또 우리가 영성 운동을 한다, 수행을 한다, 도통을 한다, 진리의 궁극을 인식한다. 또는 마음을 닦는다. 우주의 큰마음을 얻는다. 그 모든 것이 천지 부모 공부인 것이다.

● 이신사. 이법理法과 신도神道와 사건事件. 이법은 깨닫고 신도는 체험(direct experience)하고 사건, 즉 역사는 해석(final synthesis- 최종적 종합)을 하는 것이다. 이법과 신도, 사건을 해석하는 밝은 우주의 큰 눈, 진리의 눈, 광명의 눈을 갖는 것이 우주 조화 태을주太乙呪다. 태을주를 읽지 않으면 이통理通도 안 되고 신통神通도 안 되고 역사 해석도 제대로 안 되는 것이다.

● 우주는 매순간 토土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도 우주를 본받아 매 순간 자기의 조화, 영원한 생명의 토기를 만들어 나가는 여기에 주력을 해야 된다. 건강, 행복, 자기 만족 이런 모든 긍정적 생명의 정서가 바로 토土에 있다.

● 수水가 화火를 이겼다. 물이 불기운을 억압했다. 그럼 이 불의 아들인 토土(화생토火生土)가 보복을 한다. 토극수土克水 해 가지고 너 내 아버지 눌렀지 하며 수水를 극한다. 마찬가지로 금金이 목木을 극해서 목기가 위축되면 목의 아들(목생화木生火)인 화火가 금金을 친다(화극금火克金). 이러면서 우주는 음양 기운이 팽팽하게 균형이 맞는다. 상극이라는 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 주는 것이다.
상극과 상생이라는 것이 자연의 도에서는 이렇게 제어를 하고 균형의 도인데 이것이 인간 문명의 도에서는 폭력 또는 정의를 주장하면서 전쟁을 하고 복수를 한다. 여기에 원과 한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문명의 세계, 인간 삶의 세계가 그래서 복잡한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인사人事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이달의 성도 | 개벽대장, 박공우


●본관: 밀양
●호: 인암仁庵
●가족: 부父-박순문, 모母-오묘전의 장남, 세 명의 부인과 혼인하여 5남 5녀를 두었다.
●출생: 1876년 5월 5일, 전북 전주시 교동
●순도: 1940년(65세), 전북 원평
●입도: 1907년 6월(32세)-차경석의 인도
●직업: 정읍, 고창, 흥덕 지역의 장치기꾼(장날에 장이 잘 설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사람)
성품이 소탈하고 꽃을 좋아해서 직접 집에 꽃밭을 만들기도 했다. 키가 180cm가 넘었으며 풍채가 당당하였고, 음성은 사방에 울릴 정도로 웅장하였다. 배포가 크고 뚝심이 좋았으며, 상제님께서 성격과 술버릇 등을 친히 고쳐 주시는 등의 애정을 갖고 계셨는데 특히 그의 의로움을 높이 평가하셨다. 

[종도사님 도훈]


박공우 성도 딸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당시 아버지가 노총각으로 장가도 안 들고 도 닦아 보겠다고 근 50일을 밤낮으로 시천주 주문을 읽었다. 그러다가 상제님을 뵙고 하룻밤 모시고 잤는데, 거기서 기운을 받아 그날로 보따리를 싸 들고 나와 평생 생명을 바쳐 상제님을 모셨다 한다.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수염 달린 보리를 쪄서 하루하루 생계를 때우던, 그 어렵고도 힘든 시절을 종지부 찍고 천지의 사람으로 사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그때가 바로 정미(丁未)년 6월 초순경이었다.
(도기 135년 1월 9일 증산도대학교)



기도 중이던 박공우를 만나심


다시 길을 떠나시며 말씀하시기를 “대진(大陣)은 하루에 30리씩 가느니라.” 하시니 경석이 명을 받들고 일정을 헤아려 고부 솔안(松內) 최씨 재실에 사는 친구 박공우(朴公又)에게로 상제님을 모시거늘 공우 또한 동학 신도로서 마침 49일 동안 기도하는 중이더라. (道典 3:183:5~7)

인암(仁庵) 박공우의 입문


박공우는 기골이 장대하고 웬만한 나무도 뿌리째 뽑아 버리는 장사로 의협심이 충만한 인물이라. 일찍이 정읍, 고창(高敞), 흥덕(興德) 등 다섯 고을의 장치기꾼을 하면서 한창 때는 당할 자가 없는 씨름장사로 이름을 날리니라. 이후 예수교의 전도사로 수십 명을 포교하기도 하고 다시 동학을 신봉하여 혼인도 하지 않고 열렬히 구도에 정진하다가 경석의 인도로 찾아오신 상제님을 뵈니 이 때 공우의 나이 32세더라. (3:184:1~4)

‘하느님이 강림하셨다’고 믿은 박공우


하루는 신원일과 박공우, 그 외 서너 사람을 데리고 고부 살포정이에 이르시어 주막에 들어 쉬시는데 갑자기 우레가 일어나고 번개가 번쩍이며 집을 내리치려 하는지라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허둥지둥하고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 모두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거늘 상제님께서 공중을 향하여 “이놈아, 즉시 어지러운 번개를 거두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시니 번개가 바로 그치니라. 공우가 상제님께서 대흥리에서는 글을 써서 벽에 붙여 우레를 크게 일으키시더니 또 이번에는 우레와 번개를 꾸짖어 그치게 하심을 보고 비로소 상제님께서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쓰시는 분인 줄 알고 이로부터 더욱 경외하니라. (3:200:1~6)

오직 마음을 볼 뿐


공우가 상제님을 따르면서 보니 다른 성도들은 모두 머리를 길렀는데 혼자만 단발인지라 성도들과 한 물에 싸이지 못함을 불안하게 생각하여 다시 머리를 길러 여러 달 후에는 솔잎상투에 갓망건을 쓰고 다니는데 하루는 금구를 지나다가 과거의 일진회 동지 십여 명을 만나매 그들이 공우의 머리를 보고 조롱하며 달려들어 강제로 잘라 버리니라. 이에 공우가 집에 돌아와 두어 달 동안 출입을 폐하고 머리를 기르는 중에 뜻밖에 상제님께서 이르시어 그동안 나오지 않은 이유를 물으시니 공우가 강제로 머리 잘린 사실을 아뢰며 “삭발한 모습으로 선생님을 뵙기가 황송하여 집에 있으면서 머리를 다시 길러 관건(冠巾)을 차린 뒤에 찾아뵈려 하였습니다.” 하고 여쭈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니 머리의 길고 짧음이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 하시고 공우를 데리고 구릿골로 오시니라. (3:212:4~9)

공우에게 장군천의 기운을 붙여 보심


하루는 상제님께서 어디를 가시다가 과교리를 지나실 때에 공우가 아뢰기를 “저 앞산에 샘이 있는데 그 이름이 장군천(將軍泉)이라 합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샘물을 떠 오라.” 하고 명하시거늘 공우가 샘물을 한 그릇 떠 오니라.
이에 “마시라.” 하시매 명을 받들어 마시는 순간 힘이 솟아나 태산을 져도 오히려 가벼울 것 같은지라 공우가 깜짝 놀라 “감당하지 못할 큰 힘이 자꾸 솟구칩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거두어 가라.” 하시거늘 곧 힘이 사라져 평상시와 같이 되니라. (3:213:6~11)

박공우에게 용호대사의 기운을 붙여 보심


상제님께서 문득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므로 공우가 그 말씀에 황공해하며 한편으로 이상히 여기거늘 또 말씀하시기를 “기운이 적다.” 하시매 공우가 부지중에 “바람이 좀 더 불리이다.” 하니 과연 바람이 크게 부니라. 이어 상제님께서 다시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고 또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가 또 아뢰기를 “바람이 더 높아지리이다.” 하니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모래와 돌이 날리더라. 이윽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용호대사(龍虎大師)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 하시니라. (4:88:8~12)


천하 만세의 병을 다스리는 만국의원 공사


며칠 후에 상제님께서 구릿골로 돌아오시어 밤나무로 약패를 만들어 

萬國醫院(만국의원)

이라 새기시고 글자 획에 경면주사를 바르신 뒤에 공우에게 명하시기를 “이 약패를 원평 길거리에 붙이라.” 하시므로 공우가 대답하고 원평으로 가려 하거늘 물으시기를 “이 약패를 붙일 때에 경관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려 하느냐?” 하시니 공우가 아뢰기를 “‘만국의원을 설립하여 죽은 자를 다시 살리고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그밖에 모든 병의 대소를 물론하고 다 낫게 하노라.’ 하겠습니다.” 하니라. (5:249:6~10)

이 때는 해원시대라


하루는 공우를 데리고 태인 돌창이 주막에 들르시어 경어로써 술을 청해 잡수시고 공우에게 “술을 청해 먹으라.” 하시거늘 공우는 습관대로 낮은말로 술을 청해 먹으니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이 때는 해원(解寃)시대라. 상놈의 운수니 반상(班常)의 구별과 직업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아니하여야 속히 좋은 세상이 되리니 이 뒤로는 그런 언습(言習)을 버릴지어다.” 하시니라. (3:251)


[종도사님 도훈]


28장, 24장을 거느리는 개벽 대장이 바로 박공우 성도다. 또 박공우 성도는 인사로는 육임군 사령관을 상징한다. (도기 135년 2월 6일 증산도 대학교)



대개벽기, 박공우에게 내린 사명


여름에 대흥리에 계실 때 28장(將)과 24장(將)을 쓰신 뒤에 공우의 손을 잡으시고 마당을 걸으시며 흥을 내어 큰 소리로 명하시기를 “만국대장(萬國大將) 박공우!” 하시니 공우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평생소원이 성취되었다.’ 하며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거늘 이 때 옆에 있던 경석의 안색이 문득 변하니라. 상제님께서 다시 “신대장(神大將) 박공우!” 하시니 공우가 ‘혹시 죽어서 대장이 되는 게 아닌가.’ 하여 마음속으로 걱정을 하니라. (5:256)

너는 운장주를 많이 읽으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운장주를 많이 읽으라.” 하시니라. (5:363:9)

인류 구원의 의통을 전수하심


이 날 밤 성도들을 모두 물리시고 공우만 부르시어 같이 주무실 때, 밤이 깊기를 기다려 이르시기를 “이리 가까이 오라.” 하시거늘 경석이 상제님께서 공우에게 비명(秘命)을 내리실 줄 알고 엿듣고자 마루 귀퉁이에 숨어 있었으나 공우는 이를 알지 못하니라. 상제님께서 물으시기를 “공우야, 앞으로 병겁이 휩쓸게 될 터인데 그 때에 너는 어떻게 목숨을 보존하겠느냐?” 하시거늘 공우가 아뢰기를 “가르침이 아니 계시면 제가 무슨 능력으로 목숨을 건지겠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의통(醫統)을 지니고 있으면 어떠한 병도 침범하지 못하리니 녹표(祿票)니라.” 하시니라. (10:48:1~5)


상제님을 만난 개벽대장 박공우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 박공우는 허망함과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더니 신해(辛亥 : 道紀 41, 1911)년 봄 산기도를 가는 길에 전주 장에 들러 경황없이 장터를 돌아다니는데 누가 등 뒤에서 “공우, 자네 왔는가!” 하고 등을 치매 돌아보니 천만뜻밖에도 상제님이시더라. 공우가 반가운 나머지 주저앉아 상제님의 다리를 부여잡고 한없는 서러움에 목 놓아 우니 상제님께서 “공우야, 그렇게 울지 말고 저기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하시고 주점으로 가시어 술을 사 주시니 공우가 목이 메어 술을 마시지 못하다가 여쭈기를 “무심하게 저희를 버리고 어디를 가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하, 이 사람 별소릴 다 하네. 내가 나중에 올 터인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거듭 술 석 잔을 권하시고 일어서시며 “자네, 어서 볼일 보러 가소. 나는 내 볼일 보러 가야겠네.” 하시거늘 공우가 여쭈기를 “볼일이 다 무엇이옵니까? 장보기를 작파하겠사오니 함께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자네하고 같이 가지 못하네.” 하시니라. 이에 공우가 상제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옷자락을 꽉 붙잡으니 어느새 바람처럼 장꾼들 사이로 빠져나가시거늘 공우가 온 장을 찾아 헤매다가 문득 상제님의 뒷모습이 보여 급히 쫓아갔으나 끝내 상제님의 종적을 놓쳐 버리니라. 이에 공우가 구릿골에 가서 초빈을 들춰 보니 성체도 없고 늘 있던 온기도 없거늘 공우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은 우리들의 눈앞에 숨으셨을 뿐이요 별세하셨다 함은 당치 않다.” 하니라. 이후 박공우 교단에서는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날을 ‘둔일(遁日)’이라 부르니라. (10:98)

[종도사님 도훈]


또 운장주는 상제님이 박공우 성도에게 많이 읽으라고 명하셨다. 그걸 보면 박공우 성도가 운장주의 주인공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거든. (도기 134년 1월 28일 수원 인계도장 살막도수 군령 제1호)



[종도사님 도훈]


군사 병란兵亂이 오고 그 다음에 괴병怪病이 함께 들어온다. 그때는 오직 상제님이 박공우 성도를 통해 전수해 주신 의통醫統으로써만 인류를 살려 낸다. (도기 132년 4월 24일 포항 개벽 대강연회)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가족의 이름으로 도방을 말하다(진주도장 김진수, 전춘화 도생)


‘가족家族’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 중 하나이다. 단지 부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족 집단쯤으로 뜻풀이나 해 대며 이해했다고 치부하기에는 가족이라는 언어의 함의가 너무도 깊고 심오하다. 우리 모두의 발원처가 가족이라는 기틀 속에서 유래되었고, 그래서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광대한 외연을 가진 울타리를 가족이라 표현하는 것에 특별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도 그만큼 우리의 삶 속에 가족이 스며들어 체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은 우리의 신앙 정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장 친밀하고 가까워서 반드시 구하고 살려 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 신앙의 성스러움을 재단하고 속화된 의식과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고 제약하려는 속성도 가까운 가족이기에 가능하다는 역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차고 넘치는 용기와 힘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절실하게 구하는 바를 과감히 무력화시키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 가족은 애증이 뒤섞인 양날의 검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긍정적 순기능이 최적화된 가족의 이야기이다. 진주도장에서 신앙하는 김진수(47, 교무녹사장), 전춘화(43, 종감) 부부 도생은 어려서부터 가족을 통해 영적인 감성을 키우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생활 환경 속에서 성장을 했고 일정한 계기를 만나 상제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인으로 자립을 했다. 부부로서 만난 이후 두 사람은 낯선 영역 속에서 둘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일들을 가족의 지원과 사랑이라는 든든한 보호막 속에서 이루어 내고 승화시켰다. 

“지금 이 시간대에 천지일월 부모님을 모시고 태을주 읽는 증산도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핌의 손길을 한시도 놓지 않고 계시는 조상 선령신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고 표현한 전춘화 도생의 말대로 가족, 나아가 조상과 자손이 하나로 결속한 틀 속에서 영적인 공동 운명체로 교감할 수 있는 토대 또한 현실 속의 ‘가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가족의 신앙이 어떤 틀 속에서 보호되었고 교감을 이루며 성장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 특별히 이번 도방 이야기는 부부의 신앙 거처인 경남 진주의 도방과 남해에 있는 김진수 도생의 어머니 곽순엽(67, 도감) 도생의 도방을 이원 취재하여 구성되었다. 김진수, 전춘화 도생 부부가 신앙의 터전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 영적 교감을 통한 절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의 첫 목요일 이른 오후, 취재진은 경남 진주시 일반성면에 소재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6층에 있는 가정도장에 들어서니 김진수, 전춘화 도생 부부와 함께 8세의 영특한 초등학생 딸 가은이, 그리고 똘똘한 기운이 넘쳐나는 5세 된 아들 태민이가 취재진을 맞아 주었다. 아이들의 활달함으로 부산한 가운데 거실 오른쪽 방에 마련된 도방에서 예를 올리고 중앙의 거실에 앉아 그간의 신앙 얘기를 정리했다. 도방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깔끔한 느낌의 벽면을 배경으로 중앙에 우주일년 도표와 천부경 족자가 걸려 있고, 그 위쪽으로 태상종도사님 존영, 상제님 어진, 태모님 진영, 그리고 조상선령 신위가 나란히 모셔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순백색의 청수그릇이 단정히 위치해 있다. 이 부부는 각기 성직자로 봉직을 하다가 간곡한 부모의 권유와 여타 사정들로 인해 결혼을 하고 생활 속에서 진정한 가정도장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는 영적인 차원에서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 부모님의 존재가 있었다. 흥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그 숨은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해 우리는 김진수 도생의 가족과 함께 경남 남해의 친가로 다시 이동하여 어머니 곽순엽 도생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를 마무리하는 당일 일정을 소화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구도 과정과 가정의 형성 이야기


어머니의 신앙심으로 열린 구도의 삶

김진수 도생은 경남 남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성격이 남들과 어울리기 너무 힘들어할 정도로 내성적이어서 부모님이 항상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네 아이들이 언제든지 집으로 놀러올 수 있도록 자전거를 비롯해 많은 놀이 도구를 준비해서 아들과 친구들이 어울리게 해 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린 아들은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김 도생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만 지내곤 했던 이유는 현실 삶의 표면에 가리워진 근원적인 세상, 그 너머의 무엇인가에 대해 늘 궁금해 했기 때문이었다. 

김 도생은 유년 시절의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스스로가 신앙에 관심을 갖고 몰입을 하게 된 근원은 어머니의 신앙 생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하면 어머니는 항상 아침이 되면 천수경 등 불경을 소리 내어 틀어 놓고 하루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불심이 깊으신 분이었고, 김 도생의 집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지나가던 종교인부터 동네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상담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집에 오시는 분들 중에 특히 이웃집에 사는 ‘창선할머니’라 불리던 분은 영성이 밝아 굿도 하고 침도 놓아 주고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분이 오시는 날에는 사람들이 밤 늦게까지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분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에는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한 내용들이 많았다. 옆에서 들은 그런 얘기들은 어린 김 도생에게 모두 경이롭고 새로운 체험들로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귀신 이야기는 물론이고 신명을 해원시키는 굿을 하고서 문제가 풀어졌다며 기뻐하는 모습 등을 자주 보고 들으면서 보이지 않는 세상, 이 세상의 일들을 근원적으로 풀어 나가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긍금증이 크게 일어났다. 

이와 같이 영적 세계와 관련된 간접 체험과 의문들이 늘어갈수록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껍데기요 허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살아가는 데 허망함조차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귀신 등 영적 문제에 관련되거나 명리학을 다룬 책 등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대 역사에 관한 서적도 읽게 되면서 장차 동방 땅 한국이 새 문명의 주역이 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새로운 역사를 여는 곳이 어디인지 꼭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과는 다른 분야에 관심과 의욕을 보였던 그런 김 도생을 주변의 친구들은 이상하고 엉뚱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려 할 때는 이제 그만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대학 시절에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상제님 진리를 만난 것이다. 이제까지 삶과 생명의 근원 문제와 그것을 풀어 줄 열쇠를 찾고 있던 김 도생에게 증산상제님의 진리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요 근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경상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저녁 무렵, 김 도생은 영어 학원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인도자인 대학 선배 정부현 도생(현 진주도장, 부포감)을 만났고, 자취방에서 『다이제스트 개벽』 책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때 김 도생은 순간적으로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강렬한 충격과 희열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 다음 날 바로 대학 동아리방에서 7일 정성수행을 시작하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동안 가슴에 체한 듯 막혀 있던 것이 뻥 하고 시원하게 뚫리는 체험과 함께 수행의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정부현 도생의 인도로 1995년 1월에 진주도장에서 무사히 입도식을 올리게 되었다. 

김 도생은 인도자인 정부현 도생에 대해 감사한 점이 많다고 했다. 그토록 찾던 진리를 알게 해 준 은혜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 치성 준비부터 도장 살림살이까지 함께하며 김 도생이 도장 중심 신앙으로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었고, 무엇 하나라도 제값을 주고 제 정성으로 하게끔 이끌어 주었던 점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단순 수행자가 아니라 살림살이하는 주부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해 주었으며, 그것은 훗날 김 도생이 봉직자의 길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 도생은 입도 후 처음으로 본부 대치성에 참석했을 때의 생생한 영적 체험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치성 중 태상종도사님께서 독축을 하는 시간에 부복을 하고 있던 김 도생은 그 자세 그대로 공간 이동을 하듯이 다른 곳에 옮겨진 듯한 체험을 했다. 그곳에는 하얀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지어 부복하여 있었는데, 그 사람들 중에 김 도생 자신도 들어 있었고 언덕 위에 계시는 태상종도사님과 비슷한 분께 무엇인가를 맹세하고 명을 받드는 모습이 보였다. 김 도생은 그 순간 ‘이미 태어나기 전에 전생부터 맹세를 하고 내려왔구나!,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이제 그 명을 받들어 보자!’ 하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순수한 감성으로 진리에 다가서다

아내인 전춘화 도생은 1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할머니, 형제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큰 걱정 없이 성장했는데,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부엌에 신주독을 모시면서 칠성 신앙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막내인 전 도생은 또래에 비해 부모님과 할머니께서 연세가 많았으므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산골이라는 생활 환경 때문에 언니들은 일찌감치 중학교를 마치면 다른 지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그것은 어린 전 도생이 매번 겪는 슬픔이었다. 가족은 많았지만 조금만 같이 살다 헤어져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고 가슴이 아팠다. 가족들이 좋은 시절에 함께 온전히 행복을 누려 보지도 못한 채 공부하고 먹고 살아야 하는 것 때문에 떨어져 산다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살다가 그냥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허무함마저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유년 시절의 전 도생은 적극적이고 활달하면서도 한편으로 순수한 감성을 지닌 소녀였다. 

그러던 중3 시절에 대학에 다니던 다섯째 언니 전영화 도생이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왔는데 오빠와 자신에게 태을주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전 도생은 뭔가 큰 비밀이 들어있는 듯한 신비감과 호기심에 태을주를 따라 읽었는데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 겨울 방학 즈음에 자연스럽게 도장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전 도생이 평소 다른 형제들 중에서 영화 언니를 마음으로 의지했었고 더구나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들의 믿음과 지지를 얻고 있는 언니의 인도였기에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도장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전 도생은 도장에서 신앙하던 도생들에 대한 느낌이 좋았고 도장 분위기도 너무 편안했으며, 무엇보다 태을주를 읽는 게 참 좋았다고 했다. 그 결과 1990년 2월 언니 전영화 도생의 인도로 수월하게 입도를 하게 되었다.

봉직의 길, 그리고 이룬 가정

김 도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성직자로 지원을 했다. 이후 인천에서부터 여러 도장을 다니면서 봉직 생활을 했고 본부 성녀포교단에 입단도 하였다. 그는 성직자로 봉직하던 기간 동안 여러 여건들이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도 있었으나 강력한 개척 정신으로 임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고비를 넘어갈수록 신앙의 힘이 강해졌고, 진리를 수호하며 도장의 도생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것이 다소 힘은 들었지만 너무나 보람 있고 행복했다고 돌아보았다. 또한 많은 변화 속에서 함께 신앙하던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이탈하고 난법에 빠지기도 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굳건한 믿음은 진리를 제대로 알고 체득하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더불어 종도사님의 우주 변화의 원리 강독에 직접 참여하여 도훈을 받들 수 있었던 것도 큰 힘이 되었는데, 강독을 다 받들고 우주 변화의 원리 책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우주가 살아서 자신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강렬한 기운을 받았으며 마치 자신의 몸이 확장되어 우주와 함께 숨 쉬는 듯했다는 체험도 전했다. 

그로부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김 도생은 아버지께서 환갑을 지내신 그 다음 해 명절 때 집에 갔는데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하셨던 아버지의 뜻밖의 모습에 당황한 김 도생은 어머니를 통해 이유를 듣게 되었다. 평소 아버지 친구분들이 만나면 너나없이 다들 손주 자랑을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하나 있는 아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있고 손주를 볼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하시니 너무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그동안 봉직 생활을 말없이 지원해 주시고 계셨던 터라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봉직하는 아들에게 매월 일정한 경비 지원을 해 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어머니 또한 궁극적으로 아들이 신앙으로 성공하기를 늘 지심으로 기원하고 계심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무겁고 착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 도생은 그때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부모의 걱정과 근심을 너무 외면하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이런 부모님의 정서를 알게 된 마당에 봉직자로서 지속적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런 여건이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간곡한 부모님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었던 김 도생은 생활문화라는 진리 가르침대로 생활 속에서 신앙을 뿌리내리자는 결심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배우자인 전 도생과는 성녀포교단 입단 시 동료로 만나 아는 사이였는데, 처음에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 동료로만 지냈다. 그러다가 전 도생이 5년간의 본부 봉직을 거친 후 지역 도장에서 신앙을 하게 되면서 김 도생과 자연스럽게 만남이 자주 이어진 끝에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김 도생은 지금 어린 시절 생각했던 껍데기 같은 현실, 허상 같은 현실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성과 이법의 산물임을 인식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뒤늦은 결혼과 직장 생활, 늦게 얻은 아기 등등 현실에서 직면하는 모든 일들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인 전 도생도 사회 생활에 익숙하지 못해 좌충우돌 우왕좌왕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점차 적응을 해 나갔다. 그냥 막연히 자연스럽게 잘될 줄 알았던 아기 문제부터 직장 생활, 경제적인 문제, 건강 문제 등으로 초기에는 힘겨워하고 갈등도 겪었지만, 지금은 건강한 두 아이와 더불어 경제적 문제까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은 정성의 결정체임을 깨닫고 가정도장의 토대도 하나씩 갖추어 가게 되었다. 벌써 결혼 10주년을 맞은 김 도생과 전 도생 부부는 이제 누구나 도방을 방문하면 휴식 같은 집, 치유가 되는 집, 도담을 나누는 집으로 만들어 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고 있다.

신앙과 도방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잊지 못할 신앙의 은혜들

이 부부는 신앙을 해 오면서 생활상의 어려움들이 있었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도장 참여도 다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잊지 못할 신앙의 은혜와 체험들도 많다고 했다. 김 도생은 가족 신앙과 천도식은 해원 판의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울타리이며 삶을 영위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봉직 생활 중에 집안의 고질병인 위장병이 도져 고생을 하다가 혼자서 상주하고 있던 도장에서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도장 상주자 방문이 열리면서 어머니 곽 도생이 들어왔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8일간 휴식을 취한 후 수술 없이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머니 곽 도생은 당시 삼천포벌리도장에서 김 도생과 신앙을 함께하고 있었고 남해에 거주하고 있었다. 지금은 삼천포 창선대교가 멋지게 놓여 있어 편리하게 갈 수 있지만, 그때는 곽 도생이 삼천포도장에 가려면 남해에서 버스를 타고 창선까지 와서 다시 배를 타야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곽 도생이 밭을 매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한테 빨리 가야 한다는 기운이 내리면서 마음이 바빠지고 서두르게 되었다고 한다. 급하게 챙겨서 겨우 삼천포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타고 도장에 오게 되었고 그 순간에 위험에 처한 아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도 곽 도생은 그때 영적인 기운을 받아 다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렸다면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전 도생의 경우, 소소한 생활 속에서 신앙의 은혜를 여러 번 체험했다고 말한다. 기억에 남는 것은 둘째 언니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근육에 마비가 오면서 결국에는 생명에도 위협을 주는 희귀병의 하나인 급성 릴리리아 증후군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병원에는 같은 병으로 입원한 아이가 1명 있었는데 1년째 투병 중이었다. 전 도생은 언니와 함께 병원에 찾아가 태을주와 운장주를 2시간 정도 읽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조카는 점차 회복되어 한 달도 되지 않아 퇴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번은 시골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아프시다며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는 과거 담석증으로 수술을 하신 적이 있는데 수년이 지나 다시 그 부위에 비슷한 증상으로 심한 통증이 온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언니와 전 도생은 그날 도장에서 어머니가 옆에 계신다는 생각을 하며 철야로 태을주 수행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행히도 어머니가 괜찮아지셨다는 반가운 전화를 받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전 도생 자신과 관련된 체험이었다. 2008년에 결혼을 한 전 도생은 1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았다. 주변에는 괜찮다고 위로를 했지만 자신은 혼자서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자연스레 당연히 임신이 될 줄 알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자신에게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 보고 어머니가 잘 아신다는 할머니께 물어보기도 하며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도 결과가 시원찮아 고심하던 차에 ‘이제는 마지막으로 도장에서 정성을 드려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장에 출근하기 전 아침마다 도장에 가서 21일 동안 105배례를 드리고 수행을 하였다. 정성 기간을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전 도생은 정말로 기다리던 첫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어찌나 그 은혜가 감사하고 기쁘던지 첫째 태명을 ‘기쁨이’라 짓고 10달 동안 태을주를 읽어 주면서 건강하게 낳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정도장으로 얻은 나의 삶, 우리의 행복

이 부부가 가가도장을 마련한 시기는 2015년 말 무렵 종도사님께서 ‘가정신단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을 주신 때였다. 그 말씀을 받들어 도방을 새롭게 단장을 하고 분위기를 일신하였다. 그런데 조금씩 가가도장의 의미가 부여되고 실질적인 운영이 된 계기는 2016년으로 넘어올 무렵 이어진 어려운 상황들 때문이었다. 김 도생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가정의 복록이 끊기게 되고, 전 도생은 갑상선 기능저하증과 더불어 혈압이 불안정해지고 골반과 척추가 틀어지는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잘 다니던 어린이집에 너무 심하게 적응을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친정어머니 또한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는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을 끌러 내기 위해 전 도생은 시댁 직선조 보은치성과 함께 진외가와 외외가 천도해원치성, 그리고 친정 진외가와 외외가 천도해원치성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 도생은 남편 김 도생 및 언니 전영화 도생과 의논하여 차례차례 계획을 세워 거의 1년의 기간에 걸쳐 시간이 나는 대로 도장과 가정도방에서 본격적인 정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 도생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현재의 직장을 갖게 되었고, 집 또한 공기도 더 좋고, 공간도 더 넓은 자리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지금 다니는 학교와 어린이집에 너무도 즐겁게 잘 다니고 있으며, 전 도생의 건강도 많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도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셨다고 한다.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전 도생은 도방에 대한 자신만의 특별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가가도장은 가정과 개인의 어려움이 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며, 심신의 위안과 평온을 얻을 수 있는 터전임과 동시에 나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열어가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제 김 도생 가족은 천신단을 모신 가정도방을 중심으로 날마다 아침 수행을 통해 하루를 활력 있게 시작하면서 신앙도 생활도 안정감을 찾아 가고 있다.

특히 전 도생은 결혼과 더불어 창원에서 자리를 잡고 신앙을 하다가 언니 전영화 도생이 살고 있는 진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학원을 하는 언니와 함께 자녀들을 양육하며 가족 신앙이 더 안정이 되고 도장 참여도 좋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진주도장에 어린이 도생들이 많은데 자녀들과 조카들을 대상으로 낮 시간에 필요한 교육 지도를 하고 신앙 훈련을 시키기도 하면서 효율적으로 시간 운용을 하고 있다. 전 도생은 본부 봉직 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도장의 어린이 도생 양육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거주지 인근에 언니 가족과 어머니가 모여 살고 있는 이점도 있어 향후 가족의 신앙력을 바탕으로 지역에 거주하는 이웃과 지인들에게 상제님 진리와 태을주를 전하는 활동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방패

이번 도방 취재를 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이 가족들 간의 신뢰와 연대감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신앙을 하는 어머니 곽 도생과 아들 김 도생, 며느리 전 도생 사이의 조합은 탄탄하고 애정어린 교감으로 넘쳐 났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꿀 케미의 환상적 모습을 보는 듯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장처長處만 취하여 호의를 가질 것이요 혹 단처短處가 보일지라도 잘 용서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신 상제님 말씀에도 있듯이, 이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주고 크게 관용하여 허물이나 약점을 상쇄시켜 버리는 조화의 시너지Synergy가 느껴진다면 다소 과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실망을 안겨 줄 수 있었던 아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은 도방 인터뷰 말미에 불쑥 던진 “아들이 증산도 신앙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우문에 “나는 결국 아들을 잃었을 것”이라는 현답으로 화답한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본디 자식에게 한없이 약한 것이 부모라 하지만 보다 넓고 깊은 시각에서 자식의 인생과 신앙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진심을 다해 감싸 안을 수 있는 부모는 드물다. 곽 도생은 며느리 전 도생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결혼에 대한 얘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시점에 본부에서 봉직하던 전 도생을 우연히 보고서 “내 며느리였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곽 도생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아들과 함께 집에 들어서는 전 도생을 보고서 놀라움과 함께 깊은 인연의 섭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경험이 부족하고 능숙치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며느리의 생활 적응에 이해로써 보듬어 주고 힘이 되어 주었던 곽 도생의 배려로 전 도생은 힘든 가운데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전 도생은 곽 도생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 모습을 갖춘 것은 100% 어머니, 아버지 덕분입니다. 저는 한 인간, 한 여자로서도 어머니께 배울 점이 많습니다. 막내로 성장해서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는데, 어머니를 통해 모든 것이 채워졌습니다. 저는 물려받은 유산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난관들이 많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막아내고 버틸 수 있는 방패는 오직 가족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위대하다. 상제님 신앙의 과정에서 겪는 갖가지 오해와 시련들은 때로는 시리도록 아프고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치유하고 새롭게 헤쳐 나갈 힘은 가족이라는 방패, 가가도장이라는 견고한 철옹성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속 있는 도방 문화의 형성을 소망하며


도방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향후의 신앙 계획과 소망을 물었다. 어머니 곽 도생은 무엇보다 가족이 건강하게 신앙과 생업을 잘 영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힘닿는 데까지 사람들에게 증산도 신앙을 권유해 전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거주지 지역에 소재한 암자의 스님에게 도전을 전했고 그분이 태을주를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김 도생은 도장 생활 10년, 사회 생활 10년을 되돌아보면서 지금부터는 사회 생활 속에서 신앙이 자리를 잡고 가정 도방이 신앙 전파의 터전이요 기반이 되기를 소망했다. 자연스런 신앙 문화가 도방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더불어 가족 간의 진리 학습, 특히 아이들의 진리 공부 계획을 만들어 실행하겠다는 계획도 표명했다. 가족 신앙은 서로가 협력해 성과를 도출해 내는 팀플레이Team play라는 생각을 밝히면서, 앞으로 가정도방의 영역을 점차 이웃과 지역으로 확대해서 상제님 진리 신앙의 구심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전 도생도 김 도생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가족부터 신앙을 생활화하고 정성을 쏟아 즐겁게 신앙을 해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방 신앙 문화가 주변으로 확대가 될 것이라 보고 있다. 아이들과 조카들, 아이 친구들은 물론이요 시댁과 친정 가족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있으며, 가까이에서부터 실속 있고 자연스럽게 신앙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가가도장의 힘을 근간으로 가은이와 태민이를 비롯한 시댁과 친정의 자녀들이 먼저 도장 문화로 흡수될 수 있도록 남편 김 도생 및 언니 전영화 도생과 함께 정성을 드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전 도생 자신이 가가도장에서 심신의 위안과 삶의 해결 방안을 찾고 평안을 얻은 것처럼 누구든지 가가도장에 오기만 하면 위안을 얻고 삶의 힘을 얻고 말씀의 깨달음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키워 가고 싶다는 강고한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내가 60년 동안 찾던 것이다.”- 창선할머니와 어머니의 입도 사연

김 도생의 어머니 곽순엽 도생은 아들의 신앙을 반대하다가 적극적인 지원자로 돌아선 후 입도까지 하신 분이다. 그렇게 변화를 겪은 과정과 사연을 들어 보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무척이나 흥미롭다. 

본래 부모님은 김 도생의 신앙을 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아들과 딸이 잘 성장해 모두 좋은 직장에 취업해 다니고 있었기에 자식 키운 보람에 남 부러울 것이 없었던 부모님은 아들이 증산도를 신앙한다고 하고 언젠가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봉직을 한다고 하니 결단코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잘 모른 채 알려지지 않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당시로서는 아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를 반전시킬 사건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종도사님께서 도훈을 통해 가족 포교를 강조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나름대로 정성을 들이고 있던 김 도생은 어버이날을 맞아 어머니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태을주가 새겨진 ‘생기生氣’라는 성물을 우편으로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어머니로부터 급히 집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 보니 그날 집에는 이웃집에 살며 인연을 맺은 ‘창선할머니’도 와 계셨는데, 창선할머니는 어머니처럼 김 도생의 신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김 도생의 편이 되어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아들 신앙을 따라가라고 설득을 하고 있었다. 

그 내막은 이러했다. 어머니 곽 도생은 평소 아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신앙을 막아 보려고 창선할머니에게 아들이 보내 준 생기를 보여 주며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신기가 있었던 창선할머니는 생기를 손에 놓는 순간 바로 입에서 태을주가 터지면서 스스로 태을주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곽 도생에게 “내가 60년 동안 찾던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아들을 불러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창선할머니는 “이곳은 천금을 주고도 못 가는 자리이고 못 들어가서 한이 되는 그런 좋은 곳이라”며 곽 도생에게 무조건 아들을 따라 신앙하라고 했다. 

곽 도생은 창선할머니가 별다른 연관성도 없는데 평소에도 자꾸만 좋은 쪽으로 인도를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련된 얘기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창선할머니가 신명을 받아서 그런지 영적으로 모든 걸 알게 되는 모양이에요. 그분이 저에게 ‘자식과 남편을 위해 공덕을 쌓아라. 당신 시조부 되시는 분께서 아들을 위해 공덕을 많이 쌓았고 그 연관성이 당신에게 이어지고 있으니 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후 진주도장에서 우리 조상님 천도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 창선할머니를 모시고 갔어요. 그때 창선할머니가 천도식 하는 현장에서 영으로 우리 조상님들 모습을 본 거예요. 그분이 무릎을 탁 치시더니 ‘당신 조상님들이 손을 흔들고 구름을 타고 올라가니 앞으로 좋을 것이다.’고 했어요.” 

이후 곽 도생은 건강이 안 좋은 때가 있어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동희 도생의 도움을 받았고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하면서 영적 체험도 하신 끝에 1999년에 입도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 곽 도생의 인도로 창선할머니도 2001년에 입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곧 박가망 도생이다. 박 도생은 입도 당시 김 도생에게 “내가 너의 어머니와 인연을 맺어 도와주었더니 아들인 너를 통해 내 소원을 이루게 되는구나!”는 말을 하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박 도생은 도를 닦던 아버지의 신명 기운을 받은 분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박 도생의 부친은 고종 황제 시절에 ‘훔치’ 기도를 하던 신앙 단체의 책임자였고 한의원을 운영하던 분이었다. 박 도생은 신명을 볼 수 있었지만 일체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않은 채 도장에서 묵묵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도장에서 자신의 부모님 천도식을 올려드렸을 때 정말로 기뻐하셨다고 한다. 

박 도생과의 인연에 대해 김 도생은 이렇게 술회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시고 상제님 곁에 계시지만 박가망 도생은 어머니와 저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을 맺어 30년의 시간에 걸쳐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는 그 긴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는 계기와 박가망 도생의 평생 소원을 이루는 만남의 고리를 돌이켜 보면 그냥 우연이라는 건 절대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연과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며 의미 있는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광인의 한마디 말에도 취할 것이 있느니라’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가가도장은 가족의 헌신적 지원 속에 성직의 길을 걸었고 또한 그 가족의 간곡한 요청으로 한 가정을 이루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신앙 여정을 걷고 있는 도생 부부의 이야기를 담아 보았다. 이들은 이전과는 양상이 다른 사회 생활에 과감히 적응해 나가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애를 기반으로 견디고 극복해 내는 가운데 신앙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며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배경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조상과 연계된 영적 감응을 바탕으로 자식의 성직을 묵묵히 지원하고 보살폈던 부모님의 숨은 사연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평범한 인지상정의 경계를 뛰어넘는, 분명 색다르고 특별한 스토리이지만, 궁극에 가서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깊은 마음과 정서를 대신 읽고 느끼는 공감의 장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가족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며 그 본질적 가치를 함께해야 할 공동체다. 하지만 깊은 신뢰와 쏟아 내는 사랑만큼 서로의 차이와 선택을 존중하며 합리적으로 배려하고 지원해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그때 우리가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신앙의 대의에 걸맞는 선택을 어떻게,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은 결국 영적인 감성과 깨달음의 정도에 달려 있음을 이번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늘 자식의 앞길을 보살피며 신앙 속에서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 곽순엽 도생과 똑같은 마음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 김동균님의 감동적인 배려와 사랑, 그리고 두 분의 기대와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며 도방을 안정 궤도에 진입시킨 김진수, 전춘화 도생의 마음을 하나로 담아 가정도장의 성공을 서원하는 도생들께 선물로 보낸다. 부모와 자식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아낌없이 주고 바르게 인도하는 정성과 교감이 종국에는 빛을 발해 모두가 성공하는 신앙의 결실로 열매 맺기를 기원하며, 김진수, 전춘화 도생 가족의 도방, 그리고 김동균, 곽순엽님의 도방에 상제님과 태모님, 조상선령신의 가호가 무궁하시기를 소망한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상생칼럼 | 만물과 하나되는 세상

류형기 / 녹사장, 진주도장 

미국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1908~2006)는 1977년 출판된 그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에서 현대를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 원리가 사라진 불확실한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현대는 과거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가도,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고, 우리가 진리라고 여겨 왔던 많은 것들과 합리성과 이성에 근거한 담론 체계도 의심스러우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혼란스러운 시대라고 하였다. 

이제 40년이 지난 오늘의 시대는 불확실보다 더 심각한 초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hyper uncertainty)라고 한다.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교수(UC버클리)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우선주의와 브렉시트,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등으로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미래를 알고 미리 대처할 수 있다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면서 현실을 더 확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매년 세계 각국의 정계政界·관계官界·재계財界의 수뇌들이 모여 각종 정보를 교환하고, 세계 경제의 발전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는 다보스 포럼Davos Forum이라는 것이 있다. 2016년 다보스 포럼의 주제는 ‘4차 산업혁명’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이 융합해 인류의 생활 수준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개념으로 세계경제 포럼(WEF) 슈밥 회장이 처음으로 제시한 용어다. 슈밥 회장은 “이전 1·2·3차 산업혁명과 달리 4차 산업혁명은 그 변화 속도가 쓰나미처럼 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2017년의 주제는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Responsive and Responsible Leadership)’이었다. 4차 산업혁명, 포퓰리즘, 보호무역, 기후변화 등 세계 경제가 직면한 불확실성을 소통의 리더십, 책임 있는 리더십으로 극복하자는 토의를 하였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인류의 일자리를 인공지능 로봇이 빼앗아 갈 것이라는 우려 섞인 분석을 내어놓기도 한다. 반면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기술을 융합하여 개인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맞춤형 서비스 시대가 올 것이며 1,2,3차 혁명 때와 같이 사라지는 직업이 있지만 새로운 직업이 생길 것이라는 예측을 내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가 보지 않은 길이라 미래를 알 수가 없고 좀 더 시간이 지나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의 변화는 궁극으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100년 전 인간으로 강세한 우주 통치자 하느님이신 증산상제님께서는 현재 지구의 역사가 우주의 1주기 순환 과정 중에서 우주 봄여름의 성장 과정을 지나 우주 가을의 성숙한 문명으로 진입을 하고 있는 우주의 가을 개벽기에 와 있다고 하셨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앞으로의 인류 역사를 정리하고 미래 세계를 디자인하신 천지공사를 행하셨으므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산업혁명의 변화라는 것도 상제님의 천지공사 세계를 들여다봐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도전 7편5장) 

증산상제님의 말씀에 의하면 후천 세상은 ①인류가 발전시켜 나가는 과학과 사회시스템이 고도의 문명 사회로 진입하고, ②지구의 자연 환경이 극한極寒 극서極暑가 없는 살기 좋은 기후로 변화하며, ③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이 선善을 회복하여 남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상극相克의 제도와 문화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④마침내 영성과 이성이 고도로 확장되어 인식의 한계가 없이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영성靈性 문화, 인간의 능력이 제한이 없는 도통道通 대중화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메가트렌드 2010』이란 책에서 소개하는 이 시대 최고의 메가트렌드megatrend는 ‘영성’에 대한 탐구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개인적 성장, 종교, 명상, 요가 등을 통해 자신들의 삶에 영성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장차 인류는 지금의 초불확실시대를 넘어 자연개벽, 인간개벽, 문명개벽의 3대 개벽을 극복하면서 4차 산업혁명을 거쳐서 구축한 새로운 문명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에서 벗어나 인간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여 인간을 낳아 준 천지天地부모의 이상과 목적을 성취하는 ‘인존시대人尊時代’를 열게 될 것이다. 

앞으로 5차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영성혁명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3차원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신도神道 세계와 소통하며 물질 문명의 완성과 영성 문화의 완성을 함께 열어 나가게 될 것이다.

1만 년 전 인류 최초의 나라 환국의 천부경天符經에서 비롯된 수학은 피타고라스를 거쳐 서양으로 건너갔다. 동양의 주역 음양론을 바탕으로 한 라이프니츠의 이진법은 오늘날의 디지털 문명을 열었고 이를 발전시켜 현재의 컴퓨터 문명을 만들어 내면서 3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왔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은 사물과 소통을 하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지금껏 누리지 못한 새로운 문명으로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는 그 무엇보다 존귀한 인간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이루어 가는 시대이다. 증산상제님께서는 가을 우주의 인존문명을 열어 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태을주太乙呪라는 축복의 선물을 전해 주셨다. 이제 온 인류는 만사를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궁극의 조화 주문인 태을주 수행을 통해 만물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영성혁명, 태일문화를 이룸으로써, 완전하고 성숙된 최상의 문명 세계를 크게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서양철학사상 |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문계석)


인식론 순서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2.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은 자연법사상을 비롯하여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를 찾아 나섰고, 그러면서 그리스 사상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자 로마 제국은 정복민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되자, 결국 로마인의 삶은 개인의 영적구원靈的救援에 대한 관심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새롭게 일어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침투해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됐고, 중세 교황敎皇의 신권정치神權政治가 시작되었다. 중세 초기 교부철학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수용하여 그리스도 교리를 공고화하기에 이르렀지만,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절정을 이룬 스콜라철학은 사물을 파악하는 데에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를 체계화하는 신학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즉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는 확고했던 중세의 신 중심체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유럽 문명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일명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고 일컬어지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그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화, 예술, 건축 등의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재인식과 수용이 유럽을 주름잡게 됐다. 이로써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한 그리스도교의 사고와 정치적인 체계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결정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유럽은 르네상스로 인해 중세시대의 막을 내리게 됐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본성상 알기를 욕망”하는 인간 이성의 자유로운 탐구활동은 여러 분야에서 그 진가를 보이게 된다. 즉 자연과학, 수학, 생물학, 화학, 천문학, 예술 및 건축 등 여타의 학문이 우후죽순처럼 부흥하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성적 사고에 절대적인 신뢰를 둔 그리스 합리주의 사상이 다시 부활한 셈이다. 철학의 사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합리주의 철학으로 근대의 문을 최초로 열어젖힌 철학자는 바로 프랑스 출신 데카르트Renē Descartes(1596~1650)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 극복하여 동일 철학을 전개한 인물로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1632~1677)와 형이상학적 단자론을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쯔Leibniz(1646~1716)가 있다. 

1) 합리주의 선구자 데카르트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프랑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1596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출생한 지 14달이 채 되기도 전에 폐병으로 세상을 떴다. 갓난아기인 그도 병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마음씨 좋은 간호사의 극진한 돌봄으로 생명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몸이 무척이나 허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일찍 눈을 뜰 수 없었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즐겨했으며, 형제들과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한 채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다. 

1606년에 그는 지방에 있는 꼴레즈(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8년 동안 중세식 인본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게 되었는데, 5년간은 라틴어, 수사학, 고전작가 수업을, 3년간은 변증론을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 철학 수업을 받았다. 학교생활에서 그는 부지런했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했으며,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파리로 가서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과학, 법률학, 스콜라철학을 배우고 1616년에 졸업한다. 졸업하자 그는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로 들어가 30년 전쟁(가톨릭교회 국가와 개신교 국가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국제 전쟁)에 출정했다. 전쟁 때에도 틈만 있으면 그는 병영의 침대에 누워 조용한 사색에 잠겼는데, 천장에 붙어 있는 지도에서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 애쓰다가 처음으로 수학에서 사용되는 ‘좌표’라는 개념을 발견하기도 했다. 제대 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1620년). 

1627년에 그는 다시 종군한 후, 사색의 지유를 찾아 1628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있던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약 20년간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정신지도의 법칙”을 집필하여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1637년부터 그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를 사색하면서 프랑스어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을 출판했고, 1641년에 라틴어로 『성찰(Meditationes)』을, 1644년에는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판했다. 그리고 1649년에 보헤미아 왕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을 모아 그의 마지막 저술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을 출간했다. 같은 해에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Drottning Kristina(1626~1689)는 데카르트를 스톡홀름에 있는 황궁으로 초청하여 철학을 강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데카르트에게 명했기 때문에, 그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스웨덴의 찬 공기를 쏘이면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 철학을 강의했다. 그 때문에 늦잠을 즐기지 못한 그는 감기에 걸렸고, 1650년 2월 폐렴의 악화로 세상을 등진다. 

데카르트가 아침 늦도록 침대에 누워서 끊임없는 사색을 통해 이루어낸 가장 뛰어난 업적은 무엇일까? 그는 철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에서 탁월함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의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순수 이성적 사유를 근간으로 해서 근대철학의 새로운 틀을 확립한 비조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철학이란 바로 전통적인 존재론과 대비되는 인식론 분야이다. 그의 인식론은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 대륙에서 우세한 합리주의적 방식이라 불린다. 극단적인 경험주의는 모든 앎이 외적인 감각과 내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낸 관념이라 보기 때문에, 지식이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관점이다. 반면에 합리주의는, 수학과 기하학에서 자명한 원리가 보여주듯이, 인식론 상의 근본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추론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의 철학에 계승되고 있다. 철학사에서 이들을 묶어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자라 부른다. 

수학의 분야에서 데카르트의 빛나는 업적은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것이고, 수학적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x{displaystyle x}’를 사용하였고, 좌표계(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숫자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해석기하학을 창시함으로써 이 둘 간의 장벽이 간단하게 해결됐다. 또한 그가 창안한 직교좌표계는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던 대수론과 기하학을 융합하여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고, 뉴턴 역학을 비롯한 근대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물리학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현대물리학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연장(extension)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감각적 특성들을 하나하나 지우게 되면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색, 무취, 무미의 어떤 것이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그가 말하는 기하학적 공간은 물질적인 원소로 ‘꽉 차 있는 공간(plenum)’이다. 그에 의하면 실제적인 사물의 크고 작은 운동변화란 기하학적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원소들이 충돌하고 이동하고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특히 자연계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기계론적 운동관은 중세의 신 중심적 자연관을 밀어내는 데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생물학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한데 있다. 그는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 봄으로써 해부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아 연구를 계속했다. 또한 그는 가설적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로 간주하고, 우리가 의지에 따라 자동적으로 걷는 현상과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을 기계적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설명방식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근대 생리학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2) 근대 합리주의 전통은 어떻게 출범하게 될까?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인 권위를 둔 데카르트는 청년기부터 끊임없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겠노라고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학문이란 다름이 아닌 새로운 철학을 일컫는다. 그것은 인식론(epistemology)으로 수학과 기하학적 방법을 모범으로 하는 단순하면서도 엄밀한 철학을 의미한다. 데카르트가 이러한 사고를 하게 된 까닭을 우리는 어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진리 탐구에 관한 한 오늘의 진리가 내일에는 거짓이 되고, 이렇게 말했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신뢰할 수 없는 거짓을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참인 확실한 앎”의 탐구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앎이야말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참된 진리에 대한 인식을 제공함에 틀림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확실성의 인식만이 진리의 반열에 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인식을 ‘형상形相(eidos)’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데, 형상이야말로 참된 인식을 제공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형상은 지속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어야 하고, 영원히 불변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식은 가장 확실하고 참된 진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대상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불변적인 형상을 찾아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들은 항상 가고 오는 것이어서 그 형상들이 수시로 변형이 되므로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형상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 세계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저렇게 말할 수도 있어서 확실한 진리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상대주의 지식론을 전개한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는 명구에서 명백히 제시한 바 있다. 즉 개별적인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 세계란 항시 유동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얻어내는 인식은 때로는 참이지만 때로는 거짓으로 판명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을 쉽게 기만하게 된다. 또한 개별적인 감각 세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감각하는 주체가 각자의 주관적인 구미에 맞는 앎을 갖게 되므로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고정적인 형상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찾으면 될까 하고 고민한 끝에 언어로 표현되는 보편적인 개념槪念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이 인간’, ‘저 인간’, ‘그 인간’과 같은 경험적인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쓰이는 보편 개념인 ‘인간’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플라톤에 의하면 보편 개념인 ‘인간’은 현실적인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 즉 이데아에 대한 개념이다. 

이데아에 대한 탐구 작업은 보편적인 개념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확정하는 정의(definition)이다. 정의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요컨대 누군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인간’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 자체’는 이데아에 실재하고, 인간에 대한 보편적 형상은 ‘이성적 동물’(이성적은 종차, 동물은 최근 유개념)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는 경험적인 감각 대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따지고 분석하여 공통적인 본성을 찾아낸 후, 이성의 직관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이러한 인식 과정을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상기想起(anamnesis)라 했다. 

플라톤이 제안한 형이상적 탐구는 최고의 보편 개념으로부터 최하위 개념에 이르기까지 종차를 가지고 쪼개내어(diairesis) 정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방식은 수학이나 기하학학적 탐구 방식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는 “선제”(hypotheseis)로서 자명한 원리에 대한 ‘공리(axiom)’를 설정하고, 이를 가지고 ‘정리(definition)’를 내세운다. 공리 및 정리와 같은 근본 원리가 설정이 되면, 이로부터 수학이나 기하학의 복잡한 지식들을 연역 추리해 낼 수 있게 된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 근본 원리가 되는 ‘공리’와 ‘정리’들에 대한 인식은 물론 감각적인 세계에서 찾아낼 수 없는 “선천적”(apriori)인 것들이다. 반면에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어낸 인식은 “후천적”(posteriori)인 것들이라고 한다. 선천적인 인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순수 이성을 통해 자명한 것으로 직접(직관적으로) 얻어낸 지식이다. 그 예들로 “전체는 그 어느 부분보다 더 크다”고 하는 기하학적 원리라든가, “A는 A이면서 동시에 B일 수 없다”(즉 이 자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개일 수 없다)는 논리적인 원리와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논증적”(demonstrative)인 지식인데, 이는 오직 논리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결정지을 수 있는 지식, 즉 유클리드Euclid(BCE 330~275) 기하학의 정리와 같은 지식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선천적인 지식들로서 가장 확실하고 필연적인 진리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형상에 대한 “상기설”(anamnesis)을 인식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탐구 방식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으로 전수되어 부활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탐구 방식을 이어받아 그 단초를 마련한 합리주의가 수학을 여타의 학문의 범형範型으로 삼으려 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수학과 기하학적 탐구 방법론을 신봉하는 합리주의가 내세우는 선천적인 진리관은 그 정당성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 이에 데카르트는 자명한 진리를 인식해 낼 방법론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전통을 계승한 근대의 합리론자 데카르트는 수학이나 기하학을 모범으로 하여 엄밀하면서도 아주 단순하게 철학을 하기 시작한다. 수학이이나 기하학적 탐구방식으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매우 단순하고 쉬운 논리의 꼬리를 더듬어 착실하게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쉬운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쉬운 철학은 전적으로 선명하고 분명한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명한 원리가 되는 선천적 진리를 탐구해 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탐구된 것을 가장 확실하고 필연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지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먼저 이렇게 새롭게 학문하는 방법으로 누구나 탐구에 착수하기 전에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한다. 그 규칙은 명증성의 규칙, 분석의 규칙, 종합의 규칙, 매거의 규칙으로 4가지인데, 이를 데카르트는 자신의 주요 저서 『방법 서설』에서 설정하고 있다. 

① 내가 분명한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라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속단과 편견을 피하고, 그리고 조금의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clara)하고 “분명”(distincta)하게 나의 정신에 나타나는 것 이외는 결코 나의 판단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 명증성의 규칙

② 내가 검토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필요한 만큼의 많은 부분들로 분할하여 검토할 것 - 분석의 규칙

③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단계를 밟아 복잡한 것을 인식하도록 할 것이며, 자연적으로 나의 사고를 질서 있게 인도해 갈 것 - 종합의 규칙

④ 분석하고 종합하는 과정에서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는가를 충분하게 재검토하여 완벽하게 열거할 것 - 매거枚擧의 규칙

확실한 진리인식을 위해 이상의 규칙들을 정신이 잘 준수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해 간다면, 그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자명한 진리의 인식을 얻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3)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기억의 창고에 쌓아 두고 이를 활용하면서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태아 시절의 태교로부터 시작하여, 유아원과 유치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대학의 전문적인 교육과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교육을 통해 너무도 많은 지식을 짊어진 채 지식의 인도 하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많은 지식들 중에 어느 것이 거짓일까? 그리고 진정한 진리인식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탐구의 규칙들을 설정한 까닭은 많은 지식들 중에서 진정한 진리 인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진리 인식을 가려내기 위해 그는 우선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을 진리 인식을 위한 ‘방법적 회의’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과연 이것들이 과연 참된 진리 인식인지 아니면 그릇된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 중 하나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오직 추호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명증적인 인식이 있다면 이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이고, 가장 명확한 진리를 바탕으로 여타의 모든 진리를 연역 추리하겠다는 심산이 깔려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의 주요 저서 『성찰』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지식들을 우선적으로 철저한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지식들이란 셀 수 없이 많아서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함은 평생을 해도 끝이 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들을 쉽고 간단하게 검토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은 수십 층으로 지어진 고층빌딩을 단숨에 허무는 방식과 같다. 그는 그 방법을, 고층빌딩이 전적으로 기초에 의존하여 존립하기 때문에, 기초가 무너지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진리 인식을 위한 방법적 회의는 바로, 많은 지식들이 결정적으로 의존해 있는 기초적인 지식을 확실하게 검토하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단번에 검토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 확실한 진리라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많은 지식 또한 진리이고, 진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수많은 지식 또한 진리가 아니다. 이 방법적 회의를 위해 데카르트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것들을 각기 정리해 본 결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즉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감각을 통해 들어온 지식, 감각적 지식으로부터 일반화된 지식, 그리고 누구나 진리로 믿고 있는 보편적 지식이 그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만 의심하여 철저하게 검토해 보면 되는 것이다. 

첫째, 감각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 :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하는 대부분의 지식은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 오감五感 내지는 내부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얻은 것들이거나, 혹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온 것들이다. 이런 지식을 우리는 진리라고 믿고 있고, 또한 이를 편리한 방식으로 일상에서 유익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감각을 통해 형성된 지식에 대하여 조금만 반성해 본다면, 감각적 지식은 대체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 즉 감각 지각의 기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 나온 지식은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런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예로 평상시에는 달콤하던 꿀맛도 감기에 걸렸을 적에는 미감을 잃게 되어 쓰게 감각되기도 하며, 물속에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곧은 막대기는 굴절 현상 때문에 항상 휘게 보임을 안다. 또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그대로 정확하게 감각되지 않고 달리 보인다. 더욱이 세밀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가 사물들을 아무리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지각뿐만 아니라 이들의 복합들로 이뤄진 지식들은 모두 확실하지 않다. 

둘째로 일반화된 감각적 지식에 대한 회의 : 
우리가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이 손’ ‘이 머리’ 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일반화된 지식, 즉 ‘이 손’이 아닌 ‘손’ ‘이 머리’가 아닌 ‘머리’ 등의 일반적인 지식은 어떠한가? 어떤 화가가 “사튀로스Satyros”(반은 인간의 머리이고 반은 양으로 이루어진 숲의 신)를 그릴 때, 우선 그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일반적인 ‘머리’와 ‘입’이 어떻게 생겼고, 개별적인 양들을 감각함으로써 양의 일반적인 ‘발’ ‘꼬리’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그가 이런 것들을 모른다면 그는 신화에 나오는 가상적인 사튀로스를 그려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감각하는 부분들을 가지고 상상을 통해 쪼개고 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개별적인 감각 물들의 결합으로부터 이뤄진 상상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상상하여 그려낼 수 있는 ‘외눈박이 귀신’, ‘도깨비’, ‘인어 공주’, ‘스핑크스’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유형의 것들이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확실한 진리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허황된 것이겠는가?

셋째로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 :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은 어떤가? 보편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물체의 연장, 형태, 수, 공간, 시간 등을 말하거나, “1 + 2 = 3”과 같은 수학적인 지식, 또는 누구나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자기 자신의 실재”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확실한 진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세상 어딘가에 전능하고 사악한 그런 악령惡靈이 있고, 그가 사람들의 정신을 꿈의 환상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치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홰나무 밑에서 잠들어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자신은 나비가 되어 우주를 훨훨 날아다녔는데, 꿈을 깬 후 내가 지금의 나인지 꿈속의 나비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꿈속에서 사는 환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도 원래 꿈의 환상인데 사악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한다던가, ‘1 + 2’는 원래 ‘3’이 아니고 ‘5’ 인데 사악한 악령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1 + 2’를 계산할 때 항상 ‘3’ 이라고 믿도록 배후에서 정신을 조작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근거에서 본다면 우리가 실제로 누구나 다 인정하는, 그래서 확실한 진리라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조차도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인 진리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진리 탐구에 대한 방법적 회의는 극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명증적인 진리 인식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진술은 과연 없는 것인가? 다행히도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 위에서 바로 언급한 사악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그가 나를 항상 속이기 때문에 내가 기만을 당하고 있고, 항상 그릇된 것에로 이끌리고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나를 속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존재조차도 꿈의 환상으로 속이고 있다 할지라도, 그 속임이 참인 것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속임을 당하는 나의 존재가 참인 것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나의 생각이 전부 속임을 당하기 때문에 그릇된 것일지라도 속임을 당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한, 나는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확고하게 주장한다. 이 진술만은 필연적인 진리 인식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최초로 진리 인식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 존재한다는 진술은 자명한 명증적 진리이고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 진리가 되는 셈이다. 즉 사악한 악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정신을 조작하여 속일지라도 속임을 당하는 사유 주체만큼은 진정으로 실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 실체”이다.

4) 사유실체를 보증하는 무한실체로서의 신神

夫三神一體之道(부삼신일체지도)는 在大圓一之義(재대원일지의)하니, 
造化之神(조화지신)은 降爲我性(강위아성)하고 
敎化之神(교화지신)은 降爲我命(강위아명)하고 
治化之神(치화지신)은 降爲我精(강위아정)하나니, 
故(고)로 惟人(유인)이
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위최귀최존어만물자야)라. 

(무릇 삼신일체의 도는 ‘무한히 크고 원융무애하며 하나 되는 정신’에 있으니, 조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성품이 되고, 교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목숨이 되며, 치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정기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 

夫性者(부성자)는 神之根也(신지근야)라. 
神本於性(신본어성)이나 而性未是神也(이성미시신야)오 
氣之炯炯不昧者(기지형형불매자)가 乃眞性也(내진성야)라. 

(무릇 성이란 신의 뿌리다. 신은 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성이 곧 신인 것은 아니다. 기가 환히 빛나 어둡지 않은 것이 곧 참된 성이다.) 

是以(시이)로 神不離氣(신불리기)하고 氣不離神(기불리신)하나니 
吾身之神(오신지신)이 與氣(여기)로 合而後(합이후)에 
吾身之性與命(오신지성여명)을 可見矣(가견의)오. 

(그러므로 신은 기를 떠날 수 없고, 기 또한 신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몸 속의 신이 기와 결합한 후에야 내 몸 속의 본래 성품과 나의 목숨을 볼 수 있게 된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서檀君世紀 序」) -

나의 주체가 사유하는 한에서 꿈의 환상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실체 관념은 확실한 진리 인식이다. 이제 사유 실체인 자신이 사유하여 획득하는 다른 관념이 참된 인식인가 아니면 거짓된 것인가를 검토해 가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어떤 사악한 악령이 있어서 나를 속여 나의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이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나의 사유가 모두 꿈의 환상이라면, 사유를 통해 더 이상의 탐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그러한 사악한 악령 따위란 없다는 것, 설혹 있다 하더라도 나의 사유에 대한 영향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 탐구를 수행할 때 사유를 기만하는 어떤 연원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존재가 사유를 통해 인식을 획득하는 우리의 능력에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유를 통해 우리가 수행하는 탐구가 진리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사악한 악령의 영향력을 차단시키고, 사악한 악령에 의해 우리가 기만을 절대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어떤 전능全能하고 전지全知하며 전선全善한 존재가 있음을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는 것이다. 

탐구하는 나의 올바른 사유가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임을 입증해 주는 절대적으로 선善한 존재(신)에 대한 증명은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사실을 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처럼 오직 순수한 이성만을 사용하여 명증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증명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6단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진행해 간다. :

(1)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관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들 관념을 분류하여 묶어 보면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감각적 경험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와 형성된 “외래 관념”, 내 자신이 이런 관념들을 근거로 해서 마음대로 상상하여 만든 “인위적 관념”, 그리고 외부의 감각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었던 “본유 관념本有 觀念”(innata idea)이 그것이다. 

“외래 관념”은 우리가 통상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부터 형성된 경험적인 관념들의 총체를 지칭한다. “인위적 관념”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조작한 관념들이다. 인어(머리와 팔다리는 사람이고 몸과 다리는 물고기로 이루어진 형상)나 스핑크스(머리는 사람, 팔은 날개, 몸과 다리는 동물로 이루어진 형상)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본유 관념”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 논리학의 ‘동일률’이나 “전체는 항상 그 부분보다 크다”는 기하학적 관념, 또는 ‘크다’, ‘같다’와 같은 비교 관념들이다. 

세 종류의 관념들 중 본유 관념에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이 있다. 데카르트는 분명히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에서 ‘완전한 인격자’는 전적으로 선한 존재로서의 신을 말한다. 이제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을 논증의 대상으로 삼아보자. 

(2) 결과로서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없는 것, 즉 무無에서 나올 수 없다. 또한 결과로서 갖고 있는 모든 관념에는 어떤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결과로서 확실히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도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은 결과보다도 더 크고,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원리이다. 이 원리로서의 원인을 데카르트는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명증적인 관념이라 부른다. 

(3) 그런데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일까? 이 원인은 부모로부터 나온 것일까? 아니면 자연 또는 유한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그러나 모두 아니다.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오직 ‘완전한 존재’, 즉 절대적인 신神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질적인 의미에서 적어도 결과와 같은 것이어야 하거나 결과보다 더 커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결과가 그 원인보다 크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과로서의 그런 관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고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이며, (2)의 단계에서 언급한 원리와 같이 선명하고 분명하며 자명한 원리이다.

(4)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으로서의 ‘완전한 존재’는 어떠한 한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추리는 (3)의 단계에서 주장된 자명한 원리에 의해 가능하다. 만일 ‘완전한 인격자’라는 관념이 완전한 인격자 자신 이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이는 (3)의 단계에서 설명된 “원인이 더 크다”는 원리에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성이라는 관념의 원인은 그 관념 자체와 마찬가지로 완전해야 하며, 완전하게 실재해야 한다. 이러한 존재는 우리의 정신을 넘어서 실재하는 자이고, 또한 우리의 정신에 그런 완전성의 관념을 넣어 줄(산출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격자’는 관념에서뿐만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한다.

(5)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는 사유실체를 있게 하는 유일한 가능적 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생명의 힘은 바로 창조의 힘과 맞먹는 것이고, 다른 유한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증명해 보였듯이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물론 나는 감각적인 것들을 수용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사유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의 정신은,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물질들과는 달리 어떤 유한성을 지닌 자에 의해 창조됐을 리가 없다. 즉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나의 정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지하고 전능한 능력을 가졌으며 또한 완전한 정신을 가진 자(신神)가 실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자는 완전한 존재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모는 나의 신체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원인을 제공했을런지는 모르지만, 나의 지속적인 생명력으로서의 나의 정신을 있게 한 원인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 속에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완전한 존재에 의해서만 존립 가능한 것이다. 

(6) 완전한 존재가 나를 창조할 적에 여러 가지 능력들을 함께 주었는데, 이들 중 하나는 내가 감각적 지각을 믿게 하는 강한 경향성이다. 완전한 인격자는 전지하고 전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항상 기만을 당함으로써 빚어지는 신뢰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을 부여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또한 나를 항상 기만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려는 사악한 악령이 있다 해도 전적으로 선한 완전한 인격자는 내가 악령의 속임수에 끌려가도록 창조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로 내가 만일 실수를 범한다면, 나의 잘못이지 결코 ‘완전한 인격자’ 즉 절대적인 신의 잘못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인격자가 부여한 순수한 이성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결코 실수를 범할 리 없을 것이며,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인식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 연역 추리의 빛과 그림자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주의적 방식의 진리 탐구는, 인식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상식이나 감각적 경험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수학이나 기하학의 진리 탐구와 같은 방식으로 연역적 추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정신(사유) 실체를 찾아냈다. 사유 실체는 의심할 여지가 추호도 없는 명증적인 것이었다. 이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진리들을 연쇄적으로 연역하여 증명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첫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증적인 사유 실체를 기반으로 하여 참이라고 여겨지는 다른 것, 즉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런 관념의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이 타당성을 갖는 근거는 바로 모든 결과란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로부터 각 단계의 논의는 사슬의 고리와 같이 타당한 추리의 규칙에 의거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이끌어 낸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 진리는 보다 진전된 어떤 명제를 끌어내기 위한 논리적인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추리가 만일 규칙을 전혀 어기지 않고 타당하게 진전되고, 추리의 진행 과정에 거짓된 진술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확실성의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진리 탐구에 관한 한 확실성의 인식을 위해서는 감각적 관찰로부터 들어오는 경험적인 지각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이 그렇듯이 합리주의적 인식론은 명확한 증명을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한 것들을 마땅히 배제하고 있고, 경험적인 지각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라 볼 수 있다. 

셋째, 다른 합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설을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의 학통을 이어받은 근대 합리주의의 인식 방법에 의거해 보면,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라든가 ‘자아 실체’ 관념, 수학과 기하학적 진리에 대한 관념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 창조주에 의해 사람의 정신 속에 ‘선천적’으로 이미 심어진 상태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관련된 개념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들인데, 이러한 관념들은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유 관념들은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이러한 관념들은 원래부터 정신 속에 갖고 태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흩어짐이 없는 일심의 경계(사유 실체 자체)에서 정신 안에 있는 관념들을 온전히 “상기想起(anamnesis)”하기만 하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주의 진리 인식에 문제가 전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사유 실체가 명증적인 ‘제1원리’로 확립되고, 이로부터 ‘생각하는 자아’가 이성의 규칙을 잘 순수順守하여 사유의 연역적 추리의 사슬을 밟아 탐구해 나아가면 필연적인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악한 악령이 속일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유를 통한 연역이 사악한 정신에 의해 기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전지하고 전능한 선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논증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 결정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

첫째, 데카르트의 논의가 순환론循環論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순환 논법이란 A임을 증명하기 위해 B를 가지고 논의하고, B를 증명하기 위해 A를 가지고 논의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다’와 같이 말하는 것을 순환 논법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순환 논증 과정은 이렇다 : 그는 ‘사유하는 자아 실체’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필연적이고 명증적인 진리라고 확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명증적 진리임을 보증하기 위해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는 사유하는 자아 실체의 정신에 선험적으로 있는 본유 관념, 즉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 명증적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는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전에 ‘완전한 인격자’가 ‘생각하는 자아의 추리’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주장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그는 증명하려는 진술을 확실성 인식의 기초로 사용했기 때문에, “순환 논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둘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연역 추리의 과정에서 그는 관념의 “원인이 최소한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원인’이 어떤 근거에서 ‘결과’보다 커야만 하는지, 또한 이 원리가 어떤 근거에서 확실한 원리일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원인이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것 또한 사악한 정신의 조작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나아가 이 원리를 사용하여 증명하는 여타의 진술들이 진리임을 어떻게 보증받을 수 있을지 또한 상당히 의심스럽게 된다. 따라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사용된 원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밝힌 후에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의 진술이 선명하고 분명한 논증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가 증명되는 각 단계의 인과적 역할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셋째, 정신의 외부로부터 들어온 감각적인 관념들과 정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인위적인 관념들 외에 정신 안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이 있다는 전제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들 본유 관념은 ‘자아’라는 실체 관념이나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 ‘크다와 작다’와 같은 비교 관념, ‘인과 법칙因果法則’이나 ‘추론 법칙’ 등인데, 이런 본유 관념설이 전적으로 타당하다면, 한 살 박이 어린 애도 이런 본유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 살 박이 어린 애는 말도 못하는데, 우리는 어린애가 본유 관념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설사 어린애가 이해하고 있으니까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데카르트는 어린애가 본유 관념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는 주장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지적인 성숙이 있을 때까지 아마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유 관념이 이런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더욱 더 불투명해진다. 왜냐하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유 관념이 평생 동안 현실적으로 알지 못하고 마냥 ‘잠재적’으로만 가지는 것만으로 생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본유 관념이 정신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는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을 것이다.

6)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의 선구자
데카르트의 기본 사상은 실체實體(substantia)의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실체는 존재성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며,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완전한 신神만이 독립적으로 자존하며, 자기원인自己原因(causa sui)으로서의 실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유한한 존재, 즉 정신(사유)과 사물(연장)도 실체라고 주장한다. 정신과 사물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고, 비록 신에 의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실체는 무한 실체(substantia infinita)로서의 신과 유한 실체(substantia finita)로서의 정신 실체와 사물 실체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철학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이원론二元論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즉 자연”이라는 사상과 라이프니쯔의 “단자 형이상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 실체란 무엇인가? 정신은 유한한 존재로서 사유하는 실체를 말한다. 정신의 본성은 완전히 비물질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다. 정신 실체의 본성은 사유이고, 그 속성(attributum)은 의식 작용(cogitans)이다. 만일 정신의 본성인 사유가 전혀 없다면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정신에서 의식 작용이 일어날 때, 감정, 욕구, 의지 등이 쏟아져 나온다. 즉 “나는 생각한다(cogito)”와 함께 주어지는 사유 작용은 결국 사유된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의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정신 실체의 부차적인 성질들, 즉 사유의 양태(modus)가 되는 셈이다. 

사물 실체란 무엇인가? 사물도 유한한 존재로서 연장되어 있는 실체이다. 사물의 본성은 완전히 물질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사물 실체의 본질은 연장(extensa, 퍼져 있음)이고, 그 속성은 크기, 모양, 넓이이다. 만일 사물의 본성인 연장이 없다면, 사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장 실체는 사유 실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신이 사유 활동으로 드러나듯이, 사물은 연장으로 드러난다. 사물은 항상 모양에 의해 한계가 지어지고 장소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사물들 간에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채워진 공간(plenum)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본질적인 속성으로 길이, 넓이, 부피라는 성질을 필연적으로 가진다. 그리고 사물의 위치, 상태, 운동 등은 사물 실체의 양태들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들과 양태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물체의 운동은 데카르트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유 실체와 사물 실체가 완전히 다르듯이, 영혼과 물체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명의 원리인 영혼은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볼 때 물체의 운동 원리가 될 수 없게 된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물체의 운동이 기계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치게 되는데, 기계적인 운동은 마치 누군가가 벽시계에 태엽을 감아 놓으면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면 우주 자연의 물질적인 세계가 기계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운동의 최초 원인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무한 실체로서의 신神을 말한다. 태초에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 우주 자연의 물질 세계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내놓은 자동적인 기계론은 고대 원자론자들이 제시한 원자들의 필연적인 운동 방식과 다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텅 빈(vacum) 공간이란 없고, 오직 물질로 채워진 공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채워진 공간에서 물체들은 서로 접촉해서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이것들의 운동은 서로의 위치 이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로 채워진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가 헤엄쳐서 이동하는 방식과 같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 자연에는 텅 빈 공간이 없이 물질적인 것과 에테르(aether)로 꽉 차 있다. 여기에서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위치 이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수학적인 점과 그 경계선이 옮겨갈 뿐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운동은 사물의 활동이 아니라, 오직 수학적인 함수가 우주 전체에 그려져 있고, 언제나 위치 이동에 의한 새로운 함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계선으로서의 좌표계의 이동이 바로 운동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운동은 기하학적인 기계론이지 원자론자들이 주장하는 질량質量의 기계론이 아니다. 기하학적인 기계론에서 운동은 공간을 점유한 물체의 좌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짐으로써 자동적으로 서로서로의 영향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물들과 식물들 모두의 운동은 좌표 상에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정신과 사물이라는 완전히 다른 성질들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에서 발생한다. 특히 인간의 경우에서 비물질적인 정신(心)과 물질적인 신체(身)는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체에 강한 자극을 주면 정신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정신이 목적하는 의지가 있게 되면 의지에 따라 신체가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다른 ‘마음과 신체’ 간의 상호 관계 작용의 문제를 데카르트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정신과 신체가 상호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연결하는 관계의 끈이 필수적이다. 관계의 끈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인 특성을 가져야 한다. 해부학에 능통했던 데카르트는 이것이 인간 두뇌頭腦 안에 있는데, “송과선(anarium)”이라고 불렀다.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송과선을 통해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전달될 수 있고, 정신의 의지에 따라 신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신경계神經系로 전달되어 송과선을 통해 정신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한 “심신 상호작용설”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신 실체와 사물 실체, 즉 영혼과 신체라는 이원론二元論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인간의 경우에서 영혼과 신체라는 대립된 두 실체 때문에, 합리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후대에 스피노자Spinoza가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체가 아니라 무한 실체인 신의 본질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과 신체가 조화 통일된 동일철학同一哲學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심신이원론으로 말미암아 유물론과 기계론이 짝이 되어 사물 실체만을 인정하거나, 관념론과 심리주의가 짝이 되어 정신 실체만을 인정하는 철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다음 호 제목 ☞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천하를 얻었으나 지키는 법을 몰랐던 폭군 진시황秦始皇


*해와 달도 명만 내리면 운행을 멈추느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계시는데 한 성도가 아뢰기를 “옛날에 진시황(秦始皇)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돌을 채찍질하여 스스로 가게 하고, 밤의 잔치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하여 지는 달을 꾸짖어 머물게 하였t다 하옵니다. 이것은 시황의 위세가 높고 커서 돌을 채찍질하고 달을 꾸짖는 권능을 가진 것 같았다는 것이니 후세에 지어낸 말이 아닙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냐. 이제는 판이 크고 일이 복잡하여 가는 해와 달을 멈추게 하는 권능이 아니면 능히 바로잡을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때 아침 해가 제비산 봉우리에 솟아오르거늘 상제님께서 해를 향하여 손으로 세 번 누르시며 “가지 말라!” 하시고 

담뱃대에 담배를 세 번 갈아 천천히 빨아들이시니 문득 해가 멈추어 더 이상 솟아오르지 못하더라. (증산도 道典 4편 111장 1절~6절) 

*운익이 돌아간 뒤에 성도들이 구월음의 뜻을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九月(구월)에 葬始皇於驪山下(장시황어여산하)라
구월에 진시황을 여산 아래에 장사하였다 하였으니 살지 못할 뜻을 표시함이로다.” (증산도 道典 9편 142장 10절) 

* 전국 말세 진시황은 평천하 한 연후에 
만리장성 높이 쌓고 돌사람을 만드느라 학정이 자심하매 
상극사배(相剋司配) 선천 운수 갈수록 극렬했네.
(증산도 道典 11편 313장 7절 ) 

* 今日憶秦皇(금일억진황) 虎視傲東方(호시오동방) 진시황이 두 눈 부릅뜨고 진나라 동쪽을 노려보네.
一朝滅六國(일조멸육국) 功業蓋穹蒼(공업개궁창) 순식간에 여섯 나라를 멸하니 그 공이 하늘을 뒤덮었구나.
立志平天下(입지평천하) 西北驅虎狼(서북구호랑) 천하 평정에 뜻을 두고 서북 지역의 흉노를 격퇴하였네.
役民數十萬(역민수십만) 長城起邊疆(장성기변강) 수십만 백성의 힘으로 변경에 장성을 세웠구나.
欲尋不死藥(욕심불사약) 皇朝二世亡(황조이세망) 허나 불사의 선약에 미쳐 나라는 2대 만에 망하고 말았네.
不見始皇帝(불견시황제) 天地一蒼茫(천지일창망) 이제 시황제는 보이지 않고 천지만 드넓구나.
(懷古 옛일을 생각하며, 이태백) 



BCE 11세기경 고대 중국에서는 주원周原 사람 무왕武王 희발姬發이 상商나라 제신帝辛,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주나라는 자신의 영역을 여러 개의 영지로 나눠 왕실의 친척과 공신들에게 분배해 주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각 나라의 주군인 제후諸侯라 칭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받은 봉지의 정권을 잡고 이를 대대손손 세습하는 권리를 얻는 대신 주나라 왕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했다.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업무를 보고하는 의무를 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받은 영지를 다른 경대부들에게 분봉分封하기도 하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Feudalism)를 실시했다. (역사적으로 봉건제는 주나라, 중세 유럽,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형태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봉건제가 없이 일찍부터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 봉건제 운운하는 것은 마르크스 역사관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주나라는 12대 유왕幽王의 시대가 되었다. 유왕은 애첩인 포사褒姒의 환심을 사기 위해 봉화대에 불을 피워 제후들을 희롱한 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제후들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조차 잃어 후일 실제로 위급한 지경에 처했을 때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후 유왕에 의해 폐위된 왕후 신후申后 일가는 서융西戎의 여러 부족 중 가장 강력한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주나라 수도를 함락시켰고, 유왕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이때 제후들은 태자 의구를 평왕平王으로 옹립하여 동쪽의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역사에서는 이전을 서주西周로,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구분한다. 동주시대는 다시 전반기인 춘추시대春秋時代와 후반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나뉘며, 이 시기 주 왕실은 종주국으로서의 위력을 점차 상실해 갔다. 대신 각 지역의 제후국들은 저마다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약육강식의 패권시대를 열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상대부上大夫 호수壺遂와 더불어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은 까닭에 대해 논의하던 중, 『춘추』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춘추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군주를 시해한 나라가 서른여섯, 멸망한 나라가 쉰둘, 제후가 도망쳐 달아나 사직을 유지하지 못한 나라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춘추시대 가장 힘이 강성했던 5대 강자를 일컬어 춘추오패春秋五霸라 부른다. 이 춘추오패는 나라 안팎으로 큰일이 있을 때마다 주변 제후국들을 단결시켜 안으로는 주 왕실을 보존하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쳤다(존주양이尊周攘夷). 그러던 중 BCE 453년 강력한 패자였던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로 분열된다(이 세 나라를 흔히 삼진三晉이라고 부른다). 분열된 이 해를 기점으로 학자들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주나라 왕에 대한 상징적 권위나 형식상의 명분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저마다 왕이라 칭하고, 열국 간 전쟁의 규모와 내용이 더 격렬해졌다. ‘내가 너를 먹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먹히는’ 처절한 생존투쟁 현장이었다. 치열한 전쟁시대. 전국 7웅이라 불리는 강국들만 살아남아 이제는 통일의 그날만을 바라게 되었다. 

주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할 당시 진秦 민족

(주1)

의 수장인 양공襄公은 군사를 이끌고 견융의 침략을 막고, 주 평왕을 호위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주 평왕은 진 양공을 제후에 봉하고 ‘기산岐山 서쪽의 땅’을 내렸으며 다른 제후들과 통혼하고 동맹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때는 BCE 770년경이다. 

진나라 왕들의 성姓

(주2)

은 ‘영嬴’이며 넉넉하다는 뜻으로 이전 시대인 순임금 때 하사받았다. 양공 이후 9대손인 목공穆公은 오고대부五羖大夫(검은 색 수컷 양가죽 다섯 장이란 뜻으로 초나라에 붙잡힌 백리해의 가치를 알아본 목공은 일부러 낮은 가치인 양피 5장을 주고 백리해를 구해와 등용했다고 한다. 인재등용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백리해白里奚를 등용하여, 서쪽에서 뿌리를 내리며 나라의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나라 영토의 대부분은 중원대륙 서북부 지역의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연안지역의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토대로 하는 다른 나라들이 보기에는 전혀 존재감이 없고 사회발전 정도가 아주 낙후하였다.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 비해서 경제적인 능력이나 문화수준, 군사력에서 변방의 미개하고 야만적인 국가에 불과했다. 특히 이웃한 진晉 나라와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그러나 이런 여러 약점들이 오히려 진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한시대 사상가인 가의賈誼는 그의 유명한 시문詩文 ‘과진론過秦論’(진나라의 과실을 논함)에서 진나라의 천하통일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괜히 분쟁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어 다른 나라들과 잦은 전쟁에 휘말릴 염려도 없고, 저 멀리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매우 견고한 천혜의 요새를 갖추고 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도 매우 유리하니 누구의 간섭 없이 장시간 국력을 축적할 수 있는 탁월한 지리적 요건을 지녔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 비해 역사가 짧고 문화적인 전통이 없었던 점이 오히려 새로운 정치실험을 가능케 하였고 창조적이고 실용적인 제도를 통해 다른 나라 인재들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 나라 발전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BCE 361년 진효공秦孝公은 선대왕인 목공이 이룬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나라 안팎으로 널리 인재를 구했다. 이때는 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시점으로, 등용된 인물이 바로 공손앙公孫軮, 즉 상앙商鞅이었다(나중에 진왕으로부터 상商지역을 분봉받았기에 상앙이라고 불림). 공손앙은 낡은 법률과 제도를 뜯어고치는 대대적인 개혁, 즉 변법變法을 주장하였다. 효공은 공손앙을 고위직에 앉히고 법률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전권을 부여받은 공손앙은 연좌제, 신상필벌, 밀고를 장려하고 엄한 처벌을 골자로 하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공손앙 변법의 목적은 진나라 자체를 삼엄한 법률체계에 의거한 전체주의 국가로 만드는데 있었다. 공손앙의 변법은 큰 효과를 거두어 내정과 치안이 안정되고 산업이 크게 진흥되어 부국강병의 꿈이 이루어져 천하통일의 제도적 발판을 마련하였다. 훗날 진효공이 죽은 후 공손앙은 시기한 자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가 이룬 업적이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었다. 진효공의 변법이 시행된 후부터 진시황이 6국을 통합하여 중원대륙을 통일하기까지는 6대

(주3)

에 걸친 노력이 있었다. 진시황은 6대에 걸친 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긴 채찍을 휘둘러 말을 달리는 것처럼 천하를 다스렸다고 할 수 있다. 

진나라의 급속한 세력 확장은 동방 제후국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에서도 인접한 한, 위, 조 삼진은 더욱 강한 위협을 느꼈다. 진나라의 기세등등함에 여러 제후국들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때 나온 외교정책이 바로 합종연횡책合從連橫策이다. 두드러진 인물이 바로 동주東周 뤄양洛陽 사람인 소진蘇奏과 위魏나라 사람인 장의張儀이다. 

소진은 진을 제외하고 종縱(남과 북)으로 연결되어 있던 6국의 연합에 주력한 합종책合縱策을 제시한 일종의 ‘상호 방위동맹’ 같은 것을 맺게 했다. 하지만 이는 각 제후들의 동상이몽과 장의의 연횡책連橫策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 장의의 연횡책은 진나라가 6국 각각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진나라를 군주로 섬기게 하는 군신관계를 세우는데 힘을 쏟은 계책으로 진나라는 더욱 강성해졌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룩하는데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합종과 연횡은 정반대의 외교정책이지만, 따지고 보면 각각의 나라가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정치적 술수라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며,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향한 역사의 큰 흐름에서는 그 방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BCE 256년 진秦 소왕昭王 51년 진의 군사가 주 왕조를 멸망시켰다. 남아있던 주 왕실의 세력은 7년 뒤 진 장양왕莊襄王의 명을 받고 출진한 여불위呂不韋에 의해 멸망하였다. 진소왕은 위염魏冉(진 소왕 선태후의 아우로 진 소왕을 옹립하였고, 명장 백기白起를 기용한 공이 있다)을 등용해 내정을 안정시켰고, 탄력적인 외교술을 펼쳤다(원교근공 遠交近攻). 명장인 대장군 백기를 등용해 이궐 전투에서 20만 명의 한·위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장평대전에서 조나라 40만 대군을 전멸시켰다. 천하대세는 이미 진나라로 넘어와 있었고, 6국 통일은 시간 문제였다.

13세의 소년 영정嬴政, 진나라의 왕이 되다


BCE 247년 중원대륙 서쪽 변방의 강국 진나라 장양왕 자이子異(성은 영嬴, 이름은 이異로 공자라는 의미로 자이라고 했고 초나라 출신의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면서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자초子楚라고도 한다. 이하 익숙한 호칭인 자초라고 칭한다)가 죽었다. 

진나라 왕들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길어 총 56년간 집권했던 진 소양왕昭襄王이 죽고 그의 아들 효문왕孝文王이 53세로 즉위했으나 3일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아들 자초 역시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4년 사이에 진나라 왕이 4명이나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 즉위한 이는 자초의 13세 된 아들 영정嬴政이었다. 그가 중원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바로 그 사람이다.

진왕 정政이 왕위에 등극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바로 여불위呂不韋였다. 사실 진시황의 부친인 자초는 조부인 효문왕의 여러 공자 중 한 명이었다. 자초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장자도, 쉽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막내둥이도 아니었다(이에 대해서 둘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자초의 생모인 하희夏姬 역시 크게 총애를 얻지 못했기에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상황이었다. 인질로 가게 되는 사람은 대개 왕실의 직계이지만, 왕실 내에서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초를 진나라 왕으로 만든 이가 천하 대상인 여불위였다. 여불위는 양적陽翟(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우현禹縣)지방에서 태어난 거상이었다. 그는 축재에만 힘쓰는 다른 상인들과 달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고, 그런 능력도 갖춘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상인 특유의 말로 “이 진귀한 물건(奇貨:자초를 두고 한 말)은 창고에 간직해 둘만하다(奇貨可居)”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거금을 자초에게 주어 조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게 했고, 값비싼 물건들을 들고 가서 당시 진나라 태자인 안국군이 총애하는 화양부인에게 접근하였다. 화양 부인은 초나라 출신으로 안국군 뒤를 이을 군왕의 자리를 잇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있었으나, 자기 소생의 아들은 없었기에 노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여불위는 화양부인과 정치적 거래를 하게 된다. 즉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게 하여 안국군의 후계자가 됨과 함께 화양부인의 부귀영화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거래는 그대로 적중하여 후계자 지위를 얻은 자초의 앞길에는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사이 자초는 여불위의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제후들과 빈객들 사이에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훗날 진시황의 혈통에 얽힌 의혹이 제기되는 일이 일어난다. 자초는 여불위의 애첩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아 들였고, BCE 259년 정월에 건장한 아들이 태어났다.

(주4)

 정월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정政이라 하였고, 조나라에서 태어났다 하여 조정趙政이라고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와 영정을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한 여불위는 상국相國에 임명되어 국정을 보좌하였다. 진나라의 모든 군사와 정치 대권은 진왕 정이 친정親政하기 전까지 여불위 수중에 있었다. 여불위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내린다면 그가 집정 기간에 쌓은 업적은 상당히 훌륭하였고, 뒷날 진왕 정의 천하 통일 사업에 초석이 될 만하였다. 단지 진왕 정의 친정 이후에도 권력을 놓고 떠날 줄 몰랐기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여불위의 업적을 살펴보는 건 진시황의 중원 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불위는 진 장양왕 원년 이름뿐인 동주를 멸망시켰다. 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삼천군三川郡(황하黃河, 이하伊河, 낙하洛河 물줄기가 지나는 곳으로 동방 6국으로 향하는 관문에 해당한다)을 얻기도 하였다. 이 당시 진나라의 주 공격 대상은 조, 위, 한의 3진 세력이었다. 진왕 정 6년인 BCE 241년 6국 연합군을 함곡관 앞에서 격파하여 합종 책략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고, 이제 동쪽으로 진군하는 일만을 남겨 두었다. 여불위가 집정한 12년 동안 진의 군사력은 크게 신장하여 새로 얻은 영토가 15개 군 이상이었고, 통일의 비전을 제시한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저작물을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전국시대 말엽에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나라의 평원군, 제나라의 맹상군 등 이른바 전국 4공자들이 선비들을 양성하고 식객들을 우대하며 인재등용을 하여 정국을 주도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에 문화적인 열등감이 있던 진나라에서도 여불위가 식객 3천명을 우대하면서 인재를 모았다. 이는 여불위의 개인적인 영향력뿐 아니라 나날이 커져가는 진나라의 국력과 생기 넘치는 사회 분위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나라의 야심찬 희망 때문이었다. 다른 4군자들은 식객들의 호평을 얻어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 했으나, 여불위는 그들의 능력을 빌리고 이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통일을 어떻게 하고, 통일 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연구 결과물로 나온 게 『여씨춘추呂氏春秋』였다. 여불위는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해서는 군사적인 힘도 중요하지만, 사상과 문화, 교육적인 힘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통치 방법은 형벌과 덕을 함께 사용하되 덕을 우선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점에서 진왕 정과 견해가 달랐다. 진왕 정은 한비자의 엄중한 형벌 이론을 편애하였고 통일 후 진 제국의 통치 이념은 가혹한 형벌에 기초한 폭압적인 통치였다 

여불위를 제거하고 역사의 무대에 오르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진왕 정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국사를 여불위를 중심으로 한 대신들에게 맡겨 처리했다. 하지만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법. 

진왕 정은 자기주장이 강했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으며, 거만하고 난폭한데다 모든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 처리하는 인물이었다. 

진왕 정과 여불위의 대립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폭발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태후와 관련된 궁중 추문이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여불위는 진왕 정의 모친인 진 장양왕의 부인과 사통하고 있었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진왕 정이 두려웠던 여불위는 노애嫪毐라는 비상한 성 능력을 지닌 남자를 불러들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태후는 남의 눈을 피해 노애와 사통하고, 아들을 두기도 하였다. 태후의 총애를 받은 노애의 세력은 점점 커져 마침내는 난을 일으켰지만 이미 철저히 준비하고 있던 진왕 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주5)

 

이 사건은 여불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을 잘못 추천한 것인지, 태후와 사통한 행각 때문인지 사서에서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당시 전국시대에 태후나 공주가 공개적으로 사통한 일은 많았다. 대표적으로 진왕 정의 고조모 선태후 역시 서북 지역의 의거왕義渠王과 사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았고, 한 소제漢昭帝의 손위 누이도 정외인丁外人이라는 사통하는 이를 거느렸다. 어찌 보면 남자들이 첩을 두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노애의 난으로 여불위는 면직되어 쫓겨났고 얼마 후 진왕 정의 엄중한 경고를 받고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음탕한 태후와 그의 총애를 받은 노애 그리고 전 애인 여불위’로 인해 대규모 숙청이 일어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진왕 정 자신이 ‘백성들을 혼자 다스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권력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왕 정은 이겼다. 친정을 한 지 2년도 안 되어, 여불위와 노애 같은 큰 세력을 일거에 제거한 뒤 진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완전히 움켜쥐고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진왕 정은 역사적인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다. 선대왕들이 쌓아 온 물리적인 힘과 진나라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바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수중에 있는 물리적인 힘으로 방대한 규모의 전쟁을 일으켜 6국 통일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진왕 정은 그런 일을 수행하기에 제격인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였다. 그는 매우 근면한 군주로 결재서류의 무게를 달아 밤낮으로 결재해야 할 양을 정하고 이를 처리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워커홀릭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절대 권력자의 이런 모습에 백관들이 감히 나태할 수 있을까? 훗날 진왕 정을 비판하는 이들도 그의 사치향락이나 음탕한 행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그럴 만한 일도 거의 없었다. 너무 일을 열심히 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지 모른다.

진왕 정은 자기의 근면을 내세워 질서정연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어 갔다. 여기에 진왕 정은 인재를 대함에 있어 국적이나 출신 성분, 빈부귀천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어질고 현명하기만 하면 등용하는 진나라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를 보좌한 왕전王翦, 왕분王賁, 위료尉繚, 이사李斯, 요가姚賈, 돈약頓弱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진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진나라를 위해 온 힘을 모아 적을 이기기 위한 정치 책략과 군사 계획을 만들고 자신들이 직접 실천에 옮겼다. 진왕 정은 이들이 역량을 충분하게 발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진왕 정은 과감하게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 잡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에 나타난 유아독존적 이미지는 통일 이후의 모습이다. 그 이전에는 간언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잘못된 점은 과감하게 바로잡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진왕 정의 6국 통일을 위한 첫걸음은 먼저 한나라를 향했다. 지리적으로 진나라와 가까웠을 뿐 아니라 국력이 가장 약했기 때문이다. BCE 230년 한왕 안安을 지산吱山에 안치하고 한나라 영토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인 BCE 229년 진나라는 주력군을 정비하고 명장 왕전의 지휘 하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BCE 228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고 조왕을 포로로 잡았다. 실로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진왕 정을 암살하라!


BCE 227년 바람이 소슬하게 부는 어느 날. 진나라 정궁 함양궁咸陽宮은 온통 기쁨에 싸여 있었다. 조복朝服을 차려입은 진왕 정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방금 막 도착한 두 명의 사신을 정중하게 영접하고 있었다. 두 명의 사신들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선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행사는 순식간에 살벌한 광경으로 바뀌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극이 되어 버렸다. 연나라에서 보낸 두 명의 사신은 정사인 형가荊軻와 부사 진무양秦舞陽이었다. 사실 이 둘은 진나라를 배신하고 연나라로 망명한 장군 번어기의 목과 연나라 영토인 독항 지역(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구안현固安县과 줘저우시涿州市 일대의 비옥한 땅) 지도를 가지고 오는 것을 미끼로 하여 진왕 정을 암살하려는 목적을 가진 자객들이었다. 이들을 사주한 사람은 연나라 태자 단丹이었다. 조나라 멸망 이후 진나라의 군세는 역수易水까지 이르러 연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본래 태자 단은 조나라에 이질로 잡혀 있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난 진왕 정과 함께 어울려 놀며 지냈었다. 이후 진왕 정이 진나라 왕이 되었을 때 태자 단은 진나라의 인질이 되었다. 그때 고국을 보내주길 원한 태자 단의 뜻을 진왕 정은 외면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은 태자 단은 풍전등화와 같은 연나라의 운명을 걸고 진왕 정 암살에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날 형가는 번어기의 목이 든 함을,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를 들고 진왕 정 앞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무양은 위세 등등한 진나라의 위용에 눌려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형가 홀로 지도를 건네받고 진왕 정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독항의 지도를 펼쳐들면서 안에 감춰 둔 비수를 꺼내 들었다. 이 비수는 단조할 때 극독을 넣은 약수藥水에 수차례나 담금질한 제품으로 피가 한 방울만 나더라도 즉사할 수 있도록 만든 무기였다. 

당시 진나라 어전에는 왕 이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병장기도 휴대할 수 없었고, 단 아래 호위무사들은 명령 없이는 어전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 어전에서는 죽이려는 형가와 도망가는 진왕 정의 숨 막히는 대결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당시 진왕 정에게는 7척 길이의 장검이 있었는데, 이를 뽑을 여유가 없었다. 이때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손에 들고 있던 약주머니를 있는 힘껏 형가에게 던졌고 형가는 이를 피하면서 잠시 틈이 생겼다. 일순간 숨을 돌린 진왕 정은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서 칼을 등에 옮겨 매 겨우 칼을 뽑을 수 있었다. 칼을 뽑아 든 진왕 정은 형가의 왼쪽 다리를 찔렀고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바로 달려들어 형가를 죽여 버렸다.

진왕 정은 왕위에 오른 이후 함양궁 미행 중 발생한 암살 시도와 천하 순행 중 박랑사에서 장량張良과 창해 역사에 의해 감행된 암살 시도 등 여러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 형가의 암살 기도는 바로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지옥문 앞에까지 갔다가 살아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 준 사건이었다. 진왕 정의 분노는 연나라의 조속한 멸망으로 이어져 BCE 226년 연의 수도 계성薊城이 진나라 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듬해인 BCE 225년에는 황하의 물을 대량으로 끌어 모아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수공법水攻法으로 파괴하여 멸망시켰다. 

진나라는 나라의 역량을 집중하여 이웃 나라의 수도를 순식간에 함락시키는 방식으로 6국을 하나씩 멸망시켜 나갔다. 중원의 나라들을 멸망시킨 진의 창끝은 남방의 초나라로 향했다. 초나라는 북으로는 황하, 남으로는 지금의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 일대인 민월閩越, 동으로는 지금의 저장浙江, 서로는 파촉巴蜀 땅 일대까지를 차지하고 있어 땅 넓이만으로는 전국칠웅 중 단연 최고였고, 서초패왕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項燕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나라 안이 텅 빌 정도인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지구전을 폈고, 기회를 보아 초나라 도성인 수춘壽春(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서우현壽县)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진나라 군은 초나라 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았다(BCE 224년). 파죽지세였다. 하나 남은 제나라는 싸움도 하지 않고, 제나라 수도 임치를 기습한 상태에서 제나라 왕이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6국 통일의 중원 통일 대업이 완성되었다. 진나라 건국 후 약 500년이 지난 BCE 221년이다. 진나라에 의한 중원통일은 진왕 정 이전 선대왕 때로부터 차근차근 추진해 온 변혁 정책의 총체적 결과물이었다.

6국 평정 후 진시황의 업적


중국 역사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영토 분쟁으로 겹겹이 포개져 있다. 20세기 초 중국 역사학자 후스胡適는 “기원전 841년 이전의 중국 역사는 못 믿겠다”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사의 첫머리로 꼽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황제부터 하, 상, 주나라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면서 정확한 연도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나라 제18대 마지막 려왕勵王의 폭정에 민란이 일어나 왕이 축출되어 대신들이 다스리던 BCE 841년 공화 원년부터를 중국의 역사라고 여겼다. 이 시기부터 보면 중국이 정식으로 통일되던 기간은 1,374년으로 전체 역사의 반도 안 되는 시기였다.

처음으로 중국을 중국답게 통일한 제국이 진秦나라로 BCE 221년 진왕 정이 중원을 통일하여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진왕 정은 이전의 왕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한 최초의 황제,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진나라와 그 뒤를 이은 한漢나라는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하여 진한제국이라 말한다. 이 진한제국은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게 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민족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뿌리이기도 하면서 중앙집권체제의 기틀과 화폐, 토지개혁을 통한 경제적 부흥의 초석을 다지기도 하였고, 여러 법제의 기초가 마련된 시기이다. 춘추 전국시대의 난세를 겪는 동안 사람들 마음속에는 통일에 대한 염원이 싹트고 있었다. 그중 최초로 중국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유교의 아성亞聖 맹자孟子였다 그는 천하는 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천하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는 대일통大一統 사상을 주장하였다. 

황제가 되다 진왕 정은 33세 때 형가의 암살미수 사건을 겪고, 마침내 39세에 중원을 통일하였다. 통일은 그에게 새로운 무대를 열어 주었고 거대한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진왕 정은 자신만만한 자세로 만인을 굽어보며 통일 후 첫 번째 정책을 취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황제라 참칭僭稱하는 것이었다. 전국시대 이전의 제帝는 지극히 높은 신(至上神)을 가리키는 말로 하늘과 인간, 사회와 자연의 최고 주재자를 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고시대 기록을 보면 상제님(帝)의 명으로 비를 내린다, 바람을 불게 한다는 기록들을 보게 된다. 황皇은 본시 제帝의 형용사였고, 후에 군주의 칭호가 되었다(황皇에는 하늘이 낸 사람의 통칭이라는 의미도 있다). 황은 셋으로 흔히들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를 가리키며 본래 동방의 성왕聖王들을 말하고, 제는 다섯으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으로 중국 민족을 지도한 왕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그래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본래 삼황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제본기五帝本紀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상당히 훌륭한 인품을 지닌 군주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흔히 삼황오제라 일컬어지는 이들에 대해 순차적으로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진왕 정은 이들의 공업을 능가한다 하여 스스로를 황제라고 참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이 자신의 호칭과 관련한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의 명분을 바로 세우는 정명正名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정명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는 “명분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성하지 못하게 된다. 예악이 흥성하지 못하면 형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그러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고 하며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황제, 짐, 조서 등의 용어는 자신의 신격화와 신성화를 이끌어 냈다. 황제를 용龍으로 비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시황은 자신이 천하제일의 지존이라는 사상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정명, 신격화, 신성화 등)은 현실 정치를 강화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천하가 자신의 통치에 완전히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신하들이 군주의 행위를 평가하는 시호법을 폐지하여 스스로를 처음이란 의미로 시始황제라 칭하였다. 이후 황제는 2세, 3세라 칭하기로 했는데 3세만에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또한 진시황은 황제와 관련된 특별한 글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아예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한 피휘避諱제를 시행하였으며, 나라의 상징을 오행 법칙에 따라 물(水)로 정했다.

(주6)



군현제와 중앙집권 관료체제(정치 행정적인 면) 진시황은 전국을 군현으로 나눠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히 완비된 행정기구와 이에 상응하는 관료체제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 둘은 황제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활용하였다. 즉 전국을 등급에 따라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황제를 대신하여 직접 다스렸다. 이로써 정치적 권한을 황제에게 고도로 집중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 진나라는 내정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승상丞相(政), 최고 군사장관으로 태위太尉(國尉,軍) 그리고 감찰장관인 어사대부御史大夫(監察)를 두었다. 중앙기구로 이 삼공을 설치하되 서로 독립적인 기구로 최후의 결정권은 황제에게 두어 권력이 집중되도록 했다. 또한 조정의 조직체제에는 황실의 사사로운 업무와 국가의 공적 업무가 함께 뒤섞여 있게 하였는데 이는 가천하家天下적 황제체제의 기본 특징이었다. 

여기에 지방은 군과 현의 두 등급으로 나누어졌고 조정에서 임명된 관리가 황제의 의도를 각계각층에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앞선 주나라 천자도 진시황과 같이 이름은 천하의 주인이었지만 실제 다스리는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차이로 진 제국은 중국 역사상 일대 분수령을 이룬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진 제국이 두 세대 만에 멸망하였지만, 제도는 그대로 한나라로 계승 발전되었다. 군현제는 상, 주 이래 줄곧 시행된 분봉제를 종식시켰고, 이에 따라 제후가 각기 주관하는 정치 국면도 막을 내렸다.

전국 도로망 정비 진시황은 천하통일 이후 여러 측면에서 다른 ‘통일’의 업적을 세운다. 우선 중국이라는 개념을 확립시켰다. 중국의 영문 번역이 차이나 China는 바로 진秦을 음역한 것이다. 지리적 정치적 통일을 바탕으로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도 통일을 촉진하였다. 진시황은 전국 교통 발전을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삼아, 수레의 양쪽 바퀴 사이의 거리를 통일하고, 천자의 전용도로인 치도馳道(도로 넓이 50보)를 건설하였으며, 북으로 향하는 직도直道와 촉한 지역으로 가는 오척도五尺道(폭 5척 도로)와 동남쪽으로 직통하는 신도新道를 건설하는 등 함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화폐 및 도량형 통일과 문자 통일(사회 경제적인 면) 그리고 모양과 관리가 제각각인 화폐를 진나라의 진반량秦半兩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도량형(도度는 길이, 양量은 부피, 형衡은 무게를 의미한다)을 통일하였다. 명칭과 단위, 쓰임새 등을 통일하였다. 도량형은 계량의 도구일 뿐 아니라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도량형의 표준을 확립하는 일은 왕이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 중요한 시책이었다. 이와 함께 진시황은 문자를 정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나라 법정 서체를 소전小篆체(현재 인감도장으로 주로 사용되는 서체)를 기본으로 예서隸書의 사용을 허가하는 방식이었다. 진왕조의 문자 규범화는 단지 알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로 통일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자 정형의 기초를 다진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각 지방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방간 원활한 교류가 가능해졌으며, 정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었고, 통일된 문자는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진시황이 직접 정사를 돌본 시기에는 줄곧 모든 게 순조로웠다. 중원을 통일했고, 새로운 정치 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였고, 일련의 통일 정책은 중국 2천 년 정치제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시황의 공과 진시황은 천하의 모든 일을 직접 결정하였고, 공문서를 무게로 계산하여 매일 밤낮으로 자신이 처리할 문서의 양을 정해두고(呈), 정해진 양에 차지 않으면 쉬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 상주된 문서는 죽간이었을 것이고 그 문서의 상당한 양은 1일 1석(120근, 1근=250g)이었다고 한다. 이런 근면함은 그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이런 진시황의 위대한 업적 이면에는 중대한 과오도 함께 수반되었다. 즉 통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進攻)에서 그 성과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하는 쪽(守成)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통일을 실현하고 나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그 이전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조정이 없었다. 전쟁 시기에는 적국의 인적자원을 파괴하기 위해 그들을 핍박하고 적국의 물질을 빼앗아서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나라가 통일제국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6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정책이 아닌 근본적인 형세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었다. 과거 대적하던 관계는 통일된 제국 내에서는 다양한 관계로 변화했다. 계급간의 대립이나 서로 다른 집단과 다른 계급간의 이익 대립이 있는가 하면, 서로 공존공영하고 의지해야 하는 관계가 필요하기도 했다. 진시황은 이런 관계를 잘 조정하여 안정된 사회 질서를 건립하였어야 했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런 변화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거의 없었다. 통일 후에도 전쟁 시기와 변함없는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고, 다양한 관계의 조정에는 힘쓰지 않았다. 진시황은 백성들의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잔혹하게 억압하여 그들의 비난을 샀다. 근본적으로 그의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통일 사업을 추진해야 할 때는 시대의 명에 따라 이를 충실하게 잘 따랐지만(順天), 통일 이후에는 덕을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펼쳤어야 했으나 그런 인식 자체가 없었고 가장 중요한 민심을 잃고 말았다(逆民). 

진시황은 백성의 노동력을 남용하여 북으로는 만리장성 건설을 위해 30여 만 명의 백성을 동원했고, 남으로는 백월을 정벌한 후 오령五嶺을 수비하는 데 50여 만 명을 파병했다. 아방궁 건립

(주7)

과 여산驪山에 능을 건설하는 데에는 70만 명을 징발하였다. 이에 도로. 교량 등의 건설에 동원된 총 인력은 20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전국 인구 2천만 정도였는데 약 10분의 1 정도가 스스로 도구와 식량을 준비해서 국가의 노역에 종사했으니 그 부담이 막중하기가 실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또한 진나라 법의 가혹성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 중 하나를 들어보면 진시황 36년 동군東郡 경내에 운석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 진시황이 죽으면 나라는 분열된다는 저주의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진시황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운석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진나라 사람들에게는 갑자기 죽게 되거나 가족이 멸문하는 재앙이 수시로 일어날 수 있었다. 진나라 멸망의 서막인 진승, 오광의 봉기 역시 이들이 큰 비로 규정된 시간에 지정된 노역 장소로 갈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도망가도 죽고 늦게 가도 죽으니 봉기라도 일으켜 보자는 심산이었고, 한나라 고조 유방도 이런 봉기군의 일원이었다.

진시황의 최후


왕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면 지상의 제帝는 나라가 아닌 천하라는 개념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국경에 의해 제한되는 통치자는 국경 밖 다른 나라에는 ‘또 다른 통치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존재한다. 이런 국경이라는 개념이 배제되는 천하의 일인자로 인식한 진시황은 상제님이 수레를 타고 천극天極을 순회하는 것처럼 천하를 순시하기로 하였다. 통일한 다음 해부터 온량거轀輬車(작은 창을 열고 닫으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되는 상자 형태의 수레)를 타고 천하를 순회하였다. 그는 순시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유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면서 민심의 동태를 살피고 관찰하였다. 

진시황은 통일 후 10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시하면서 가는 곳마다 “진시황의 덕을 찬양하고 의기양양함을 밝힌다”는 비문을 새겨 놓았다. 이런 비문들은 진시황의 득의양양한 기세를 충분히 드러내 준다. 하지만 말년의 진시황은 대단히 우울한 생활을 보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진시황이 즐겁지 않다”, “진시황이 묵묵히 있다.”, “진시황이 화를 내다” 등의 심경 변화를 나타내는 기록들이 자주 보인다. 정작 진시황을 가장 심란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예감이었다. 말년의 진시황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해 단약丹藥(일반적으로 외단에서 사용하는 단약에는 수은과 납 성분이 들어 있어 수은 중독, 납 중독의 위험이 있었다. 도교가 성행한 당나라 때에는 이런 단약을 먹고 죽은 황제가 꽤 있다)을 복용하였을 것이고, 장생불사의 약을 구하기 위해 방사인 서불徐市(서복徐福)을 어린 남녀 아이들과 함께 동방으로 보내기도 한다(이때 서불 일행이 도착한 곳이 제주도 어귀로 서불이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 서귀포西歸浦이다). 아마도 진시황은 동방 단군 조선에서 수련의 묘법과 생명 연장의 비법을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모든 노력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시황제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떠돌아다녔다. 이는 민심 이반의 징조를 보여 주는 것이고, 시황제의 죽음은 곧 진나라가 멸망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로 분서焚書와 갱유坑儒 같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시황 37년 BCE 210년 시황제는 마지막 순행을 떠난다. 이 유람에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데리고 갔다. 이것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진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운명의 전주곡이었다. 진시황 일행은 10월에 출발하여 11월 운몽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면서 적가籍柯를 돌아보고 해저海渚를 건너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塘을 거쳐 절강浙江에 도달했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회계會稽로 가서 오나라 땅을 거쳐 돌아가 북쪽의 낭야琅琊에 도착했다. 다시 낭야로부터 서쪽으로 순행한 시황제 일행이 평원진平原津을 건너 황하를 건넜을 때 드디어 진시황은 병이 들고 말았다. 말없이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사구沙丘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세가 악화된 시황제는 장자인 부소扶蘇에게 편지를 써서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관하라고 했다. 생전에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의미는 부소가 후계자임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새를 관장하던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의 주도하에 음모가 진행되었다. 승상 이사, 호해에 의한 음모는 마침내 성공하였다. 장자 부소는 자결하고, 진시황의 뒤를 이은 호해는 진시황의 과오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극단으로 몰고 갔다. 이후 일어난 반진反秦 세력 중 하나인 한고조 유방에 의해서 BCE 206년 함양이 함락되고 초왕 항우에 의해 이미 투항한 3세 자영子嬰이 죽으면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진시황 사후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진시황의 인생사는 100여 년 뒤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에 남아있다. 이미 1세기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황제는 전설 속 인물이 되었다.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진 다양한 이야기가 생긴 이유는 그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이자 최초로 통일된 제국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진 제국은 대륙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가 그 동쪽에 위치한 여섯 나라를 정복한 결과 탄생한 것이지만, 불과 15년 만에 잔존한 유민 세력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탓에 시황제를 ‘폭군’ 으로, 혹은 ‘유능한 군주’로 평가하는 양 극단의 평가가 내려졌다. 

진시황에 대해 폭군이라는 평가가 생긴 이유는 과도한 군사 및 노동력 동원으로 인한 백성들의 반발에서 찾을 수 있다. 장수한 다른 왕조의 경우를 보면 오랜 전란이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면 그간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하고 노동력 징발을 자제하며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통해 내부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반해, 진시황은 대규모 군사행동과 대형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추진하였다. 북으로 흉노와 대치하고 남으로 남월을 공략하는 등 계속된 전시체제는 백성들을 지치고 고통스럽게 했다. 거기에 만리장성이나 직도, 치도 등의 방대한 토목공사와 지배계층이나 향유가 가능했을 호화, 사치의 대명사인 아방궁 신축, 능묘 조성 등을 무리하게 진행하여 서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즉 오랜 전쟁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평화와 행복한 삶을 염원하였는데, 정작 통일된 제국이 백성에게 가져다 준 것은 과중한 조세와 부역, 가혹한 형벌과 굶주림뿐이었다. 아마 백성들은 나라 전체가 캄캄한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여기에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이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권력의 권權 자는 ‘저울추’ 권으로 힘의 저울, 즉 힘의 균형된 분배를 뜻하는데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할 권력이 특정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예상치 못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래서 진시황의 급작스런 사망과 2세 호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리더십 공백이 생기면서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 또한 시대를 만든다. 시대는 진왕 정에게 6국 통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고, 진시황은 이 무대 위에서 성공적으로 6국 통일의 웅장한 연극을 연출해 냈다. 그렇기에 진시황을 ‘폭군’이라는 두 글자로만 규정하는 건 일종의 모욕이 될 것이다. 그가 폭군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 건 집권 후반기의 여러 실책들로 인해 진나라가 너무 쉽게 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이루어 놓은 것들 중 영토, 도량형, 문자, 화폐의 통일만으로도 그를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로 평가할 여지는 충분하다. 하-상-주로 이어지는 유가문화 전통을 겉옷으로 치장하고 진나라의 법가 통치술을 속살로 채워 넣은 것이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문물제도인데, 이것은 이후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지금의 중국인들이 항상 염두에 두는 통일의 관념을 최초로 구체화시킨 인물이 진시황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진시황과 만리장성萬里長城 그리고 분서焚書 갱유坑儒 사건

진시황은 그 위대한 공적만큼이나 과실도 분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갈린다. 명말 학자인 이탁오李卓吾는 진시황을 가리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황제(千古一帝)”라고 했으며, 청말 학자인 담사동譚嗣同이나 모택동은 “지난 이천 년의 모든 왕조가 진나라를 모방했다(兩千年之政皆秦政也)”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반면 중국 역사상 많은 군주들은 전대의 과실을 잊지 말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대표적 인물로 진시황을 언급하였다. 그를 둘러싼 여러 의혹과 사건들이 비판의 소재였는데, 여기서는 만리장성과 분서갱유 사건을 통해 진시황에 얽힌 오해와 의혹에 대해 짚어보기로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
진시황 32년인 BCE 215년, 통일 이후 평화의 시대는 종언을 알리게 되었다. 북방 흉노족과의 치열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산시성 북부의 초원지대인 하남(오로도스Ordos 지방) 지역을 빼앗고 황하 변경에 보루를 설치하였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성새, 만리장성을 쌓게 된 것이다. BCE 214년 진시황 33년 흉노족에게 공격을 개시하였고 34년인 BCE 213년에 장성 축성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 BCE 210년 만리장성은 4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연, 조, 진나라는 북쪽 흉노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장성을 축조하고 있었다. 통일을 이룬 후에도 북방의 흉노는 여전히 큰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진시황은 기존 장성을 보수하거나 하나로 연결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민岷현 일대인 임조臨洮에서 시작해 하란산賀蘭山, 음산陰山을 따라 동으로 ‘고古’요동에 이르는 1만 리 장성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다.주8 

이후 진을 계승한 한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는 이를 보수, 증축하면서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 현재 보는 장성은 대체로 명나라 때 것으로 원래의 진 장성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만리장성은 하나의 긴 담 개념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 뚫리게 되면 나머지 부분은 전략적으로는 무용지물이 되는 비효율적인 군사 방어 시스템이었다. 단지 장성의 남쪽은 모두 중국이라는 관념이 생겨났으며, 만리장성은 중국 한족을 동방과 북방의 민족과 구분 짓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통일 전쟁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해 이렇게 거대한 공사를 진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시황의 통치 행위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는 그 자체가 거대한 공사판과 같았으며, 진시황은 한마디로 각종 건설 프로젝트 추진에 미친 황제라고 평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진시황의 여러 역사적인 공헌은 종종 역사에 길이 남을 죄악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병존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모순들이 진 멸망을 가속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분서焚書와 갱유坑儒
활발한 사상 활동은 사상의 자유에서 비롯되는데 전제적인 정치체제 아래서 그것은 용납될 수가 없다. 전제정치의 본질은 독재이며 ‘모든 일은 권력의 중앙에서 결정한다’는 원칙하에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진리를 탐구하고 자유로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진시황과 그 후대 제왕들의 행적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통일을 이룩하기 전에 진왕 정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매우 귀담아 듣는 듯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룩하고 난 뒤에는 천하에서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진리로 여겨지기를 원했다. 이런 사상 통일을 위한 진시황의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게 이른 바 분서焚書(책을 불사름)와 갱유坑儒(수많은 유생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임)이다. 이 사건은 지난 2천 년 동안 중국 지식인들이 진시황을 비판하는 주 대상이었다. 분서는 진시황 34년 BCE 213년에, 갱유는 진시황이 죽기 두 해 전인 진시황 35년에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진시황의 생일날 벌어졌다. 70명의 박사들이 참석한 대 연회에서 수석 박사인 주청신周靑臣은 진시황을 한껏 치켜세우는 등 칭송의 말을 늘어놓았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군주라고 말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지만, 평소 진시황의 시정 방침에 문제의식을 지닌 제나라 출신 박사 순우월淳于越은 간사하게 아첨하는 주청신을 비판하면서, 제나라가 강태공의 후손으로 이어지다 전씨가 찬탈한 사실을 들면서 진시황의 군현제를 반대하였다. 물론 순우월은 대제국 진나라의 천하가 영嬴씨에 의해 대대로 통치되어야 한다는 충정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진시황은 터지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분봉제와 군현제에 대한 열띤 토론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했다. 현재 다른 의견들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승상 이사李斯의 견해만 남아 있다. 이사는 군현제를 지지하는 발언과 함께 옛것을 답습하는 문제와 현실을 부정하는 문제를 함께 연관 지어 옛것을 답습하는 것은 바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난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제국의 통치에 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옛것을 따른다는 명분 아래 현행 정책에 반기를 드는 자들을 정권의 힘으로 적절히 제압해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여 황제가 되는’ 목적에 비로소 다다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분서라는 방법으로 각 나라의 역사서를 불태움으로써 과거 6국의 역사를 지워버리려고 했다. 즉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던 시詩, 서書, 제자백가들의 어록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백성들이 현재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들을 모두 없애고자 했다. 이를 위반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건의하였고,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얼마 후 이른바 갱유 사건이 벌어진다. 만년의 진시황은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장생불로長生不老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 당시 장생불로의 술법을 수련하고 선단이나 선약을 제련하는 이를 방사方士라고 불렀다. 진시황 28년, 두 번째로 천하 순행을 나선 진시황은 낭야대에서 생애 처음 푸른 바다를 보게 되었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3개월을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방사 서복徐福(서불徐巿)을 만나게 된다. 이후 많은 수의 방사가 유입되어 진시황의 기대에 부응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300명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시황이 찾아오라는 선약仙藥을 찾지 못하자, 황당한 이유를 들며 시간을 끌었다. 진나라는 법가를 신봉하는 법치국가로 실효성을 중시하였는데, 효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노생 등 방사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겁이 난 이들은 한꺼번에 도망가 버렸다. 이에 크게 노한 진시황은 이 사건을 감찰기구인 어사대에 넘겨 그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때 주모자급인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은 도망간 이후였고, 다른 방사나 문인, 잡기에 능한 이들이 잡혀 심문을 받았으며, 그 중 460여 명이 유죄 처리되어 함양 동부 외곽 지역에 생매장되었다. 이게 이른바 갱유 사건의 전말이다. 

이른바 분서와 갱유를 통해 진시황은 단기간 내에 신속하게 사상을 통일하고 여론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 분서갱유의 후폭풍은 더 심각했다. 이 사건들 이후 2,000년간 진시황은 잔혹하고 포악한 독재자라는 소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분서와 갱유의 결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려 한다.

분서는 무엇보다 우민화愚民化 정치를 선도하였다. 폭력을 통해 우민화 통치와 여론 장악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우민화 정책은 동서고금을 통해 칭찬을 받은 경우가 없다. 진시황은 박사라고 하는 고급 인재들이 자신의 군현제를 지지해 주기를 희망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치제도와 관련된 문제가 충돌하자, 진시황은 냉정해졌다. 그러면서 분서라는 장치로 모든 이들의 정치적 입장을 막아 버렸다. 분서는 문화 독재를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으나, 책과는 상관없는 항우와 유방에 의해 진은 멸망했다. 진정 사람의 계산은 하늘의 계산과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우민화정책을 폈으나, 백성들이 모두 제정신일 때 진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분서갱유 사건은 『사기』 <진시황본기>에 처음 등장한 이후 확대 재생산되었다. 하지만 기록을 잘 보면 유학자들을 잡은 것이 아니라, 방사들과 문학 방술사 등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처벌 방식에 있어서도 출토된 다량의 당시 법률문서를 보면 진나라에서는 생매장으로 사형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생매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악행으로 취급되었다. 생매장 방식은 예외적으로 전장에서만 등장하는데 이 역시도 세인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경우가 진나라 장군 백기가 장평대전에서 승리한 다음 포로 40만을 생매장한 것과 항우가 진나라 포로 20만을 생매장한 것이다. 그만큼 처형의 수단으로 생매장을 택했다는 기록은 당시 법률로 봤을 땐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주모자급은 전부 놓쳤고, 서복은 갱유사건 다음 해인 진시황 37년 다섯 번째 순행 길에서 진시황과 만나게 되지만, 이때 처벌은커녕 서복이 말한 여러 가지 장애 요소를 진시황이 직접 제거해 주는 선처까지 베풀어 주었다. 또한 진나라 이후에 등장한 한漢나라 초기 정치가인 가의賈誼의 『신서新書』와 한 문제에게 진나라의 실패를 언급하며 치국 방안을 조언하였던 가산賈山이 쓴 『지언至言』은 모두 진시황과 진나라의 실패 원인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인데, 여기에는 진시황의 여러 실정들 가운데 분서는 언급했지만 갱유에 대해서는 거론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갱유 사건은 아마도 한나라 때 유생들에 의해 조작 확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국시대 인물열전

상앙商鞅
상앙商鞅은 진 제국의 기초를 닦은 법치주의 개혁가이다. 위衛나라 왕실의 후손으로 위앙韋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으로 불렸다. 일찍부터 형명지학刑名之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공숙좌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위魏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진秦나라로 건너가서 10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상앙 변법이라 일컬어지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효공의 신임을 받고 농지개혁, 농업 및 양잠 중시, 군공 장려, 도량형 통일 및 군현제 실시를 골자로 하는 변법變法(법률을 고쳐 개혁을 시행함)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진나라는 전국 시대 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공적으로 열후에 봉해지고 상商을 봉토로 받아 성씨를 상商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법치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으며, 결국 그는 최대 지원자인 진효공이 죽자 반대파들로부터 거열형을 당했다.

소진蘇奏과 장의張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전국시대 말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橫策을 제창한 인물들이며,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한 동문으로 배움은 같았으나 서로 상반되는 외교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했다. 당시 천하는 통일을 주도하려는 진나라와 이를 막으려는 나머지 6국 사이에 첨예한 긴장 관계가 조성되고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정책 대결은 진나라와 다른 6국 사이의 대리 외교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합종책은 서쪽의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동쪽에 남북 방향으로 위치한 나머지 6국(연, 조, 제, 위, 한, 초)이 종적(남과 북)으로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정책이고, 연횡책은 동쪽의 6국들이 연합해 진나라에 대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나라는 6국을 따로 흩어 놓고 6국과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정책이다. 

소진은 진나라에 들어가 연횡책을 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연나라로 가서 합종책을 추진했다. 그는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6국을 설복하는데 성공하여 BCE 333년 남북으로 6국 합종에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의 합종책이 깨어질까 염려하던 소진은 계략을 써 장의를 진나라로 보내어 긴장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또한 소진이 있는 한 조나라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장의 덕분에 십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진이 중원으로 진출하려면 조나라를 치는 게 불가피했으므로 진은 조나라와 합종하고 있던 위나라와 제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를 공격했고, 합종책은 깨지고 말았다. 그 후 소진은 연나라의 관직에 있다가 다시 제나라에 출사했으나 대부의 미움을 사 암살당했다.

장의 역시 초나라로 유세를 떠났으나 자신의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벽옥으로 만든 의기儀器를 훔친 혐의를 받아 태형을 받고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계속했고 마침내 소진의 주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됐다. 진 혜문왕惠文王 때 재상에 오른 그는 6국을 설득하여 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했다. 그러나 혜문왕이 죽은 뒤 실각하여 위나라로 피신했으며 재상이 된지 1년 만에 죽었다.

왕전王翦과 왕분王賁
왕전王翦과 왕분王賁은 부자지간이며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진나라 명장들로 왕전은 백기白起, 염파廉頗, 이목李牧과 함께 전국시대 4대 명장으로 꼽힌다. 두 사람의 전략과 전술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의 활약으로 진나라는 통일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왕전은 BCE 229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하고 조왕을 사로잡았고, BCE 223년 남방의 강대국인 초나라를 멸하였다. 초나라로 출병하기 전 진시황은 왕전에게 얼마의 병력이 필요한지 자문을 구했다. 이때 그는 60만 명의 군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진시황은 20만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이신을 총사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초군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진시황은 왕전을 다시 불러 60만 대군을 주어 초나라를 치게 하였고, 마침내 초나라를 얻게 되었다. 이에 무성후武成候에 봉해졌다.

왕분은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함락시켰고 BCE 222년 요동을 공격하여 연왕 희를 사로잡았으며, 곧바로 제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제왕 건의 항복을 받아냈다.

몽념蒙恬
몽념蒙恬은 진나라 명장으로 아버지인 몽무와 함께 통일 진 제국을 만든 일등 공신이다. BCE 221년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웠다. BCE 214년 북방 흉노족을 격파하고 만리장성을 축성하면서 북쪽 변경을 방어하는 총사령이 되었다. 당시 진 제국 최강군 30만을 지휘하였다. 이때 진시황의 장자인 부소와 함께 상군에 주둔하였다. 진시황 사후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의 흉계로 자결하였다. 

이사李斯
이사李斯는 진나라의 대표적인 법가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초나라 상채上蔡에서 출생하였고 한비자와 함께 순자苟子에게 사사하여 법가 사상을 공부하였으나, 순자의 인의설仁義設에 회의를 느끼고 그를 떠나 진나라로 건너갔다. 그는 승상 여불위에게 발탁되어 낭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진시황이 축객령을 내려 다른 나라에서 온 인재들을 내쫓으려 했을 때 이에 반대하는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렸다. 이것으로 진시황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진시황의 통일 대업을 보좌하여 승상까지 지냈다.

6국을 통일한 후에는 군현제, 도량형과 문자 통일 등의 정책을 입안했으며, 분서와 갱유에 관여하였다. 이사는 진시황 사후 환관 조고에게 설득되어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장자인 부소와 장군 몽념을 자결케 했으나, 얼마 후 조고의 참소로 투옥되어 함양의 시장터에서 처형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권모술수에 능하고 시기심이 많아 동문인 한비자를 죽이기도 하였다. 

조고趙高
조고趙高는 진시황이 곁에 두고 부리던 환관으로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간신이다. 일류 서예가이면서 법률전문가였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행정처리 능력도 빼어난 인물이었다. 진시황이 순행 도중 병사하자, 승상 이사와 짜고 거짓 조서를 꾸며 부소와 몽념을 자결케 한 뒤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내정을 다스리는 중승상 자리에 올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이후 호해의 이복형제들을 죽이게 했으며 BCE 208년 호해에게 참소하여 이사를 처형시키고 승상이 되었다. 그의 권력에 대한 일화는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BCE 209년 전국에서 모반이 일어나는 혼란한 와중에 2세 호해를 모살하고 자영子嬰을 옹립하였으나, 자영의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노생盧生과 후생候生
노생盧生과 후생候生은 이른바 갱유坑儒의 도화선이 되었던 방사方士들이다. 말년에 불로불사의 신선사상에 도취되어 있던 진시황은 방사와 술사를 가까이 했는데, 그들 가운데 총애를 받던 인물들이다. 노생은 연나라 출신으로 진시황의 명을 받들고 고대의 선인仙人인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으러 떠났으며, 이듬해에는 바다로 들어가 선인을 찾는 작업을 벌이다 “진을 멸망시키는 자는 호胡이다”라는 예언이 적힌 지도를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BCE 212년 진시황의 폭정과 성정을 비판하고 자취를 감췄고, 이에 노한 진시황은 방사와 술사 460여 명을 생매장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사기 본기』 (정범진 외, 까치, 2014)
『사기 열전 상』 (정범진 외, 까치, 2002)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사계절, 2008)
『종횡무진 동양사』 (남경태, 그린비, 2013)
『진시황 강의』 (왕리췬, 홍순도, 홍광훈 역, 김영사, 2013)
『중국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진시황제』 (쓰루마 가즈유키, 김경호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4)
『진시황의 비밀』 (리카이위엔, 하병준 옮김, 시공사, 2010)
『제국의 탄생과 몰락』 (중국 CCTV원작, 김원동 편저, 퍼플카우, 2013)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주학연, 문성재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9)
『진시황 평전-위대한 폭군』 (천징, 김대환, 신창호 옮김, 미다스북스, 2002)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 (이인호, 천지인, 2007) 




주1.

 오래 전부터 진나라가 중국 한족이 아닌 북방 유목민족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해 중국인 주학연 박사의 저술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기 진 본기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가축을 방목하고 말을 기르는데 출중한 재능을 발휘하는 유목민족임을 강조하고 있다. 

진시황의 증조부인 소왕의 모친인 선태후가 의거왕과 사통했다는 기록을 들어 유목민족은 대체로 성性 문제에 관대했다는 점을 들었다. 사기 상군 열전에 따르면 상앙은 당시 진나라의 습속에서 부자가 한 방에서 지낸다는 표현으로 난륜을 완곡하게 비판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진나라 선조는 사기 진본기 서두에 나오듯이 새(鳥) 토템을 중시하는 민족이었고, 그들의 인명 자체도 융적의 족명을 인명으로 차용했다고 한다. 

또한 진나라의 성씨인 영嬴씨는 음가로 볼 때 안安씨이거나 김金씨라고 주장하면서 퉁구스계 김씨 씨족으로 여진족이며 언어는 몽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테라코타 기법으로 만들어진 진시황 병마용의 얼굴 유형은 퉁구스-여진계나 선비-몽골계 혈통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의미 있는 설이고 더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2.

 성씨姓氏는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표지로 성은 혈족을, 씨는 그 성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이다. 성이 먼저 나타나고 뒤에 씨의 구별이 나타난다. 인류의 뿌리 성姓은 태호 복희의 풍風가이나 전해오지 못하고 염제 신농의 강姜가가 성의 시원이다(자세한 내용은 도전道典 2편 37장 참조). 성姓은 글자의 의미로 볼 때, 여자(女)가 낳은 자식(子)들이라는 뜻이다.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혈족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였다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부계혈통을 나타내는 표식이 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는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를 씨라고 하는데 이런 구분은 하상주 3대와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부자 사이에도 성은 같지만 씨가 다른 경우가 생기고 성이 다른데도 씨는 같은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성이 같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씨가 같아도 성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주3.

 6대는 진효공, 진혜문왕, 진무왕, 진소왕, 그리고 진시황의 조부인 진 효문왕과 부친인 장양왕이다. 확실한 기초를 세운 이는 진 효공과 진 혜문왕 그리고 진 소왕이다. 진나라가 대외적으로 이룬 주요한 성과는 주로 이 세 왕의 통치시기에 있었다. 

주4.

 일각에서는 진시황이 장양왕 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속설이 있으며, 이는 역사상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가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애첩 조희趙姬를 자초에게 주었고, 달이 차서 낳은 아들이 바로 진왕 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그다지 믿을게 못 된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사학자이자 극작가인 궈모뤄郭沫若는 이러한 기록이 사기에만 보이고 전국책에는 실려 있지 않으며 사실 여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다른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야기 줄거리가 마치 똑같이 인쇄되어 나온 소설처럼 초나라 때 춘신군과 여환女環의 고사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과 사기 본문의 기록들이 서로 모순되어 신빙성과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주5.

 노애의 난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다. 당시 진왕 정이 등극한 후 진나라는 3대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즉 진왕 정의 양조모인 화양태후를 위시한 초나라계 외척 세력, 친조모인 하태후夏太后를 위시한 한나라계 외척 세력, 그리고 모후인 제태후帝太后의 조나라 세력이었다. 진왕 정 8년 배다른 동생인 장안군 성교의 난을 진압하면서 한나라계 외척 세력이 숙청되었고, 최대 세력인 초나라계는 이제 조나라계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에 제태후와 노애 등의 조나라계는 자기 방어 성격으로 화양태후와 여불위를 제거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주6.

 진나라는 왕조의 상징으로 오행 가운데 수덕水德을 채택했다. 주왕실을 대신한 왕조로 정통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황제는 토덕으로 이를 극剋한 하나라는 목덕으로, 상나라는 금덕, 주나라는 화덕으로 보고 상극 원리에 따라 나라의 제도를 정하였다. 계절로는 겨울, 숫자는 6, 색은 검은색으로 하여 모든 의복을 검게 하였고, 길이의 기준을 6으로 하였으며 황화를 덕수德水라고 개칭하고 수덕은 음형陰刑을 관리하기 때문에 엄격한 법집행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성(民)을 검수黔首라는 호칭으로 했는데 이는 검은 머리라는 뜻으로, 관리가 관을 쓸 때에 두발이 노출되는 것을 따왔다고 한다. 

주7.

 아방궁阿房宮 명은 아성阿城으로 진 혜문왕 때 건설하기 시작했다. 유지遺址는 현 서아시 삼교진 남쪽 거가장 일대에 위치한다. 기록에 따르면 시황제 35년 함양은 인구가 많고 선왕의 궁전은 좁기 때문에 위수 남쪽의 상림원에 궁전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2세 호해 원년인 BCE 209년 다시 아방궁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아방궁 축조 공정은 실제로는 아성, 전전前殿, 궐문의 세 부분으로 조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전전 유지는 서안시 서쪽 삼교진 남쪽으로, 동으로는 거가장에서 서로는 고성촌古城村에 이른다. 동서로 길이 1,300m, 남북으로 너비 500m, 총 면적 60여 만m²에 달한다. 아방궁에 대해서는 사치했다는 평이 있으나, 완전하게 지어지지 않은 채 불타 버렸기 때문에 그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상생칼럼 | 제사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자


강동범 / 교무녹사장, 본부도장

가을이 깊어서 겨울로 빠져들어 가는 11월 첫 주말 하루, 오랜만에 고향길에 나섰다. 아침 시간대였는데도, 고속도로에는 적지 않은 차들이 달리고 있다. 마치 추석이나 설 명절 귀향길 같다. 1시간여 달려서 도착한 고향마을에도 골목마다 자가용들이 주차되어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추수를 끝마치고 후손들이 모여 조상선령님들께 제사를 지낸다. 매년 돌아가신 날 집에서 지내는 제사와 달리 5대조 이상의 묘소墓所에서 지내기 때문에 묘사墓祀라고도 하고 시사時祀, 시제時祭라고도 한다. 가을은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는 원시반본의 계절이자, 한 해의 모든 농사를 결실해서 거두어들이는 완성의 계절이다. 이러한 가을의 정신에 따라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짓고 조상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것은 우리 민족의 가장 훌륭한 전통문화임에 틀림이 없다. 

상제님께서도 ‘사람이 조상에게서 몸을 받은 은혜로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지의 덕에 합하느니라(도전 2편 26장 10절)’ 하시며 조상 제사의 의미에 대해 소중한 말씀을 내려 주셨다. 부모님부터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까지 매년 기일이 되면 모시는 제사보다 5대조 이상의 조상님들을 함께 모시고 지내는 시제는 왠지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어릴 적 시제 때가 되면 동네 꼬마들이 시제 모시는 행렬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서 제사가 끝나면 저마다 한 움큼씩의 떡과 과일을 받아 들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학업과 직장 때문에 고향을 떠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 때 외에는 제사나 시제 때 조상님들을 찾아뵙지 못하다가, 40이 넘어서야 기제사와 시제에 참석하게 되었다. 올해는 묘소에서 지내지 않고, 종가 마당에서 제를 모셨다. 나로부터 9대조 조상님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다고 한다. 그분으로부터 크게 세 집으로 나뉘어서 자손줄이 뻗어 왔고, 그래서 세 집안이 돌아가면서 음식 준비를 맡아서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제사 때 모인 자손들은 멀게는 10촌이 넘는다. 아버지야 다들 잘 아시지만, 나에게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뵙지 못한 분들도 계신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그냥 지나쳐 버렸을 터이다. 함께 모여 조상님께 절을 올리면서 우리가 한 핏줄을 나눈 자손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사해동포가 한 형제니라”는 상제님 말씀도 뿌리 계통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한 천지부모의 자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번에는 어쩌다 내가 축문을 읽게 되어 9대조 할아버지부터 5대조 할아버지까지 한 분씩 휘諱자를 차례로 불러가며 기도를 올렸다. 이 순간이 바로 조상과 자손이 하나가 되는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단고기』에는 환웅천황께서 하늘의 정신을 처음으로 대각하여 인간에게 도덕을 베푸셨고,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하셨으며,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도 이때에 하늘에 계신 삼신 상제님께 대한 천제뿐만 아니라 조상 선령신을 모시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도 내려 주셨으리라 생각된다. 단군왕검께서는 ‘너를 낳으신 분은 부모요,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오직 너희 부모를 잘 공경하여야 능히 하느님(상제님)을 경배할 수 있느니라’(『단군세기』)고 하는 조칙을 내려주셨다. 단군조선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때, 집안에 자리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항아리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단군조선 말기 44세 구물단군께서는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제도를 정비하셨다. 어느 날 꿈에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내렸는데 그 첫 번째가 ‘너희는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도록 힘쓸지어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어 네 생명의 근본 뿌리(조상과 삼신상제님)에 보답하여라.’는 말씀이었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 시간에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제 제사도 우리 세대에나 모시지 다음 세대에는 없어지지 않을까 모르겠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 우선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제사에 참석한 분들의 면면이다. 전부 60, 70대 이상의 고령이다. 언제부터인가 당신님들부터 자식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제사 참석을 강요치 않으셨다. 그리고 제사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 주신 적도 없다. 왜 음식을 차리고 제를 올리는지, 어째서 일정한 절차로 제사를 모시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알고 지내는지 모르고 지내는지, 그냥 관습대로 후딱 끝내고 말아 버리는 느낌이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이라는 책에 보면 ‘엄숙하게 한 번 (조상님께서) 밥 먹을 시간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면 너무 시간 여유가 없다. 조상님께서 제대로 드시려면 엄청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드셔야 할 것 같다. 전반적으로 제사 문화가 형식으로 치우쳐 가는 느낌이다. 생각건대 이 또한 우리 문화, 역사 정신의 단절 때문이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에 역사 속에 살아 숨 쉬어 내려온 바르고 온전한 도리와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인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일제 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당장 눈앞에 닥친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한 시대를 살아왔다. 그나마 조상님께 드리는 제사는 끊이지 않게 붙들고 오신 것만 해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아버지가 그동안 읽어 오신 축문을 내가 받아 읽으면서, 문득 ‘이제는 우리가 제사 문화를 제대로 후손들에게 가르쳐 계승해야 될 때로구나, 그게 나의 사명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것이야말로 조상님, 부모님께 진정으로 효도하는 길이리라.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

서양철학사상 | 4.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의 전향


4.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의 전향


1) 중세에서 벌어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간의 논쟁

암흑기로 접어든 학문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케도니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이탈리아 반도 북쪽의 조그만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점차 세력을 키워 오랜 세월에 걸쳐 지중해 연안 주변 국가들을 무력으로 통합해 나갔다. 이리하여 로마는 여러 국가들의 색다른 문화를 수용 통합하여 과거 도시국가의 틀을 벗어나 대 제국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감행한 정복전쟁으로 인해 로마시민들은 절대자에 기대어 영혼의 안식처를 갈구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신앙지상주의가 싹터 주변으로 점점 확대되어 갔다. 신앙지상주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고 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0-220)의 사상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 합리주의 이성으로써 가톨릭 교리를 정당화하려는 모든 학설에 대해 반대한다. 오히려 철학을 이단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면서, 가톨릭의 교리가 이성에 불합리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역설한다. 그 역설은 그가 “신의 아들(예수 크리스트)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신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신의 아들은 묻혔다가 부활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말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기 로마제국의 위풍당당했던 위상은 콘스탄티누스(F. V. Constantinus, 274-337)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가톨릭교회가 공인(313년)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반면에 점점 확대되는 신앙지상주의는 로마제국의 안위를 지탱하는 정치세력을 더욱 위협하게 됐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북방에서 밀고 내려오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반달족의 침입은 로마제국을 빈사상태의 지경에까지 몰고 갔다. 

이민족의 색다른 문화가 로마로 유입되고,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되자 가톨릭교회의 세력은 급속히 확장되어 갔다. 이런 상황을 보다 긍정적으로 말해 보자면, 로마제국의 쇠퇴는 고대문화의 총체적인 보유자가 되려고 노력한 가톨릭교회가 북방의 게르만 민족을 개화시키면서 중세의 종교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서양 중세의 신권정치를 위한 신앙지상주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게 되는데, 그 중심에 교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가 등장하여 활동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에 극도의 타락한 삶을 살았다. 그는 특히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마니교(Manichaeism)의 교주가 될 뻔도 하였지만, 유대교를 독실하게 신앙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설득과 플로티노스의 사상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그는 플라톤 철학을 기반으로 『신국론』을 비롯하여 신학의 교리를 옹호하는 많은 글을 썼다. 430년 반달족이 침입하자 그는 피난을 마다하고 신학적 교리에 대한 믿음을 펼치기 위해 마지막 펜대를 든 채 글을 쓰면서 창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된다.

신앙지상주의에 힘입은 중세의 신권정치는 북방의 기성문화를 제압하는데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또한 중세 봉건주의 사회에서 발현되는 통일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한 몫을 하게 된다. 반면에 정치 사회 문화가 교회의 주도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학문의 꽃이라 불리는 철학, 문명의 추동력을 제공하는 수학과 과학, 인간생명의 안녕에 힘쓰는 의학 등은 당연히 종교의 엄격한 감독 하에 놓이게 된다. 역사가들이 중세를 학문의 암흑기라 부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
가톨릭교회는 초기부터 교부 철학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종교교리를 점차 확립해 나갔고, 이를 무기로 포교의 영역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9세기경에 이르자 가톨릭교회는 교리에 대한 철학적 합리성을 부여하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철학은 교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합리적인 교리를 가지고 이교도들을 설득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중시하게 되었고, 논리학은 수도원에 부속된 학교(schola)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철학은 학교의 교사에 의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이라 불린다. 서양 중세의 스콜라철학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스콜라철학은 본격적으로 에리우게나(Eriugena, 810-877)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종교는 진정한 철학이요, 진정한 철학은 진정한 종교이다.”는 주장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믿기만 해서는 안되고, 교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일이라는 얘기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인 객관성이 뒷받침돼야 올바른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계시의 진리는 마땅히 이성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합리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체계적으로 조직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신앙과 이성의 화합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런데 종교적인 교리와 학문적인 조직, 신학과 철학은 뭔가 불협화음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인 교리와 신앙이 신학의 중심 내용이라면, 학문적인 조직과 이성은 철학의 중심 내용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교리를 대변하면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신학이고, 학문적인 조직을 대변하면서 이성으로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양자의 관계는 화합하기 힘든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에, 서로 갈라서 대립해 있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화합하는 문제가 곧 스콜라철학의 전개에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교부시대에 이성은 단지 신성한 교회를 이단적인 사상으로부터 지키거나 신앙이 없는 자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스콜라철학에 들어오면서 이성은 신앙의 내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삼는다. 그러다보니 스콜라철학은 초기부터 교리의 해석과 합리화에 따른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성을 통한 교리의 조직에 많은 역할을 수행했던 스콜라철학자는 안셀무스(St. Anselmus, 1033-1109)이다. 그를 스콜라철학의 비조(鼻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신앙이 이성의 활동에 당연히 앞서 있다고 보았고, 이성이 신앙의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말은 이성의 논리로 탐구하는 철학이 종교적인 신앙이 요구하는 대로 신학적 교리를 영원한 반석이 되도록 공고히 해야 함을 뜻한다.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은 이러한 사고를 기반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신학의 시녀가 철학이라면, 신학은 주主가 되고 철학은 종從이 된다. 신앙의 교리가 일차적인 주主가 된다면 이성이 탐구하는 철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종이 된다. 신앙적 교리의 주인은 신이고 교리 조직의 주인은 이성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 간에는 주종관계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종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세 암흑기에는 이성에 의한 철학적 탐구든 과학적 탐구든 신앙의 교리에 어긋나는 탐구는 절대 금물이었던 것이다. 

보편논쟁普遍論爭이 대두한 까닭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道典』2:118:2-4)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진정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죽었을 때 생명을 구성했던 육신(에너지 덩어리)이 흩어져 버림과 동시에 인간은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 실재가 되는 것은 혼魂이고, 그 혼은 죽어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천상)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거기로 돌아간 혼은 개별적인 것일까 보편적인 것일까? 만일에 실재하는 혼이 보편적이라면 거기로 돌아간 인간의 혼은 전적으로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크라테스의 혼과 홍길동의 혼은 서로 구분이 될 수 없는 동일한 ‘하나’가 되고 만다. 그러나 개별적인 영혼의 구원을 전제하는 가톨릭교회는 보편적인 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혼이 실재해야 함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위 보편자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가의 논쟁은 서양 중세 스콜라철학의 중심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앙과 이성 간의 관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스콜라철학의 논구는 소위 보편논쟁普遍論爭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런데 보편논쟁의 발단은 원초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으로 보편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은 로마의 마지막 철학자 보에티우스(M.S. Boethius, 480-524)이다. 그는 중세에다 풍부한 사상과 많은 문제들을 제공해 준 인물이다. 특히 그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전부 알려줄 요량으로 주요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한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2-304)의 서론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요컨대 인간의 실체, 본질, 덕 선, 유, 종 등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과 하양, 뜨거움 등과 같은 다른 서술 범주의 개념들인데, 과연 이들 보편개념이 실재하는가 아니면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가의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보편논쟁이란 무엇인가?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편자와 개별자(개별적인 사물)를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우선 서로 다른 ‘개별적인 사람’을 여러 번 관찰하고 비교하여 특수한 성질들은 버리고 공통적인 성질들만 추상하여 비물질적인 보편개념을 이끌어낸다. 즉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 ‘사람’은 보편 개념이다. 반면에 ‘이 사람(소크라테스)’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것으로 오직 ‘단 한사람’에게만 적용이 되는 물질적인 개별개념이다. 

보편논쟁은 보편자와 개별자 간에 무엇이 실재하는가의 주장을 놓고 벌이는 논쟁이다. 이는 보편자만이 실재하고 개별자는 보편자에 참여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플라톤 철학의 진영과 개별자만이 실재하고 보편자는 개별적인 사물로부터 추상해 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진영 간에 벌어지는 대립이라 볼 수 있다. 

보편자의 문제는 무엇 때문에 그리 중요했던 것일까?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을 추상적인 보편자라고 하느냐 아니면 구체적인 개별자라고 하느냐에 따라서 교리에 대한 믿음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스콜라철학에서 보편논쟁을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삼았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보편적 개념들, 즉 절대적인 ‘신의 존재’, 구원을 받는 ‘인간의 영혼’, 신성한 가톨릭 ‘교회의 이념’,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이 되는 ‘원죄’ 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종교적인 믿음의 향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콜라철학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거리였던 것이다.

보편자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을 지적해 보자. ‘인간의 영혼’이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여기에서 구원을 받는 주체는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는 ‘공통적인 영혼’ 아니면 오직 자신에게만 적용이 되는 ‘개별적인 영혼’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보편자만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개별적인 영혼에게 내려주는 은총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이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고유한 영혼은 없고 오직 보편적인 영혼만이 실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개별적인 영혼의 구원은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개별자(개별적 영혼)가 실재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진영에서 제기할 수 있는 주장이다.

신성한 가톨릭 ‘교회의 이념’의 문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신의 권역에 속하는 신성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교회가 있음을 보듯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교회다. 개별적인 교회에 참석해서 신에게 경배도 드리고 참회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적인 교회는 신성하지도 않고 영원히 실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성한 가톨릭 ‘교회의 이념’이 신성하고 신의 권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보편자로서 실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 철학의 진영에서 제기할 수 있는 주장이다.

보편논쟁의 출발은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진행되다가 절충론折衷論으로 끝나게 된다. 우선 안셀무스는 에리우게나의 사상에 동조하면서 플라톤 진영에 서서 보편자만이 실재한다는 극단적인 실재론(realism)을 전개해 간다. 여기에 대립하여 맞선 스콜라철학자는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1124)다. 특히 둔스 스코투스(D. Scotus, 1266-1308)와 오캄(W. Ockham, 1280-1349)은 보편자란 단순히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극단적인 유명론(nominalism)을 내세운다. 결국 보편논쟁은 후에 아벨라르두스(P. Abelardus, 1079-1142)의 절충론(온건 실재론)이 등장함으로써 일단락되고,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이르러서 종합 정리된다. 

극단적인 실재론의 입장
스콜라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에리우게나는 종교와 철학,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주장한다. 절대적인 신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으로 유일한 실재이며, 전적으로 선善한 존재이다. 모든 만물이 신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에리우게나는 신이 근원의 본질이요 최고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들 중의 이데아가 최고 보편자로 실재한다는 극단적인 실재론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셀무스는 굳은 신앙에 기초를 두고서 이성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입장에서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신앙은 모든 이해에 앞서 있고, 철학이 추구하는 지혜는 신앙으로 가져와질 때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 그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대한 믿음을 플라톤의 사상을 동원하여 학문적인 진리로 정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성한 가톨릭교회, 즉 보편적인 교회가 신도들 개개인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특수한 개별적인 교회에 앞서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보편적인 교회와 개별적인 교회들의 관계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상의 구체적인 개별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라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기반으로 해서 그는 개별적인 인간이 보편적인 교회에 속할 때에만 참된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은 실재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것에 앞서 있다.”는 논지에 따라 안셀무스는 신성한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가장 큰 보편자로서의 절대적인 신이 실재함을 논증한다. 보편자가 참되게 실재한다는 입장에서 그는 보편적인 인간의 실재,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죄의 실재, 개별적인 인간의 속죄와 크리스트의 구원을 앞세운 가톨릭교회의 당위성을 주장하게 된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안셀무스는 최고의 보편자인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최고의 신이 실재한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노력이었느냐 하면, 신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사색에 열중한 나머지 그는 식사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신에 대한 논증을 찾아 헤맨 나머지 결국 방법을 발견해 냈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은 두 방식으로 논의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현상의 사물을 통한 경험적인 증명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이성을 통한 존재론적 논증이다.

① 신에 대한 경험론적 증명 :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선善하거나 선하지 않은 것들이 실제로 무수히 많다. 이러한 것들은 생멸生滅의 노정에 있다. 그러나 경험에 주어지는 것들은 ‘자체로 존재’하거나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어떤 ‘원인이 되는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하거나 선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결과로 존재하거나 선한 것보다 ‘더 완전하게 존재하거나, 더 선한 것들이다.’ 

만일 이성의 사유가 그 원인에 원인을 찾아서 무한히 소급해 가다보면, 더 이상 소급해 갈 수 없는 지점, 즉 궁극의 완전하고 선한 존재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더 이상의 원인이 없는 가장 완전하고 선한 존재’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자체로 독립적이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나, 다른 것들이 모두 이것에 의존해서 존재하거나 선하게 되는 최초의 원인으로 ‘절대적으로 선한 하나의 존재’이다. 

최고의 원인으로 가장 완전하고 선한 하나의 존재는, 내적으로 아무런 정도(degree)를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성 소멸의 도정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완전히 선한 존재로 절대적인 신神이라고 말한다.

②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 :

안셀무스는 경험적인 사물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있다고 한다. 논증과정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이 ‘존재는 불생불멸하는 일자’임을 논증한 방식, 소위 불합리에로의 환원이라 불리는 귀류법(歸謬法)의 방식을 활용한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만일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되면, 결국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완전한 신은 실재할 수밖에 없다는 논증이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존재론적 논증 혹은 본체론적 논증이라 불리는데, 귀류법에 의한 논증과정은 다음과 같다 : 

“더 이상 크다고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id quo maius cogitary non potest)”, 즉 ‘가장 완전한 인격자’는 실재한다. 만일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성에 내재하는 ‘가장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이 우리의 지성 안에 관념으로만 실재하는 것보다 지성 밖에 실제로 실재하는 것이 ‘더 완전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가장 완전한 인격자’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제로 관념 밖에 더 완전한 인격자의 실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인격자’인 신은 우리의 관념 속에 뿐만 아니라 관념 밖에 실제로도 존재한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은 당시 수도사인 고닐로(Gaunilo)에 의해 논박을 받았다. 고닐로에 따르면, 우리의 지성 안에 ‘가장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성 밖에 ‘실제로’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성 안에 ‘가장 완전한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어딘가에 실제로 실재한다는 것은 따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셀무스의 가장 완전한 인격자로서의 신의 존재증명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셀무스가 생각한 ‘가장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과 고닐로가 말한 ‘완전한 세계’에 대한 관념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각기 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안셀무스는 관념을 실재론적인 입장에서 사용했고, 고닐로는 관념을 관념론적인 입장에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의 주장에 대한 고닐로의 논박은 결정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신의 존재에 대한 안셀무스의 논증은 후에 삼각형의 존재와 그 본질이 분리될 수 없듯이, 신의 존재와 완전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한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신 존재증명, “원인이 결과보다 더 크다.”고 말한 라이프니쯔(G.W. Leibniz,1646-1716)의 우주론적 신 존재증명, “신에게 존재의 질을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헤겔(G. Hegel, 1770-1831)의 신 존재 증명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된다. 

극단적인 유명론의 입장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주장에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즉 개별적인 존재가 실체라는 사상이 널리 소개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세기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슬람 세력의 영향권에 있던 스페인,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프리카 북부 등지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특히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이슬람 철학자 아비켄나(Avicenna, 980-1037)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무장하여 대단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세기에 접어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스콜라철학에 도입되어 알려지면서 유명론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편자는 단순히 지성이 창출한 개념(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론을 제기한 스콜라철학자는 로스켈리누스이다. 그에 따르면 “보편은 이름이고 보편자는 실제적인 사물 다음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실재하는 것들은 모두 개별자들이다. 보에티우스가 지적했듯이, ‘하양’과 같은 보편자는 입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공기의 숨과 같은 단순한 말이라는 얘기다. 현실이란 오직 개별적인 사물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것이고, 보편적인 개념이란 인간이 창출해 낸 ‘이름’이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유명론은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주의(Thomism)에 반기를 들고 등장하는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캄에 이르러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보편자가 개별적 사물에 앞선다(universalia ante res)”고 주장한 안셀무스의 실재론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유명론의 주장에 의하면, 보편개념이란 사물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물 안에 존재성을 갖는 것도 아니며, 단지 인식 주관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기호나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적인 사물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오캄은 지식이란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지각에 기초를 두고 있고, 개별적인 경험으로 들어올 수 없는 ‘보편적인 존재는 깎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들 때문에 오캄은 후에 ‘오캄의 면도날’이란 애칭이 붙었다.

심지어 오캄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바늘 끝에서 춤을 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말을 던짐으로써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야유했다는 속설도 있다. 오캄은 왜 그런 야유를 보냈을까? 오캄은, 만일 보편자만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개별적인 수많은 인간이 구원을 받아 천상에 올라갔을 때, 거기에 보편적인 ‘하나의 인간 영혼’만이 실재하고 개별적인 인간의 고유한 영혼이란 찾아볼 수 없음을 꼬집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빤히 경험하는 개별적인 영혼의 차별은 보편적인 영혼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인간의 구원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최고의 보편자가 되는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의 존재, 보편적인 신성한 교회의 이념, 원초적으로 아담이 지음으로써 개별적인 인간에게 지워진 보편적인 원죄의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론이 득세하게 됐다. 이성으로써 신앙을 합리화하려는 스콜라철학의 일차적인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제는 신성한 교회의 권위도 무너졌다. 결국 스콜라철학이 해체되면서 인간은 외면적인 신앙에 따르는 것보다 각자 자신의 내면에 고요하게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신비주의가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후에 루터의 종교개혁과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온건실재론과 그 종합
로스켈리누스가 대표하는 유명론과 안셀무스가 대표하는 실재론 두 진영 간의 대립을 어떻게 해결해야 바람직한가의 문제가 제기되자, 양자의 대립을 종합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그것은 플라톤의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도 일부 수용하고 극단적인 유명론의 입장도 일부 수용하여 절충한 온건실재론이다. 온건실재론은 개별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논의되는 질료(hyle)와 형상(form)의 내재를 앞세운다. 아벨라르두스(P. Abelard, 1079-1142)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온건 실재론의 중심에 있다.

아벨라르두스는 개별자가 실재한다고 확고하게 주장하면서도 보편적인 개념은 개별자에 앞서 존재하거나 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식은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개별적인 사물에 관계해서만 보편자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생전 보지도 못하고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은 외계인外界人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 보자. 생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외계인에 대한 어떤 표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실제로 외계인을 직접 보기라도 한다면, 그러한 표상은 잘못된 것이거나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온건실재론은 감각될 수 없는 보편자가 지식의 참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개별자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보편자가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은 아니다. 보편개념이 개별자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사람은 ‘사람’이라는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불려진 것이 아니라, ‘사람임’이라는 보편자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 불려진다는 얘기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는 명제가 있다면, ‘사람’이라는 보편개념은 인간의 지성이 추상해낸 것이지만, 이러한 추상 개념은 곧 그 개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소크라테스’의 개별자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건실재론에 따르면, 보편자가 경험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은 그것이 사물 ‘안에만’ 있는 것이지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편개념은 사물에 ‘앞서서’, 즉 신적 정신 속에 자리 잡은 피조물의 원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반면에 인간 지성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보편개념은 사물보다 ‘뒤에’, 즉 지성이 사물과의 일치를 통해서 비로소 창출될 수 있는 개념의 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실재론과 유명론을 종합한다. 그 방식은 아벨라르두스의 입장과 거의 유사하다. 그는 이성의 지식과 신앙의 일치를 주장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만으로는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자와 개별적인 사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관계를 활용하는데, 형상은 신의 지혜에 의해서 주어지고, 이것이 질료에 가해져서 개별적인 것들이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온건실재론의 입장에서 그는 보편적인 형상이 실재하고 개별적인 사물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2) 형이상학적 유심론의 대표자 라이프니쯔

신앙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의 이성
중세의 신권중심 사회질서 체제는 종교개혁의 회오리가 일자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 신앙의 중심교리인 구원의 문제가 최우선의 과제로 떠오르면서 이제는 보편적인 교회의 관심사가 아닌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시대적 요청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는 중세 교회의 철학적인 지주였던 스콜라철학의 붕괴를 초래했으며,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의 실재성이 강조된다.

특히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인문개벽이라 부를만한 일종의 사상적 정신운동이 일어난다. 소위 문예부흥이라 통칭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그것이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문화와 로마문화를 재인식하여 새롭게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 근대의 세계를 열어주는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고 본다. 

르네상스의 암묵적 의미는 중세의 신 중심 사회에서 신과 믿음[信仰]의 시종侍從에 불과했던 인간과 이성의 권위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신의 섭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고, 이성 또한 교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거나 비판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개인주의적인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새 역사 전개의 주체가 되었으며, 이성은 교리에 대한 믿음에 위배될 수 있는 학문적 탐구의 영역으로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로부터 르네상스는 휴머니스트의 부활이니 이성에 토대를 둔 인문주의 부활이니 하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근대가 개벽되도록 촉진한 역사적인 배경은 과학혁명기라 할 수 있는 자연과학의 진보가 한몫을 차지한다. 신앙의 교리와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이룩한 괄목할 만한 자연과학의 성과는 종교로부터 자연의 분리를 더욱 촉진하였고, 실질적으로 이성과 신앙의 분리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로써 이성은 새 시대의 학문적 확신과 뚜렷한 전망에 희망을 품었으며, 순수 이성으로 사유하여 탐구하는 수학은 자연과학적 지식의 짜임새를 구성하는 데에 핵심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이성을 통한 수학적 지식이 갖고 있는 확실성의 방법은 철학적 사유의 진리탐구에서도 확고한 표본이 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 새롭게 출현하는 근대의 철학은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와 대륙의 합리주의(rationalism)로 갈라진다. 합리주의는 원래 감성이 아닌 냉철한 이성理性(ratio)을 사유의 규준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합리주의는 가톨릭 종교가 내세우는 초자연주의나 초합리주의가 아닌 자연에 있어서 인간존재의 이성을 중시하거나, 인식능력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눠볼 때 이성만이 확고한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신념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합리주의는 필연적인 사유로부터 보편타당한 이성적 진리의 탐구를 목적으로 삼는데, 사실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항상 ‘꼭 그러하다’는 필연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에 충족될 수 있는 진리는 경험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필연적인 사유에서 찾아진다.

합리주의가 내세우는 이성은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하고 특수한 능력을 의미한다. 이성은 인간이 성장해가면서 발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천부적으로 타고난,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감각능력과 전적으로 다른 인식능력이라는 얘기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특히 파르메니데스, 퓌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성은 로고스(Logos)요, 우주의 법칙으로서 유한적인 인간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인식능력, 신적인 능력이다.
근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절대적인 존재, 즉 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절대적인 권위를 이성의 힘에 두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원천으로 보고, 이성에 의해서만 참된 진리파악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논리적이며 가장 확실하고 명확한 지식을 제공하는 수학적인 탐구가 학문의 이상이라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합리주의자들은 대부분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였다. 그 이유는 수학과 철학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유를 전개한 대표적인 합리주의 철학자는 르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를 필두로 하여 베네딕트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 빌헬름 라이프니쯔(G.W. Leibniz,1646-1716)를 꼽을 수 있다.

대륙의 3대 합리주의자들
시대적으로 볼 때,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의 근대가 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맨 먼저 학문사의 무대에 프랑스 출신 데카르트가 등장한다. 그는 당대의 최고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 

유럽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나폴레옹은 “미래란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세기의 늦잠꾸러기였다는 사실은 나폴레옹의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철학과 수학 분야에 남겨놓은 그의 탁월한 업적은 늦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학자로서의 그는 복잡하게 기술한 유클리드 기하학 체계를 간명하게 기술하는 대수학과 해석 기하학을 창시했고, 철학자로서의 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려질 정도로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이라는 새로운 철학의 길을 개척했다.

데카르트는 학창시절에 스콜라철학의 형이상하과 논리학을 공부하면서 당시의 시대정신을 사로잡은 자연과학과 수학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사색에 몰두했다. 자연과학에서 괄목할만한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나오면서 참된 진리라고 여겼던 것이 내일에는 거짓이 됨을 개탄한 그는 가장 엄밀한 수학적 사유방법을 철학에 적용하여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를 정립할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근대 합리주의 거장 데카르트는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냉철한 분별력을 가진 이성에 절대적인 신뢰를 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사유하는 이성야말로 진정한 실체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사유실체 외에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의 존재로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extendum) 실체를 내세운다. 사유실체와 연장실체는 모두 ‘유한실체’들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무한실체’를 주장한다.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무한실체로서 신神이다. 그리고 무한실체와 유한실체 외에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은 모두 실체의 양태(mode)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속성이 서로 다른 사유실체와 연장실체로 엄격히 구분해 놓은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심신이원론이란 마음(정신)과 몸(신체)는 본질적으로 근원이 다른 것임을 전제함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심신이원론에는 몸 따로 마음 따로 각기 작동한다는 위험이 따른다.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피노자가 등장하게 된다.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한 스피노자는 유태계의 혈통을 가진 네덜란드 출신으로 특히 윤리학을 기하학적 공리체계로 저술한 고독한 철학자였다.

스피노자는 유한자(정신과 물질)가 아닌 무한자로서의 “일자”만이 궁극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무한한 실체는 데카르트가 말한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특성, 즉 무한한 연장과 무한한 사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한하게 존재하는 개별적인 모든 것들은 이 두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사유와 연장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다. 오직 사유와 연장을 통해 파악되는 하나의 무한한 실체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한 몸체의 두 측면으로 구분되듯이 말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대안이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오직 하나의 신만이 실체이다. 그러나 “신즉 자연”이다. 그는 우주만물이란 무한한 신이 펼치는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생산되는 자연(natura naturata)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주장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으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되는데, 후에 범신론을 바탕에 깔고서 현대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화이트헤드의 범재신론(panentheism)이 등장하게 된다.

문제는 실체가 하나(신즉자연神卽自然) 밖에 없다면, 양태들로 등장하는 개별적인 것들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신의 속성인 연장과 정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개별적인 ‘나’의 존재와 ‘너’의 존재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쯔의 형이상학적 단자론이 등장한다.

라이프니쯔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다. 그는 신이 창조할 수 있는 최선의 존재가 우주라고 여기고, 철학과 수학, 물리학 및 공학에 관련된 여러 학문분야를 탐구하여 획기적인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수학과 철학에 관련해서 남겨놓은 학문의 업적은 근대의 지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학자로서의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의 역리에 등장하는 ‘무한분할’의 문제를 연구하다가 오늘날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분微分과 적분積分을 창시하였고, 동양철학에서 우주론적 체계를 담고 있는 「낙서洛書」의 근본 원리가 되는 음양陰陽 논리에 많은 영향을 받아 최초로 이진법의 수數 계산방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그는 기계적인 계산기 분야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하였는데, 수학자 파스칼(Pascal Blaise, 1623-1662)의 계산기에 자동 곱셈과 나눗셈 기능을 추가했고, 톱니바퀴 식의 기계적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철학자로서의 그는 학창시절에 철학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스콜라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가 다른 사유의 길을 가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유는 이전에 발생한 여러 가지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자신만의 통일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데로 나갔다. 특히 그는 데카르트의 물질관과 가상디(Pierre Gassendi, 1592-1655)의 원자론 종합, 기계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의 조화를 시도한 예정조화설,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문제, 합리적인 이성론과 경험적인 감성론 등을 조화하는 글을 중점적으로 썼던 것이다. 「모나드론」, 「형이상학 서설」 「인간 오성론」 등은 대표적인 저술로 꼽힌다.

형이상학적 단자론(monadology)
라이프니쯔는 “신즉 자연”을 주장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반기를 든다. 그럼에도 스피노자에게서 개별적인 사물이 비록 양태이지만 스스로 활동하는 것임을 파악한 라이프니쯔는 궁극의 실체를 본질적으로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힘으로 상정한다. 그에 의하면 “실체는 활동할 수 있는 존재”인데, 이것이 바로 “단자(monad)”이다.

그는 단자를 불멸의 실체로 보고 단자 형이상학을 전개해 나간다. 단자란 무엇인가? 단자 개념은 원래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가분적인 ‘하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monas”에서 유래하는데, 근원의 단일한 개체를 의미한다. 여기로부터 라이프니쯔는 단자를 궁극의 불가분적인 실체로서, 근원적으로 활동하는 힘을 가진 비물질적인 정신, 즉 무수하게 실재하는 정신적 개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유심론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라 볼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단자의 본질적인 특성을 요약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단자는 자체로 단일한 실재이기 때문에 외부의 어떠한 영향으로부터도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실체이다. 결코 쪼개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보면 단자는 원자(atom)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니쯔는 단자가 ‘자연의 진정한 원자’라 한다. 그럼에도 단자는 물질적인 원자가 결코 아니다. 물질적인 원자는 양적인 크기와 차이가 있으나 질적인 차이가 없다. 반면에 단자는 질적인 차이가 있으나 전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적인 크기가 없다. 만일 단자가 어떤 공간적인 크기를 갖는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쪼개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자는 어떠한 크기도 갖지 않은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실재이다. 공간적인 크기가 없다는 의미에서 단자는 “형이상학적인 점(point metaphysique)”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단자는 자체로 생생하게 활동하는 능동적인 힘을 갖고 있는 정신적인 “엔텔레키Entelechie”이다. 엔텔레키란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도입한 실재개념, 즉 “엔텔레케이아entelechei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자신 안에 생성변화의 ‘운동인’을 포함하는 제1실체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보자면, 엔텔레키는 운동인으로서의 목적인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단자는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근원의 정신적인 실체가 되는 셈이다.

셋째, 정신적인 실체인 단자는 본질적인 작용으로 “지각(perception)”과 “욕구(appetition)”를 가진다. 지각은 하나인 단자가 무한히 많은 것들을 표상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적으로 하나이면서 일체의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라이프니쯔는 단자를 그러한 정신으로 간주하여 자체로 하나이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표상할 수 있는 “우주의 산 거울”로 본 것이다. 이러한 단자는 또한 욕구를 가지는데, 욕구는 지각을 통한 보다 선명한 표상에로 향하는 경향 내지는 노력을 의미한다.

넷째, 단자는 불가분적이고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실체이다. 그래서 단자는 다른 것이 침투하거나 들어갈 수 있는 어떠한 창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문제는 정신적인 의미의 단자가 상호 대등한 실체이면서 서로 포섭하고 포섭되는 관계가 성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하나의 사물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무한하게 실재하는 단자가 전체적으로 하나에 포섭돼야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개인의 사람은 무수한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단자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라이프니쯔는, 마치 원의 중심점이 무수하게 많은 직경을 포함하고 있듯이, 다른 여러 무리들을 지배하는 중심적인 단자들도 있다고 주장한다. 중심적인 단자는 우월한 단자들로서 무한하게 많은 단자들의 집단을 대표하여 단자들의 통일성을 이룩해주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체에 포섭된 부분의 단자들은 지배적인 단자에 끼어들 수 있게 되고, 모든 단자들은 우주를 반영하면서 전체적인 하나에 저절로 종속되어 실재할 수 있게 된다.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단자들
자체로 능동적인 힘을 갖고 있는 무수하게 많은 단자는 생명이 없는 무기물과 생명이 있는 유기물을 구성한다. 그 구성은 대략적으로 세 단계로 차등을 두어 구분해볼 수 있다. 그것은 단자군의 욕구와 지각작용의 정도에 따라 최하위에 있는 것,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 최상위에 있는 것들이다. 

무기물과 식물들은 최하위에 있는 단자들로 구성된다. 이들 단자들은 무의식적이거나 혼란된 지각을 가지는 것들이다. 감각기관을 가진 동물들은 중간 단계에 속하는 단자들로 구성된다. 중간단계의 단자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감각적인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동물들은 기억하는 의식적 지각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최상의 단자가 있는데, 인간의 이성적인 정신과 같은 생생한 지각을 가지는 것들이다.

이로부터 볼 때 단자들은 낮은 단계의 것일수록 무의식적이고 비활동적이지만, 높은 단계의 단자일수록 보다 생생하게 의식하고 더 활동적이다. 바위와 같은 물질은 잠자는 정신과 같이 무의식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고, 인간과 같은 동물은 정신이 생생하게 의식하므로 보다 명료한 지각을 가진다. 그래서 모든 단자들은 우주를 반영하면서 전체에 포섭되어 실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실재는 그 성질 속에 자신의 활동의 연속률과 그리고 이미 일어났던 것의 전부와 앞으로 일어날 것의 전부가 함유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주자연에는 중복도 비약도 없는 단일한 정신의 실재들이지만, 생명이 없는 물체로부터 동물에로, 동물에서 이성적인 정신으로, 더 아나가 피조된 단자들을 창조한 원초적인 단자인 신에 이르기까지 지각의 질적인 차이에 의해 연속적이다. 따라서 자연 전체는 무한히 기묘한 예술 작품이요, 전체적인 조화로 완벽하게 짜여진 정신적인 체계일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쯔의 입장이다.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을까?
자연세계의 모든 것들은 완전히 창이 없는 독립적인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라이프니쯔는 단자들 상호 간에는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조화와 통일이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그는 “예정조화설(harmonie preetablie)”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정조화설에 의하면, 생생하게 활동하는 역동성을 가진 단자들은 비록 상호 독립적으로 자신을 전개해나간다 하더라도 결코 자의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신이 단자를 창조함에 있어서 원래 예정된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안배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자들 상호 간에 밀접한 교섭이 없을지라도, 마치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자들은 조화통일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전개해 나간다.

우주자연의 모든 것이 신의 안배에 따라 계획된 것이라면 예정조화설은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자유와 기계적인 필연성이 잘 조화되고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쯔의 주장이다. 이는 마치 신체와 정신이 각기 고유한 본질에 따라 운용되는데, 신체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만 정신은 의지에 따른 목적을 향해 활동한다는 이치와 같다. 정신이 자유롭게 의지하는 대로 신체가 기계적으로 움직이더라도 원래 신에 의해 상호 일치하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양자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르면서도 조화통일을 이루어 작동하도록 정해져 있다. 

라이프니쯔에 의하면, 우주자연의 전체는 가장 훌륭하고 자유로우며, 최고로 좋은 세계이다. 왜냐하면 우주자연의 전체는 완전히 선한 신에 의해 완전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 내부에 부조화나 악이 존재한다면 이는 자체로 불완전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완전함이나 선함에 기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즉 악은 전체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거나 보다 큰 악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있다는 얘기다. 만일 세계 내부에 악이 전혀 없다면,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평가될 수 없다. 부분적인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선한 내용이 풍요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쪽의 악은 전체의 선을 위한 것이요, 한쪽의 불완전은 전체의 완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조화나 악은 전체의 조화나 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 다음 글 제목
3.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의 전향
3) 주관적 관념론자 버클리
4) 절대적 관념론자 헤겔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