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이와 복남이가 알려주는 천제와 제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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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칼럼 | 미륵반가사유상은 내 영감의 원천

김택상 / 교무녹사장, 본부도장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9월 25일부터 11월 15일까지 세계의 불상佛像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기획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라는 제목 아래 인도의 불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의 미륵반가사유상 2점(국보 78호, 83호)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상제님께서는 “내가 미륵이니라.”『도전』 2:66 하신 바, 나는 관심을 갖고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먼저 인도의 불상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불상들이 거의 다 머리에 큰 상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상투는 중국으로 이어지고 역시나 우리나라의 불상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상투를 튼 불상들은 우리나라에 불상이 수입되면서 만들어졌다고 여기겠지만, 오히려 상투는 인도불상들에서 더 확연하고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투는 상두上斗에서 온 말로 내가 하늘의 북두칠성과 항상 연결돼 있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있는 인류의 원형문화 생활양식이다. 이에 따르면 부처는 상투의 정신처럼 바로 하늘의 정신을 세상에 그대로 실현하고자 지극한 서원을 세우고 나서 이룩한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신교의 3도 중에서 바로 전도佺道(원형 불교)의 모습이다.

이번 기획전시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었다. 두 가지 미륵반가사유상은 다른 작품들과 급을 달리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작품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진한 울림이 전해왔다. 그것은 단지 제작기술의 우수성에 대한 놀라움에서만 온 것은 아니다. 두 분의 미륵부처님이 취하고 있는 자세와 표정은 보는 이에게 오묘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압권은 두 손가락을 오른쪽 뺨에 대고 고요히 생각하는 자태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에서 무한한 영감을 느꼈으리라. 슬픈 듯하면서도 미소 짓고 있는 표정에서는 우주를 다 담을 수 있는 웅장한 심법과 함께 중생을 보듬어주는 세심하고 섬세한 마음도 느껴진다. 필자는 앞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옆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올려다보고 하면서 그 자리를 차마 뜨지 못하였다. 세속을 벗어나 초탈해 있는가 하면 세상의 중심에서 치열히 노력하고 고뇌하는 모습도 보인다. 불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운은 나를 계속 사로잡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계속되는 여운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생각을 끊고 끊어서 무념무상의 상태에 나아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번뇌와 망상,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의 경지에 이른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부처의 경지에 있으면서도 손을 뺨에 가져다 대고 골똘히 열중하고 있는 생각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생각이 마음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고요한 표정을 살펴보면 진정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금 반가사유상의 생각이란 어떤 종류의 생각일까? 알 듯 모를 듯 쉽게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생을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당연히 잘된 생각도 있고 잘못된 생각도 있다. 과연 생각을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려줄 사람이 있을까? 미륵반가사유상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일말의 답을 던져주는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을 초탈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매이지 않은 그런 경지에서의 완벽한 몰입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집착이 아닌 집중執中을 보여주는 듯하다. 미륵불이신 상제님께서는 도전 8편 7장에서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느니라. 무엇을 하나 배워도 끝이 나도록 배워라.”라는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바로 이 경계를 반가사유상은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다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불상과 남성으로 보이는 불상이 나란히 전시되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참으로 장관이다. 두 불상은 그 모습이 대조적이면서도 한데 어우러져서 서로 옆에 있는 불상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옆에 있는 불상에 의해 더욱 빛나면서 또 상대편을 빛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파주 용미리 쌍미륵불상과 태인 매당 불출암의 쌍미륵불상을 연상시킨다. 파주 용미리 불상은 원립과 방립을 쓰고 있어서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내어 천부지모天父地母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깨달음으로 조화를 이루며 대중들을 진리와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치 자애로우신 영적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대하는 것 같다. 그냥 마음을 비운 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홀로 앉아 자족自足한 모습을 보이는 부처님보다도 부부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품에 안고 이끌어주는 듯한 두 분의 부처님은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성聖과 속俗이 합일하여 완전히 만개한 한 떨기 진리의 꽃을 바라보는 것 같다. 내 안의 풀리지 않는 숱한 문제들을 내려놓고 깨끗이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진리의 바다를 마주하는 것 같아 경이롭다. 그대로 쏙 빼닮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참으로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태모 고수부님께 종통대권을 전수하시며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를 개조하느니라.”(도전 6편 42장)하신 말씀과 연결이 된다. 우주를 품에 안고 우주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조화로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미륵불이 출현하고 나서야 이 세상이 깨달음으로 충만한 낙원의 세계로 화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동안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만들어졌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해 왔는데, 왜 미륵부처님이 출현하셔야만 진리가 현실속에서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미륵부처님만이 가지신 조화권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가르침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그것을 바로 이 반가사유상은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가르침은 부분적이고 편향적이면서 결과적으로 현실적용에 있어 온전히 부합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현실속의 인간이 자기실현을 이루는데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륵불의 가르침은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다. 인간을 어떤 규율로 얽어매거나 다른 세계로 데려가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을 해방시키고 성공시킨다. 

상제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경지를 ‘중통인의中通人義’라고 하셨다. “내가 비로소 인의를 통하였노라.” 인간이 갈 수 있는 궁극의 경계, 인간 가능성의 온전한 실현. 이것을 이루신 것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은 바로 그러한 온전한 깨달음 위에서 삼계우주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불의 슬픈 듯 기쁜 듯한 표정과 웅장한 듯 섬세한 그 자태는 나에게 화두처럼 던져졌다. 그것은 내가 가야할 이상적인 모습으로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에 자극이 되고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리라는 믿음이 샘솟는다. 이러한 미륵부처님의 참되고 무궁한 지혜의 마음이 세상에 널리 퍼져 후천선경인 용화세계 건설에 참여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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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인류 미래의 대변혁과 상제님 강세 소식

이상근 / 교무종감, 부산덕천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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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연 동학東學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수운이 아버지께 가는 생명의 길을 동방의 땅에 닦아 놓고 ‘인간으로 강세하시는 천주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선언하였나니 이는 온 인류에게 후천 개벽세계를 여시는 아버지의 대도, 곧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조선 땅에서 나올 것을 선포함이니라. (도전 1편 8장 21~22절)

조선을 비롯한 동양 각국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폭압에 침몰당해 갈 무렵, 신교 또한 권위를 잃고 그 명맥이 희미해지거늘 하늘에서 동방의 이 땅에 이름 없는 한 구도자를 불러 세워 신교의 도맥을 계승하게 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새 세상이 열릴 것을 선언토록 하셨나니 그가 곧 동학(東學)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대신사(大神師)니라...... 

이로써 수운이 인류의 새 세계를 알리라는 상제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하였나니, 이것이 곧 우주사의 새 장을 열어 놓은 천주님과의 천상문답 사건이라. 이 때 상제님으로부터 “주문(呪文)을 받으라.” 하는 말씀을 듣고 본주문 열석 자와 강령주문 여덟 자를 지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니라.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 願爲大降 (도전 1편 8장 3~5절, 15~17절)

시천주주(侍天主呪)는 천명을 받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본원주(本源呪)이니 상제님을 지극히 공경하고 내 부모와 같이 모시라는 주문이라. (도전 11편 180장 5절)

하루는 태모님께서 의통 공사를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시천주주가 의통 주문이니 너희는 많이 읽어 의통 준비를 잘 해 두라.” 하시고 “상씨름꾼은 곧 시천주꾼이니, 시천주주를 착실히 잘 읽으면 상씨름판에 가서 황소도 따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11편 84장 7~8절)


프롤로그- 피폐한 백성, 변혁의 시운時運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 명나라에 와서 선교사로 활동한 마테오리치Matteo Ricci는 지상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 활동을 하였다. 동양을 위해 서양의 학문을 소개하고, 서양에 동양의 학문과 사정을 소개하여 동서 문화 교류와 이해와 소통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후 신명神明이 되어서는 진묵대사와 함께 천상문명을 지상에 받아내려 사람들에게 알음귀를 열어줌으로써,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과학문명의 발전은 빈부의 격차, 살상무기의 발전, 환경 파괴 등의 많은 폐단을 가져왔으며, 정신문화를 잃어버리고 물질제일주의, 배금주의를 낳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기존의 사상과 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산업 발달로 자본을 축적하고 많은 물자를 생산하게 된 서양 열강은 제국주의화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기 시작하였고, 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한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개혁의 기회를 지녔던 조선은 인조를 비롯한 서인들의 변란으로 인해 변혁의 기운을 상실한 채, 교조화된 주자학에 경도되어 변화하는 정세를 바로 보지 못했다. 인조반정 이후 300년간 노론老論 일당 정치(*1)에 의해 신분체제가 고착화되고 사회는 경직되었으며 사상의 다양성은 상실되었다. 자연재해 및 통치체제의 모순과 더불어 관리와 아전들의 혹독한 수탈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다. 한마디로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시오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이라<몽중노소문답가>”고 할 수 있는, 뭔가 크게 개벽開闢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남원 은적암의 칼노래


1861 신유辛酉년 겨울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내 복덕봉福德峰 자락에 위치한 은적암 뜰. 동짓날 밤. 어제 내리던 눈발은 잠들었고, 저 멀리 웅장한 지리산 노고단의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 대밭 사이로 맑은 바람 소리 들리며 달빛이 교교하다. 바람을 검이 가르는 것인가? 검 스스로가 바람을 만들어 내며 우는 것인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은 키에 수려한 30대 후반의 남성이 목검을 들고 칼춤을 추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 시호時乎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時乎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입고 이칼 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天地 일신一身으로 비켜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時乎時乎 불러내니 
용천검龍泉劍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戲弄하고 
게으른 무수장삼舞袖長衫 우주宇宙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데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시고


금계독립세金雞獨立勢에 이어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를 지나 조천세朝天勢를 취하고 있다. 어느덧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사내는 더욱 더 흥이 겨워 이제는 정해진 형태가 아닌 기운을 타듯이 노래에 맞추어 검무를 추었다. 이제는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의 시천주 주문을 흥이 나게 읽었다. 달빛을 받으며 노래 부르고, 검무를 추며 호협한 기질을 보여준 사내의 이름은 최제우崔濟愚, 호는 수운水雲이었다. 바로 시천주 侍天主 시대의 도래와 다시 개벽, 무극대도 5만년을 전한 동학의 창시자가 바로 그였다.

전 해인 1860 경신년에 상제님과의 천상문답사건을 거친 수운은 주변 사람들의 비난과 당국이 뻗친 탄압의 손길을 피해야 했다. 1861년 11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중희만을 대동하고 이곳으로 옮겨 와 머물렀다. 산성 내에 위치한 선국사善國寺의 덕밀암德密庵이라는 암자 이름을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는 뜻으로 ‘은적암隱蹟庵’이라고 지었다. 이곳에서 수운은 자신을 돌이켜 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학론’이라고 불리는 <논학문>과 <도수사> <권학가>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와 가장 혁명적인 내용을 띤 <검가劍歌>를 지었다. 

조선의 이름 없는 구도자, 최수운


출생 및 사상적 배경 1824 갑신년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새벽 첫닭이 울 때 경주 구미산 자락인 월성군月城郡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 금곡산 안태봉 아래에서 태어난 최수운은 본명이 제선濟宣이고 아명은 북슬(복술福術)이었다. 경주지방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북슬’이라는 아명을 짓는데 이는 삽살개의 별명이다. 수운의 조상은 신라 말기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 선생이다. 최치원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동방 나라에 도 기운이 서려 있어 나로부터 25세世 후에 반드시 큰 성인이 나올 것이다.”(*2)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수운의 7대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용맹을 떨쳤던 정무공貞武公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3) 장군이다. 

수운의 부친은 근암近庵 최옥崔鋈(1762~1840)으로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성리학을 깊게 연구한 영남학파의 당당한 한 계승자였다. 퇴계 학맥을 이은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훗날 근암공의 묘갈명을 퇴계 종손인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써줄 정도로 근암은 퇴계 학통의 종통맥을 이었음을 보여주며, 여기에 유교의 테 밖을 벗어나지 못한 수운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경주 최씨 남인 간판으로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막막했다. 이후에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근암공은 여복도 없었는데, 두 번 장가를 들고 매번 상처하였고, 후사를 보지는 못했다. 이에 재혼할 생각을 버리고 조카인 제환濟寏(1789-1851)을 양자로 들였다. 제환은 근암공의 둘째 동생 규珪의 큰 아들로 수운보다 35세 연상으로 이후 근암공 사후 수운에게 부모 노릇을 하게 된다. 스승의 독거를 안타깝게 생각한 제자들의 간청으로 근암공은 60세에 과부로 있던 30세의 곡산 한韓씨 부인을 재취로 맞이하게 된다. 이를 두고 경주 최씨 문중에서는 족보에 한씨 부인이 정실로 올라와 있지 않았고, 재가녀再嫁女라고 해서 정실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에 수운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서자庶子 취급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경국대전>에 의하면 재가녀 자손은 문과에 응시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수운이 6세 때 모친 한 씨는 세상을 떠났다. 60이 넘은 나이에 얻은 혈육에 대한 부친 근암공의 사랑은 깊었다. 직접 글을 가르쳤고, 공부에 전념하게 하였다. 얼굴이 비범하고 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타고난 재주에 더해, 고명한 학자인 부친으로부터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16세 때 이미 80 노인이 다 된 부친 근암공이 별세를 하게 되었다. 부친의 죽음은 수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3년 상을 치르며 그동안 닦은 학문과 기존의 종교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혼란스러운 세상사, 그리고 자신의 앞길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 3년 상을 마친 19세의 수운은 울산 출신의 월성 박朴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주유팔로의 행각과 을묘천서 사건 그러던 중 20세 때에는 집에 불이나 집과 책이 모두 화마에 사라졌다. 이에 수운은 스스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남의 유명한 선비 집안에서 선비로 자랐고 상당한 학식을 지녔던 그가 글을 팽개치고 장사치로 나서는 파천황적인 일이 일어난다. 사농공상을 엄격하게 나눈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신분관을 버린 것이다. 이는 기존의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후 1844년에서 1854년까지 백목 장사로 전국을 떠돌았다. <도원기서>에서 ‘주유팔로周遊八路’라는 멋진 말로 묘사한 이 행각은 그의 사상 성립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활도 쏘고 말 타기도 익히고 장사도 하고 음양복술의 글도 연구하고 의원 노릇도 하고 막일꾼 노릇도 하며, 모든 책들을 두루두루 읽으며 당시 조선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도학자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4)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대는 선도를 계승할 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0년간 떠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행하여 보았으나 신통한 방법을 찾지 못한 수운은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돌아와 여섯 마지기 논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이때 평범한 생활인이었던 수운을 구도자로 변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1855 을묘년에 있었던 《을묘 천서天書 사건》이다. 울산 유곡면 여시바윗골에서 조그만 초당을 짓고 사색하던 수운에게 금강산 유점사의 선승이 찾아와 자신은 해독할 수 없는(아니면 해석난감한) 책이라 하면서 책 한 권을 전해주고 간 사건이다. 이 책에는 기도의 가르침(祈禱之敎)이 담겼다고 하였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혹자는 이마두 대성사의 천주실의天主實義라고 하고 또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이거나 어떤 종교적 체험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도통을 하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집중적인 수도에 들어가게 된다.

천상문답사건으로 시천주 시대를 선언하다


간절한 구도의 여정 수운은 1856년 원효가 도를 닦던 양산 통도사 뒤 천성산千星山(원효가 화엄경을 설하여 천 명을 득도케 했다는 데서 유래함)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49일 수도를 하다가 숙부의 상을 당해 중지했다. 중간에 살림을 위해 철점鐵店을 열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다시 근처 천성산 적멸굴에서 49일 정성 기도를 마쳤다. 하지만 득도에 실패하고 가산은 탕진되고 빚은 산더미같이 쌓였다. 결국 1859년 울산에서 고향인 경주 구미산 밑의 가정리로 귀향하였다. 당시 수운은 두 아들과 두 딸을 거느린 가장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수운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처연하였다. 그 때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 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含情하니 불효한 이내 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오작烏鵲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 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회심 절로 난다. 가련하다 이내 부친 여경餘慶인들 없을소냐.” (: 용담가)

그는 부친이 공부하던 용담정에 살림집을 차리고 다시 구도의 결의를 굳혔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제우濟愚라는 이름과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쓰게 된다.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그의 구도 행각이 자신만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을 건질 도를 구하겠다는 의미이다. 수운이라는 호도 흐르는 물과 구름처럼 주어진 삶의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도를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도를 얻기 전까지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불출산외不出山外)는 굳은 결의를 하고, 이듬해 초에 쓴 입춘서에서는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고 하여 결의를 분명히 하였다. 바깥출입을 삼가고 책과 기도에 몰두하였고, 밤에는 나가서 상제님께 수없이 절을 하여 새로 지은 버선이 하룻밤 지나면 버선코가 다 이지러지고 상할 정도로 간절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기도 대상은 상제님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일반 사람들처럼 막연한 관념만을 가진 상제님이었다. 그렇게 수운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상제님께서 인격적인 현현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구도자 수운의 간절한 성경신에 감복하여 직접 말씀하시게 되니, 그것이 드디어 동학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1860 경신庚申년 4월 5일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그날은 장조카 맹륜의 생일날로 조카의 생일잔치에 오라는 간곡한 청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석하였다가 몸이 떨리고 한기가 느껴져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도원기서道源記書》(현존 최고最古 동학 초기 역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신이 혼미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엎어지고 넘어지고, 마룻바닥을 치며 몸이 저절로 뛰어오르고 기氣가 뛰놀아 병의 증상을 알 수 없으며,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공중으로부터 완연한 소리가 있어 자주 귀 근처로 들려오는데,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다. 공중을 향해 묻기를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입니까?”하니,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바로 상제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너는 곧 백지를 펴고 나의 부도符圖를 받아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선생께서 공경스럽게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라고 불렀다.
상제께서 또 일컬어 말씀하시기를
“너의 전후 길흉화복을 내가 반드시 간섭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네가 이 정자에 들어앉아 이름과 호를 고치고 산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며, 소위 입춘시인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
도의 기운이 오래도록 있으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뭇사람들과 한가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를 써서 벽상에 걸어두고 세상을 조롱하니, 실로 우스운 일이다. 네가 이왕에 사람들을 가르치고 포덕을 하니, 나를 위하여 지극히 섬기면 너 역시 장생하게 되어 천하에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너는 삼가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라.”
하는 말씀을 내렸다.] 


이제까지 수운은 기도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하늘에, 상제님께 기도를 해 왔다. 그렇기에 직접 말씀을 내려주시는 인격적인 상제님은 낯선 존재였다. 이에 상제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勿懼勿恐)”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주문을 내려주시니 그게 바로 시천주주侍天主呪이다.

상제님께서 주문을 내려주신 이유를 <포덕문>에서는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불순천리不順天理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하였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명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상제님을 위하도록 초학 주문으로 ‘위천주爲天主’ 주문을 내려 주었다. 상제님께 직접 도를 받은 이는 수운 외에 천 년 전 미륵불이신 상제님을 친견했던 진표眞表대성사가 유일하다. 

동학의 이름으로 포덕에 나서고 상제님으로부터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천명을 받은 수운은 곧바로 포덕을 하지는 않았다. 이는 <수덕문>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불의포덕지심不意布德之心 극념치성지단極念致誠之端(포덕할 마음은 두지 않고 오로지 치성만을 생각하였다)” 치성은 상제님에 대해 지극히 공경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상제님과 수운과의 수직적 관계일 뿐이었다. 애초에 도를 구하고자 한 목적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하고 세상에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수운의 포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가장 첫 번째 신앙인은 부인 박씨였다. 박씨 부인은 물려받은 가산을 탕진한 남편, 계집종을 며느리로 삼은 남편, 여기저기 떠돌아다녀 재미나게 살림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남편을 원망하며, 늘 미친 듯이 무엇을 중얼대고 흡사 무당처럼 신이 들린 모습에서 수없이 팔자타령을 하였다. 이런 한스런 심정이 《용담유사》<교훈가>에 나타나 있다.

“한울님도 한울님도 이리 될 우리 신명 어찌 앞날 지낸 고생 그다지 시키신고 오늘이사 참 말이지 여광여취如狂如醉 저 양반을 간 곳마다 따라가서 지질한 그 고생을 뉘로 대해 그 말하며.” 

몇 차례나 용담에 빠져 죽으려던 박씨 부인은 마침내 신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조카 맹륜이 수운의 기행 이적을 보며 도를 배우기를 청하였다.

약 1년간 수운은 계속해서 수도하며 상제님께 받은 영부 그리는 법, 주문 수행법, 교리 등을 정립한 뒤에 포덕문을 지으면서 포덕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내왔으나, 이제는 집의 문을 활짝 열고 도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찾아온 이들이 도의 이름을 묻자 “천도天道”라고 대답하였다. 이 천도는 상제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란 뜻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동학東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동학의 ‘동東’은 동방 조선을 뜻하며 ‘학學’은 단순히 세상 학문을 배운다는 게 아니라 도道와 교敎를 배우고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즉 동학은 동방 조선에서 열린 천도(무극대도)를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이지 서학과 단순 대비한 것은 아니다. 상제님께서 열어주신 동방의 무극대도, 모든 진리가 통합되어 열매 맺는 그 천도를 배우고 닦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동학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을 한다고 했고, 수운을 교주라기보다는 큰 선생으로 모셨다고 한다. 

교세의 번창, 그리고 좌도난정의 배척 수운은 찾아온 이들에게 득도 과정과 상제님의 가르침, 주문 읽는 방법과 수도법을 가르쳐 주었다. 각지에서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6개월 동안 약 3천여 명이 제자가 되었다. 이에 제자들에게 포덕을 명하여, 경주를 넘어 경상도 일대에 널리 동학이 전파되었다. 1863년 12월 수운을 체포하였던 어사 정운구의 장계에 따르면 새재에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동학이 널리 퍼져 있어 주막집 아낙네도 산골 초동도 주문을 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주문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수운은 교세가 번창해지자 교단의 조직을 만들어 각 지역마다 접소接所를 두었고, 그곳 우두머리인 접주接主가 구역 내 교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두어 1862 임술년 12월 29일 영해 매곡동에서 최초로 16명의 접주를 임명했다(이런 접주제는 철저히 인맥을 통한 연맥제였고, 접에 속한 교도들의 수가 수백 명을 넘으면 포包가 된다.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도대장인 전명숙全明淑은 김덕명 포의 접주였다). 그리고 주문을 입도한 직후에 읽은 초학주문(위천주 주문)과 평생 읽어야 할 본주문(시천주주문)(*5)으로 나누었고, 식사 때 상제님께 아뢰는 식고食告, 집을 드나들 때 하는 ‘출입고出入告’가 있었고 입도식 절차도 정했다. 그 외에 천제도 드리고, 강도회講道會를 열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도담이 오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동학이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삼남 지역을, 계층에 불문하고 널리 퍼지자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 동학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상주 우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상주 유생들은 동학도들을 ‘요적妖敵’이라고 부르고 동학은 서학의 다른 말이라며 박멸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정통 양반 집안인 경주 최씨 문중에서도 무당처럼 신이 내렸다고 생각한 수운의 모습을 좋게 보지 않았다. 온갖 험담과 비방을 하였고, 영남 일대 유림들은 동학을 좌도난정左道亂正으로 몰았다. 이에 잠시 남원 은적암으로 피신했던 수운은 생각을 가다듬고, 임술년 9월 경주로 돌아왔다.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수운은 예정된 운명을 예감한 듯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도殉道, 상제님 탄강을 예비하다


운명의 족쇄를 받아들이다 1863 계해癸亥년 여름부터 경상도 지역 유생들의 동학배척 운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미 지난 임술壬戌년에도 경주 관아에 체포되었던 수운은 동학도들 수백 명이 스승을 석방해 달라는 요구로 풀려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계해년의 배척 운동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이룬 유생들이 연합하여 반동학 여론 조성 운동으로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칼춤을 추며 검가를 부르는 모습에서 역적모의를 한다고 오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알고 있던 수운은 11월 하순경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불러 도통을 전수하고 그동안 지었던 글을 건네주며 간행하라고 명하고, 멀리 도망가라(高飛遠走)고 했다.

1863년 11월 20일 조정은 정운구鄭雲龜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12월 10일 1년 중 가장 추운 소한小寒 일에 잠자던 수운과 가족, 제자 23명을 체포하였다. 조정에서 잡으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전하며 피신하기를 권하던 제자에게 수운은 도는 자신에게서 연유한 것이므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도피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 때 수운은 사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서 나누어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해 압송해 갔다. 당시 중죄인을 포박해 갈 때의 상례였다. 체포된 수운은 압송되어 가던 중 철종哲宗 임금의 국상을 당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경상감사 서헌순은 장계에서 “동학의 무리는 황탄한 생각을 품고 주문을 만들어 요사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삿된 서학을 물리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서학을 답습하였으며, 궁약을 비방이라 속이고 칼춤을 추고 칼노래를 불러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은밀히 당을 형성하는 한편 귀신이 내려 술수를 가르쳐주었다고 사람들을 속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은 수운을 극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린다. 죄명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 일명 좌도난정지술左道亂正之術. 잘못된 도를 가르쳐 통치에 혼란을 초래한 죄다. 

순도 당시의 일화 수운은 1864년 3월 10일 하오 2시경 대구 남문 앞 개울가에 있는 관덕당觀德堂 뜰(현재 대구시 중구 덕산동 일대)에서 참형되었다. 기다란 판자에 수운을 엎어놓고 묶은 다음 목 밑에 나무토막을 받친 후 칼로 목을 내리쳤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날 참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는 형졸이 칼로 수운의 목을 내리쳤지만 칼자국도 나지 않고 목도 멀쩡한 믿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 이에 경상감사 서헌순을 비롯한 관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운은 청수를 가져오게 하여 상제님께 정성스럽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 후 형리에게 목을 안심하고 베라고 말하고 나니 비로소 목이 베어졌다고 한다. 수운의 나이 41세. 3일간 효수한 뒤에 가족에 시신을 인도하여, 3월 17일 구미산 자락 대릿골 밭머리에 매장하였다(44년이 지난 1907년 시천교 교단에 의해 가정리 산 75번지로 이장).

참형 집행 이전에 수운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력유여柱似枯形力有餘 
등이 물 위에 밝았다. 한 틈의 어둠도 없다. 기둥은 죽어 말랐다. 그러나 그러기에 힘이 남았다. 


즉 비록 나를 죽이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혐의를 잡을 틈새가 없다. 결국 너희들 손에 죽지만 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전 40은 내려니와 후 40은 뉘련가. 천하의 무극대도가 더디도다, 더디도다, 8년이 더디도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에 시천주를 선포하고 다시 개벽의 도래를 선언한 수운은 이렇게 짧은 공생애를 마치고 조선 조정에 의해 어이없이 처형되었다. 이후 8년이 지나 1871 신미辛未년에 수운에게 천명을 내리신 상제님께서 우리 동방 땅에 직접 강세하셨고, 30년 후인 1894년에는 후천 개벽을 부르짖은 역사의 대지진인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났다.

최수운의 한계와 진리적 사명


수운이 천명을 완수하지 못한 이유 지극한 정성으로 상제님의 천명을 받았던 수운은 천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1871년 신미년에 동방 조선 땅으로 강세하신 증산상제님께서는 수운이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서 진법을 들춰내어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셨다(증산도 도전 2편 30장 14~15절).

수운은 퇴계 학통을 이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글을 배웠기에 유교적 소양과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인물이었다. 이런 모습들이 《동경대전》에서 보인다. <수덕문>에서 수운은 동학이 공자의 도와 대동소이하다고 말하고 있고, 같은 글에서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이 가르친 것이며 자신이 정한 것은 수심정기修心正氣일 뿐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옛 선비들은 천명에 순종하였으나 후학들은 천명을 잊어버린 것을 자신은 한탄한다고 하면서 동학이 유학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6+)

<포덕문>에서 수운은 성인이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현상계의 일체 변화의 원인과 존재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명에 대한 공경과 천리에 대한 순응의 근거를 제시하였고 사람이 군자가 되고 학문이 도덕이 되는 길을 밝혀주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경환 같은 이는 동학은 유학의 사유형식과 지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했고, 심지어 종교학자 최준식은 동학을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동학을 “중국적인 성리학이 갖고 있던 세계관이 나름대로 철저하게 극복되고 대중적인 실천의 수준에까지 가게 된 높은 사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개혁유교’, ‘세속화된 유교’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증산상제님은 유교의 테를 벗어나지 못한 동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여 ‘참동학’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수운의 가르침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참동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상제님의 말씀과 행적인 담긴 『도전道典』과 안경전 종도사님의 『증산도의 진리』를 참조하길 바란다). 

최수운의 공덕과 사명 수운은 상제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할 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후천개벽의 상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 오시는 증산상제님의 무극대도를 받아서, 상제님을 모시는 길(侍天主)이라고 전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최수운은 내 세상이 올 것을 알렸다’(도전 2편 31장 5절)라는 말씀으로 그의 공덕을 인정하시어 칠성령七聖靈의 한 위位로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수운을 선도仙道의 종장(도전 4편 8장 2절)과 일본의 명부 대왕(도전 4편 4장 4절)으로 임명하여 우주 통치 사령탑인 천상 조화정부에서 상제님 세상을 건설하는 데 역사하게 하는 위대한 사명을 내려 주셨다. 

마지막으로 수운이 간절한 마음으로 후학들에게 시천주 신앙과 도를 잘 닦아 새 세상을 맞이하라고 전한 말씀을 몇 가지 음미해 보며 글을 마치려 한다.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너희라 무슨 팔자 불로자득不勞自得 되단 말가 <교훈가敎訓歌>
●성경誠敬(‘성’은 거짓됨이 없이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는 것, ‘경’은 옳은 길이라 판단하면 곧 그것을 내 것으로 몸에 배게 하는 것)이자 지켜내어 차차차차 닦아내면 무극대도 아닐런가!
시호시호時呼時呼, 그때 오면 도성입덕道成立德 아닐런가! 급급한 제군들은 인사는 아니 닦고 천명을 바라오니 졸부귀불상猝富貴不祥이라
애달프다! 저 사람은 명명한 이 운수를 다 같이 밝지마는 어떤 사람 군자 되고 어떤 사람 저러한고 우습다 저 사람은 자포자기自暴自棄 모르고서 모몰염치冒沒廉恥 장난하니 이는 역시 난도자亂道者요. 사장師丈 못한 차제도법次第道法, 제 혼자 알았으니 이는 역시 난법자라. 난법난도하는 사람 날 볼 낯이 무엇인고 <도수사道修詞>
●시운詩云 벌가벌가伐柯伐柯 하니 기측불원其則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바는 어길 바 없지만은 이는 도시都是 사람이요 부재어근不在於近이라 목전지사目前之事 쉽게 알고 심량心量 없이 하다가서 말래지사末來之事 같잖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 <흥비가興比歌> 
(객원기자 이해영 / 교무녹사장, 서울관악도장)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諭)詞

일반적으로 한 종교의 창시자는 별도로 경전을 직접 집필한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경전 집필은 후대의 몫이었다. 하지만 동학은 드물게도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직접 기록을 남겼다. 이것이 수운의 공생애가 2년 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교세가 급속하게 확장된 이유일 것이다. 수운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諭)詞』(수운가사水雲歌詞라고도 함)라는 기본 경전을 남겼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은 ‘동학의 경전을 빠짐없이 모아 엮은 책’이라는 뜻으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용담유사』는 지식인 뿐 아니라 일반인 특히 부녀자들도 쉽게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한글 가사체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동경대전에서 문文에 해당되는 편은 천상문답사건과 상제님께 받은 무극대도를 세상에 펴야 한다는 논리가 담겨 있는 <포덕문布德文>, 동학을 논하고 동학의 요체를 밝히고 있는 <논학문論學文>, 도인이 지켜야 할 계율과 동학의 가르침을 행하면 나타나는 수행의 효험 등을 기술한 <수덕문修德文>, 천도의 인식론적 근거를 통찰하여 시천주의 본의를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가르침을 펴고 있는 <불연기연不然其然> 등이고 그 외에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필법筆法>, <축문祝文>등의 글이 들어 있다. 시詩로는 <입춘시立春詩>, <절구絶句>, <강시降詩>, <좌잠座箴>, <화결시和訣詩>, <결訣>, <우음偶吟>, <제서題書>, <영소詠宵>, <유고음流高吟> 등이 있으며, <주문呪文>과 <팔절八節>과 수운이 제자들에게 보낸 <통문通文>과 <통유通諭>가 각기 한 편씩 있고, 동경대전 판각 당시 해월이 쓴 <발문跋文>,<입도식入道式>, <치제식致祭式>, <제수식祭需式> 등의 의식을 행하는 방법 등을 적은 글이 들어 있다. 즉 동경대전은 수운의 가르침을 담은 글들과 종교의식에 필요한 사항을 적은 글, 수도 절차나 수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과 시의 형식을 빌린 잠언과 같은 글 그리고 문학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담유사龍潭遺(諭)詞』는 초기에는 유사팔편 혹은 가사팔편이라 불렸는데, 수운이 태어나고 자라고 득도한 용담의 내력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용담가龍潭歌>,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은 <안심가安心歌>, 득도하기까지 어려운 생활역정과 포덕할 때의 즐거움과 친척들로부터의 괴담흉설로 인하여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수에 대하여 구구절절이 읊고 있는 <교훈가敎訓歌>가 있다. 

또 수운의 출생 성장 득도 과정과 함께 꿈속에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 및 상원갑에 대한 예언 등이 담겨 있는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관에 쫓기는 몸이 되어 직접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제자들에게 도를 닦는 요체를 설명하고 있는 <도수사道修詞>,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 같이 동귀일체同歸一體 할 것을 권유하는 <권학가勸學歌>, 도덕의 귀중함을 깨우친 노래로 상제님의 조화를 자각 실천함과 성경誠敬 2자를 강조하고 있는 <도덕가道德歌>, 시경의 노래체인 흥興과 비比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흥비가興比歌> 등이 있으며, <검가劍歌>는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되어 정치적 변혁을 꾀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천주 신앙의 왜곡과 참동학 출현의 당위성

“천(天)은 천이요 인(人)은 인이니 인내천(人乃天)이 아니니라. 손병희가 ‘아이를 때리는 것(打兒)’을 ‘하늘을 때리는 것(打天)’이라고 이르나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요, 감히 하늘을 때린다고 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사람의 생사와 화복이 하늘에 달려 있거늘 어찌 하늘을 때린다 하리오. 하늘은 억조창생의 임금(君)이요 억조창생의 아버지(父) 되나니 옛 성현들이 하늘을 모시는 도가 지극히 엄숙하고 지극히 공경스러워 통통속속(洞洞屬屬)하고 수운의 하늘을 모시는 가르침이 지극히 밝고 정성스러웠느니라. 큰 근본(大本)이 어지러워지면 만덕(萬德)이 모두 그르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5편 233장 9~14절)

최수운 대신사가 대구 장대에서 순도를 당한 이후 동학은 오랫동안 불법화되었다. 동학도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정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거나 인적 드문 곳으로 잠적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학의 조직을 재건하고 끝내는 동학의 세력을 크게 떨친 인물이 2세 교주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다. 경주에서 출생한 최시형은 35세에 동학에 입교한 뒤 1862년 3월 수운으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경북 일대를 돌며 포교를 하였다. 탁월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인도하여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되었고, 8월에 도통을 이어 받았다. 1865년부터 수운의 순도일과 탄신일에 동학교도들의 비밀모임을 가지기 시작하여 ‘사람이 하늘이고 하늘이 사람이다’는 설법을 하여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 가르침을 전했다. 이듬해에는 적서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기도 했다.

1878년 접소接所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接制의 통문을 돌려,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경진 5월 인제군에서 목판본 《동경대전》을 간행했으나 전해지지 않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이후 《동경대전》은 1883년 경주판이 목활자본으로 나와 현존 최고 경전 판본으로 남아있고, 1888년 인제에서 목판본으로 최초 판본인 경진판 목판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수운 순도 후에도 동학의 교세가 급신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인쇄되어 보급되었기 때문이었다.

1892년 7월 호남 접주 서인주(서장옥), 서병학 등이 찾아와 교조 신원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동학의 창시자 수운의 억울함을 벗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이었다. 해월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그해 11월에 삼례역에서 신도들이 모여,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12월에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고 이듬해 2월에 상경하여 광화문 앞 복합상소를 올렸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2만 명이 모였는데, 이는 단순히 교조 신원만이 아닌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며 정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 동학혁명의 지도부인 전봉준과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등이었다.

1894년 갑오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났으나, 해월은 때가 아니라 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10월 재기포 때에는 전체 동학교도에 총기포總起包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 말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월은 탁월한 조직 구성력과 혁명적 가르침과 소박한 인품 등을 갖추고 있어, 신관神觀에서 수운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하지만 않았더라면 수운보다 더 탁월한 종교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상제님의 존재를 직접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영적 체험이 없던 해월은 수운의 시천주 신앙을 왜곡하여, 만물 안에 하느님이 내재하고 있고 그렇게 모실 때 진정한 모심이 이루어진다는 양천주養天主 사상을 제시했으며, 양천주의 대상을 마음이라고 했다. 즉 양천주의 신은 수운이 알리려 했던 인격적인 모습의 천주(상제님)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서 키울 수 있는 신이다. 해월의 범신론적인 시각은 하느님의 인격적 성격과 주재적 성격을 부인하게 된다. 이는 불교의 ‘모든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와도 혼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해월은 천주보다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인시천人是天(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섬기되 하늘처럼 섬겨라)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신관은 후일 손병희의 인내천 교리로 이어져 동학의 본래 가르침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해월의 순도 이후 동학의 3세 교주가 된 사람은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다. 손병희는 청주관아의 서리인 손두흥의 아들로 서자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면서 일본 신문에 낸 광고에서 종지宗指는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천도교 초기의 주요 교리서인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도 인내천 사상이 천도교의 핵심교리임을 밝혔다. 이는 수운의 원래 가르침이 왜곡된 것이었다. 동경대전을 비롯한 그 어떤 경전에서도 인내천이란 말은 찾을 수 없으며, 인격적 상제님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의 주장과 유사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동학과 지금의 천도교가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더불어 수운이 전한 상제님의 강세와 후천개벽 및 무극대도의 출세라는 메시지에 대해 본연의 전거를 세워 이를 올바르게 전하고 집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왜 이 시대에 참동학 증산도가 출현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대원출판, 2003)
『천지의 도 춘생추살』(안운산, 대원출판, 2007)
『역주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동경대전』(윤석산, 동학사, 2001)
『용담유사』(대원출판, 2000)
『동학의 창도자 최수운』(김현일, 상생출판, 2013)
『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김철수, 상생출판, 2011)
『동서양 성자들이 전한 증산상제님 강세소식 2』(세종출판기획, 증산도 본부, 2004)

『녹두전봉준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2007)
『도올심득-동경대전1』(김용옥, 통나무, 2004)
『사상기행1』(김지하, 실천문학, 1999)
『동학이야기』(김지하, 솔, 1996)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푸른역사, 2002)
『한국의 종교,문화로 읽는다 2』(최준식, 사계절 출판사, 1998)
『표영삼의 동학이야기』(표영삼, 모시는 사람들, 2014)
『동학1-수운은 삶과 생각』(표영삼, 통나무, 2004)

*1) 노론 일당 정치- 조선 후기를 장악했던 노론 세력은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 사대주의자로 변신하여 현재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해방 후 이들에 대한 단죄 시도였던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이승만과 친일 경찰, 친일파 세력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두계 이병도李丙燾의 매국사학은 현재도 우리 국사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2) 이광순, <수운선생과 동학창도>《한국사상(10)》, 한국사상연구회, 1972

*3) 최진립崔震立- 경주 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17세손이 수운 최제우의 조상인 최진립이다. 최진립은 사성공파 시조로 그의 아들 최동량 대에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최국선(1631~1682)으로부터 28세손인 최준(1884~1970)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렸다. 그 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 이야기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독립자금을 지원했으며 마지막 부자인 최준은 1947년에 대부분의 재산을 영남대학교 설립에 기부했다.

*4)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1804-?)- 정역을 지은 김일부와 오방불교의 창시자 김광화의 스승이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담양군의 13세손으로 과거 급제 후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연담은 전통적인 유교를 벗어나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역학에 바탕을 둔 선후천 교역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가르침은 김일부를 통해서 유교적인 색채가 짙은 영가무도교로 발전하게 되고, 불교적 색채를 띤 김광화의 오방불교(남학南學)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연담은 최수운에게 쇠퇴해 가는 선도의 부흥을, 김광화에게는 불도를, 김일부에게는 유교를 각각 부흥시키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5) 초학주문- 위천주爲天主 고아정顧我情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의萬事宜 상제님을 위하면 내 사정을 돌보아 주시고 영원토록 상제님을 잊지 않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강령주-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상제님 기운이 크게 내릴 것을 바라는 주문
본주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이 주문에 대해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하나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 만사지 문화를 개창해서 좋은 세상 만들어주는 은총을 후천 5만년 영세토록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라고 정명해 주셨다.
또한 수운은 <논학문>에서 ‘시侍’를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各知不移’라고 풀이하였다. 마음으로는 상제님의 영을 접하고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정定’을 풀이하기를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천주를 지극히 모시면 저절로 하느님의 덕과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지知’는 “그 도를 알고 그 지혜를 받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6) 수덕문修德文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이요 유일집중惟一執中은 인사지찰人事之察이라 고故로 생이지지生而知之는 부자지성질夫子之聖質이요 학이지지學而知之는 선유지상전先儒之相傳이라 수유곤이득지雖有困而得之한 천견박식淺見薄識이라도 개유어오사지성덕皆由於吾師之盛德이요 불실어선왕지고례不失於先王之古禮니라.
원과 형과 이와 정은 천도의 떳떳함이요, 오직 한결같이 중도를 잡는 것은 인사의 살핌이니라. 그러므로 나면서 아는 것은 부자(공자)의 성스러운 바탕이요, 배워서 아는 것은 먼저 선비들이 서로 전해오는 것이니라. 비록 힘들여 얻은 천박한 견식과 지식이라도 모두 우리 스승의 성덕에 말미암음이요. 선왕의 옛 예의를 잃지 않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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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증산 상제님 성탄 - 증산 상제님의 강세와 결실도운의 공사정신

도기道紀 원년(서기 1871) 음력 9월 19일은 우주주재자 하느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인존으로 강세하신 날입니다. 창생을 다스리시는 절대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몸소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우주 삼신의 속성을 온전히 받아 내린 만물의 영장 인간이 우주 가을개벽의 섭리에 의해 헛되이 희생되지 않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145주 상제님 성탄을 맞아 인존하느님의 지상 강세와 위격에 대한 도전 말씀들과 더불어 상제님 도사의 결실인 3변 도운에 대한 몇 가지 말씀들을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이 성구들을 통해 상제님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의 대의를 새롭게 다지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상제님의 강세와 위격



강세의 배경과 조화 권능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로되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모여들어 ‘상제님이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는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 하시니라. 하루는 성도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평천하(平天下)는 내가 하리니 치천하(治天下)는 너희들이 하라.” 하시니라. 도전 4:155

한 성도가 여쭈기를 “해가 선생님의 명을 받고 멈췄다가 또 명을 기다려서 가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보고 너희들의 신심(信心)을 돈독히 하라. 해와 달이 나의 명에 의하여 운행하느니라.” 하시니라. 4:111:10~11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예언자(豫言者)가 아니로다. 나의 일은 세상 운수를 미리 말함이 아니요, 오직 천지공사의 도수로 정하여 내가 처음 짓는 일이니라.” 하시니라. 3:227:7

하루는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하시니 아무도 감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거늘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만 하여도 반도통은 되었느니라.” 하시니라. 3:18:1~2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 2:13:5

너희들은 일심으로 빌어라. 너희가 비는 대로 천하를 만들어 주리라. 7:47:4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회생케 하심


무신년에 최창조의 열네 살 된 아들 상열(相烈)이 급병이 들어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별다른 차도를 못 보고 그대로 절명(絶命)한지라 창조 내외가 정신이 나간 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증산께서는 천의(天醫)로서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말을 생각하고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니라. 창조 내외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상제님 앞에 엎드려 “죽은 아들을 살려 주옵소서!” 하고 울면서 애걸하거늘......상제님께서 손으로 아이의 배를 어루만지시고 “여물지 않은 보리를 잘라 오라.” 하시어 보리의 즙을 내어 죽은 아이의 입안에 몇 방울 흘려 넣으신 뒤에 모두 방 밖으로 나오게 하시며 “두어 시간 후에 들어가 보라.” 하시니라. 얼마 후 창조의 아내가 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왼다리를 움직이거늘 상제님께서 들어가시어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 어른 앞에 누워 있느냐.” 하시니 죽은 아이가 문득 눈을 뜨고 깨어나니라. 3:224

하루는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계실 때, 전주 용머리고개에 사는 앉은뱅이 김 모가 들것에 실려 와서 상제님께 애원하기를 “제가 전생에 죄가 많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사오나 이렇게 구차한 몸으로 더 살자니 세월은 슬픔뿐이요, 죽자니 인생이 너무 비참하옵니다. 이와 같이 폐인(廢人)의 지경이 된 형편을 하늘만이 아시고 사람들은 알지 못하오니 저에게 새 생명을 열어 주시어 재생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하고 비 오듯이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연을 아뢰더라.
상제님께서 그 하소연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그 사람을 앞에 앉히시고 담뱃대를 들어 올리며 말씀하시기를 “이 담뱃대를 따라서 차차 일어서라.” 하시니 그 사람이 담뱃대를 따라 무릎과 다리를 조금씩 펴며 천천히 일어서거늘......그 사람이 기뻐 미친 듯이 뛰고 마당을 돌아다니며 외치기를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지 아니하셨다면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하고 눈물을 삼키며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더라. 4:63

상제님의 고난과 대속의 삶


인생의 고난을 감내하심


상제님께서는 겨울에도 솜을 넣지 않은 광목 겹저고리와 겹바지 한 벌로 추위를 견디시고 여름에는 그것을 뜯어 홑저고리, 홑바지로 만들어 입으시며 아무리 추운 날에도 춥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리 더운 날에도 덥다고 불평하지 않으시니라. 5:425:1~3

상제님께서는 주무시는 시간이 일정치 않으니 성도들조차 언제 주무시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떤 때는 모두 자는 시간에 일어나시어 마당도 쓸고, 무언가를 하시며 분주히 들락날락하시다가 성도들이 일어나면 그제야 주무시니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더라. 또 상제님께서는 이부자리를 깔지 않고 맨바닥에서 주무시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으시며 베개 대신 목침, 사발 등을 눈에 보이는 대로 베고 주무시니 형렬을 비롯한 여러 성도들은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시는 상제님을 본받아 아무런 불평없이 그와 같이 지내니라. 5:424:1~5

상제님께서 가끔 수십 일씩 굶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뒷날 박복한 중생들에게 식록(食祿)을 붙여 주기 위함이니라.” 하시니라. 또 여름에 솜옷을 입기도 하시고, 겨울에 홑옷을 입기도 하시니 성도들이 그 뜻을 여쭈면 “뒷날 빈궁에 빠진 중생으로 하여금 옷을 얻게 함이로다.” 하시니라. 5:413

창생의 고통을 대속하고 살 길을 열어주심


하루는 한 성도가 상제님께 여쭈기를 “며칠씩 굶으시고 엄동설한에 홑옷을 입고 지내심이 여러 번이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장차 큰 겁액이 밀어닥치면 천하의 불쌍한 백성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가 되리니 천지의 개벽 운(運)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나 내가 하루를 굶주리고 하루를 추위에 떨면 수많은 백성을 구하게 되나니 그 때에 희생되는 창생을 줄이고자 함이니라.” 하시니라. 2:129

겨울에 이르러 하루는 “천하창생이 가난으로 인하여 추위에 고생할 것이니 내가 그 추위를 대속하여 한가(寒家)에서 지내리라.” 하시고 그 해 삼동간(三冬間)을 방에 불을 때지 않으시고 짚을 깔고 지내시니라. 또 밥티 하나라도 땅에 떨어진 것을 보시면 반드시 주우며 말씀하시기를 “장차 밥 찾는 소리가 구천(九天)에 사무치리니 어찌 경홀히 하리오. 쌀 한 톨이라도 하늘이 아느니라.” 하시니라. 2:128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천하의 모든 병을 대속(代贖)하여 세계 창생으로 하여금 영원한 강녕(康寧)을 얻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각종 병을 번갈아 앓으시되, 한두 시간씩 고통스러워하시며 병을 앓으신 뒤에는 갑자기 일어나 앉으시어 “약을 알았다.” 하시고...... 병을 다 앓으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다 대속하였으나 오직 괴병은 그대로 남겨 두고 너희들에게 의통(醫統)을 전하리라.” 하시니라. 10:28

뭇 생명의 아버지이신 증산 상제님께서는 종종 가난에 헐벗고 굶주린 창생들에게 녹(祿) 붙여 주는 공사를 행하시니 동냥아치들의 얼굴과 머리를 씻겨 주시고, 가지고 계신 돈을 탈탈 털어 주시며 입고 계신 옷을 동냥아치와 문둥병 환자들에게 벗어 주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주시는 등 살길을 열어 주시니라. 9:32

상제님의 공사와 공도의 정신


창생이 성공하는 공사 정신


상제님께서 “두 집이 망하고 한 집이 성공하는 공부를 하려는가?” 하시거늘 형렬이 대답하기를 “열 집이 망해도 하겠습니다. 열 집이 망하고라도 한 집만 성공하면 열 집이 다 성공될 것 아닙니까?” 하매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자네 말이 옳도다. 그러나 모두 자네 같은가? 어려운 일일세.” 하시고 세 번 다짐을 받으시고서야 방에 들어가 앉으시니라. 3:11:8~10

비록 사사로운 일일지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 두기만 하면 그 도수에 이르러 공사(公事)와 사사(私事)가 다 함께 끌러지느니라. 3:228:17

사사로움을 배제하는 천지공사


상제님의 늙으신 부친께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 이따금 약방으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시니라. 하루는 성부께서 어린 이순의 손을 잡고 약방에 오시어 살림의 어려움을 말씀하시므로 성도들이 돈을 내어 드리려 하거늘 상제님께서 괴로운 표정을 지으시며 언성을 높여 말씀하시기를 “아,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느냐! 그 돈은 천지 돈이니 손 못 댄다.” 하시니라. 9:176

상제님께서 하루는 태인으로부터 손바래기에 이르시어 부친께 여쭈기를 “나의 일은 추호도 사정(私情)이 없으니 부디 죄를 짓지 마소서.” 하시니라. 2:105:9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천지공사에는 인정도 사정도 없느니라.” 하시니 성도들이 “어찌 그렇습니까?” 하고 여쭈거늘 말씀하시기를 “허허~, 각기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어찌 그 뜻을 다 받아 줄까.” 하시니라. 6:136

천하사 일꾼에게 필요한 일심의 도심주


이 일은 남조선 배질이라. 혈식천추 도덕군자의 신명이 배질을 하고 전명숙(全明淑)이 도사공이 되었느니라. 이제 그 신명들에게 ‘어떻게 하여 만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천추에 혈식을 끊임없이 받아 오게 되었는가.’를 물은즉 모두 ‘일심에 있다.’고 대답하니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 6:83:4~6

심주(心柱)라는 기둥이 허망하면 분각에 이리 자빠지고 저리 자빠지고 하지마는 도심주를 복중(腹中)에서 턱밑에까지 단단히 받쳐 놓으면 아무리 요동해도 꿈쩍도 아니하며 도끼로도 못 찍고 짜구로도 못 깎고, 끌로도 못 쪼으며 톱으로도 못 자르고 썩지도 않고 불로도 못 태우고 벼락이라도 못 때릴 터이니 부디 영구장생(永久長生) 하는 도심주를 잘 가지라. 천지집을 지으려면 기둥이 완전히 서야 천지공사가 무궁하리라.” 하시니라. 8:51:6~10

태모님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일심으로 신봉(信奉)하라. 너희들 신세를 그르치지는 않으리라.” 하시고 “증산 상제님과 내가 합덕(合德)하여 여는 일이니 너희들은 팔 짚고 헤엄치기니라.” 하시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천지공사와 후천 도수는 너희들의 아버지께서 말(斗) 짜듯 틈이 없이 짜 놓았으니 부귀영달(富貴榮達)과 복록수명(福祿壽命)이 다 믿음에 있는 고로 일심만 가지면 안 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일은 후천 오만년 도수니라.” 하시니라. 11:139

상제님 도의 결실, 3변 도운


나의 일은 삼변성도니라


상제님께서 구릿골 약방에 계실 때 하루는 여러 성도들을 벌여 앉히시고 큰 소리로 글을 읽히시니 이러하니라. 삼국시절三國時節이 수지지어사마소誰知止於司馬昭리오 삼국시절이 사마소에서 대세가 그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또 말씀하시기를 “술수(術數)가 삼국시절에 나와서 해원하지 못하고 이제야 비로소 해원하게 되었느니라.” 하시고 “내 일은 삼변성도(三變成道)니라.” 하시니라. 5:356

태모님께서 오성산으로 이사하신 뒤 하루는 공사를 행하며 말씀하시기를 “삼변(三變)이라야 성국(成局)이니라.” 하시고 “오성(五聖)의 기령(氣靈)을 배합케 한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오성산은 북방(北方) 일육수(一六水)라야 채울 수 있으리라.” 하시니라. 11:369:1~3

우리 일은 삼대三代밖에 없다


하루는 공신이 이르기를 “남자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야 둘이 하는 사람의 절반도 못 따른다.” 하고 “세상을 잘 살피고 잴 줄 알아야 살아남는다. 늘 지혜를 모아서 세상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잣대질하라.” 하니라. 

이즈음 공신이 제자들에게 거듭 말하기를 “그분 말씀은 끝까지 하나도 틀림이 없네. 앞으로 때가 되면 자네들 마음 시키는 대로 되는 세상이 오니 일심으로들 해야 하네. 큰 스승은 후에 청운교(靑雲橋), 낙수교(洛水橋)를 타고 오시리니 주위가 어쨌든 끝까지 잘 마치게.” 하니라. 

하루는 공신이 이르기를 “우리 일은 삼대(三代)밖에 없다.” 하니라. 10:149:1~5

일월日月 진주의 사람 둘


상제님께서 형렬이 새로 지어 올린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마쳤음을 성도들에게 선포하시니 김경학(金京學)이 여쭈기를 “공사를 마치셨으면 나서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사람 둘이 없으므로 나서지 못하노라.” 하시거늘 경학이 재촉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그렇게 되지 못하느니라.” 하시니라. 10:27:1~5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실 때 천지에서 신도가 크게 내리매 여러 차례 용봉(龍鳳)을 그려 깃대에 매달아 놓으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용화동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다시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이르시기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용봉기를 꼭 꽂아 두라.” 하시며 다짐을 받으시니라. 11:365:1~3

도통 전수의 도맥 공사


하루는 태모님께서 성도들을 앉히신 후에 전선필에게 명하시어 중앙에 황룡기(黃龍旗)를 세우고 그 아래에 청수 한 동이를 떠다 놓게 하시니라. 이어 “말뚝을 박아라.” 하시고 일곱 고랑으로 된 우산을 펴서 말뚝에 잡아매게 하시며 다시 “청수를 우산 위에 부어라.” 하시거늘 그대로 행하매 태모님께서 “우산의 몇 고랑이나 물이 내려갔느냐?” 하고 물으시는지라 선필이 아뢰기를 “우산의 여섯 고랑만 물이 흐르고 한 고랑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마저 내려가야 할걸.” 하시며 “더 부어라.” 하시므로 더 부은 후에 “다 흘렀습니다.” 하고 아뢰니라. 이에 태모님께서 기뻐하시며 “세상을 다 추려 잡을 수는 없으니 이만하여도 종자(種子)는 하겠다.” 하시고 “대도통은 육(六)으로 되느니라.” 하시니라. 11:138

태전이 도운 결실의 성지


상제님께서 하루는 금산사로 가시는 길에 계룡봉(鷄龍峯) 옆을 지나시며 말씀하시기를 “태전(太田)은 현룡재전(見龍在田)이요 여기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니라.” 하시고 금산사에 이르시어 공사를 행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은 혁신불(革新佛)이니라.” 하시니라. 3:84:2~4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꾼이 콩밭(太田)에서 낮잠을 자며 때를 넘보고 있느니라.” 하시고 “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太田)에 꽂았느니라.” 하시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새 세상이 오면 서울이 바뀌게 되느니라. 큰 서울이 작은 서울 되고, 작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되리니 서울은 서운해지느니라. 5:136:1~3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용화동은 동요동(東堯洞)이요, 건곤(乾坤)의 사당(祠堂) 자리이니 미륵이 다시 서니라.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나니 법은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것 아니더냐. 앞으로 태전(太田)이 서울이 되느니라.” 하시고 “사람 욕심 내지 마라. 올바른 줄 하나 치켜들면 다 오느니라.” 하시니라. 11:36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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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 지상선경 건설의 주벽 절대신앙의 화신 마테오 리치 대성사


*천지신명이 받드는 마테오 리치 대성사
이마두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은 그를 떠받드나니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라. 이마두가 24절(節)의 역(曆)을 개정하여 때(時)를 밝히매 백성들이 그 덕(德)을 입어 왔으나 이 뒤로는 분각(分刻)이 나리니 분각은 우리가 쓰리라. 이마두는 보민신(保民神)이니라. (도전 4편 12장)


*마테오 리치 대성사의 큰 공덕
이마두(利瑪竇)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현 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되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어다. 그러나 그 공덕을 은미(隱微) 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서양 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쳤느니라. (도전 2편 30장 1~12절)


*이마두 대성사를 치하하심
태모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마당에 단을 설치하고 치성 절차와 같이 제수(祭需)를 진설하게 하시니라. 이어 계란과 양주(洋酒)를 그 위에 놓게 하시고 쌀밥과 계란을 잘 비벼서 놓으시며 “많이 드시라.” 하고 권하신 다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이마두(利瑪竇)의 선술묘법(仙術妙法)을 칭찬하는 공사이며 후천선경 세계 건설에 역사(役事)함을 치하하는 공사니라.” 하시고 성도들에게 시천주주를 읽게 하시니라. 태모님께서 공사를 마치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이마두를 잘 대접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이마두는 서양 명부대왕이니라.” 하시니라. (도전 11편 124장)


*상제님의 일등비서, 리치 신부
서교의 마테오리치 신부는 신명계에서 어떤 분이냐 하면, 리치 신부가 예수 신도지만 공자보다도 우수한 분이고, 부처보다도 나은 분이고, 예수보다 몇 백배 훌륭한 분이다. 역사적인 성자들은 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리치 신부는 죽어서도 인간들을 위해 무슨 방법이 없나 하고 저 별나라까지 쫓아다니면서, 그곳의 문명이기를 받아내려 사람들에게 일러 주었다. 이렇게 참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러고는 하다하다 할 수 없으니까 동서양 신성불보살을 전부 거느리고 상제님께 달려가서 ‘우리 능력으로는 좋은 세상을 열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상제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임어하셔서 세상 사람을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했다. 그래 상제님이 “내가 괴롭기는 하지만 리치 신부를 데리고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대순하다가 오직 너희 동토에 그쳐서 미륵불에 30년 동안 명을 붙여 있다가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천명과 신명을 내려 최제우를 내었으나 수운이 천명을 다하지 못하므로 그 명을 거두고 직접 오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셨다. 상제님은 그렇지 않더라도 오실 분이지만, 리치 신부가 그렇게 하소연을 해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다. 리치 신부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현재 상제님의 1등 비서라고 할 수 있다. 
(도기 140년 3월 17일 대구 수성도장 태상종도사님 도훈 말씀 중)


13세기 몽골초원에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났다. 분열되어 있던 몽골 부족을 하나로 묶은 그의 이름은 테무친, 즉 위대한 칸 칭기즈칸이었다. 강력한 초원 전사들의 말발굽 아래 동서양의 모든 나라가 영향권에 들어가 그 판도가 과거 환국桓國의 그것과 유사해졌다. 그랬던 대몽골제국은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에 이르러서는 대칸의 직할령과 여러 칸국으로 나뉘어 느슨하게 연합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주역의 건괘 효사에서 딴 ‘원元’으로 고치고 고려를 복속시켰다. 마지막으로 중원 남방에 명맥을 유지하는 남송을 압박했다. 휘몰아쳐오는 원나라 군대 앞에 마지막 충신 문천상의 정기가正氣歌를 뒤로 한 채 남송은 힘없이 멸망하였다(1276년). 

이후 원제국은 후계자 선정을 위한 권력 쟁탈전으로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고려인 출신인 주원장에 의해 다시 몽골초원으로 쫓겨났다. 중원에는 명나라(1368년~1644년)가 들어서게 되었다. 명나라는 중원 왕조 최초로 장강 이남인 남경을 토대로 화북 일대까지 통일한 왕조였다. 이후 주원장의 아들 3대 영락제 때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겼고,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와 손자 선덕제 때 명은 국력을 충실하게 쌓아 최전성기를 누렸다. 명나라는 황제독재권이 강화되어 황제를 둘러싼 환관들의 권력횡포가 그 어느 때보다 심했고, 대외관계는 정화의 남방 원정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암군暗君, 혼군昏君들이 많았고, 특히 명황제 중 통치기간이 제일 길었던 13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1563년 9월 4일~1620년 8월 18일: 만력제를 위해 조선은 만동묘를 짓고 망국의 그날까지 제사지냈다)은 정치에 흥미가 없어 30여 년간 정사를 환관들에게 맡겨 두었다. 오직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조선의 임진왜란에 대해서만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만력제 치하인 1582년 중국 남방 포르투갈의 거점지인 마카오에 이립而立(서른)의 나이에 접어든 서양 가톨릭의 한 신부神父가 찾아왔다. 훤칠한 키, 푸른 눈에 큰 종鐘소리와 같은 음성을 지녔고, 신학 철학 법학 천문학 수학 등의 여러 학문을 연마한 고결한 인격을 갖춘 이였다. 동서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장 훌륭한 인물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대성사大聖師였다.

내가 믿는 천주님이 동양의 상제님과 동일한 분이다


서기 1603년 만력 31년 7월 백중이 지난 다음 날, 휘영청 밝은 보름 달빛이 명나라 수도 베이징의 시가지를 교교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50세의 나이에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해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벽안碧眼의 노인은 붓에 먹을 묻혀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오국천주吾國天主는 즉화언상제卽華言上帝니라.
He who is called the Lord of Heaven in my humble country is He who is called Shang-ti(Sovereign on High) in Chinese.
내 나라에서 천주님이라 불리는 분은 중국에서 상제라 불리는 분이시다.


또 한 구절을 썼다.

역관고서歷觀古書하야 이지상제여천주특이이명야而知上帝與天主特異以名也라.
Having leafed through a great number of ancient books, it is quite clear to me that the Shang-ti(Sovereign on High) and the Lord of Heaven are different only in name.
수많은 중국 고전을 검토해 본 결과, 상제님과 하느님 아버지이신 천주님은 이름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주1)


이제야 매듭을 짓는구나. 노인은 눈을 들어 창문 밖 달빛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촛불 아래 서문을 작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썼다. 利瑪竇書. 20여 년 전 이 땅에 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려 한 마테오 리치 대성사였다. 

그가 이날 마무리 한 책은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DE Deo Verax Disputatio: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이다. 리치 대성사는 동양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단순히 교리 해설에만 그치지 않고 유불선의 고전을 인용해서 가톨릭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유불선 사상과 가톨릭의 사상을 대비시켜 양자가 서로 배타적인 게 아니고 서로 보완적이라는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처음에는 ‘천학실의天學實義’라고 했다. 이 책의 저본을 수년간 친구들에게 읽혀서 문장을 수정하고 더 완벽한 내용으로 바꾸었으며, 문장 형식도 독자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는 대화체를 택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천주교 교리가 변증론적으로 구명되어 있다. 이 책을 완성한 리치 대성사의 나이 어언 오십사 세. 얼굴은 주름살로 가득했고 머리와 수염에는 서리가 내렸다. 그는 중국인으로 죽기로 결심하였다. 

하느님의 군인으로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동방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 년 전인 1552 임자년 10월 8일 이탈리아 동북부 교황령의 소도시인 마체라타Macerata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날은 성녀 브리짓(St. Bridget)의 축제일이고, 태어난 시간은 토성이 지평선에 머물고 천칭궁天秤宮 자리가 한 중간에 와 있었다. 이는 길조로 해석되고 이 아이는 장차 귀인이 될 것이라 했다. 약국을 경영하는 한편 시청에서 시장을 역임하기도 한 조반니 바티스타 리치G. B. Ricci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 아이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였다. 그는 태어날 때 세례를 받고 가정교사인 예수회 회원 벤치베니N. Bencivegni신부에게 영적 훈련을 받아 기도 생활이 몸에 배었다. 가톨릭 문명권에서 자라 자연스레 성직자가 되기를 소망했고, 예수회가 설립한 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라틴어와 헬라어 등을 연상에 의한 기억법으로 익혔는데, 이는 훗날 중국 선교 때 많은 중국인들이 그의 기억법을 배우기 위해 몰려드는 광경으로 이어졌다.

16세가 되던 1568년 아버지 뜻에 따라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그는 1571년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예수회에 가입하고 정식 신부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엄격한 계율 아래 영적 훈련과 기도생활을 통해 리치 대성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성스러운 소명을 확신했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쳐 하느님께 순종하고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종으로 써주시길 간절히 염원한 그는 이듬해 대학으로 돌아가 독일 출신의 클라비우스Ch. Clavius 교수에게 기하학, 천문학, 역학曆學 등을 배웠고, 해시계, 자명종, 지구의 등의 제작법도 전수받았다. 대학 과정을 마친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인종, 국가, 대륙을 넘어 인류를 사랑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최상의 삶은 지적 추구도 하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포교의 삶이었다. 이후 엄격한 선발 과정에서 몇 번 실패를 겪은 후 1576년에 인도에 파견될 선교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1578년 9월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뒤에야 당시 포르투갈의 동남아 및 중국 무역의 중심지인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인들의 현지인에 대한 박해와 강제 개종, 노예 매매,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미 인도에 당도하여 동양 포교의 기초를 닦은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주교는 개종이란 무력이 아닌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우선 현지인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선교 방침을 내렸고 이를 받아들인 리치 대성사는 당시 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어를 비롯해 정치, 경제, 풍속, 종교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여 외국인은 입국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 조경肇慶 지부사知府使 왕반王泮은 리치 대성사가 수학에 능하며 지도와 자명종, 지구의 등을 제작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리치와 루기에리Michael Ruggieri 신부를 초청했다. 드디어 1583년 9월 10일 초청을 받은 리치 대성사와 도반 루기에리 신부는 중국 본토인 조경에 당도하게 되었다.

독행천리에 백절불굴, 일심의 화신


당시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에서 온 상인을 노략질이나 일삼는 ‘야만인’으로 여기고 서양인을 몹시 경계하였다. 여기에 중국인은 오직 자신들만이 온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오만한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리치 대성사는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승복을 입고 삭발을 감행했다. 이는 일본에서 승려가 존경을 받는다는 발리냐노 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도 그러리라고 속단한 결과였다.

리치 대성사는 길에 버려진 병자를 간호하는 등 현지인들을 위해 활동하였고, 이름도 중국식으로 지었다. 이마두利瑪竇. ‘마두瑪竇’는 ‘마테오’의 음사이며, 성은 ‘리치’를 본떠 ‘리利’라 하였다. 이는 벼(禾)를 칼(刀)로 추수한다는 의미와 함께(당연히 가을을 상징한다) 동서양 문화를 통합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서방에서 온 현자’라는 뜻의 ‘서태西泰’라는 별호도 얻게 되었다. 이를 합쳐 ‘리서태마두’, 혹은 ‘서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고민에 빠졌다. 즉 인격신 하느님(Deus)을 나타내는 중국어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는 중국인 포교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입교를 희망한 청년이 자신의 집에 조그만 제단을 만들고 벽에 ‘천주天主’라고 써 붙인 것을 보고 무릎을 치며 이를 번역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천天’은 천지만물을 주재함을 뜻하고, ‘주主’를 통해서 하느님의 유일신적, 주재신적, 인격신적 개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때 새로 부임한 신임 총독 유절제劉節齊가 외국인 체류 불허 방침을 내세우면서 이마두 대성사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시켰다. 이 때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마치 높은 산에서 큰 돌을 굴려 올리다가 정상에 도달할 무렵 돌이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원래 리치 대성사를 추방해 서양식으로 지은 성당과 사제관을 차지하려던 유절제가 이런 행위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해 리치 대성사 일행을 소주韶州에 정착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불승이든 도교의 도사든 모두 우상이나 숭배하고 술수나 부리는 어리석은 이들로 인식되고 있음을 깨달은 이마두 대성사는 예수회 선교사가 유학자와 가장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때부터 전형적인 유자儒者 복장을 하게 되었다.

황제를 만나 정식으로 포교활동을 인정받고 싶던 이마두 대성사는 1595년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조선에 파견할 명군을 거느리고 베이징으로 가던 병부시랑兵部侍郞 석성石星을 알게 되었다. 이때 석성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배가 전복되어 친구인 수련수사 바라다스를 잃고, 자신도 실신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후 석성과도 헤어져 육로로 어렵게 남경南京(Nanjing)에 도착하였으나 끝내 거주를 허락받지 못했다. 다시 남창南昌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원을 했다.

“하느님 당신이 저의 계획을 아시는데 이 어려운 사업을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계시해 주었다. “장차 북경과 남경 두 황도에서 너를 도와줄 것이다.”

희망을 안고 도착한 남창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병부시랑 석성의 수행원 가운데 한 의생醫生을 방문한 자리에서 황족인 건안왕建安王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비상한 기억력을 선보이며 우의를 돈독하게 다졌다.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난 즈음, 남경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사대부들의 예방을 받으며 교유하였다. 이곳에서 서양의 과학과 수학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였으며 1600년에는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또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1584년)에 누락됐던 조선朝鮮을 추가하고 중국어로 지명을 표기하여 재판을 내었다. 이 지도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같은 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800km의 물줄기를 거슬러 북경北京(Beijing) 길에 올랐다가 환관 마당馬堂에게 억류되기도 하였다. 당시 환관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세금을 포탈, 횡령하였고 거액의 뇌물을 받기도 했다. 이는 집권자 만력제의 무능과 명 왕조의 쇠락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에 이른 이마두 대성사는 이곳에서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이지조李之藻(1571~1630: 세례명 레오)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이마두 대성사는 그에게 해시계 등의 제작법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동양의 고전을 서양 언어로 번역하고, 서양의 문명을 동양에 전달하기도 했다. 저술은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20여 권이 넘었으며, 종교, 과학, 수학, 음악(8음계와 피아노의 전신인 클리비코드 연주법), 미술(투시법에 의한 원근법을 적용한 서양화법) 등 전 방위에서 초적극적인 활동으로 동양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서양의 그레고리 역을 번역하였고, 24절기의 날짜를 계절에 맞게 고쳐 ‘시헌력時憲曆’이라고 했다.(주2) 

하지만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는 마침내 격무를 이기지 못하고 1610년 5월 3일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중국에 온지 27년 되던 해였다. 긴 여행과 이질적인 풍토로 인해 중병을 많이 앓았고, 포교 사업은 생각만큼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난항을 겪었으며, 숱한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 추방되고 억류되고 심지어 도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친형제와 같이 사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아 식사를 거르게 되고 과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궁의 어의도 조선의 인삼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5월 11일 오후 6시 지상에서의 천국 건설을 이루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는 결국 상제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향년 58세. 숨을 거둘 때 사람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聖人, 眞是聖人)”이라고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19일, 만력제는 북경성 밖 책란柵欄에 이마두 대성사의 묘지를 하사하였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서양인을 위해 묘지를 하사한 사건으로 비문에는 ‘야소회사리공지묘耶蘇會士利公之墓’라고 적혀 있다. 베이징 부윤 황길사黃吉士는 이마두 대성사의 묘실에 ‘모의입언慕義立言’(의를 숭모하고 저술로써 말씀을 세움)이란 편액을 증여했다. 

이마두 대성사는 생전에 유럽의 다양한 자연과학적 지식과 서양 문물 전반을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중국인의 삶과 문명에 기여를 하였고, 동시에 스스로 중국 전통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동서양간의 호혜적이고 우호적인 문화교류의 모델을 확립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동서 문명 사이에 다리를 놓은 ‘최초의 세계인’이자 동양에 개화의 문을 열어 준 선구자로 칭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 죽어서도 상제님 나라를 건설하리라!(주3)


정열적인 포교활동을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 하지만 대성사의 꿈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후에 천국 건설을 위해 심혈이 경주되는 빨간 정성을 기울인 모습과 천주이신 상제님의 지상 강세 배경에 관련된 놀라운 비의를 우리는 상제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대성사의 위대한 사후 행적을 도전道典 말씀을 통해 들여다보자.

동양 문화의 위대성을 살아서 경험한 대성사는 동양 문명신을 지상천국 건설에 동참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동양의 문명신 가운데 상제님께서 밝혀주신 이가 있으니 바로 진묵대사震默大師이다(본지 2015년 7월호 참조). 이마두 대성사와 진묵대사가 신명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17세기 중반은 서양에서 상업주의 및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시기였다. 이는 과학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고, 기계를 바탕으로 한 산업혁명이 촉발되었다. 산업혁명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굉장히 짧은 시간에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의 역사 과정을 통해 보거나, 이성적으로 보아도 납득이 되지 않은 일대 사건이었다.(주4) 누군가가 미리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체계적으로 추진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바로 이마두 대성사를 비롯한 동양의 문명신, 도통신들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이는 상제님께서 그 숨은 공덕을 밝혀주시기 전에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인 것이다. 또한 이전까지 경계를 넘나들지 못했던 동양신, 서양신의 경계를 허물고, 천상 지하 지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도 이마두 대성사였다. 이로써 전 세계는 활발하게 서로 문명이 섞이고 교류하여 이웃 나라와 내 집처럼 상통하고, 물건도 마음대로 교통하게 된 이른바 ‘비빔밥’문명이 되었다. 천국의 문명을 본떠 만들어진 현대 문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줄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 편리함을 주어 지상천국이 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자연의 신성을 배제하고 물질주의 및 과학만능주의에 젖어버린 인간의 헛된 자만심과 모든 것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 인간의 교만함과 잔인함, 인간성 타락 등은 스스로를 우울과 불안, 공허와 무기력에 빠뜨려 자신도 모르는 죽음의 길로 질주하도록 이끄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지옥행 열차처럼. 

이마두 대성사의 본래 의도는 동양의 정신문명을 바탕으로 과학문명이 조화를 이룬 조화선경을 지상에 여는 것이었는데, 인간의 이기적이고 미숙한 의식은 이 모든 의도를 인류가 진멸지경에 처하게 되는 폐멸閉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때 이마두 대성사는 오직 한 분을 생각하였고,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 불타와 보살들을 설득하여 함께 그 분 앞에 나아갔다. 헤어날 길 없는 멸망의 깊은 수렁에 빠진 인류를 구원해 주실 단 한 분! 천주님 즉 상제님께 눈물로 호소하였다. 이마두 대성사와 여러 신성보살들의 애끓는 정성으로 마침내 참 하느님이신 상제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게 되었다. 지상에 강세하시는 상제님을 모신 분도 바로 이마두 대성사였다.

처음에 상제님께서는 이마두 대성사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바티칸 천개탑에 내려오셔서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인연 있는 개벽의 땅 한반도에 인간으로 강세하셨다. 마침내 열리게 될 지상천국으로 인류가 건너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상제님 지상강세의 배경에는 이마두 대성사의 큰 공덕이 숨어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배경도, 앞으로 열리게 될 후천 선경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 모든 이면에도 이마두 대성사의 큰 음덕이 있음을 모든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과정의 근본 바탕에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원대한 인류애가 자리하고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제 천주실의 하권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마두 대성사가 우리에게 전한 은혜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보려 한다.

중국 선비는 말합니다. “우리(인간)의 몸은 천주로부터 나왔는데도 오랫동안 천주의 도리에 어두웠습니다. 다행이 선생께서 팔만 리 풍파를 마다하지 않고 먼 곳에까지 와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수하시고, 중국의 가르침과 다르고 같은 점을 환하게 드러내어 주시며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서 지난날의 잘못을 훤하게 깊이 깨닫게 하였으니 은혜를 입음이 참으로 많습니다. ... 저는 마땅히 집으로 돌아가서 가르침 받은 것을 온습하고 궁구하며 그것을 회념하고 기록함으로써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근원으로 귀의하는 곧은 도리(歸元直道)를 다 듣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의 공덕이 넓고 크심을 또한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절대순명의 군대조직으로 구성된 가톨릭 수호단체, 예수회(Societas Jesu)


이마두 대성사는 가톨릭의 ‘예수회(Societas Jesu)’ 소속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를 다녔고, 법학을 공부하던 중 예수회에 가입하여 평생 예수회의 선교사로 그 사명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렇다면 예수회란 어떤 단체인가?

16세기 중반, 유럽의 가톨릭은 루터와 츠빙글리, 칼뱅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으로 천 년 이상 누려온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때 1534년 8월 15일 에스파냐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한때는 출세의 야욕에 불탔다가 수사修士가 된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1491~1556)와 6명의 동료들에 의하여 이 위기를 타개할 단체가 설립되었다.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군인이었던 로욜라는 1521년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 전투 중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는 작센의 루돌프라는 카르투시오 회원이 쓴 〈그리스도 전〉과 자코보 데 보라지네라는 도미니코 회원이 엮은 〈성인 열전〉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새롭게 회심을 하고, 몬트세라트 근처의 작은 도시 만레사의 한 동굴에서 1년 동안 하루 7시간가량 기도와 묵상을 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훗날 신학을 공부하여 동료들과 함께 교황에 대한 순명, 즉 어느 곳이든, 무슨 일이든 즉시 달려가서 행할 수 있는 즉응성卽應性을 중시하고 영혼 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예수회라는 수도 단체를 설립하였다.

예수회란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영성수련을 통해 하느님과 인류에 봉사한다는 기치 아래 청빈, 정결, 순명의 세 가지 서원을 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구습을 과감히 폐지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채택했다. ‘하나님의 군대’인 예수회는 비교적 민주적인 구성을 지닌 중세 기원의 다른 교단과는 달리 실제적이고 능률적인 구성을 채택하여 전제 군주제와 비슷한 체제 안에서 예수회원 대다수는 교단 운영에 관해 평생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 총장은 종신제로 그 이름도 ‘장군general’이라 불렀다. 철저한 복종과 엄격한 규율이 조직적인 선교활동의 효과적 실행을 위해 요구되었다. 그러면서 수도자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적이고 영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제복을 채택하지 않았는데 이런 현실적인 태도는 이마두 대성사가 승복을 입었다가 곧 선비의 옷으로 바꾸는 등의 현지 적응주의적인 조치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이 교단의 목적에는 예수회 선교사 자신의 정신적 완성뿐 아니라 타인의 정신적 완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부들이 해외에 나가 전도하고 교육 사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하느님에게 더 큰 영광’을 목표로 한 보편주의의 실천이었다. 그 실천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동양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가톨릭 포교에 이바지했으며, 유럽 각지에 대학을 설립해 갈릴레이나 데카르트를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근대 문명을 꽃피운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예수회 선교사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과학적 성과를 체득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 선교에 성공을 거두게 되는 계기 되었다. 즉 당시 예수회 선교사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논리학, 라틴어, 법학 등의 학문적 소양, 거기에 ‘하느님의 군대’라는 전투적이며 종교적인 확신과 영성훈련을 가진 지덕체를 지닌 종합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마두 대성사는 천주님에게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선교를 위하여 어느 나라에서든 살겠습니다.”는 서약을 했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동서 사상을 융합한 이마두 대성사의 저작들

이마두 대성사는 중국에 와서 30여 년간 중국 지성인들의 중심 텍스트인 사서四書의 번역을 비롯하여 종교와 천문, 지리와 수학 등 포교에 필요한 저술을 이십여 권이나 남겼다.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서오경이라는 한문 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사람으로 최초로 공자를 소개하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사서를 읽고, 비판하기도 하며 동료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통독해 주었고,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건륭제(청淸나라 고종, 1736~1795) 때 수집, 정리된 [사고전서존목총서四庫全書存目總書]에 수록된 이마두 대성사의 저술은 [천주실의(1603)]를 비롯하여 [건곤체의乾坤體義(1605)], [기하원본幾何原本(1607)], [25언(1604)], [기인십편(1608)], [교우론(1595)], [기법記法(1596)] 등이 있다. 이중 [건곤체의]에 관해 [사고전서]에서는 ‘이마두는 중국과 서양의 문자에 모두 통달하여, 책을 지음에 한자와 중국말로 하니 새김이 있어 번잡하지 않다’고 칭찬하고 있고, [기인십편]에 대해서는 ‘그 말이 두루 근원을 찾고 널리 분별되어 있어 자못 경청할 만하다’라고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그의 저작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주실의]는 일차적으로 천주교 교리 문답서 형식을 취하면서 단순한 교리 해설에 그치는 게 아니고 동양 유불선 고전을 인용하면서 가톨릭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서양 정신세계의 정수를 동시에 관통한 최초의 인문학적 금자탑으로 서양 가톨릭에서 신앙하는 아버지 하느님이 곧 동양의 최고신인 상제님이라는 위대한 진리 선언을 하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 등에게 영향을 주어,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 신관이 창조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신앙에서 인격신으로 드러나게 된다.

[25언]은 그리스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로마시대의 에픽테토스Epictetus(60~120)의 교훈적이고 수양론적인 글[소책자, 엔케리디온Enchiriidion]을 선택하여 번역한 것으로 다른 종교를 배격하지 않고 일반적인 덕에 대해서 논했으므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중 제 13언을 인용해서 이마두 대성사의 신관을 음미해 보자.

“인仁의 대단(大端:큰 단서)은 상제上帝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에 있다. 상제님은 만물을 낳은 근원이며 만물을 주재하는 본래의 근원이다(이 부분은 에픽테토스 원문에는 없는 구절을 삽입했는데, 그렇게 함으로 해서 하느님다운 정의를 내렸다.) 어진 사람은 상제님의 실재함을 믿으며 또한 상제님은 지극히 선하여 조금의 잘못도 없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명령한 바를 한 번 들으면, 억지로 하고자 기다리지 않는다.”

[기인 십편]에서 기인畸人이란 중국인의 눈에 비친 이마두 자신을 말한다. 이 말은 장자 제 6장에서 따온 것으로 인간성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천주실의]의 연장선에서 성경과 기독교 성인의 저술, 그리스 철인들의 사상, 이솝 우화의 내용 등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 

[교우론]은 이마두 대성사가 쓴 최초의 한문 저술로 난창에서 황족인 건안왕과 나눈 진실한 우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최초의 저술이기에 그 말씨에 미숙함이 있다고 한다. 그 중 53번째 문구에는 ‘상제께서 사람에게 두 눈과 두 귀, 두 손과 두 발을 준 것은 두 친구가 서로 돕도록 하고자 함이니 그래야 비로소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우友라는 글자는 옛날에 쌍双이라 했으니 이는 곧 양손이다. 있어야만 되고 없어서는 안 된다. 또한 붕朋이라는 글자는 옛날에 우羽라 했으니 이는 곧 두 개의 날개로, 새는 이를 갖추어야 비로소 날 수 있다. 옛 현자가 친구를 보는 것이 어찌 이러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서술돼 있다. 

마지막으로 [기법記法]은 기억술에 관한 저술이다. 이 저술은 이마두 대성사 자신이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인데다 학창 시절 연마한 연상법에 의한 기억술을 응용하는 한편, 로마시대의 학자인 플리니우스Plinius의 저서 [박물지], 작자 미상의 수사학 관련 서적인 [헬레니우스], 그리고 퀸틸리우스의 웅변술에 관한 책 등에서 힌트를 얻어 지었다. 이마두 대성사는 ‘기억 체계의 장소’를 이렇게 설명한다. 머릿속에 자기가 실제로 가 보았거나 아니면 가상적인 방을 그린 다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물건이나 인물, 문자 등을 여기에 저장해 두었다가 자유롭게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 사상을 융합하고 이를 번역 전파한 이마두 대성사는 동서 문화 교류사에 있어 위대한 거인이었다. 어떤 문화를 다른 문화로 번역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문화에 ‘적응’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상생출판, 2015)
『천국문명을 건설하는 마테오 리치』 (양우석, 상생출판, 2008)
『천주실의』 (마테오 리치, 송영배역, 서울대 출판부, 1999)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조너선 D 스펜스, 주원준 역, 이산, 1999)
『마테오리치: 동서문명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히라카와 스케히로, 노영희 역, 동아시아, 2002)




주1. 여기에 실은 『천주실의』 본문과 번역 등은 『증산도의 진리』 책을 참고하였다. 훗날 조선에서는 이 『천주실의』책을 들여와 독자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다. 이는 선교사에 의하지 않은 매우 독자적인 흐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의 지식층에 의한 도입이었기 때문에 교리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결국 이 책의 저술은 우리나라 천주교 도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주2. 시헌력時憲曆: 시헌時憲은 이마두 대성사의 호이다. 시헌력은 청에서는 순치 2년 1644년부터, 조선은 효종 4년 1653년부터 시행되었다.

주3.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 뜻 있는 자는 한 번 뜻을 세우면 평생을 한결같이 일관하여 필경에는 성취한다는 말. 이 부분은 도전 2편 30장 말씀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주4. 산업혁명 이전 세계 문명의 중심은 동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주겸지朱謙之 저),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로버트 B. 마르크스Robert B. Marks 저)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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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출 '범어사 칠성도' 오는 13일 돌아온다 http://media.daum.net/culture/art/newsview?newsid=20150710204523102 조선후기 불화 '범어사 칠성도'가 오는 13일 스위스에서 돌아온다

☞칠성도(七星圖)는 북두칠성을 비롯하여 하늘의 여러 별들을 형상화한 칠성신을 그린 불화다. 북극성을 여래화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불로 하여 그 협시보살인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 그리고 7성(七星), 즉 북두칠성의 화현(化現)인 7여래(七如來)와 7원성군(七元星君)이 그려졌다. 주로 칠성각(七星閣)에 봉안되지만, 산신, 독성과 함께 삼성각에 봉안되기도 한다.

☞칠성은 원래 천체를 신앙하는 도교와 관련된 민간신앙의 신이었으나 불교로 수용되면서 인간의 수명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의 유행과 함께 칠성각이 많이 건립되었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으로, 칠성각 건립과 칠성도의 유행은 불교가 민간신앙과 융합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태을천의 상원군님은 도의 뿌리요, 인간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상원군님은 동서의 생명문화, 도통문화의 궁극적 근원에 계신 분입니다. 그 때문에 태을천상원군님, 곧 태을신太乙神을 '선불지조仙佛之祖', 모든 신선과 부처의 조상이라 일컬으며, 불가에서는 '치성광여래'로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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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음 5.10)


☂매년 음력 5월 10일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를 아시나요?


☞‘5월 10일은 태종(太宗)의 기신(忌辰)이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서 내외의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상(上)이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상이 승하하고 이어서 경기 일원에 큰비가 와서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매년 이날에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라고 하였다.’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 중에서)

☞매년 음력 5월 10일이면 어김없이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는 문헌상으로는 성종 때의 선비 이행(李荇)의 <용재집(容齋集)>에 처음 나타납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태종우에 대한 언급이 있고, 영조 재위 40년인 1764년 음력 5월 10일에도 비가 내리자 영조가 ‘이는 선조들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민간전승입니다.‘http://goo.gl/FDMAAX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대왕 전후 때까지 궁을 지어놓고 태을천 상원군님, 태을신(太乙神)께 제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대표적으로 태종 이방원이 죽기 직전 조선이 오랜 가뭄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태을전(太乙殿)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태을신께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기우제 태종 이방원은 세상을 떠났으며, 그 끝에 비가 내렸고, 매년 같은 날에 비가 내려 태종우(太宗雨)라고 전한다. (도훈 中)


☂하늘의 상제시여 비를 내려주소서 

☞용의눈물 조선 태종의 기우제 장면1 https://youtu.be/g216CJYIDyw

☞용의눈물 조선 태종의 기우제 장면2 https://youtu.be/LFKJwQ1lY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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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에 언급된 129600년]

◈영화 몽키킹:손오공의 탄생(2014)의 한 장면 https://youtu.be/lnu3hduWgeI

 "여기는 선단을 만드는 곳입니다. 저는 선기를 모아 상제님(옥황상제)을 위한 선단을 만들지요. 신선이 선단을 먹으면 법력이 몇배 고강해지지요. 한알이 3만년 분의 수련과 맞먹습니다. 

상제님은 젊은 날부터 드셔와 지금은 1750겁을 수련하신 셈입니다. 1겁은 129600년입니다. 그를 통해 삼계를 관장하고 계십니다."


◈서유기의 한 대목 : 석가모니가 하늘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손오공을 제재하기 위해 들려주는 말입니다. "난 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석가모니 존자이다. 기껏해야 원숭이에 불과한 놈이 어찌 주제넘게 옥황상제의 보좌를 빼앗으려든단 말이냐? 옥제님은 어릴 때부터 수행에 힘써서 지금까지 천칠백오십겁을 지내온 분이다. 한 겁이란 12만 9천 6백 년을 이르는 말이다. 그만큼 끝없이 큰 도를 깨치느라고 얼마만큼이나 되는 세월을 보냈는지 생각해 봐라. 너도 허튼 소리를 걷어치우고 일찌감치 귀의하는 것이 좋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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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음력 5월 10일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

☞‘5월 10일은 태종(太宗)의 기신(忌辰)이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서 내외의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상(上)이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상이 승하하고 이어서 경기 일원에 큰비가 와서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매년 이날에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라고 하였다.’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 중에서)
☞매년 음력 5월 10일이면 어김없이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는 문헌상으로는 성종 때의 선비 이행(李荇)의 <용재집(容齋集)>에 처음 나타납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태종우에 대한 언급이 있고, 영조 재위 40년인 1764년 음력 5월 10일에도 비가 내리자 영조가 ‘이는 선조들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민간전승입니다.‘http://goo.gl/FDMAAX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대왕 전후 때까지 궁을 지어놓고 태을천 상원군님, 태을신(太乙神)께 제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대표적으로 태종 이방원이 죽기 직전 조선이 오랜 가뭄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태을전(太乙殿)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태을신께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기우제 태종 이방원은 세상을 떠났으며, 그 끝에 비가 내렸고, 매년 같은 날에 비가 내려 태종우(太宗雨)라고 전한다. (도훈 中)

하늘의 상제시여 비를 내려주소서
☞용의눈물 조선 태종의 기우제 장면1 https://youtu.be/g216CJYIDyw
☞용의눈물 조선 태종의 기우제 장면2 https://youtu.be/LFKJwQ1lY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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