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을 넘어 포스트 고조선으로

캐나다 퀸즈대학  박병섭 교수  


STB초청특강 고조선을 딛고서 포스트 고조선으로 1강 한국사의 쟁점에서'환단고기'의 위치는 어디인가 


1강 - 한국사의 쟁점에서 '환단고기'의 위치는 어디인가?  환단고기 기록은 대부분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연결고리인 경우가 많다.한국사에서 환단고기의 진서,위서 논쟁이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방법론(해석학, 계보학 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STB초청특강 고조선을 딛고서 포스트 고조선으로 2강 배달국 치우천왕은 신화인가 


2강 - 배달국의 치우천왕 신화인가? 치우천왕은 우리 배달국의 14대 자오지 환웅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다.군신(軍神), 병주(兵主) 등‘전쟁의 신’으로 통하며 고대의 전설적인 존재로 중국의 여러 고서와 한국의 환단고기에 나온다.


STB초청특강 고조선을 딛고서 포스트 고조선으로 3강 고조선 누구의 나라인가 


3강 - 고조선, 누구의 나라인가?   환단고기의 낙랑과 관련한 기록은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연구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전개한 ‘난하 유역의 한사군의 낙랑과 한반도 대동강가의 낙랑’이라는 두 개의 낙랑론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STB초청특강 고조선을 딛고서 포스트 고조선으로 4강 고구려의 역년은 몇년인가 


4강 - 고구려의 역년은 몇 년인가?   고구려 역사 900년의 미스터리.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 환단고기의 기록 비교를 통해 명확하게 알수 있으며, 특히 단군세기의  '기원전 232년에 해모수가 공화정치를 철폐하고 만백성의 추대에 의해 단군이 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900년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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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고쳐라. 
-일본국왕은 천황으로 바꿔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사진설명에서 김구를 삭제하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2012년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심사에서 수정권고한 내용입니다. 일제의 한국침략을 합법화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국사편찬위원회가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주류사학계는 단군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에 대한 연구를 국수주의로 몰아붙입니다. 

광복 68년, 여전히 우리는 일제가 채운 족쇄를 차고 있습니다. 1945년 일제는 패망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아직도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한 이들이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교원양성소를 통해 일제식민사관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 국사교과서를 통해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군국주의, 중화패권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이 땅의 역사교과서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사를 약술하는 데서 그치고 있고, 일제의 역사날조만행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중일의 역사전쟁이 날로 격화되는 가운데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일제 식민사관의 틀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오늘의 식민사학자들은 역사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지금 식민사관 구조를 해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영구히 일제 식민사학에 지배될지 모릅니다.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박사의 강연에서 식민사학, 그 실체를 밝힙니다. 

[들어가는 글] 
2012년 11월 15일, 오늘이 무슨 날이냐? 102년전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점령당한 후 67년전 우리 대한민국은 해방이 됐죠. 

그러나 우리의 역사관은 67년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제 식민사관이 지배해 왔습니다. 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대한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해왔습니다. 상해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백암 박은식 선생, 만주에서 돌아가신 석주 이상용 선생, 여순감옥에서 돌아가신 단재 신채호 선생, 이분들에 대한 공격은 해방 6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그런 공격이 과연 합당한가. 역사학의 가장 기초적인 일반원칙에 비춰봤을 때 과연 합당한가.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검증해보는 자리입니다. 


일본 강경파와 손잡은 친일세력 _일진회와 노론당파


102년 전, 우리나라가 망할 때 온 백성들이 울고불고 목숨을 끊고 망명하고 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부동반하여 일본 가서 자랑스럽게 사진 찍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1908~9년 무렵 친일파들의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게 되냐 하면, 나라 팔아먹는 경쟁을 서로 치열하게 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일진회라고 불렸던 친일세력과 인조반정 이래로 250년을 집권한 노론 당파, 일진회와 노론, 양쪽에서 나라 팔아먹는 경쟁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는 정치 주류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문관 온건파가 있고, 또 하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심의 무관 강경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강경파와 손잡고 바로 조선을 점령하자는 합의를 했는데, 석 달 후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에서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후 일본 통감부로 부임하는 인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입니다. 대한제국을 바로 점령하자는 강경파입니다. 

매국경쟁에 앞장선 이완용과 이인직

그렇게 되니까 이완용이 대단히 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 계열의 데라우치가 일진회와 손을 잡고 나라를 먹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런 불안감이 든 이완용이 비서인 이인직을 시켜서 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쓰와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몰래 주도하게 됩니다. 이 비밀협상에서 이완용과 이인직이 가장 알고 싶은 게 뭐였겠습니까? ‘우리가 나라를 넘기면 우리에겐 뭘 줄거냐?’ 통감부 외사국장이 외교부 장관입니다. 고마쓰가 하는 말이 ‘나라를 넘기면 조선 귀족령을 만들어서 너희들은 조선의 귀족으로 봉해주고 그리고 따로 특별예산을 편성해서 막대한 돈도 주겠다.’ 그랬더니 이인직이 ‘그렇게 관대한 조건이라면 하등 어려울 것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간 뒤 일사천리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인직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혈의 누’가 생각나죠?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인직을 뭐라고 가르칩니까? ‘혈의 누’를 쓴 선각자, 이렇게 가르치고 있죠?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한 매국노를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사교과서는 선각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혈의 누의 내용은 안 가르칩니다. 혈의 누의 내용이 뭐냐면,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줬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21세기 백주대낮에 대한민국 학생들이 선각자로 알아야 하는 이인직의 실체죠.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은 76명중 56명이 노론

일본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 나라를 점령하고 10월 7일 약속대로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훈장을 줍니다. 그 중에 왕족들이 있고 당파로 알 수 있는 사람이 64명쯤 됩니다. 조선의 사색당파로 분류를 해보면 남인들은 한명도 없고 북인은 두 명이고 소론은 여섯 명이고 나머지 56명이 전부 다 노론입니다. 250년 동안 인조반정 이래로 집권했던 당파가 조직적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가담을 한 것이죠. 

이 후예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특히 역사학계의 주류를 장악해서 우리 국민들의 역사관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①한사군

우리가 역사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좁히면 일제 식민사관의 대부분, 일제식민사관의 논리구조가 주로 고대사에 집중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이 일제식민사관의 복사판인데 마찬가지로 고대사에 집중돼 있죠. 그런데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고대사 논리가 뭐냐? 

한사군 한반도설을 가르치는 한국 역사교육


한사군은 한강 북부에 있었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반도 북부도 식민지로 시작했고 한반도 남부도 식민지였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식민지는 너희 나라의 운명이다.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해방된 나라에서 초등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려면 먼저 뭘 가르쳐야 됩니까? 이순신 장군을 가르치고 을지문덕을 가르치고 세종대왕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죠. 그런데 우리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인직을 갖다가 선각자로 가르친 그 논리구조, 그 속에서 한사군을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가르쳐왔던 것이죠. 그럼 이 시점에서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왜 한사군은 일관되게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을까요. 

중국의 고대 사서에도 낙랑군은 만주에 있었다


여기서 보시는 『한서』 「설전 열전」에 보면 사고왈, 낙랑속유주. 낙랑은 유주에 속해 있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보면 낙랑군은 옛날 조선국이다, 재요동. 요동에 있다. 『후한서』 「최인 열전, 장잠현」은 속낙랑군, 기지재요동. 낙랑군에 속해 있다.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제가 일부만 뽑아왔습니다만 중국의 고대사서는 한사군, 낙랑군은 만주에 있다고 시종일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것을 인용한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불리한 글은 일체 인용을 안하죠. 

그런데 이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획정하기 위한 구절이 『사기』 「하본기 태강지리지」에 나오는 제일 아랫귀절입니다. 낙랑군에는 첫째 수성현이 있고 두 번째 갈석산이 있고 세 번째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이렇게 기록돼 있죠? 그래서 요 세 가지 정보를 만족시키는 지역을 찾으면 그곳이 낙랑군 지역이고 그 주변 일대가 한사군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류 식민사학계에서는 지금 황해도 수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가 뭐냐? 이병도가 세칭 ‘낙랑군고’라는, 저는 이게 논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성서처럼 떠받드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중국 성은 벽돌성, 우리나라 성은 석성


“수성현,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의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란 이야기죠. 그런데 그 다음에 “수안에는 승람산천 쪽에 요동산이라는 산명이 보이고.” 승람, 동국여지승람이란 책에 황해도 수안군 조에 요동산이라는 산이 나온다. 그게 갈석산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갈석산은 갈석산이고 요동산은 요동산이죠?

그 다음에 동국여지승람 황해도 수안군 관방 방어수세를 적어놓은 “관방조에 후대 소축의 성이지만 방원진의 동서행성의 석성이 있고.” 이 방원진 석성이 만리장성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중국 만리장성 가보시면 벽돌로 만들었죠? 우리나라 성들은 뭘로 만듭니까? 자연석으로, 돌로 만든 석성이죠? 저희가 이번에 지난 7월 내몽골 적봉에 갔더니 중국 사람들도 이야기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쌓은 석성이다. 단군 조선의 석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석성에 올라가봤습니다. 지금의 고구려, 백제성하고 똑같습니다. 석성이라는 것 자체는 벌써 우리 민족의 성이지, 중국의 성이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병도와 그의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역사날조

“또 진지의 수성현 뒤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기효기라는 기재도 있다.” 이건 한마디로 문장 자체가 아니에요. 비문이에요. 왜냐면 이병도씨의 사전 전제가 자기는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 라고 그랬죠? 그러다 논리로 전개하다가 논리가 부족하니까 진지, 진지는 뭐냐면은 중국 고대진서 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조에 보면은 ‘진대장성기소기-진나라 때 장성이 일어나는 지역이다’라고 쓴 이 구절은 그야말로 낙랑군 수성현, 만주에 있는 낙랑군 수성현을 말한 것이지, 황해도 수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논리가 부족하니까 아무거나 뒤죽박죽 섞어놓은 이야기죠? 터무니없는 말이라면 논문에다 쓰지 말아야죠? 


그런데 이병도씨의 모든 논리가 그렇듯이 이것도 자기가 만든 게 아니어요. 이 문장은 원래 이나바 이와기치라는 이병도의 스승이 「낙랑군 수성현 및 진장성 동단에 관한 고」라는 이것도 논문인지 아닌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다 뭐라고 써놨냐면 “수성, 진나라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써놓은 걸 무비판적으로 이병도씨가 추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현재의 주류 식민사학계가 성서처럼 떠받들다 보니까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데 너무 신이 난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한반도에 그려넣었지만 갈석산은 못 그려넣은 이유


중국 동북공정이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작하다가 한국 주류 식민사학계가 자기네 학설에 동조를 하니까 너무 신나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가 바로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중국 사학계의 공식 역사지도집입니다. 이 지도집을 보면은 만리장성이 한반도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죠? 여기 수성이 보이죠? 이게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만든 중국의 공식 지도집이예요.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그런데 이 지도에 보면 낙랑군 수성현을 한반도 내로 끌어들였죠. 만리장성을 끌어들였죠. 그럼 뭐가 빠졌습니까? 갈석산이 빠졌죠? 갈석산은 바로 여기 중국 하북성에다 그려놨어요. 우리 시각만 제대로 서 있으면 이 지도 한장으로 중국 동북공정의 모든 논리는 무너집니다. 

그러면 중국 사람들이 수성현을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만리장성도 끌어들였는데 왜 갈석산은 못 끌어들였을까요? 


갈석산은 너무 유명한 산입니다. 갈석산은 중국에서는 진시황을 비롯해서 아홉 명의 황제가 올라갔다 그래서 구등황제산이라고 불리우는 대단히 유명한 산입니다. 그런데 한나라때 저술된 회남자에 보면, 한사군이 있었다는 시대의 지리인식을 반영하는 회남자 십초군에 동방의 끝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다. 갈석산을 지나면 바로 고조선이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사료들은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석산 주변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이 있습니다. 갈석산이 있는 곳이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인데 중국 수서에 보면 하북성 창려현은 옛날에 수성현, 낙랑군 수성현이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낙랑현에는 수성현이 있고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라고 말한 것이 지금의 중국의 하북성에 있는 창려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믿어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중국의 하북성까지 고조선 강역이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너희들이 먼저 시작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다 너희들 고대 사료에 나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역사관이 바로 서면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ㄷ’ 자도 못 꺼내게 돼 있습니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②임나일본부

그런데 또 하나의 일제 식민사관,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소위 말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입니다. 이 이론은 왜 나왔냐? 쓰다 소키치라는 이병도의 스승, 이 식민사학자가 삼국사기를 보니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그 시기에 경상도 지역에는 강력한 고대국가 신라가 있었고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는 강력한 고대 국가 백제가 있었다. 이렇게 강력한 두 고대국가가 있는데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서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다 가짜로 몰아야 되겠다 이런 발상을 하게 되죠. 그래서 이 쓰다 소키치라는 인물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발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발명품의 가장 원조, 첫 번째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과 원삼국 발명


여기서 시종일관 쓰다 소키치의 사고는,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왜 혹은 왜인 기록대로라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최초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 마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런 식의 논리를 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최근까지도 가보면 원삼국실이라는 게 있었어요. 원삼국실이 뭐냐? 낙동강 유역에서 칼이 하나 나왔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해보니까 A.D2세기 때라고 나옵니다. 그럼 뭐라고 쓰면 됩니까? 신라시대! 그럼 간단하죠?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A.D1세기 때 금동관이 나왔어요. 뭐라고 쓰면 되요? 백제시대! 하면 간단하죠? 그러나 이 식민사학자들 머릿속에 3세기 4세기에 백제 신라는 없었다. 있어도 조그만 부락이었다. 그러니까 신라 백제란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원삼국, 이런 걸 하나 발명해가지고 원삼국론이라고 써놓은 것입니다. 

백제사 400년을 말살하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 뭐라고 쓰고 있느냐. 백제에 관해서 여기 보시는 대로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B.C18년에 온조 임금이 백제를 건국했다’ 라고 기록했죠? 그런데도 국사교과서에서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백제가 건국됐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 이병도 씨가 “나의 연구한 바로는 엄밀한 의미의 백제의 건국은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 되었다고 믿는 바이다. 고이왕 이전은 부락정치 시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라고 해서, 자기의 스승 쓰다 소키치가 이야기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백제사 400년을 전부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③식민지 정체성론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에 해체됐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전혀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주류대학 국사학과, 국사관, 국사교원양성소를 장악하여 주요대학 국사학과와 국사관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하고 가르친 결과 여러분이 초등학교 때 한사군에 대한 이야기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됐지만 우리 역사는 지금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교육현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한국역사의 정체성 주장

그렇다보니 이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뉴라이트라 말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 이것이 왜 문제냐? 이 문제는 좌우의 잣대로 바라보시면 안됩니다. 여야의 잣대로 바라봐서도 안됩니다. 이 이야기는 좌우 여야를 뛰어넘는 우리가 코리안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 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에요.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한 논리 중에 하나가 정체성론停滯性論입니다. 정체성론은 뭐냐? 우리 역사는, 한국 역사는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때부터 19세기까지 상태가 똑같았다. 한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병도씨가 자기 책에 한사군을 극찬하는 논리가 나오고, 21세기 백주대낮에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되었다’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죠. 일제정체성론에 따르면은 우리는 해방 이후에 지금쯤 다 굶어죽었어야 돼요. 지금 우리사회가 이렇게 발전한 것과 저 식민사관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사 바로세우기 과제

이뿐만 아니라 법학, 음악, 미술, 국문학 등 조금 공부해보면 전부 다 일제 통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 67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종합적으로 연구검토한 적이 없습니다. 이걸 연구 검토해가지고 받아들일 점이 있으면 계승하고, 버릴 점이 있으면 철저하게 버리는 작업을 해야 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두번째로 한국사 관련 국가기구, 여러분이 낸 세금 가지고는 식민사학 하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 자민당 돈을 받아서 해야죠. 일본에 가서 일본 극우파 돈을 받고 중국에 가서 중국 패권주의 공산당의 돈을 받아가지고 식민사학 하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식민사학을 하느냐? 이제는 ‘이 구조를 해체하고 판을 전면적으로 새로 짤 때가 됐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국사교과서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다시 써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이 너무 재밌어서 국사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게 돼 있어요. 국사교육이 암기과목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기초사안

이제는 식민사관 비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나아가 이들이 장악한 한국사 관련기구를 해체, 재편하여 한국사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재구성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여야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21세기에 순국선열의 피와 한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21세기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사안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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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은,주,진과 북방유목민족오순제 1부 1강 


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은,주,진과 북방유목민족오순제 1부 2강 






오 순 제 박사 약력


1. 학력:
서울공업고등학교 주물목형과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졸업(석사)
명지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박사)

2. 경력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 역임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역임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부회장
재단법인 한민족문화산업진흥재단 부총재
사단법인 하천협회 역사문화특별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촛불봉사단 이사장

3. 교직경력
한성디지털대학교 교양학부 외래교수 역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보존관리학과 겸임교수 역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외래교수


4. 저서
『한국역사기행』, 형설출판사, 1994.
『한성백제사』, 집문당, 1995.
『우리 高句麗 찾아가기』, 다시, 2003.
『漢城百濟의 都城體制 연구』, 학연문화사, 2005.

5. 공저
『高句麗山城과 海洋防禦體制 연구』, 백산자료원, 2000.
『河南의 역사와 문화』, 국학자료원, 2001.
『大高句麗 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2004.
『韓國 여성들 무엇을 믿고 살았을까』, 집문당, 2005.
『高句麗의 역사와 대외관계』, 서경문화사, 2006.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국토해양부, 2009.
『한국하천 콘텐츠 개발연구』, 국토해양부, 2009.
『칼과 철』, 시몽, 2010.
『한국 하천 지명사전』, 국토해양부, 2011.
『한국의 하천경관』, 국토해양부, 2011.
『강과 한국인의 삶』, 나남, 2012.

6. 논문
「<日本書紀>를 통해본 韓·日 關係」,『자유』142호, 자유사, 1985.
「滿洲와 滿洲族의 역사」, 『國學』, 국학연구소, 1992. 
「2C말~3C중엽에 걸친 遼東地域 정치권력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伽倻史 新考」,『가야문화』4호, 가야문화연구회, 1994. 
「가야사신고」,『昌寧文化』14호, 창녕문화원, 1994. 
「2C말~3C중엽 高句麗의 遼東 진출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선사와 고대』 11집. 한국고대학회, 1998.
「百濟의 東明과 高句麗의 朱蒙」,『실학사상연구』12집. 박상환박사 정년기념. 무악실학회, 1999. 
「百濟佛敎 初傳地에 대한 연구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 -」,『명지사론』11, 12집 (명지대학교 사학과 창설 20주년 기념특집). 명지사학회, 2000. 
「百濟 漢城時期 都城體制의 연구」,명지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0.
「百濟 佛敎에 대한 재고찰 -摩羅難陀와 初傳地를 중심으로-」,『명지사론』13집, 명지사학회, 2002.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의 재고찰-放學洞土城과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향토서울』62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2.
「百濟 都城의 都市構造와 信仰遺跡의 공간적 배치」,『선사와 고대』19, 한국고대학회, 2003.
「漢城百濟時代 漢北地域의 防禦體制」,『한북사학』제1집, 한북사학회, 2003.
「古代 洞窟 信仰遺跡 및 거북바위(龜岩)에 대한 연구」 『명지사론』14. 15합집, 명지사학회, 2004.
「河南市, 江東區地域 漢城百濟時代의 金星墳 발생과 鴨綠江, 臨津江, 日本地域의 前方後圓墳 관련연구」,『漢北史學』 제3집, 한북사학회, 2006.
「遼西지역 紅山文化의 前方後圓墳 발생과 卒本扶餘, 百濟, 日本의 前方後圓墳에 대한 관련성 연구」,『한북사학』 제4집, 한북사학회, 2007.
「漢城百濟의 都城과 3韓5加, 3山5嶽의 傳統思想」,『한북사학』 제5집, 한북사학회, 2008.
「河南市 고골의 漢城百濟時代 平地都城과 南漢山城의 推定 王宮址에 대한 연구」,『山城論誌』제2집, 광주문화권협의회, 2008.
「하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4권 제4호, 한국하천협회, 2008.
「古代 運河에 대한 연구」,『한북사학』제6집, 한북사학회, 2009.
「二聖山城 신앙유적의 재해석」,『山城論誌』제3집,광주문화권협의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삼국시대유적」,『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고려·조선시대 유적」,『물과 미래』제42권 제12호, 한국수자원학회, 2009. 
「오산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한강하구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수자원학회논문집』43권 7호, 한국수자원학회, 2010년.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위례문화』13호, 하남문화원,2010
「이성산성 건축유구의 성격분석」,『위례문화』14호, 하남문화원, 2011.
「강과 한국의 역대 왕도」,『국토연구』통권369호, 국토연구원, 2012.7. 
「칠지도의 곡나철산과 한성백제시기 서산지역의 담로」,『서산의 문화』,서산향토문 화연구회,2012.12.29

7. 학술활동

* 고구려 유물, 유적, 문화, 역사 등의 멀티미디어 컨텐츠 개발, 이구식, 윤명철, 오순제,정보정보통신산업진흥원,1999년
* 백제한성시기 하남시 고골일대의 도성체제,21세기 하남의 재발견,하남역사문화연구회,2001.2.2
* 백제불교 초전지와 하남,이성산성 국제학술 심포지엄,하남신문사,2002.5.10
* 한성백제시기 한반도 중부지방의 중요매장문화, 한민족의 기원과 매장문화 학술세미나, 세계거석문화협회,2006.5.26
* 하남시와 강동구지역 한성백제시대의 금성분과 압록강·임진강유역 및 일본의 전방후원분,제3회 학사재학술세 미나,강화역사문화연구소·학사재,2006.5.27 
* 하천의 역사와 문화-역사와 문화유적을 통해 본 하천의 중요성 고찰-, 2008 하천환경 세미나, 한국하천협회, 2008. 12. 2
* 한국 고대의 운하,2010 세계도시물포럼, 한국수자원공사, 2010. 
*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하남문화원,2010.11.12
* 이성산성의 건축유구의 성격분석,하남학술세미나,하남문화원,2011.10.7
* 4대강의 역사와 문화, 2012 세계강포럼, 한국수자원공사,2012.9.
* 시베리아 바이칼,몽골,한반도를 통해본 한민족의 시원문화,제1회 학술대회,국제신인류학회,2012.12.8

8. 언론활동

* 한배달, 북소리, 자유, 해동불교신문 등에 역사관련 연재
* EBS "역사속으로 여행(일연스님의 일생:개천절 특집)"에 출연
*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 백제하남위례성 관련 출연
* KBS 9시뉴스 등에 “백제 하남위례성 발견(1992)”, “마한의 왕궁 발견(2004.10.25)”, “세계최대고분 발견(2005.10.31)” 와 MBC,SBS 뉴스 등에 다수출연
* 2001년 5월 31일 한계레신문(고구려유적훼손)
* 2003년 1월 2,3,4일 문화일보(한성백제의 서남방어선을 찾다)

9. 국내조사

* 백제의 하남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백제의 하북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마한의 목지국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맥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예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원가야 왕궁터와 우두봉(소시머리)의 발견 및 조사
* 고령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금관가야,아라가야,대가야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통일신라의 북원경(원주),서원경(청주),중원경(충주),금관경(김해)의 치소발견 및 조사
* 화순 지석천의 마한의 왕궁 및 소도유적, 백제시대의 역사문화유적 조사
* 4대강사업기획 자문(역사문화분야)
* 금강변 공주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임하댐 주변 안동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및 자문
* 낙동강변 창녕,영산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안성의 안성천,한천유역의 역사문화유적조사
* 한강변 남양주지역 역사문화유적조사

10. 해외학술답사
* 중국의 고구려,백두산,장보고유적 답사
* 중국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유적 답사
* 일본 속의 백제,고구려유적 답사
* 국내성, 졸본지역의 고구려유적조사 
* 중국의 황하문명(상해,소주,항주,곡부,정주,낙양,서안) 대탐사
* 대마도의 우리문화 학술답사 
* 중국 산동지역의 우리문화유적답사
* 중국의 상해,소주,항주지역 답사
* 실크로드답사
* 내몽골유적답사
* 인도, 네팔 불교유적 답사
* 티벳, 촉나라유적 답사
* 파키스탄의 인더스, 간다라문명과 실크로드유적 답사
* 바이칼, 몽골 답사
* 일본 구주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일본 오사카,아스카,나라,교토,오쯔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몽골 고비사막유적 조사
* 몽골 동부지역유적 조사 
* 일본 구주,야마구찌,오카야마,히로시마,시코쿠,와카야마,이즈모 등 우리유적조사
* 중국 남경,단양,양주 지역 삼국과 육조시대 유적조사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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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말하는 식민사관 해체론

- 식민사관에 의한 근대사의 병폐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잔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두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쾌락을 다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저에게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이봉창 의사가 거사 직전 백범 김구 선생께 한 말 



민족 항일기 어릴 적 상해에서 배웠던 역사 이야기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를 그냥 어깨 너머로 읽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식민사관이 어떻게 주류 사학이 되었나’ 하는 역사적인 해설을 하기 이전에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전에 중앙아시아에 사는 어떤 고려인, 우리 민족 중에 거기 추방당해 있었던 분들을 고려인이라고 그러죠. 우리 동포들입니다. 제가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를 하기 때문에 고려인들하고 조금 유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하는 얘기가, 우리 부모님께 배우기를 단군이 우리 할아버지인줄 알고 있었는데 요새 선교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같이 들린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단군이 신화로 날아가 버렸으니 단군이 없는 자리에 누가 나타납니까. 아브라함이 나타났죠. 주체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단군상의 목이 어느 날 갑자기 다 달아나 버렸어요. 신화인데 왜 귀신을 여기다 갖다놨냐 이거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유태인이 얼마나 강합니까? 미국에 있는 여야 정치인 전부 이스라엘 유태인에게 굽실거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여러분이 생각하는 월스트리트가 뭡니까? 유태인들의 월스트리트입니다. 이 정도로 힘을 쓰는데 실상 유태인은 얼마 안 됩니다. 세계 인구로 따지면 0.5% 될까 말까예요. 이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879년에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태인 출신 헤롯이라는 사람이 시오니즘이라는 걸 처음 만들었어요. 시오니즘이라는 게 뭐냐? 유태인의 역사를 똑바로 하고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자. 말하자면 우리 독립운동 하시는 분들이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세우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자” 이것과 똑같은 정신입니다. 

지금 우리는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이유는 뭐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됐는데 일제가 남겨준 유산인 식민사학에 젖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지금 식민사학인지 구민사학인지 모르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발전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금까지 발전한 것은 솔직히 우리의 창조적 기능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 베끼고 남의 것 수입해서 조립하는 이런 거 잘해왔어요. 맞죠? 우리가 애플처럼 창조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창조적 능력이 없는 건 왜냐? 우리가 아직도 남에게 의존하고 우리의 것은 못났고 남의 것이 좋아 보이고 남의 것을 배워야 되고. 남의 것이 우리 것보다 우월하다고 늘 생각하는 이 열등감, 이런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식민사학의 병입니다. 지금 일본은 이렇고 중국은 저렇고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근본은 뭐냐? 식민지 근성, 식민지적으로 살아온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야말로 새로운 주류 사학, 주체적인 창조적인 데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모임의 주된 생각이며, 주된 흐름이며, 주된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같이 갑시다. 감사합니다. ◎ 


독립운동 편찬사업으로 탄압받은 이승만 정권기 이야기


오늘은 그동안 우리 집안에서 목격했던 이야기 중에서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편찬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친 선열들의 추도식을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무명용사들의 추도식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바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었습니다.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죠. 독립운동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한 것입니다. 둘째는 친일반역자에 대한 의법조치입니다. 법에 의해서 그 사람들을 처단하고 징계하는, 이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라는 것이죠. <그림 희산 김승학>

그래서 희산 할아버지께서 해방 후에 독립운동사에 착수한 것은 이러한 의지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당시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 임정에 함께 있을 때, 한국통사와 한국독립혈서를 쓰면서 약속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독립사라는 할아버지 저서에 그대로 담겨 있는데 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일찍 조국광복을 위한 운동 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주재하던 때에 백암 박은식 선생이 저술한 〈한국통사〉라는 나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지혈서〉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 모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후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로부터 여러 해 그 참담한 투쟁을 통하여 사료가 작성되는 대로 당시 내몽골 포두에 계셨던 조병준 선생께 보관시키고 불행히 왜경에게 체포된 후 팔다리가 부서지는 수십 차례의 악형은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모처에 은신하면서 자료를 수합하였다가 일제 항복 후 이 사료를 40여년간 내 피땀의 결정으로 삼아 귀국하였다.” 



이것이 당시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자, 그런데 해방 후 46년부터 49년까지 독립운동사를 주재해서 독립운동사 복간사업을 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1949년 독립신문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백범 피살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혹을 천명한 사설이 문제가 되어서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날 바로 정간이 되었고, 그후 복간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피난지 부산에서 겨우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1953년 5월입니다. 지금 부산의 초량동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애국동지원호회〉라는 독립운동단체 산하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벌써 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사무실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결국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독립운동사가 발간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사 집필에 힘쓰다가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시고 1964년 12월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저희 아버님(김대업)께서 그것을 이어서 196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독립사를 간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 독립운동사가 나타나는 것을 집요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친일세력입니다. 독립운동사가 나타나게 되면 그들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까닭에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사는 198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계에서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1980년이 되면 독립운동의 지도급에 있던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는 그분들의 기록이나 생생한 증언자료를 남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에 지금 현재 우리 독립운동사는 일제가 남긴 재판기록이나 일제자료를 가지고 역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는 찾았으나 역사는 찾지 못한 그런 민족입니다. 단재 선생은 일찍이 역사로 망하면 100년을 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방된 지 67년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식민사관이 여전히 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라가 앞장서서 식민사관을 강요하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의 득세로 이 땅에서는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친일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됐습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호는 백암(白巖)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1915년 3편 114장으로 구성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했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는『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 동기를 한국통사로 지적할 만큼 민족적 자쉼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해 봉안 일화


식민지생활, 독재,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체제이고 억압적 존재입니다. 지금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지난 식민지 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아직 식민지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관만 문제가 아니라 해방 후 70년에 가까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근성 가운데 노예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 뼈아픈 사실을,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끼며 자신을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식민지 근성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노예근성이죠. 노예적 근성입니다. 사대주의 국제주의 운운하는 가운데, 해방 후 제 나라는 찾지 못하고 국제적 교류에 따라 국제사회가 시키는 대로 눈치껏 따라가면서 약삭빠르게 출세하고 감투을 찾고 돈을 벌고, 해보자고 하는 이런 생각! 해방되던 그날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것이 팽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명칭을 대기도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것이 소위 건국준비활동이었고 이것이 소위 나라를 미국 혹은 소련에 의지해 나라를 혹은 내 출세 길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시대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군상 속을 헤매고 다니는 가운데 제가 만난 것이 아나키스트 그룹이었고 그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일은 일제 잔재를 소탕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제 잔재의 소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일제의 가장 악질적인 경찰, 이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박살내자. 이것이 그분들이 제 1차로 한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소탕하지 않고서 내가 어떻게 독립을 찾을 수 있겠느냐. 이것이 그분들의 1차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 동지들이 그 다음에 한 일은 무엇이냐. 선열들을 추모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순국선열들이 일제와 싸우면서 피를 흘렸고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이 죽어갔는데 해방된 공간에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을 빼놓고서 무슨 일을 할 것이냐. <그림 윤봉길 이봉창 유해 이관> 

1945년 12월 20일 전후 태고사, 지금의 조계사에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며 성재 이시영 선생이며 많은 어른들이 모였었습니다. 광복회의 회장을 하셨던 이강훈 선생이 그 당시에 발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모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어른들의 유해를 봉안하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일본에서 총살 당하고 쓰러진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분들이 일본 어느 구석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 이런 세태인데, 우선 이분들을 국내로 모시는 일부터 우리 해봅시다. 만장일치로 결의가 됐습니다. 

결국 1946년 6월 15일 부산으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울부짖으면서 삼인의 유해 앞에 경배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3열사를 효창공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민족의 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파괴, 암살 등을 필요조건으로 보고 급진적 폭력주의를 택하여 강한 항일운동의 한 면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운동사, 묻혀진 이야기


제가 일제 식민사관이라고 쓰지 않고 식민사관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굉장히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갔지만, 겉으로는 갔지만, 지금 후유증으로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죠.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신제국주의, 신식민사관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아까 잠깐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국사 전부 엉터리예요. 이거 정말 만신창이가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때 국사교육을 선택과목으로 했다가 지금 필수로 한다고 그러죠. 그러나 누더기가 된 국사를 그대로 가르치면 하면 뭘 하느냐 이거예요. 고장 난 자동차를 타고 가면 사고 나죠? 수리를 하고 깨끗한 자동차를 타고 가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고대사 근대사 조선사 고려사, 이거 전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고치자, 고쳐가지고 타고 나가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강자를 좋아하고 돈 많은 사람을 좋아하고 절대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을 편들지 않습니다. 요즘 독립운동사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서울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있잖아요. ‘뉴라이트’라고 합니다. 좌냐 우냐. 지금은 그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식민사관에 반대되는 역사관이 뭡니까? 민족사관입니다. 민족사관이 아니면 안 됩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일본은 황국사관이 있었어요. 이것이 우익입니다. 극우파예요. 여러분, 극우파 무섭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칼 들고 온 깡패, 구마모토 깡패들이 동아일보에 숙소를 정해놓고 명성황후를 찔렀고, 지금도 그 칼을 전시하고 있어요. 구마모토에 가보시면 박물관에다가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전시해놓고 있어요. 일본에 가면 검은 차가 방송하고 다녀요. 극우의 자동차입니다. 

일본에서 기차를 타면 터널이 많은데 그 터널 다 우리가 팠어요. 파다가 죽은 사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중국도 당한 적이 있지만 정말 우리 약한 나라 되면 안 됩니다. 패자는 말이 없다. 역사에 등록이 안 되요. 그러기 때문에 민족사관을 하려면 우리가 이겨야 됩니다. 과거와 같은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아까 말씀하신 의사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어떻게 했어요? 총살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민족의 손에 의해 처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쓰지 않고 뭐 암살했다, 뭐 등등 정말 힘없는 역사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사관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우리가, 한국이 중심이 돼야 해요. 세상에 1년에 250억이나 돈 들여가지고 왜 남의 역사를 연구해 줍니까? 중국 역사를 연구해 주더군요. 우리가 우리 역사를 해야지 왜 남의 역사를 하고 있습니까? 한국이 중심인 민족사관을 정립합시다. 감사합니다. ◎


식민사관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면


오늘 식민사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식민사관이라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제 나라 역사를 작게 만들고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그래서 우리는 원래부터 형편없는 민족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한 하나의 기본생각이라고 봅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얘기가 여러 번 나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제가 심란합니다. 왜 심란한가 하면 중국에서 동북공정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총리공관 삼청각에서 장관들 하고 여럿이 모였습니다. 총리 주재 하에 회의를 했는데 대응할 방법이 있습니까? 여러분, 대응하는 방법은 있잖아요. 우리가 역사연구를 열심히 하고 잘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중요한 학술지에 실어서, 그 사람들의 논리가 허구고 이론적으로 틀리고 실제적으로도 틀리다고 바꿔주면 됩니다. 그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연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교수 출신은 저밖에 없었거든요. 

아, 그래서 돈을 300억인가 들여가지고 고구려재단인가 하는 연구재단을 만들어줬더니, 그후 다시 좀더 증자를 한 거 같은데, 설마 그 자리에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취직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야말로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더니, 뽑아 쓸 사람, 책임자 한 사람을 잘못 앉혔어요. 나중에 보니 전부 다 그런 부류들만 자리에 앉혀 놨어요. 

여러분, 역사 기록을 잘 남겨놔야 고위 공직자들이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을 합니다. 이승만 정권 십수년 동안 독립운동 위해서 애썼다고 훈장받은 사람이 몇분이나 될까요? 딱 두명밖에 없습니다. 한분은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고, 한분은 여기 계시는 이종찬 원장님의 종조부, 이시영 부통령님입니다. 해방 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추서하고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죠. 

그리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국회도 없었고 거기서 법도 만들었습니다. 그때 국가기록보존소라는 것을 제가 국가기록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연락을 해서 거기에 이관된 문서목록을 좀 가져오라고 그랬더니, 이관된 문서가 딱 두 건밖에 없더라구요. 한 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현판이고 또 한 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직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나라입니까.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한테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 거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다 고쳐나가야 합니다. 

36년이라는 세월 잠깐이지만 그후에도 60년 세월이 지나고 거의 100년의 세월에 거쳐 이런 식민사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역사강연이 아니라 어찌 보면 운동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 운동에 동참해주시는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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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전한,후한제국과 흉노제국 오순제 2부 1강 


STB콜로키움 북방유목민족사 전한,후한제국과 흉노제국 오순제 2부 2강 






STB 콜로키움 강좌는 기존의 강의물 형식에서 벗어나 각계 저명한 교수 한 분을 초청하여 매회 색다른 주제를 가지고 상생문화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함께 강좌를 진행하여 서로의 토론의 장을 마련한 프로그램입니다.


사회자는 발표자의 의견을 정리하고 콜로키움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발표 내용에 대한 의문사항을 주체적으로 말하고 들으며 토론을 통해 주제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간다.

 

STB 콜로키움을 통해 보다 넓고 깊은 지성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 입니다.


오 순 제 박사 약력


1. 학력:
서울공업고등학교 주물목형과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졸업(석사)
명지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박사)

2. 경력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 역임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역임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부회장
재단법인 한민족문화산업진흥재단 부총재
사단법인 하천협회 역사문화특별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촛불봉사단 이사장

3. 교직경력
한성디지털대학교 교양학부 외래교수 역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보존관리학과 겸임교수 역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외래교수


4. 저서
『한국역사기행』, 형설출판사, 1994.
『한성백제사』, 집문당, 1995.
『우리 高句麗 찾아가기』, 다시, 2003.
『漢城百濟의 都城體制 연구』, 학연문화사, 2005.

5. 공저
『高句麗山城과 海洋防禦體制 연구』, 백산자료원, 2000.
『河南의 역사와 문화』, 국학자료원, 2001.
『大高句麗 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2004.
『韓國 여성들 무엇을 믿고 살았을까』, 집문당, 2005.
『高句麗의 역사와 대외관계』, 서경문화사, 2006.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국토해양부, 2009.
『한국하천 콘텐츠 개발연구』, 국토해양부, 2009.
『칼과 철』, 시몽, 2010.
『한국 하천 지명사전』, 국토해양부, 2011.
『한국의 하천경관』, 국토해양부, 2011.
『강과 한국인의 삶』, 나남, 2012.

6. 논문
「<日本書紀>를 통해본 韓·日 關係」,『자유』142호, 자유사, 1985.
「滿洲와 滿洲族의 역사」, 『國學』, 국학연구소, 1992. 
「2C말~3C중엽에 걸친 遼東地域 정치권력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伽倻史 新考」,『가야문화』4호, 가야문화연구회, 1994. 
「가야사신고」,『昌寧文化』14호, 창녕문화원, 1994. 
「2C말~3C중엽 高句麗의 遼東 진출에 대한 연구 - 공손씨 정권을 중심으로-」,『선사와 고대』 11집. 한국고대학회, 1998.
「百濟의 東明과 高句麗의 朱蒙」,『실학사상연구』12집. 박상환박사 정년기념. 무악실학회, 1999. 
「百濟佛敎 初傳地에 대한 연구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 -」,『명지사론』11, 12집 (명지대학교 사학과 창설 20주년 기념특집). 명지사학회, 2000. 
「百濟 漢城時期 都城體制의 연구」,명지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0.
「百濟 佛敎에 대한 재고찰 -摩羅難陀와 初傳地를 중심으로-」,『명지사론』13집, 명지사학회, 2002.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의 재고찰-放學洞土城과 河南市 고골을 중심으로」,『향토서울』62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2.
「百濟 都城의 都市構造와 信仰遺跡의 공간적 배치」,『선사와 고대』19, 한국고대학회, 2003.
「漢城百濟時代 漢北地域의 防禦體制」,『한북사학』제1집, 한북사학회, 2003.
「古代 洞窟 信仰遺跡 및 거북바위(龜岩)에 대한 연구」 『명지사론』14. 15합집, 명지사학회, 2004.
「河南市, 江東區地域 漢城百濟時代의 金星墳 발생과 鴨綠江, 臨津江, 日本地域의 前方後圓墳 관련연구」,『漢北史學』 제3집, 한북사학회, 2006.
「遼西지역 紅山文化의 前方後圓墳 발생과 卒本扶餘, 百濟, 日本의 前方後圓墳에 대한 관련성 연구」,『한북사학』 제4집, 한북사학회, 2007.
「漢城百濟의 都城과 3韓5加, 3山5嶽의 傳統思想」,『한북사학』 제5집, 한북사학회, 2008.
「河南市 고골의 漢城百濟時代 平地都城과 南漢山城의 推定 王宮址에 대한 연구」,『山城論誌』제2집, 광주문화권협의회, 2008.
「하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4권 제4호, 한국하천협회, 2008.
「古代 運河에 대한 연구」,『한북사학』제6집, 한북사학회, 2009.
「二聖山城 신앙유적의 재해석」,『山城論誌』제3집,광주문화권협의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삼국시대유적」,『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남한강변 중원지방의 고려·조선시대 유적」,『물과 미래』제42권 제12호, 한국수자원학회, 2009. 
「오산천의 역사와 문화」,『하천과 문화』제5권 제3호, 한국하천협회, 2009.
「한강하구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수자원학회논문집』43권 7호, 한국수자원학회, 2010년.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위례문화』13호, 하남문화원,2010
「이성산성 건축유구의 성격분석」,『위례문화』14호, 하남문화원, 2011.
「강과 한국의 역대 왕도」,『국토연구』통권369호, 국토연구원, 2012.7. 
「칠지도의 곡나철산과 한성백제시기 서산지역의 담로」,『서산의 문화』,서산향토문 화연구회,2012.12.29

7. 학술활동

* 고구려 유물, 유적, 문화, 역사 등의 멀티미디어 컨텐츠 개발, 이구식, 윤명철, 오순제,정보정보통신산업진흥원,1999년
* 백제한성시기 하남시 고골일대의 도성체제,21세기 하남의 재발견,하남역사문화연구회,2001.2.2
* 백제불교 초전지와 하남,이성산성 국제학술 심포지엄,하남신문사,2002.5.10
* 한성백제시기 한반도 중부지방의 중요매장문화, 한민족의 기원과 매장문화 학술세미나, 세계거석문화협회,2006.5.26
* 하남시와 강동구지역 한성백제시대의 금성분과 압록강·임진강유역 및 일본의 전방후원분,제3회 학사재학술세 미나,강화역사문화연구소·학사재,2006.5.27 
* 하천의 역사와 문화-역사와 문화유적을 통해 본 하천의 중요성 고찰-, 2008 하천환경 세미나, 한국하천협회, 2008. 12. 2
* 한국 고대의 운하,2010 세계도시물포럼, 한국수자원공사, 2010. 
* 하남시 지명과 유적으로 복원한 한성백제의 역사,하남문화원,2010.11.12
* 이성산성의 건축유구의 성격분석,하남학술세미나,하남문화원,2011.10.7
* 4대강의 역사와 문화, 2012 세계강포럼, 한국수자원공사,2012.9.
* 시베리아 바이칼,몽골,한반도를 통해본 한민족의 시원문화,제1회 학술대회,국제신인류학회,2012.12.8

8. 언론활동

* 한배달, 북소리, 자유, 해동불교신문 등에 역사관련 연재
* EBS "역사속으로 여행(일연스님의 일생:개천절 특집)"에 출연
*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 백제하남위례성 관련 출연
* KBS 9시뉴스 등에 “백제 하남위례성 발견(1992)”, “마한의 왕궁 발견(2004.10.25)”, “세계최대고분 발견(2005.10.31)” 와 MBC,SBS 뉴스 등에 다수출연
* 2001년 5월 31일 한계레신문(고구려유적훼손)
* 2003년 1월 2,3,4일 문화일보(한성백제의 서남방어선을 찾다)

9. 국내조사

* 백제의 하남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백제의 하북위례성 발견 및 조사
* 마한의 목지국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맥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예국의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원가야 왕궁터와 우두봉(소시머리)의 발견 및 조사
* 고령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금관가야,아라가야,대가야 왕궁터 발견 및 조사
* 통일신라의 북원경(원주),서원경(청주),중원경(충주),금관경(김해)의 치소발견 및 조사
* 화순 지석천의 마한의 왕궁 및 소도유적, 백제시대의 역사문화유적 조사
* 4대강사업기획 자문(역사문화분야)
* 금강변 공주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임하댐 주변 안동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및 자문
* 낙동강변 창녕,영산지역 역사문화유적 조사
* 안성의 안성천,한천유역의 역사문화유적조사
* 한강변 남양주지역 역사문화유적조사

10. 해외학술답사
* 중국의 고구려,백두산,장보고유적 답사
* 중국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유적 답사
* 일본 속의 백제,고구려유적 답사
* 국내성, 졸본지역의 고구려유적조사 
* 중국의 황하문명(상해,소주,항주,곡부,정주,낙양,서안) 대탐사
* 대마도의 우리문화 학술답사 
* 중국 산동지역의 우리문화유적답사
* 중국의 상해,소주,항주지역 답사
* 실크로드답사
* 내몽골유적답사
* 인도, 네팔 불교유적 답사
* 티벳, 촉나라유적 답사
* 파키스탄의 인더스, 간다라문명과 실크로드유적 답사
* 바이칼, 몽골 답사
* 일본 구주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일본 오사카,아스카,나라,교토,오쯔지역의 우리유적조사 
* 몽골 고비사막유적 조사
* 몽골 동부지역유적 조사 
* 일본 구주,야마구찌,오카야마,히로시마,시코쿠,와카야마,이즈모 등 우리유적조사
* 중국 남경,단양,양주 지역 삼국과 육조시대 유적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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